최형우 | |
| 생년월일 | 1935년 10월 15일 |
|---|---|
| 사망일 | 2026년 10월 24일 (향년 91세) |
| 국적 |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 |
| 본관 | 경주 최씨 |
김영삼의 오른팔.
ㄴ 김영삼한테 오른팔이 따로 있었어?
ㄴ 김동영과 최형우가 있었다.
ㄴ 오른팔이 둘이야?
ㄴ 그래서 좌동영 우형우라고 불렀다.
ㄴ 뭐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같이 정치한 사람들이다.
ㄴ 그럼 이 사람도 대통령 하려고 했어?
ㄴ 1997년에 대선주자로 거론됐다.
ㄴ 그래서?
ㄴ 그때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ㄴ 아...
ㄴ 그리고 2026년 10월 24일 별세했다.
최형우(崔炯佑, 1935년 10월 15일 ~ 2026년 10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이다. 제8·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6선 정치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상도동계의 핵심 인물이었다.
특히 같은 상도동계 정치인이었던 김동영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左東英 右炯佑)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김동영과 최형우가 김영삼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정치활동과 조직 운영을 담당했다는 의미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대표로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시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연행과 고문을 겪었으며,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에는 정치활동 규제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민주산악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통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88년 국회의원에 복귀하고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했다.
1990년에는 김영삼을 따라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을 지냈으며,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과 제58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내무부 장관 재임 시절에는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했으며, 부산의 연제구와 기장군 신설 등에 관련된 정치·행정 과정에서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93년에는 아들의 경원전문대 부정입학 파문으로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하는 사건도 있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1997년 4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사실상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약 29년 동안 투병생활을 이어갔으며, 2026년 4월에는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향년 91세로 사망했다.[1]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뛰어다니다가 실제로 대통령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대통령에 도전할 수도 있었는데 하필 그 시점에 건강 문제로 정치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정치의 굴곡을 개인의 생애로도 보여주는 인물이다.
개요
최형우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과 보수정당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치인이다. 특히 1960년대 학생운동과 야당 활동을 시작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활동 규제,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정당정치, 1990년 3당 합당 및 1993년 문민정부 출범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정치의 여러 주요 사건에 참여했다.
최형우의 정치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김영삼이었다.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진행했으며, 이후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정치조직을 운영하고 당내 협상에도 참여했다.
특히 상도동계는 김영삼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김영삼이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거주했던 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1970~1980년대에는 야당과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계와 함께 한국 야당정치의 주요 계파를 이루었다.
최형우는 김동영과 함께 상도동계의 조직 운영과 정치적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러한 관계 때문에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최형우의 정치적 경력은 민주화운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1990년 김영삼과 함께 3당 합당에 참여하면서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립했던 노태우 정부의 집권세력과 같은 정당에 소속되었다. 이후에는 김영삼 정부의 주요 인사로서 국정과 여당 운영에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기존 집권세력과 결합하여 정권을 교체하는 과정에 관한 정치적 논쟁과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최형우는 1993년 아들의 부정입학 파문으로 사무총장에서 사퇴했으며, 1994년에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지방세 비리와 관련된 관리·감독 책임 논란을 겪었다.
이처럼 민주화운동과 정치권력의 운영, 그리고 여러 정치적 논란을 함께 경험한 인물이었다.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오랫동안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2026년 별세했다.
생애
어린 시절
1935년 10월 15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해당한다.
부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동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1958년 졸업했다.
특히 대학 재학 시절부터 사회문제와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1960년 4·19 혁명에 학생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최형우가 성장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 및 이승만 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의 정치제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야당정치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시대적 경험이 정치경력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4·19 혁명
1960년 4월 최형우는 동국대학교 학생대표로 4·19 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3·15 부정선거를 비롯한 여러 문제로 시민과 학생들의 반발을 받고 있었다.
특히 마산에서 발생한 시위와 김주열 열사의 사망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서울에서도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동국대학교 학생들 역시 이승만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최형우는 동국대학교 학생대표로서 시위를 계획하고 학생들이 당시 대통령 관저였던 경무대 방면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국가보훈처의 조사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2023년 정부는 최형우가 4·19 혁명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수여했다.[2]
6·3 항쟁과 청년운동
최형우는 1960년대에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64년에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학생들과 야당 등에서는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협상 내용 등을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이 6·3 항쟁이다.
최형우는 이후 4·19 혁명과 6·3 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결성한 단체에서 활동했다.
