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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군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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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3T09:55:48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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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ovaAdmin: 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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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8T08:21: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괜찮은데?}}&lt;br /&gt;
{{롬뽕}}&lt;br /&gt;
{{사기캐}}&lt;br /&gt;
{{틀:ROME}}&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로마의 왕정, 공화정, 제국 그리고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군대이다. (exercitus Romanus) 주석너무많다. 좀 지워죠&lt;br /&gt;
&lt;br /&gt;
== 군단장 ==&lt;br /&gt;
집정관, 법무관으로 일했던 관료들만이 군단장으로 일할 수 있었으며 군단장의 임기는 3~4년이였다.&lt;br /&gt;
&lt;br /&gt;
BC 27년부터 아프리카를 제외한 군단이 한 개가 주둔할 시 그 군단의 군단장은 그 지역의 총독역할을 하였다.&amp;lt;ref&amp;gt;아프리카는 황제의 직속령&amp;lt;/ref&amp;gt;&amp;lt;ref&amp;gt;시민들을 다스리는 민정총독도 따로 있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두 개의 군단이 주둔하고 있을 시에는 군단장 두명 외에 따로 총독을 한명 더 두었다.&lt;br /&gt;
&lt;br /&gt;
군단장은 사소하게는 아침 조회, 사열식 등을 감독했고 크게는 건설 총감독, 군사 재판, 회계 감사까지 많은 일을 하였다.&lt;br /&gt;
&lt;br /&gt;
군단장의 명령이 아무리 얼탱이가 없어도 복종해야했는데 예로 시리아의 총독이였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Gnaeus Calpurnius Piso)의 사례가 있다.&lt;br /&gt;
&lt;br /&gt;
두 병사(임의로 A와 B)가 함께 휴가를 갔다가 돌아왔는데 병사 A만이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이에 피소는 네놈이 B를 죽인 것인 것이 틀림 없다며 [[마녀사냥]]을 시전하였고 억울한 A는 곧 올 것이라며 기다려달라 간청을 했지만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다.&lt;br /&gt;
&lt;br /&gt;
사형을 집행하는 중 돌아오지 않았던 병사가 돌아왔고 백부장은 사형을 중지, A와 B를 피소에게 데려간다.&lt;br /&gt;
&lt;br /&gt;
이를 본 피소가 하는 말. &amp;quot; 두 병사 모두 사형을 집행하라. A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B는 살인을 피했기 때문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이런 어이 없는 말과 함께 두 병사 모두 목이 날라갔으며 사형집행을 중지한 백부장마저 명령불복종이란 이유로 목을 날린다.&lt;br /&gt;
&lt;br /&gt;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위 사례처럼 군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였다.&amp;lt;ref&amp;gt;사족이지만 이후 피소는 게르마니쿠스 독살사건 때 연루되어 모가지가 날라간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무장 ==&lt;br /&gt;
로마군이 지급 받는 장비는 방패, 투구, 글라디우스(단검), 필룸(제정 말기엔 베르툼), 갑옷, 벨트, 군화가 있다.&lt;br /&gt;
&lt;br /&gt;
