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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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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따 바람이 구멍을 통해 솔솔 들어오구마잉~

개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은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 제3제국 총통 암살 미수사건이다. 7·20 음모 또는 7월 20일 사건으로도 불리며, 암살 계획에 이용된 쿠데타 작전의 이름을 따 발퀴레 작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히틀러 암살 계획은 이외에도 여러 건 더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단순히 히틀러를 죽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독일군을 동원해 나치 정권을 뒤엎고 신정부까지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규모가 달랐다.

검은 오케스트라

검은 오케스트라는 1930년대부터 반히틀러 성향의 우파들이 모여서 조직한 단체이다.

ㄴ 정확히는 하나의 정식 조직명이라기보다는 나치 정권에 반대했던 군부·정보기관 인사들의 저항망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게슈타포가 이들을 부르던 표현에서 유래했으며, 7월 20일 사건에 가담한 모든 사람이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이었던 것은 아니다.

히틀러가 집권 당시 국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많은 노장들을 죽이거나 쫓아내자, 이에 분노한 국방군, 특히 육군 내 장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ㄴ 히틀러의 군부 장악과 일부 고위 장교의 해임·퇴진이 반발의 배경이 된 것은 맞지만, 반히틀러 군부 저항이 노장 장교들을 대거 죽인 것에 대한 복수로 시작됐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 히틀러의 전쟁 계획, 군 지휘권 장악, 나치의 범죄 등에 반대하면서 서로 다른 인사들이 저항망을 형성했다.

이들은 히틀러의 과격한 막가파식 외교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 거라고 생각했으며, 멤버였던 프란츠 할더 육군참모총장은 히틀러를 권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ㄴ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군부 내부에서 쿠데타와 히틀러 제거 계획이 논의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할더가 직접 권총으로 쏴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여러 암살 구상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멤버

ㄴ 엄밀히 말하면 위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군부 저항이나 7월 20일 암살·쿠데타 계획에 참여한 인사들이다. 하나의 단체에 정식 가입한 회원 명단으로 보면 안 된다.

가담했었거나 가담이 유력시되는 이들

  • 에르빈 롬멜 - 반히틀러 인사들과 접촉한 사실은 있으나 히틀러 암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직접 승인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 귄터 폰 클루게 - 저항세력과 접촉했지만 7월 20일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 프란츠 할더 - 초기 군부 저항과 관련이 있었으나 1944년 7월 20일의 실제 암살·쿠데타 작전에 직접 참여한 인물은 아니다.
  • 발터 폰 브라우히치 - 히틀러와 갈등한 적은 있었으나 7월 20일 사건의 핵심 가담자로 보기는 어렵다.

계획

히틀러는 동프로이센에 위치한 늑대굴이라는 곳에서 작전회의와 같은 일을 처리했으므로 슈타우펜베르크가 가서 총통을 폭사시키면, 에리히 펠기벨이 통신을 차단하고 베를린에서 보충군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소집하여 괴벨스, 힘러, 괴링과 같은 이들을 싹 체포해서 제거하고 신정부를 세워 연합국과 강화협상을 하고 소련과는 계속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ㄴ 정확히는 베를린 쿠데타의 주력은 독일 보충군이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전체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는 계획이 아니라, 베를린 경비를 담당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대대 등을 동원하려 했다.

ㄴ 신정부가 서방 연합국과 휴전을 추진하려 했던 것은 맞지만, 소련과 계속 싸우는 문제를 포함한 전후 구상은 가담자들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같은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발퀴레 작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으나 발퀴레 작전은 사실 베를린에 있는 외국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같은 정예부대들과 예비군을 동원하여 진압한다는 계획이었다.

정확히는 발퀴레 작전(Unternehmen Walküre)은 독일 본토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벌어지거나 치안이 무너졌을 때 보충군을 동원해 질서를 회복하도록 마련된 비상계획이었다.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의 봉기 등도 그 대비 대상에 포함됐다.