1968년에는 4·19·6·3범청년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국회의원 활동
1971년 첫 당선
1971년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최형우는 만 35세였으며, 이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신민당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던 주요 야당이었다.
특히 1971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함께 치러졌으며,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경쟁했다.
최형우 역시 야당 정치인으로서 국회에 입성했다.
유신체제 반대
제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최형우는 박정희 정부의 장기집권 움직임을 비판했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을 앞두고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구상이 추진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국군보안사령부 소속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했다.
2026년 부고 보도에 따르면 최형우는 이 과정에서 약 3개월 동안 구금되어 가혹한 고문을 겪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헌법을 추진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후 국회의원의 선출 방식과 국회의 권한에도 변화가 발생했으며, 야당의 정치활동은 여러 제약을 받았다.
최형우는 이러한 시기에도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제9·10대 국회의원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다시 당선되었으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특히 제9·10대 국회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가 적용되었으므로 하나의 선거구에서 복수의 당선자가 나올 수 있었다.
최형우는 1973년과 1978년 모두 울산 일대의 선거구에서 당선되면서 3선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활동은 다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80년 신군부의 탄압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등 야당 정치인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체포되거나 연금되었다.
최형우 역시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다시 고문을 겪었다.
또한 신군부의 정치활동 규제 조치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정치활동에도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최형우는 이후 공식적인 의정활동보다 민주화운동 조직과 야당 정치인들의 연대를 통해 정치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상도동계와 민주화운동
김영삼과의 관계
최형우는 김영삼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다.
특히 두 사람은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야당 활동을 함께했으며, 전두환 정부 시절에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김영삼은 야당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였으며, 최형우는 당내 조직과 정치적 협상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최형우는 김영삼의 오른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만 최형우가 김영삼의 모든 정치적 결정에 무조건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함께 활동하면서도 정치조직의 운영이나 전략 등에 관한 의견 차이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좌동영 우형우
좌동영 우형우는 김영삼의 주요 측근이었던 김동영과 최형우를 함께 지칭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김동영은 1936년생 정치인으로,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상도동계에서 활동했다.
최형우 역시 김영삼의 정치조직과 선거운동, 야당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두 사람이 김영삼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정치활동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별명이 만들어졌다.
특히 상도동계가 단순한 친목집단이 아니라 당내 세력과 선거조직을 운영하는 정치집단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다.
김동영은 1991년 사망했으므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반면 최형우는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았으며, 이후 문민정부에서 장관으로 활동했다.
김영삼한테 왼팔과 오른팔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김동영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최형우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같은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두 사람의 마지막 정치적 경력은 서로 달랐다.
민주산악회
1981년 김영삼을 중심으로 민주산악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야당 정치인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이 자유롭게 조직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민주산악회는 등산이라는 활동을 통해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이 만나고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든 조직이었다.
특히 등산모임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관계를 유지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역할도 했다.
최형우는 민주산악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초대 회장을 맡은 경력도 있다.
이후 민주산악회는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의 조직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민주산악회의 인적 네트워크는 선거와 정당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표면적으로는 산에 올라가는 단체였는데 실제로는 정치인들이 만나서 조직을 관리하던 단체였다. 민주주의가 산속에서 자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산에 올라가야 서로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민주화추진협의회
1984년 김영삼과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약칭 민추협을 결성했다.
이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의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최형우는 1984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제된 뒤 1985년 민추협 간사장을 맡았다.
특히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민주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조직 운영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최형우는 이러한 정치세력들이 협력하는 과정에서 활동했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후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야당정치에 참여했다.
1985년 총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형우는 신한민주당 후보로 울산 지역에 출마했다.
그러나 중선거구제 아래에서 당선권에 들지 못해 낙선했다.
따라서 최형우가 제8대부터 제15대까지 모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당선된 국회의원 대수는 제8·9·10·13·14·15대의 여섯 번이다.
이후 1988년에는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활동
1987년 통일민주당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 계열의 정치세력은 야당의 재편 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 등을 둘러싸고 양측의 관계가 달라지면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별도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최형우는 김영삼과 함께 통일민주당에서 활동했다.
특히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의 선거운동과 조직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당선되었으며, 김영삼은 낙선했다.
1988년 부산 동래구 을 당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형우는 울산을 떠나 부산 동래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지역 기반이 변화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최형우는 이전에 울산 지역에서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의 부산 지역 조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선거구에 출마했다.
