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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북국시대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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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7T19:50:49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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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ovaAdmin: 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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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8T07:42: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진지주의}}&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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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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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colspan=6 |[[파일:남북국시대 지도.png|가운데|35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를 말한다.&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lt;br /&gt;
‘남북국시대론’이라는 것은 발해사도 한국사에 넣어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으로 부르자는 주장이다.&lt;br /&gt;
&lt;br /&gt;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개되는 종래의 역사 체계를 벗어나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포함시키자는 논리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장수였고, 주체세력도 고구려유민들이었으므로 결국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가였다는 데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 &amp;#039;남북국시대&amp;#039;라는 개념의 정립 ===&lt;br /&gt;
&lt;br /&gt;
발해는 멸망 후 ‘사라진 왕국’으로 버림받다시피 했는데,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역사체계에 넣으려 했던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서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넣었다 하더라도 통일신라와 대비시켜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이해하려는 이른바 ‘남북국’의 착상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lt;br /&gt;
남북국시대론이 학문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전개된 것은 1784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엮은 ≪발해고 渤海考≫의 서문에서이다.&lt;br /&gt;
&lt;br /&gt;
그는 “고려가 발해 역사를 편찬하지 않음으로써 그 국세가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도다.”라고 하면서,&lt;br /&gt;
&lt;br /&gt;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했으니 그것을 남국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 그 후예가 그 땅 위에 발해국을 세웠으니 그것을 마땅히 북국으로 하는 역사체계를 세워야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고려 왕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특히, 그가 아쉬워한 것은 고구려 영토가 여진과 거란에 점거되었어도 그 땅을 되찾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사실이니, 이는 고려가 발해사를 엮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개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大東地志≫(1864년경)로 이어졌다. 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방여총지 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다.&lt;br /&gt;
&lt;br /&gt;
＜발해국 渤海國＞항목에서는 삼한·삼국([[신라]], [[가야]], [[백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다시 재론되었다.&lt;br /&gt;
&lt;br /&gt;
장도빈(張道斌)이 ≪국사 國史≫(1916·1946)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했고, 권덕규(權悳圭)의 ≪조선유기 朝鮮留記≫(1924)와 황의돈(黃義敦)의 ＜상고시대 上古時代＞(1943)라는 글에서는 각기 ‘남북조’시대를 설정하였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새로운 사학의 시각에서 엮어진 역사서에는 대개 발해사를 국사의 체계에 넣어 서술하고 있으나 남북국사의 체계 자체는 거론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그후 [[식민지사관]]의 극복과 민족의 주체의식이 고조되던 1970년 무렵부터 남북국시대론이 다시 거론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5월에 개최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이우성(李佑成)이 ＜삼국사기와 발해문제＞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국사가 남북국사로 엮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주장은 국사학계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한우근(韓㳓劤)의 ≪한국통사 韓國通史≫가 개설서로서는 처음으로 이 체계를 따랐다.&lt;br /&gt;
&lt;br /&gt;
1980년대에는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송기호(宋基豪)·한규철(韓圭哲) 등이 다시 이 용어 사용을 제기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리하여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한국사에서 발해사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에 대한 평가 ===&lt;br /&gt;
&lt;br /&gt;
근래에 남북국시대론이 수용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반론도 적지 않아, 아직도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제기된 반론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 긍정론 ====&lt;br /&gt;
&lt;br /&gt;
시대구분의 기준과 관련된 문제이다.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북국시대라는 것이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이기 때문에 역사서술에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amp;#039;&lt;br /&gt;
&lt;br /&gt;
그러나 다른 기준을 가지고 시대구분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 방식은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란 용어나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lt;br /&gt;
&lt;br /&gt;
이를 인정할 경우, 발해와 신라를 포괄해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는 것보다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점을 덜 안고 있다. --고병익(高柄翊), 이기백(李基白) 주장.&lt;br /&gt;