이는 군단의 장인들이 만들거나 민간 대장간에서 개인적으로 구해야했지만 4세기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곳에서 통일된 무장으로 지급받았다.&lt;br /&gt;
&lt;br /&gt;
== 징집 ==&lt;br /&gt;
로마 왕국 시절, 전쟁이 나면 왕이 시민들을 모아 싸우고 전쟁이 끝나면 바로 해산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로마의 7왕 중 6번 째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때부터 징병제으로 바뀌게되었다.&lt;br /&gt;
&lt;br /&gt;
전쟁이 나면 거리 곳곳에 트럼펫이 불었고 이 소리를 들으면 카피톨리움 언덕&amp;lt;ref&amp;gt;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곳&amp;lt;/ref&amp;gt;으로 갔다.&lt;br /&gt;
&lt;br /&gt;
징병관인 집정관이 징집조사를 하는데, 이름과 사는 곳&amp;lt;ref&amp;gt;로마는 5년에 1번 가정의 가족 수, 연령, 재산을 조사하는 호구조사를 했다.&amp;lt;/ref&amp;gt;을 묻고 명부에서 확인, 신체 조건을 조사하면 끝이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구체적으로는 17~47세의 나이이며 시민권을 갖고 있고 자비 무장이 가능한 경제력, 장애가 없어야하고&amp;lt;ref&amp;gt;고자는 상관이 없었다!&amp;lt;/ref&amp;gt; 몸이 건장한 것이 조건이였지만 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되었다.&lt;br /&gt;
&lt;br /&gt;
로마군의 신체조건은 최소 173cm&amp;lt;ref&amp;gt;4세기 기준&amp;lt;/ref&amp;gt;이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그럴리가... 일반적으로 165cm라고 추측한다.&lt;br /&gt;
&lt;br /&gt;
그 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면제를 받았는데 손가락이 하나라도 없으면 면제였다.&amp;lt;ref&amp;gt;그 중 무기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엄지 손가락이 가장 중요했는데 병역을 면제 받기위해 엄지손가락을 잘라냈다고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자 4세기 말에는 엄지손가락이 없어도 입대시키도록 법이 개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속주국의 시민들을 징집하면 타국 경우엔 반발하겠지만 로마는 보조군으로 징집 후 제대하면 시민권을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시민권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많으며 자식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아버지는 보조군, 아들은 군단병인 가정이 많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값싼 수입 곡물과 잦은 전쟁으로 인해 자영농민인 병사들이 몰락해가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lt;br /&gt;
&lt;br /&gt;
군제 개혁으로 인해 무장을 나라가 준비해주니 중산층만이 아닌 가난한 시민들도 로마군으로 복무 할 수 있게되었으며 군에 복무할 때는 돈으로 월급을 지급, 제대하면 땅을 지급하여 중산층의 몰락을 막아냈으며 BC 28년엔 성인 남성 26.2명당 1명이 로마군이였고 나머지 인구들도 언제든지 징집이 가능할만큼 군사의 수를 불렸다.&amp;lt;ref&amp;gt;하지만 돈을 지급하는 사람이 군단장이라 군의 통제권이 지나치게 군단장에게 가고, 왠만해선 똑같은 군단의 군단장으로 복무했기에 사병화를 불러오고 내전의 확률이 증가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베게티우스(Vegétĭus)에 따르면 신병은 군대 마크(문신)를 새겼다고 한다.&amp;lt;ref&amp;gt;이는 탈영방지 때문으로 보인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군 복무 기간 ==&lt;br /&gt;
개혁 이전엔 징집 후 복무기간이 6년이였으나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뀌고 복무기간이 16년으로 늘어났다.&lt;br /&gt;
&lt;br /&gt;
술라의 로마 진격 이후 내전기엔 복무기간이 다시 6~10년으로 줄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정권을 잡고 다시 16년으로 늘렸다.&lt;br /&gt;