부산일보의 2011년 회고 기사에 따르면 최형우는 지역구를 옮기는 문제를 가족들과도 충분히 상의하지 않았으며, 김영삼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결국 최형우는 부산 동래구 을에서 당선되어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통일민주당의 원내총무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3]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원내총무는 오늘날의 원내대표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특히 국회에서 다른 정당과 의사일정과 법안, 정치적 현안 등을 협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국회는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여당이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여소야대 구조였다.
따라서 국회에서는 여야 간의 협상과 타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형우는 이 과정에서 통일민주당을 대표하여 다른 정당과 협상했다.
부산일보는 당시 최형우가 협상 과정에서 양보할 부분은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러한 방식 때문에 김영삼에게 질책받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러한 일화는 당시 정치인들의 회고와 취재에 기초한 내용이므로 모든 협상 과정에서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3당 합당
1990년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은 세 정당을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세 정당이 합쳐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3당 합당이라고 불린다.
최형우는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다만 최형우가 합당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라는 증언도 존재한다.
2023년 월간조선이 보도한 부인 원영일의 회고에 따르면, 최형우는 과거 군부세력과 같은 정당에 들어가는 문제에 상당한 고민을 했으며 김영삼의 설득을 받은 뒤 합류했다고 한다.
이는 최형우가 3당 합당을 단순한 정당 변경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경력에서 중요한 선택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일화다.[4]
민주화운동과 3당 합당의 모순
3당 합당은 당시부터 상당한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김영삼과 최형우는 오랫동안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는 과거 자신들이 반대했던 집권세력과 같은 정당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민주화운동 세력이 군부정권의 후계세력과 결합하여 기존의 정치적 원칙을 변경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김영삼과 그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집권세력 내부로 들어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민간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김영삼은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다만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만으로 1990년 3당 합당에 관한 모든 정치적 비판이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3당 합당은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정당정치의 재편, 보수정당의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사건이다.
1991년 정무제1장관
1991년 7월 최형우는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정무제1장관은 대통령과 정당, 국회 등 정치권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민주자유당 내부에서는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민정계와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계,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계 등 여러 계파가 존재했다.
특히 차기 대통령 후보를 누구로 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최형우는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정치적 협상에 참여했다.
부산일보의 회고 기사에 따르면 최형우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김영삼이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은 1992년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영삼 정부
김영삼 대통령 당선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삼은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정치인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문민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최형우는 오랫동안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활동했던 정치인으로, 새로운 정부 출범 이후 여당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특히 김영삼의 정치적 측근 가운데 일부는 청와대와 정부, 민주자유당 등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다.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1993년 3월 3일 최형우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무총장은 정당의 조직과 재정, 인사 및 선거 준비 등을 관리하는 주요 직책이다.
특히 여당의 사무총장은 대통령과 정당 조직 사이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최형우는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던 개혁정책과 당 운영에 참여했다.
특히 여당 국회의원들의 재산공개를 추진하는 등 정치권의 개혁 움직임에 관여했다.
그러나 사무총장에 취임한 지 약 한 달 만에 가족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다.
아들의 부정입학 파문
1993년 4월 최형우의 둘째 아들이 1990학년도 경원전문대 입학시험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해당 학교의 교수는 입학시험 과정에서 답안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여러 학생이 부정입학했다고 폭로했다.
이 명단에는 최형우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경찰은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최형우는 자신이 아들의 입학 과정에서 이루어진 부정행위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금품을 제공하거나 직접 입학을 부탁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가족과 관련된 부정입학 파문이 발생한 상황에서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결국 1993년 4월 14일 최형우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개혁을 강조하던 여당에서 발생한 가족 관련 의혹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다만 최형우가 직접 답안지를 조작했다거나 금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형사재판에서 확정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부정입학 의혹과 최형우 본인의 직접적인 범죄 가담 여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1993년 내무부 장관
1993년 12월 최형우는 다시 정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다.
1993년 12월 22일 제58대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내무부는 당시 지방행정과 지방자치단체의 감독, 경찰 등 여러 행정 분야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중앙행정기관이었다.
오늘날에는 내무부라는 이름의 정부 부처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기능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후 여러 조직개편을 거쳐 행정안전부 등으로 이어졌다.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지방행정구역 개편과 지방자치 관련 업무를 추진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효율적인 운영과 행정구역의 재편 등이 당시의 주요 과제였다.[6]
지방행정구역 개편
최형우가 내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대한민국의 지방행정구역을 재편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생활권을 함께 고려하는 도농통합과 시·군 통합, 광역자치단체 및 기초자치단체의 경계 조정 등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개편은 행정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지역 간의 이해관계 충돌도 발생시켰다.