&lt;br /&gt;
==== 부정론 ====&lt;br /&gt;
&lt;br /&gt;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이다. 이들은 한국학자들이 주장한 남북국시대론의 논리적 취약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하마다 고사쿠(浜田耕策), 이성시(李成市) 주장.&lt;br /&gt;
&lt;br /&gt;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에 논리적 취약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반대의 논리가 타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lt;br /&gt;
&lt;br /&gt;
반면에 중국학자나 러시아학자들은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유민을 주체로 한 국가였으므로,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lt;br /&gt;
&lt;br /&gt;
==== 절충론 ====&lt;br /&gt;
&lt;br /&gt;
현재적인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주장들이다. 이것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lt;br /&gt;
&lt;br /&gt;
* 1 &amp;#039;&amp;#039;&amp;#039;발해와 신라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므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북한]]의 견해가 대표적인 것으로서,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이 용어의 사용은 반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것은 이들이 사회구성체를 바탕으로 시대구분을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더 근저에 깔린 이유는 현재의 남북한 관계와 직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조선)이란 하나의 통일체를 상정하고 그것이 일시적이나마 갈라져 있는 것이 남북한인데, 신라와 발해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북국이란 용어에 대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역사에 투영한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 2 &amp;#039;&amp;#039;&amp;#039;이와 비슷한 발상으로서, 발해와 신라 또는 발해와 고려 사이에 동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남북국시대론을 부정하는 경우이다.&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이용범(李龍範)은 발해사에 우리 역사와의 공동추억체의식(共同追憶體意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소극적이었다.&lt;br /&gt;
&lt;br /&gt;
또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사실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데, &lt;br /&gt;
&lt;br /&gt;
일본학자들은 이것이 동일민족의 북쪽 부분이란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방위 개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려가 발해 유민들을 동족아닌 이민족으로 취급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민족과 민족의식이 확립된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이후이며, 당시는 이러한 의식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므로 현재의 민족의식을 기준으로 당시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lt;br /&gt;
&lt;br /&gt;
===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점 ===&lt;br /&gt;
&lt;br /&gt;
이상으로 반론을 살펴보았지만,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할 수 없다는 두번째 주장은 여러 가지 증거를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너무 현재적 시각에서 발해사를 바라보려는 세번째 주장도 문제가 있다.&lt;br /&gt;
&lt;br /&gt;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7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남북국시대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lt;br /&gt;
&lt;br /&gt;
* 1 &amp;#039;&amp;#039;&amp;#039;한국사에서 신라사와 발해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보면, 신라사가 발해사보다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발해와 신라가 병존했던 당시에는 양국의 국력이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8세기에는 신라의 국력이 앞섰지만, &lt;br /&gt;
&lt;br /&gt;
9세기에 들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대등한 정도까지 이르렀다.&lt;br /&gt;
&lt;br /&gt;
이 무렵 당나라에서 있었던 양국 사이의 경쟁사건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 &lt;br /&gt;
&lt;br /&gt;
897년에 양국 사신 사이에 벌어졌던 윗자리 다툼 사건, 872년과 906년에 벌어졌던 양국 유학생 사이의 빈공과(賓貢科) 수석 다툼 사건들이 그러한 예이다.&lt;br /&gt;
&lt;br /&gt;
그렇다면 다음 시기의 계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구분을 하느냐, 아니면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참고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이다. 그 뒤에 일어난 수나라는 기본적으로 북조를 계승한 국가였으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원용한다면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lt;br /&gt;
&lt;br /&gt;
* 2 &amp;#039;&amp;#039;&amp;#039;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문제이다.&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삼국통일을 최초의 민족적 통일로 평가해왔고, 지금도 남한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북한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 견해를 따르다가, 1960년대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분적 통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1979년 ≪조선전사≫부터는 부분적인 통합이란 사실마저 부정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부각시켜, 고려를 역사상 첫 통일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면 어떻게 신라가 통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론이 상호 배치된다고 하면서 고려의 통일이 최초의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사에서 언제부터 하나의 국가로만 남게 되었는가 하는 기계적이고 외면적인 판단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고려의 통일이 발해까지 아우른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다.&lt;br /&gt;
&lt;br /&gt;
더구나 발해가 건국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이고,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뒤로부터는 20여 년이 흐른 뒤이다. 따라서 발해는 통일이 일단락된 뒤 새로이 형성된 국가였다.&lt;br /&gt;