&lt;br /&gt;
거기에 베테랑으로 4년을 추가 복무하게 하였는데 베테랑으로 복무시 다양한 혜택과 면제가 있었다.&lt;br /&gt;
&lt;br /&gt;
이후 복무기간이 20년에 베테랑도 5년 추가 복무하게 되었고 점점 베테랑과 일반 군단병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사실상 복무기간은 25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초창기의 로마는 멀리가도 이탈리아 내였지만 확장 이후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아프리카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 6~7년은 지나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복무 중 주둔지의 여성과 눈이 맞아 제대한 후에도 정착 할 수 있어 본토에 있는 부모와는 반 영구적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 입대 과정 ==&lt;br /&gt;
&lt;br /&gt;
청년들은 징집 후 마르스 광장으로 모이고 집정관은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 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조&amp;lt;ref&amp;gt;점괘의 일종으로 이를 못받는다면 전투에서 승리하여도 개선식을 할 수 없었다.&amp;lt;/ref&amp;gt;를 받았다.&lt;br /&gt;
&lt;br /&gt;
이후 군인 선서식, 행동 지침을 낭독하고 천부장이 백부장을 뽑았다.&lt;br /&gt;
&lt;br /&gt;
왕정기에는 공적을 쌓을 수록 승진하여 뽑혔지만 공화정기부턴 이전에 백부장을 했어도 안뽑힐 가능성이 있었다.&amp;lt;ref&amp;gt;하지만 이의를 제기 할 수도, 번복할 수도 없었다.&amp;lt;/ref&amp;gt; &lt;br /&gt;
:ㄴ잠깐, 내가 로알못이라 그러는데 순서상 공화정이 폐지되고 난뒤에 제정이 수립된것 아니었나?&lt;br /&gt;
:ㄴ 이전에 적은 사람이 왕정하고 제정을 착각한 듯. 왕정으로 시작햇다가 왕정을 엎고 공화정으로 이어진 뒤, 다시 제정이 됨.&lt;br /&gt;
&lt;br /&gt;
백부장이 정해지면 백부장은 백인대를 구성하는데 구성 기준은 그냥 자신이 서있던 열의 병사, 아니면 같은 고향의 병사들로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lt;br /&gt;
&lt;br /&gt;
백인대가 정해지면 무기가 지급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공화정말고 제정도 알려줘라.. &lt;br /&gt;
오직 로마시민권자들만 갈수있었냐?&lt;br /&gt;
:ㄴ맞음. 병력 충당이 의심스럽겟지만, 그 때 되면 로마 전역에 식민도시라던가 그런 게 많이 세워져서 오히려 수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가 텅텅 빌 정도가 됨.&lt;br /&gt;
&lt;br /&gt;
== 훈련 ==&lt;br /&gt;
{{인용문2|their exercises unbloody battles, and their battles bloody exercises.&lt;br /&gt;
&lt;br /&gt;
로마군의 훈련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를 흘리는 훈련이었다.&amp;lt;ref&amp;gt;한국에서는 로마군의 훈련에 대해 이 문장을 주로 인용하지만 해외에서는 When not campaigning, legionary training and preparation, almost as hard and as expensive as war, consumed the Roman army를 더 자주 인용한다.&amp;lt;/ref&amp;gt;&lt;br /&gt;
 |Flavius Josephus&amp;lt;ref&amp;gt;제 1차 유대-로마 전쟁의 지휘관이였으며 유대 전쟁사의 저자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모든 로마군은 입대 후 4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았다.&amp;lt;ref&amp;gt;공화정까지만해도 밑에 서술한 훈련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처음엔 보폭훈련과 행군훈련을 했다고한다.&lt;br /&gt;
&lt;br /&gt;