최형우는 내무부 관료들과 함께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했으며, 부산일보는 당시 내무부의 강한 추진력과 기획력을 설명하면서 최형우의 역할을 소개했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연제구와 기장군의 신설, 울산의 광역시 승격 등이 관련된 사례로 거론된다.
다만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은 국회 입법과 지방자치단체, 행정기관의 협의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든 결과가 최형우 한 사람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연제구와 기장군
1995년 3월 부산에서는 기존 동래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연제구가 신설되었다.
연제구는 연산동과 거제동 등을 관할하며, 부산의 행정기관이 집중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최형우는 이전에 부산 동래구 을을 지역구로 활동했으며, 이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롭게 신설된 부산 연제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특히 부산일보는 최형우가 지역구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이해관계 속에서 연제구 신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경상남도 양산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기장군을 설치하고 부산광역시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도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은 주민들의 생활권과 행정서비스, 지역정치의 구조 등에 영향을 주었다.
다만 지역구를 신설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평가와 행정구역 개편이 실제로 지역 주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7]
울산광역시 승격
최형우의 고향인 울산은 오랫동안 경상남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인구와 산업시설이 크게 증가하면서 독립적인 광역시로 승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0년대에는 울산광역시 승격을 위한 행정적·정치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최형우는 울산 출신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논의에 참여했다.
특히 부산일보의 회고 기사에서는 울산광역시 승격을 위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과정에서 최형우가 다른 울산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소개했다.
이후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가 출범했다.
그러나 당시 최형우는 이미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하고 있었다.
따라서 울산광역시 승격 이후 관련 행사와 정치활동에 정상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1994년 부천 세금횡령 사건
1994년에는 경기도 부천시의 지방세 징수와 관련된 대규모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부 공무원들이 지방세를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방행정기관의 관리·감독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지방자치단체를 감독하는 내무부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었다.
최형우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다.
1994년 11월 최형우는 기자회견에서 정부기관이 관련 비리를 은폐하거나 축소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주무장관으로서 지방행정기관의 비리를 사전에 확인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이후 1994년 12월 23일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다만 최형우가 직접 세금을 횡령했다거나 관련 범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사건은 아니다.
사건의 핵심은 지방세 횡령을 저지른 공무원들의 범죄와 이를 감독해야 했던 내무부의 관리책임 문제였다.[8]
1997년 대통령 선거와 투병
제15대 총선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형우는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했다.
최형우는 이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6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신한국당은 김영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여당이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1998년 2월 종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96년 이후 당내에서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경쟁이 진행되었다.
신한국당 9룡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서는 여러 정치인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이러한 후보군을 언론에서는 9룡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기도 했다.
최형우 역시 주요 대통령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특히 오랫동안 김영삼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당내 조직과 정부 운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정치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최형우가 실제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최종 선출되었던 것은 아니다.
정식 경선과 대선 본선에 출마하기 이전에 건강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997년 뇌졸중
1997년 4월 11일 최형우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받았으며, 당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97년 5월 서울신문은 최형우가 뇌졸중으로 입원한 뒤 회복을 위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재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최형우의 차기 대통령 선거 도전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최형우는 장기간의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다만 병으로 정치활동을 중단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어떤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9]
정치활동 중단
1997년 이후 최형우는 정상적인 의정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국회의원 임기는 2000년까지 이어졌지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당내 조직과 정치활동을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이후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며, 정치활동의 중심에서도 점차 물러났다.
그러나 김영삼과 상도동계의 다른 인물들과는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말년
장기 투병
최형우는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약 29년 동안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에는 부인 원영일을 비롯한 가족들이 간병을 담당했다.
2023년 월간조선은 최형우와 가족들의 생활을 소개하며 1997년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투병과 간병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했다.
특히 부인 원영일은 인터뷰에서 남편과 함께했던 정치적 경험과 가족의 생활을 회고했다.
2026년 6월 중앙일보 역시 원영일의 간병생활과 부부의 관계를 다룬 기사를 게재했다.[10]
2015년 김영삼 조문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당시 최형우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김영삼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특히 김영삼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최형우는 수십 년 동안 김영삼과 정치활동을 함께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과 민주화운동, 3당 합당 및 문민정부 출범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함께 경험했다.