&lt;br /&gt;
그런 의미에서 발해의 건국은 한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부분적이었다는 한계성을 보완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통일신라나 삼국통일이란 용어와 결코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lt;br /&gt;
&lt;br /&gt;
===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한 정리 ===&lt;br /&gt;
&lt;br /&gt;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연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lt;br /&gt;
&lt;br /&gt;
이를 위해서는 &amp;#039;&amp;#039;&amp;#039;첫번째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두번째는 고려에의 계승성, 세번째는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amp;#039;&amp;#039;&amp;#039;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lt;br /&gt;
&lt;br /&gt;
* 1 &amp;#039;&amp;#039;&amp;#039;[[발해]]의 [[고구려]] 계승성&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이와 관련해 발해는 건국집단의 구성이나 지배집단의 성씨(姓氏) 구성에서 고구려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lt;br /&gt;
&lt;br /&gt;
특히 지배층의 성씨에서 고구려계통의 고(高)씨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발해 초기의 지배층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서 고구려식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문왕(文王)시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구려의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원용해 천손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의미로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강왕(康王)시대에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왕 스스로 국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표명한 것은 발해 지배층의 인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lt;br /&gt;
&lt;br /&gt;
한편 872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워 발해 사신을 접대했던 사실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 2 &amp;#039;&amp;#039;&amp;#039;[[고려 왕조]]에의 계승성&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발해의 고려에의 계승성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lt;br /&gt;
&lt;br /&gt;
다만 발해의 멸망 무렵부터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 대화균(大和鈞), 공부경 대복모(大福謨), 좌우위장군 대심리(大審理), 검교개국남 박어(朴漁) 등 고위관료들이 잇따라 무리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세자인 대광현(大光顯)까지 내투해 보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2백여 년간 발해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은 민족적 계승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lt;br /&gt;
&lt;br /&gt;
지금의 태(太)씨는 고려로 들어온 발해 왕실의 후예들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다른 한편으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의 신하였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황제국의 질서도 가지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이것은 통일신라와는 다른 태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고려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계승성도 유추될 수 있다.&lt;br /&gt;
&lt;br /&gt;
* 3 &amp;#039;&amp;#039;&amp;#039;[[발해]]와 [[신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래에는 2백여 년간 대립적이었다고 일컬어져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장애가 되어 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먼 것으로, 양국은 상호 대립 혹은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양국이 대립하거나 세력 경쟁을 벌였던 사건으로는 먼저 733년에 벌어졌던 양국 사이의 전쟁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당나라의 요구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했던 이 전쟁을 제외한다면, 양국 사이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lt;br /&gt;
&lt;br /&gt;
9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국세가 약화되고 반대로 발해의 국세가 강화되면서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당나라에서 상호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양국 사이에 교섭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다수 나타난다. 발해 건국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lt;br /&gt;
&lt;br /&gt;
또 ≪삼국사기≫을 보면, 790년(원성왕 6)과 812년(헌덕왕 4) 두 차례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의 파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당시 개설되어 있던 신라도(新羅道)를 이용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신라도가 들었고, ≪고금군국지 古今郡國志≫에는 발해의 책성부(柵城府)와 신라 국경의 천정군(泉井郡)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양국 사이에는 이렇게 상설적인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훨씬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음에 틀림없다.&lt;br /&gt;
&lt;br /&gt;
한편 발해의 3성 가운데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9세기 통일신라에 선교성(宣敎省)이 설치된 것은 명칭의 유사성으로 보아 발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이상으로 세 가지 검토를 통해 발해사가 한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았다.&lt;br /&gt;
&lt;br /&gt;
== 결론 ==&lt;br /&gt;
&lt;br /&gt;
발해사는 과거에 항상 한국사의 일부로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서 제외했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넣으려고 했던 시기가 있고, 양면적인 인식이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 말갈계 국가로도 인식하였다.&lt;br /&gt;