행군 훈련은 한 달에 3번있었으며 보통 14.8km를 걸었다.&amp;lt;ref&amp;gt;여름엔 특별 훈련으로 29.6~35.5km를 걸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 외에 체력훈련&amp;lt;ref&amp;gt;멀리 뛰기, 수영 등을 말한다.&amp;lt;/ref&amp;gt;, 대형훈련, 투창훈련, 기병훈련&amp;lt;ref&amp;gt;보병도 신체 단련의 일환으로 훈련하였다.&amp;lt;/ref&amp;gt; 등을 하였으며 잘 못했을 경우 채찍을 맞았다고한다.&lt;br /&gt;
&lt;br /&gt;
BC 105년부터 검투사들에게 로마군을 훈련시키게 하면서 나무 무기가 지급되었다.&amp;lt;ref&amp;gt;실제 무기보다 2배나 무거웠다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인전투 훈련을 할 때는 알마투라(armatura)라고 부르는 1:1 훈련을 했는데 이 때는 실제무기와 비슷한 무게의 무기로 훈련을 했다고 한다.&amp;lt;ref&amp;gt;원래는 검투사의 전투기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기병들은 보병과 같은 훈련에 다양한 승마술을 배웠으며 훈련기간은 자료가 적어 모른다.&lt;br /&gt;
&lt;br /&gt;
훈련시험을 할 때는 총독 등 고위 인사들까지 오는데 여기서 합격하면 평소 배급 식량의 2배를 받지만 떨어질 경우 밑의 형벌항목과 같은 곡물을 보리로 받는 불명예를 얻었다.&lt;br /&gt;
&lt;br /&gt;
시험을 통과해도 훈련은 하루에 2번씩 계속 하였다.&lt;br /&gt;
&lt;br /&gt;
== 군생활 ==&lt;br /&gt;
로마군은 매일 아침 사열식을 하였으며 오늘의 암호를 전달하였다.&lt;br /&gt;
&lt;br /&gt;
한 가지 예로 군단장을 몰라본 병사가 암호를 대라고 했는데 마침 군단장이 암호를 잊어 말을 못하자 군단장을 공격한 사례가 있다.&amp;lt;ref&amp;gt;그 군단장의 이름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다... 아프리카 원정 중의 일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로마군은 12~1시까지 오침시간이 있다고한다.&lt;br /&gt;
&lt;br /&gt;
경비와 순찰은 약 200여명이 하였으며 절차가 철저했다고 한다. 이는 밑의 형벌항목의 경비쪽을 보면... &lt;br /&gt;
&lt;br /&gt;
10일에 하루 비번이였으며 1년에 5일 정도 휴가를 주었다.&amp;lt;ref&amp;gt;이런 날에 나가서 주둔지 근처의 가족들을 만났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로마의 축제일은 플레베이 대축제 등 축제, 유피테르 등의 각종 신들의 경축일, 황실 가족의 생일, 군단 설립일 등 1년에 축제일이 43일이 넘었으며 이런 날엔 검투사, 악사 등을 주둔지로 불러 같이 축제를 즐겼다.&amp;lt;ref&amp;gt;물론 임무를 마치고 축제를 즐겨야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런 축제일과 휴일을 제외하곤 로마군은 전쟁 등의 임무가 없다고 놀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로마는 군단이 그냥 논다면 정치와 돈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결과 계속해서 굴리게 되는데 하다하다 일이 없으면 각종 건설 작업까지 시켰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백인대장의 재량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물을 먹이면 면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amp;lt;s&amp;gt;죽창 주욱창을 들어라&amp;lt;/s&amp;gt;&lt;br /&gt;
&lt;br /&gt;
== 급료 ==&lt;br /&gt;
급료에 대해 말하기 전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데나리우스로 통일해서 서술했다.&lt;br /&gt;
&lt;br /&gt;
데나리우스의 화폐가치를 알고 싶으면 [[데나리우스]] 항목 참조. &amp;lt;s&amp;gt;쉽게 말하면 1데나리우스에 빵이 16개이다.&amp;lt;/s&amp;gt;&lt;br /&gt;
&lt;br /&gt;
로마군은 1년에 급료를 3번 받았다.&lt;br /&gt;
&lt;br /&gt;