따라서 김영삼의 사망은 최형우 개인에게도 오랜 정치적 동지를 잃는 사건이었다.[11]
2023년 건국포장
2023년 4월 국가보훈처는 제63주년 4·19 혁명을 맞아 유공자 31명에 대한 정부 포상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최형우도 포함되었다.
특히 1960년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 시위대를 이끌고 경무대 방면으로 진출하는 시위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최형우는 4·19 혁명 유공자로서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으로 활동한 경력과는 별도로 학생운동 시절의 공적을 인정받은 것이다.
2026년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
2026년 4월 9일 최형우는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김영삼민주센터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역사와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는 기관이다.
당시 김덕룡 이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최형우의 자택을 방문하여 추대장을 전달했다.
특히 최형우는 오랜 투병으로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으며, 부인 원영일이 추대장을 대신 받았다.
이는 최형우가 김영삼의 핵심 정치적 동지였다는 점을 기념하는 성격의 행사였다.[12]
동국대학교 최형우 강의실
2026년 4월 17일 동국대학교에서는 최형우와 권노갑의 이름을 딴 강의실의 현판식이 열렸다.
이는 동국대학교 건학 1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과 정치발전에 참여한 동문들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특히 최형우는 김영삼계인 상도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권노갑은 김대중계인 동교동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계파에서 활동했지만 민주화운동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동국대학교는 사회과학관의 강의실을 각각 권노갑 강의실과 최형우 강의실로 명명했다.
최형우는 건강상의 문제로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으며 가족들이 참석했다.[13]
2026년 10월 24일 별세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최형우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91세였다.
이는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약 29년 만이었다.
사망 소식은 같은 날 오전 연합뉴스와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최형우의 장례는 대한민국헌정회와 4·19혁명공로자회, 민주화추진협의회 등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김영삼계와 김대중계에서 활동했던 정치인들이 장례에 함께 참여한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장례위원장에는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과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이 참여한다.
또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대표들도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다.
빈소는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2026년 10월 27일 오전 8시로 예정되어 있다.
장지는 국립4·19민주묘지로 발표되었다.
다만 2026년 10월 24일 현재 발인과 안장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예정된 일정으로 서술하는 것이 정확하다.[14]
정치적 활동과 평가
민주화운동
최형우는 1960년 4·19 혁명부터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치적 사건에 참여했다.
특히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신군부에 반대하면서 연행과 고문을 겪었다.
또한 민주산악회와 민주화추진협의회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조직과 교류를 지원했다.
이러한 활동은 최형우의 정치적 경력을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2023년에는 4·19 혁명에 참여한 공로가 정부의 포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김영삼과의 정치적 동맹
최형우는 수십 년 동안 김영삼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선출과 선거운동, 당내 세력 형성 및 문민정부 출범 과정에 참여했다.
다만 최형우를 김영삼의 지시를 단순히 전달하던 정치인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는 직접 국회의원과 당직자, 정부의 장관 등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정치적 협상과 행정업무에도 참여했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의 회고에서는 김영삼에게 강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협상하는 인물로도 소개되었다.
3당 합당에 관한 논쟁
최형우의 정치적 경력에는 1990년 3당 합당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과 최형우는 민주자유당에 참여하여 정권을 운영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이 노태우 정부의 집권세력과 결합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반면 3당 합당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제도권에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는 정치적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최형우의 3당 합당 참여는 단순한 개인의 정당 변경보다는 1990년대 한국 정치세력의 재편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민정부의 행정개혁
최형우는 김영삼 정부에서 민주자유당 사무총장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지방행정구역 개편과 정당 운영, 정치권의 재산공개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조직 운영과 행정적 추진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에는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지역정치의 문제가 함께 존재했으므로 모든 개편을 정치적 논란이 없는 성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1993년의 가족 관련 입시 파문과 1994년 지방세 비리와 관련한 감독책임 문제 역시 그의 공직 경력에서 함께 살펴봐야 할 사건이다.
사건 및 논란
1990년 3당 합당 참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최형우가 노태우 정부의 집권세력과 합당하는 데 참여했다는 점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특히 당시 3당 합당에 반대한 정치인들은 야당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기존 집권세력과 결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합당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집권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최형우 개인뿐 아니라 김영삼과 3당 합당에 참여한 정치인들 전체에 관한 문제였다.