&lt;br /&gt;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했고, “고구려 잔당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고 한 반면에, 다른 글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해 세운 나라’라고 하여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상반된 인식을 보였다.&lt;br /&gt;
&lt;br /&gt;
후삼국 통일을 기반으로 성립된 고려는 기본적으로 신라 계승의식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를 주목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발해를 ‘혼인한 나라’ 또는 ‘친척의 나라’라고 하여 동족의식을 나타냈다. 이에 발해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으며, 934년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 중기에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이 주축을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다.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겪었다. 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lt;br /&gt;
&lt;br /&gt;
첫째 단계는 ≪동국통감 東國通鑑≫(1484)의 역사 인식이다.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했던 역사로 파악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해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하는 사론을 달아 비판한 것은 이 책의 역사 의식을 잘 반영한다.&lt;br /&gt;
&lt;br /&gt;
둘째 단계는 발해사를 새롭게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것은 다시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뉜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했으니,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 東國地理誌≫(1615)가 선구를 이루었다.&lt;br /&gt;
&lt;br /&gt;
그는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으면서,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발견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확인하였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되었다.&lt;br /&gt;
&lt;br /&gt;
후기에는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 疆界考≫(1756)가 선구를 이루었다.&lt;br /&gt;
&lt;br /&gt;
그는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 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했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공격해 고구려 왕의 치욕을 설욕했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셋째 단계에는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했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일부에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세가(世家)·세기(世紀) 등으로 다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경우이다.&lt;br /&gt;
&lt;br /&gt;
전자는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발해의 역사를 세가로 다룸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역사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그의 발해사 인식은 홍석주(洪奭周)의 ≪동사세가 東史世家≫(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세가로 다룸으로써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한편 유득공의 ≪발해고≫가 선구적인 역할을 한 후자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경우이다.&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두 가지 흐름은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되어야 함에도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리고 다음 세기의 과제로 넘겨졌다.&lt;br /&gt;
&lt;br /&gt;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장기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삼한정통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러다가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lt;br /&gt;
&lt;br /&gt;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하면서 만주 지역의 북방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권덕규(權悳奎) 등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대종교에서도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933년 발해 수도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으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용범이 연구를 주도했고, 북한에서도 같은 시기부터 박시형, 주영헌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의 뒤를 잇는 연구자들의 실증적인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lt;br /&gt;
&lt;br /&gt;
발해사 자체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해 남북국시대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들이 진행됨으로써, 이제는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남북한 학계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참고한 문헌 ==&lt;br /&gt;
&lt;br /&gt;
*『삼국사기』&lt;br /&gt;
*『삼국유사』&lt;br /&gt;
*『제왕운기(帝王韻紀)』&lt;br /&gt;
*『발해고(渤海考)』&lt;br /&gt;
*『발해의 대외관계사』 -남북국의 형성과 전개-(한규철, 신서원, 1994)&lt;br /&gt;
*『발해정치사연구』(송기호, 일조각, 1995)&lt;br /&gt;
*「삼국사기와 발해문제」(이우성, 『제13회전국역사학대회발표요지』, 1970)&lt;br /&gt;
*「발해왕국의 성립과 고구려유민」(이용범, 『동국대학교론문집』 10·11, 1972·1973)&lt;br /&gt;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우성, 『창작과 비평』 10·4, 1975)&lt;br /&gt;
*「渤海史をめぐる朝鮮史學界の動向-共和國と韓國の南北國時代論について-」(濱田耕策, 『朝鮮學報』 83, 1978)&lt;br /&gt;
*「渤海史硏究における國家と民族 -‘南北國時代’論の檢討を中心に-」(李成市,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5, 1988)&lt;br /&gt;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의 발해와 신라」(송기호, 『한국사시민강좌』 5, 일조각, 1989)&lt;br /&gt;
*「고려에서 독립운동기까지의 발해사 인식」(한규철, 『역사비평』 18, 1992년 가을호)&lt;br /&gt;
*「고려 초·중기의 역사계승의식과 발해사 인식」(조인성,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 상, 일조각, 1994)&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남북국시대 [南北國時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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