처음 받는 급료를 비아티쿰(viátĭcum)이라하는데 보조군의 병사는 75 데나리우스를 받았다.&amp;lt;ref&amp;gt;군단병의 비아티쿰에 관한 자료는 아직 없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제 1차 포에니 전쟁(264~241 BC) 당시 보병의 연봉은 120데나리우스였다.&amp;lt;ref&amp;gt;기병은 그의 2배를 받았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시절인 AD 84년의 자료엔 군단병에게 297드라크마를 받았고 보조군 기병은 247드라크마를 받았다고 한다.&amp;lt;ref&amp;gt;드라크마는 데나리우스와 가치가 똑같다고 보면 된다. 둘 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였기 때문.&amp;lt;/ref&amp;gt;&amp;lt;ref&amp;gt;이 때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랐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카이사르는 병사의 일당을 5 아스(As)에서 10 아스로, 2배나 올렸고 아우구스투스 때도 이를 유지, 연봉은 225 데나리우스였다.&lt;br /&gt;
&lt;br /&gt;
이 후 11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까지 약 100여년이 넘도록 연봉이 유지되다가 300데나리우스로 인상, 또 다시 동결되었다가 20대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500 데나리우스로 올린다.&amp;lt;ref&amp;gt;약 100년 주기로 인상하는 안습한 병사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하지만 연봉만 지급받는 것은 아니였다. &lt;br /&gt;
&lt;br /&gt;
원정을 가면서 약탈하는 자금도 있었고 보너스, 상여금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예를 들어 AD 40년, 3대 황제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 원정 실패 이후 모든 군단병들에게 100 데나리우스씩 주었다.&lt;br /&gt;
&lt;br /&gt;
그 외에 클라우디우스 이후로 황제가 즉위하면 군단병들에게 상여금을 돌렸다.&amp;lt;ref&amp;gt;이는 베스파시아누스 이후로 사라졌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리고 군단병들은 3년에 한 번씩 보너스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렇게 해도 돈은 부족했는데 예를 들어 AD 70년의 군단병은 225 데나리우스를 받았지만 식량값 -60 데나리우스, 장비값 -50 데나리우스하고 남은 돈 115 데나리우스만 받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3년에 한 번 받는 보너스 75 데나리우스를 3 나눠봤자 1년에 140 데나리우스이다...&amp;lt;ref&amp;gt;보조병은 보너스도 못받았으며 순수익은 약 78데나리우스였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제대 급여, 퇴직금으로 3000 데나리우스를 주었는데 21대 공동 황제인 카라칼라 때는 5000 데나리우스로 상향되었다.&amp;lt;ref&amp;gt;만기 제대만 해당&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저 보너스 상여금도 전투에서 공을 세운 소수만 받는 포상이고, 기타 약탈 등의 수입도 로마가 확장을 멈추면서 의미가 없게 된다. 뭐 어딜 쳐들어가야 뺏고 노예로 팔아먹든지 하지.&lt;br /&gt;
&lt;br /&gt;
게다가 설령 침공을 한다고 쳐도 조직력이 좆밥이라 비교적 이기기 쉬운 게르만 애들은 당연히 똥수저들이라 수익이 안나고, 금수저들인 동방 제국은 로마 못지 않은 문명국이기 때문에&lt;br /&gt;
&lt;br /&gt;
싸워서 이기기가 힘들다.&lt;br /&gt;
&lt;br /&gt;
황제가 새로 즉위해서 상여금이라도 뿌리려면 황제가 빨리 뒤지고 새 황제가 즉위해야 하는데 계승에 하자가 없다면 재위기간도 존나게 길어지니 기회도 없다.&lt;br /&gt;
&lt;br /&gt;
내전기라면 이놈저놈이 다 황제라고 꺼드럭 거리면서 지지율 확보를 위해 돈이라도 뿌리겠지만 같은 로마군이랑 싸워야 해서 졌다간 말그대로 끝장이다.&lt;br /&gt;
&lt;br /&gt;
제 1대대 백인대장은 일반 백인대장보다 2배를 더 받았다. &lt;br /&gt;
&lt;br /&gt;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675 데나리우스를 받았다.&lt;br /&gt;
&lt;br /&gt;
보조군의 급여에 대한 사료는 부족한데, 부대마다 급여가 달랐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현대 사학자는 약 100 데나리우스 정도를 받았다고 추측한다.&lt;br /&gt;
&lt;br /&gt;
== 이동 ==&lt;br /&gt;
보조군(투창병&amp;amp;궁수)-보병&amp;amp;기병-기술자-군단장&amp;amp;호위병-기병-군단기수-트럼펫 취주자-군단-군수품-용병-보병&amp;amp;기병 순으로 행군했다.&lt;br /&gt;