1993년 경원전문대 부정입학 파문
1993년 아들이 경원전문대에 부정입학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최형우는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다.
당시 입시 관계자의 폭로와 경찰 수사가 진행되었으며, 최형우는 자신이 아들의 입학 과정에서 이루어진 부정행위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인은 당시 학교 관계자에게 아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한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직접 금품을 제공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 사건으로 최형우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다만 부정입학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최형우 자신이 직접 불법적인 입시 조작을 지시했다는 주장은 별도의 증거가 필요한 문제다.[15]
1994년 지방세 비리 감독책임
1994년 부천시의 세금횡령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무부의 관리·감독 책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관련 비리를 사전에 발견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했다.
이후 같은 해 12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다만 지방세를 실제로 횡령한 사람들과 내무부 장관으로서 감독책임을 부담했던 최형우를 동일한 범죄의 당사자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역대 선거
| 연도 | 선거 | 정당 | 선거구 | 결과 |
|---|---|---|---|---|
| 1971년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신민당 | 경남 울산시·울주군 | 당선 (초선) |
| 1973년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신민당 | 경남 울산시·울주군·동래군 | 당선 (재선) |
| 1978년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 신민당 | 경남 울산시·울주군 | 당선 (3선) |
| 1985년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신한민주당 | 경남 울산시·울주군 | 낙선 |
| 1988년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통일민주당 | 부산 동래구 을 | 당선 (4선) |
| 1992년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자유당 | 부산 동래구 을 | 당선 (5선) |
| 1996년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신한국당 | 부산 연제구 | 당선 (6선) |
최형우는 경남 울산 지역에서 세 차례, 부산 지역에서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울산에서 부산으로 옮긴 것은 정치경력의 중요한 변화였다.
주요 경력 연표
| 연도 | 주요 활동 |
|---|---|
| 1935년 | 울산 출생 |
| 1960년 | 4·19 혁명 동국대학교 학생대표 |
| 1968년 | 4·19·6·3범청년회 사무총장 |
| 1971년 | 제8대 국회의원 당선 |
| 1973년 | 제9대 국회의원 당선 |
| 1978년 | 제10대 국회의원 당선 |
| 1980년 |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 |
| 1981년 | 민주산악회 활동 |
| 1985년 | 민주화추진협의회 간사장 |
| 1988년 | 제13대 국회의원 당선,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
| 1990년 |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합류 |
| 1991년 | 정무제1장관 |
| 1992년 | 제14대 국회의원 당선 |
| 1993년 |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아들 부정입학 파문으로 사퇴 |
| 1993~1994년 | 제58대 내무부 장관 |
| 1996년 |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
| 1997년 |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군으로 거론, 뇌졸중으로 정치활동 중단 |
| 2015년 | 김영삼 전 대통령 조문 |
| 2023년 | 4·19 혁명 공로로 건국포장 |
| 2026년 4월 |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 추대, 동국대학교 최형우 강의실 현판식 |
| 2026년 10월 24일 | 별세 (향년 91세) |
여담
- 최형우는 1935년 10월 15일 울산에서 태어났다.
- 같은 이름의 야구선수 최형우와는 동명이인이다.
- 부산공업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 1960년 4·19 혁명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대표로 참여했다.
- 2023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다.
- 제8·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6선 정치인이다.
- 울산과 부산 지역에서 각각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김영삼의 정치적 측근인 상도동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 김동영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
- 김동영은 199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 최형우는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이후 장관도 역임했다.
- 1970년대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활동을 하면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
- 1980년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도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겪었다.
- 1981년 민주산악회에 참여했으며,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 민주산악회는 등산모임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민주화운동과 정치조직의 역할도 수행했다.
등산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정치인이 산악회를 운영하는 게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1985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간사장을 맡았다.
-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존 울산 지역구를 떠나 부산 동래구 을에 출마했다.
- 부산에서 당선된 이후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 1990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3당 합당에 참여했다.
-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 1991년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당시에는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정치적 협상에 참여했다.
- 부산일보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최형우와 같은 측근을 부러워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를 누구로 만들지 고민하는데 다른 사람의 측근이 와서 적극적으로 영업한 셈이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 그러나 아들의 경원전문대 부정입학 파문으로 같은 해 4월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다.
- 최형우 본인은 아들의 부정입학 과정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던 시점이었는데 핵심 측근의 가족과 관련된 입시 문제가 터졌다. 개혁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일수록 내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다.- 1993년 12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내무부 장관 재임 시절에는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했다.