슈타우펜베르크 일당은 이 계획의 명령문을 뜯어고쳐 히틀러를 죽이고 이게 SS가 한 짓이라고 선언하여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대대와 보충군으로 SS를 제압하고 신정부를 세우려 했다.

구체적으로는 히틀러 암살 직후 SS와 나치당 지도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발표하고,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보충군에 발퀴레 작전 명령을 내려 주요 시설을 점령하려 했다.

그 사이 베를린에서는 루트비히 베크가 국가원수 역할을,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가 총리 역할을 맡는 신정부 수립 구상이 마련돼 있었다.

한마디로

히틀러를 죽인다 → 나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한다 → 독일군으로 나치 지도부를 체포한다 → 신정부를 세운다

라는 계획이었다.

ㄴ 히틀러가 죽은 뒤에도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군과 SS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암살만 성공한다고 저절로 정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베를린에서 얼마나 빨리 군대를 장악하느냐가 중요했다.

실행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이 든 서류가방을 가지고 동프로이센의 늑대굴로 향했다.

그는 전쟁 중 부상으로 오른손과 왼쪽 눈을 잃었고 왼손도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폭탄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원래 폭탄은 두 개를 준비했지만 회의 시작을 재촉받는 바람에 한 개에만 기폭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결국 폭탄 한 개가 든 가방을 들고 히틀러가 참석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회의가 시작되자 슈타우펜베르크는 서류가방을 히틀러가 서 있던 회의용 탁자 아래에 놓았다. 이후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1944년 7월 20일 오후 12시 42분경 폭탄이 터졌다.

파일:없음.png

ㄴ 위 파일이 없는 경우에는 실제 늑대굴 회의실 폭발 사진을 따로 추가 바람.

폭발로 회의실이 박살 났고 참석자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폭발을 목격한 뒤 히틀러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베를린에서 발퀴레 작전을 직접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틀러가 안 뒤졌다.

실패

어쨌든 폭탄은 터졌으나 슈타우펜베르크는 알 카에다처럼 자폭을 하는 대신 자기는 폭탄만 설치해 놓고 빠져나가서 가족을 돌보고 싶어했다.

ㄴ 가족을 돌보려고 빠져나왔다는 설명은 틀리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암살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가 쿠데타를 실행할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회의실에서 나와야 했다.

근데 슈타우펜베르크가 빤스런한 사이 어떤 장교가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 방해된다고 가방을 테이블 다리 건너로 치웠고 그 바람에 히틀러는 찰과상만 입고 살아남는다.

정확히는 회의 참석자였던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방이 히틀러에게서 멀어지고 두꺼운 탁자 다리 반대편에 놓이면서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이 줄어들었다.

ㄴ 정작 가방을 옮긴 브란트 본인은 폭발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사실 날씨 덥다고 회의장이 벙커에서 지상건물로 바뀌는 바람에 폭압이 밖으로 빠져나가서 그리 됐다는 소리도 있다.

이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밀폐된 지하 벙커가 아니라 창문이 있는 지상 회의실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폭압이 분산됐다.

결국 폭탄 하나만 작동함 + 가방 위치 변경 + 지상 회의실이라는 악재가 겹쳤다.

ㄴ 그렇다고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달랐으면 히틀러가 반드시 죽었을 거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이 와중에 히틀러를 구한 건 낙지의 똥별 빌헬름 카이텔이었다.

ㄴ 카이텔도 현장에 있었고 폭발 후 히틀러를 부축했지만, 히틀러를 살린 결정적 원인이 카이텔의 구조행동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베를린에서 벌어졌다.

슈타우펜베르크 일당은 히틀러가 죽었다는 전제 아래 발퀴레 작전을 개시하려 했으나, 현장에서 히틀러의 생존을 확인한 인사들이 있었고 통신도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

베를린에서는 작전 개시가 지연됐으며, 쿠데타에 동원된 부대들에도 서로 엇갈리는 명령이 전달됐다.