&lt;br /&gt;
로마군은 타국보다 신속하게 전쟁터나 발령받은 주둔지로 갈 수 있었는데 이는 도로가 잘 되어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로마군들이 이동을 할 때는 그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amp;lt;ref&amp;gt;로마 군단병은 복무중엔 결혼이 인정되지 않아, 부인들도 전부 &amp;#039;정부&amp;#039;(情婦) 취급을 당햇다.&amp;lt;/ref&amp;gt;과 잡상인, 창녀들이 같이 이동을 하였다.&amp;lt;ref&amp;gt;어떨 때는 이들이 군단보다 많았다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동할 때 민간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동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가 지면 임시 주둔지를 건설해야했다.&amp;lt;ref&amp;gt;하지만 에픽테토스가 아리아노스에게 징발당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꼭 해를 끼치지 않은 것 같진 않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주둔지를 건설하지 못할 경우 돈을 주고 민가나 여관에 묵었으며 정 여의치 않으면 길바닥에서 자야했다...&lt;br /&gt;
&lt;br /&gt;
군장의 무게는 약 50kg 정도였으며 스쿠툼, 갑옷 외의 구성품으로는 주로 식기, 톱, 곡괭이, 삽, 말뚝 등이였다.&amp;lt;ref&amp;gt;마리우스 이후부터 군장의 무게가 늘었는지 저렇게 된 후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불렀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식량은 주로 3일분을 가져갔지만 발령받은 주둔지가 멀 경우엔 최대 17일분의 식량을 챙겨간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막사와 같은 무거운 것은 분대마다 한 마리 씩 배당된 노새가 싣고 다녔다.&lt;br /&gt;
&lt;br /&gt;
== 주둔지 ==&lt;br /&gt;
주둔지는 보통 식수를 구하기 쉬운 강 근처나 농지 부근에 자리잡았다.&lt;br /&gt;
&lt;br /&gt;
장소가 결정되면 측량사들이 측량을 하고 병사들은 땅을 고르고 주둔지 바깥에 참호를 팠다.&lt;br /&gt;
&lt;br /&gt;
참호가 완성되면 방책과 망루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다만 모든 병사들이 건설에 동원 되는 것은 아니였고 상황에 따라 수를 나눠 교대로 경계와 일을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게 다 하는데 오래걸릴 것 같지만 1~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amp;lt;ref&amp;gt;주둔지만 적었지만 그 외에 다리도 만들고 별 거 다 만든다. ㄷㄷ&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철거할 때는 정리 후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위는 임시 주둔지일 때의 경우고 상비군, 정식 주둔지일 경우 석재로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여러 군단이 이용하는 주둔지일 경우 부지가 약 20만평이였는데 이는 잠실구장의 25배나 되는 크기이다.&lt;br /&gt;
&lt;br /&gt;
주둔지는 공장, 곡창, 병원, 목욕탕 등 다양한 시설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유럽의 일부 도시는 로마군 주둔지가 도시화 되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쾰른, 콜체스터 등등.&lt;br /&gt;
&lt;br /&gt;
== 상과 벌 ==&lt;br /&gt;
전쟁 후 공훈을 치하할 때 최종결정은 황제나 원로원이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흔히 생각하는 월계수는 1급 백부장 이상만 받을 수 있는 관인데 이 것과 부상으로 금은으로 만든 군기, 장신구를 받고 한계급 승진을 했다.&lt;br /&gt;
&lt;br /&gt;
위가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병사가 받는 상이며 그 다음가는 공훈을 세운 자는 오크&amp;lt;ref&amp;gt;떡갈나무의 일종&amp;lt;/ref&amp;gt;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관과 부상을 받았다.&lt;br /&gt;