- 부산 연제구와 기장군 신설 과정에서도 역할을 했다.
- 울산광역시 승격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도 참여했다.
- 다만 울산이 실제로 광역시가 된 1997년에는 이미 뇌졸중으로 투병 중이었다.
고향인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는 데 관여했지만 정작 승격될 당시에는 병상에 있었다. 정치적 목표를 이루는 것과 그 결과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1994년 부천시 세금횡령 사건과 관련하여 내무부의 관리·감독 책임 논란을 겪었다.
- 같은 해 12월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최형우 본인이 지방세를 횡령한 것은 아니며, 당시 문제는 주무부처의 관리·감독 책임이었다.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연제구에 출마하여 6선에 성공했다.
- 1997년 신한국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 그러나 1997년 4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 이후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수십 년을 보내고 나서 자신도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왔는데 건강 문제로 경력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97년부터 약 29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 이 기간에는 부인 원영일을 비롯한 가족들이 간병을 맡았다.
- 부인 원영일은 화가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에는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 당시 김영삼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다.
- 2026년 4월 9일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 같은 달 17일 동국대학교에서는 최형우의 이름을 딴 강의실의 현판식이 열렸다.
- 동국대학교는 김대중계의 권노갑과 김영삼계의 최형우를 함께 기념했다.
- 2026년 10월 24일 오전 3시 30분 중앙보훈병원에서 사망했다.
- 향년 91세였다.
- 발인은 2026년 10월 27일 오전 8시로 예정되어 있다.
- 장지는 국립4·19민주묘지로 발표되었다.
- 장례에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출신 정치인들이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1960년에 4·19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이 1970년대에는 야당 국회의원이 되었고, 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했으며, 1990년대에는 집권여당과 정부의 장관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의 여러 시대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최형우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상도동계의 핵심 정치인으로, 1990년대 문민정부 출범과 지방행정 개편 등에 관여했으며, 1997년 이후 장기 투병 끝에 2026년 별세한 6선 국회의원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 연합뉴스 - 2026년 최형우 별세 및 장례 일정
- 뉴스1 - 최형우 별세
- 한겨레 - 최형우 전 내무장관 별세
- 부산일보 - YS와 함께 민주화 투쟁한 최형우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2023년 4·19 혁명 유공자 포상
- 행정안전부 - 역대 내무부 장관
- MBC 뉴스데스크 - 1993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사퇴
- MBC 뉴스데스크 - 경원전문대 부정입학 관련 수사
- MBC 뉴스데스크 - 1994년 부천시 지방세 비리와 내무부 책임
- 서울신문 - 1997년 뇌졸중으로 입원한 최형우
- 한겨레 - 2015년 김영삼 빈소를 찾은 최형우
- 월간조선 - 최형우 전 장관과 가족들의 장기 투병 이야기
- 중앙일보 - 2026년 최형우와 원영일의 근황
- 조선일보 -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 추대
- 동국대학교 - 권노갑·최형우 강의실 현판식
각주
- ↑ 연합뉴스, 2026년 10월 24일,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별세
-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3년 4월 17일, 4·19 혁명 유공자 포상
- ↑ 부산일보, 2011년 2월 7일, YS와 함께 민주화 투쟁한 최형우
- ↑ 월간조선, 2023년, 최형우 전 장관 가족의 회고
- ↑ MBC 뉴스데스크, 1993년 4월 14일, 최형우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사퇴
- ↑ 행정안전부, 역대 내무부 장관 명단
- ↑ 부산일보, 2011년 2월 7일, 최형우의 행정구역 개편 관련 활동
- ↑ MBC 뉴스데스크, 1994년 11월 28일, 부천 세금횡령 사건에 관한 최형우 장관 기자회견
- ↑ 서울신문, 1997년 5월 2일, 뇌졸중으로 입원 중이던 최형우의 근황
- ↑ 중앙일보, 2026년 6월 15일, 최형우와 부인 원영일의 근황
- ↑ 한겨레,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최형우
- ↑ 조선일보, 2026년 4월 10일, 김영삼민주센터 명예이사장 추대
- ↑ 동국대학교, 2026년 4월 20일, 권노갑·최형우 강의실 현판식
- ↑ 연합뉴스, 2026년 10월 24일, 최형우 별세와 장례 일정
- ↑ MBC 뉴스데스크, 1993년 4월 14일, 경원전문대 부정입학 관련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