특히 베를린의 그로스도이칠란트 경비대대장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려다가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히틀러와 통화한 레머는 즉시 쿠데타 세력에 등을 돌렸다.

ㄴ 히틀러가 죽은 줄 알고 출동한 군인들이 히틀러 목소리를 직접 들었으니 쿠데타 명령의 명분 자체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결국 베를린의 반란군은 역으로 포위됐고, 슈타우펜베르크 일당은 체포됐다.

결말

검은 오케스트라 멤버들 대부분이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의해 처형당하고 연좌제를 적용받는다.

ㄴ 다만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핵심 가담자 일부는 프라이슬러의 재판에 넘겨지기도 전에 사건 당일 밤부터 처형됐다.

슈타우펜베르크,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베르너 폰 헤프텐,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은 7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 사이 베를린 벤들러블록 안뜰에서 총살당했다.

루트비히 베크는 자살을 강요받았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실패하자 살해됐다.

헤닝 폰 트레슈코프는 암살 계획이 실패한 사실을 알고 동부전선에서 자결했다.

빌헬름 카나리스와 한스 오스터 등도 체포된 뒤 1945년 4월 처형됐다.

에르빈 폰 비츨레벤을 비롯한 여러 가담자는 프라이슬러가 재판장을 맡은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 롬멜도 사건과 관련해 이름이 거론되면서 히틀러 정권의 압박을 받았다. 결국 1944년 10월 자살을 강요받았고, 대외적으로는 전쟁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사망한 것처럼 발표됐다.

ㄴ 다만 롬멜이 히틀러 암살을 사전에 알고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있다.

가담자의 가족들까지 체포하거나 수용시설로 보내는 연좌제식 보복도 벌어졌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히틀러가 군부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은 장교들이 대거 체포됐다.

이후 히틀러는 벌지 전투를 개시했다. 결국 벙커엔딩.

ㄴ 정확히는 벌지 전투가 암살 미수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작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벌지 전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에서 실시한 독일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이다.

이 와중에 머리 존나 좋은 천재 경제인 얄마르 샤흐트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새끼를 아닥하게 만들 정도의 뛰어난 언변으로 자기변호를 했고 결국 살아남는다.

ㄴ 샤흐트는 7월 20일 사건 이후 체포돼 수용소에 수감됐지만, 프라이슬러의 인민법정에서 말빨로 무죄를 받아 풀려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전쟁 말기까지 수감돼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평가

독일 연방군이 옛날에 슈타우펜베르크와 슈바르체 카펠레 정신을 계승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정확히는 독일 연방군은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나치 저항운동 참가자들의 양심에 따른 저항을 군의 중요한 전통으로 기리고 있다. 매년 7월 20일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하며, 베를린 벤들러블록에서는 신병 선서식도 열린다.

ㄴ 나치 시대 독일 국방군 전체를 계승한다는 뜻은 아니다. 독일 연방군은 나치 정권의 범죄에 가담한 국방군의 역사와 저항운동 참가자들의 행동을 구분한다.

이때는 안네 프랑크가 살아 있었는데 안네는 독일의 융커 출신 장교가 나섰다는 점에 놀라워했으면서도 독일이 강화를 한 후 힘을 비축했다가 다시 전쟁에 나서려는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ㄴ 안네 프랑크가 1944년 7월 20일 당시 살아 있었던 것은 맞다. 그는 같은 해 8월 4일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다만 위와 같은 내용의 발언을 실제로 남겼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안네의 평가로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사건 가담자들이 모두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보수적·민족주의적 배경을 가진 군인과 관료였으며,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동기와 전후 독일의 정치체제에 관한 구상도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히틀러를 제거하고 나치 정권을 전복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독일에서 나치 독재에 맞선 저항의 중요한 사례로 기념되고 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