&lt;br /&gt;
그 후에 각종 상을 받았으며 끝에는 적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병사까지 다 주고 상으로 받은 것들은 제대 후에도 훌륭한 자랑거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령불복종, 투항 등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했을시엔 벌금과 모욕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군단의 군단장, 기수&amp;lt;ref&amp;gt;군단기를 잃어버렸을 때. 이는 매우 큰 중죄다.&amp;lt;/ref&amp;gt;는 벌금으로 그치지 않고 불명예제대나 강제 전출 등을 당했다.&lt;br /&gt;
&lt;br /&gt;
== 식사 ==&lt;br /&gt;
주로 곡물, 빵과 고기, 올리브유와, 치즈와 포도주를 마셨다.&lt;br /&gt;
&lt;br /&gt;
포도주는 물에 탄 포도주인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당시 포도주는 숙성 항아리(토기)에서 수분이 빠져 농축이 되었기 때문에 걸쭉하고 진해서 물에 타먹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헬조선 군머처럼 양 불리려고 비리 저지르거나 한 건 아님.&lt;br /&gt;
&lt;br /&gt;
그리고 의외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lt;br /&gt;
:ㄴㅈㄹ하고 있네 시오노 나나미가 처쓴 소릴믿네. 고기를 싫어한 게 아니라  없어서 못먹은 거다 동서를 막론하고 일반 평민이 유목민이 아닌한 고기를 섭취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평소 닭을 키우거나 사냥 ,낚시를 통해 고기를확보했다. 고기를 싫어하면 장비 중 (고기 꽂아서 구워먹는 데 쓰는) 꼬치가 있던건 뭔데??&lt;br /&gt;
:ㄴ 애초에 시오노 할매는 고대 로마를 좆본(정확히는 좆본제국)하고 지나치게 겹쳐보는 국뽕(우리가 보면 일뽕)이라서 그런 식의 오류를 존나 많이 저지름.&lt;br /&gt;
&lt;br /&gt;
== 놀이 ==&lt;br /&gt;
로마의 병사들은 주로 주사위 3~4개를 던져 그 수의 합이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 외엔 밑의 기차놀이 정도... 진짜 존나 재미없게도놀았다&lt;br /&gt;
:ㄴ 너 급식충이지? 그 시절이 지금하고 같냐? 허구헌날 전쟁하러 돌아다니는 로마군이 간편하게 갖고 다닐 수 있는 장난감이 얼마나 될 것 같냐?&lt;br /&gt;
&lt;br /&gt;
== 성욕 해결 ==&lt;br /&gt;
위의 이동 항목에서 말했듯이 로마군들이 이동을 할 때는 그의 가족과 창녀들이 같이 이동을 하였다.&lt;br /&gt;
&lt;br /&gt;
로마군들은 부대 밖으로 나와 부인과 창녀들로 성욕을 해결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기가 어려웠다.&lt;br /&gt;
&lt;br /&gt;
이에 병사들은 우애와 단결력이라는 이름으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뒤를 탐하게 되는데...&lt;br /&gt;
&lt;br /&gt;
지금의 군대가 그런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당시엔 쌍방 간의 합의가 있었으면 OK였다.&lt;br /&gt;
&lt;br /&gt;
심지어 장교들도 그랬는데 이렇게 총애를 받게 되면 군생활도 편해지고 서로 윈-윈한 셈이였다.&lt;br /&gt;
&lt;br /&gt;
다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자 강간하려는 사례도 있다.&lt;br /&gt;
&lt;br /&gt;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인 가이우스 루시우스는 트레보니우스라는 쌔끈한 병사를 따먹기 위하여 유혹했으나 넘어오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어느 날, 루시우스는 트레보니우스를 불렀고 강간을 시도하려고 했고 기겁한 트레보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루시우스를 칼로 죽였다. 난 죽이고 싶어 너를!&lt;br /&gt;
&lt;br /&gt;
이를 안 마리우스는 군사재판을 하였는데 루시우스는 원래 군단에게 평가가 좋은 인물이였고 트레보니우스를 비난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lt;br /&gt;
&lt;br /&gt;
하지만 트레보니우스는 사건의 내막을 모두에게 말해주었고 마리우스는 무죄를 선언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사례처럼 로마인은 동성애 풍습이 있었지만 저 당시엔 동성애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amp;lt;ref&amp;gt;동성애는 그리스문화에서 온 것인데 이방의 풍습이라며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로마인은 자신이 탑, 즉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됐다. &amp;lt;s&amp;gt;? 위랑 모순되는데?&amp;lt;/s&amp;gt;&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어후 시발&lt;br /&gt;
&lt;br /&gt;
march......&lt;br /&gt;
&lt;br /&gt;
== 보병 진형과 명령 ==&lt;br /&gt;
가장 유명한 테스투도는 라틴어로 거북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방어대형 중 하나를 말한다. 일명 귀갑진.&lt;br /&gt;
&lt;br /&gt;
스쿠툼을 든 병사들이 외형을 둘러싼 후 대형의 중앙에 들어간 보병이 방패를 모두 위로 올려 적의 화살과 투창을 막는 효과적인 대형이였다.&lt;br /&gt;
&lt;br /&gt;
언제부터 사용한 대형인지는 모르나 플루타르코스는 BC 36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사용했다고 서술하였다.&lt;br /&gt;
&lt;br /&gt;
테스투디넴 포르마테(testudinem formate) 명령이 내려지면 테스투도 진형을, 반대로 테콤브레(tecombre) 명령이 내려지면 테스투도 진형을 해제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쐐기진(Flying wedge)과 같은 진형의 명령은 쿠네움 포르마테(cuneum formate)로 충격을 주어 적의 진형을 깨트리는 대형이다.&lt;br /&gt;
&lt;br /&gt;
사각형 진형과 비슷할 것으로 여겨지는 대기병진의 명령은 레펠레레 에퀴테스(Repellere equites)이다. &lt;br /&gt;
&lt;br /&gt;
방패와 방패 사이에 창 또는 필라를 드는 대형이라한다.&lt;br /&gt;
&lt;br /&gt;
== 형벌 ==&lt;br /&gt;
로마군은 다양한 형벌이 존재하였다.&lt;br /&gt;
&lt;br /&gt;
먼저 탈영, 탈영을 할 시에는 푸스투아리움을 했는데 이 것은 쉽게 말하면 패죽이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푸스투아리움은 그 외에 도둑질, 거짓 증언 등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형벌이였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발 채찍질인데 이 것은 현대의 고문 기술에도 있을만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lt;br /&gt;
&lt;br /&gt;
그 외의 범죄에 관한 형벌로는 군단 앞에서 채찍질하기, 뱀의 자루에 넣어 강이나 호수에 던지기, 벌금 등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인한 형벌도 있었는데 배급 식량을 보리로 주기, 추가업무, 계급 강등 등이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리고 가장 중죄인 반란에 대한 형벌로는 데시메이션(decimation)이 있다. &lt;br /&gt;
&lt;br /&gt;
병사 10명 중 9명이 1명을 때려 죽이는 것인데 죽음을 당하는 1명은 무작위로 선정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살아남은 9명의 병사들은 평상시 배급 받던 곡식 대신 보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이 형벌이 처음 적용된 것은 BC 417년, 볼스키인과 전쟁 중 병사들이 이틀 연달아 도망가자 이 형을 내린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연대책임]]의 극치인 이 형별은 흔하지 않은 벌이였으며 이를 강행했을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카이사르 등 많은 장군들이 형을 내렸다가 취소하였다. 반대로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진압할 때 연패로 사기가 이미 바닥난 군대를 분발시키기 위해 쓴 바 있다.&lt;br /&gt;
&lt;br /&gt;
==같이보기==&lt;br /&gt;
&lt;br /&gt;
[[군단병]]&lt;br /&gt;
&lt;br /&gt;
[[백인대장]]&lt;br /&gt;
&lt;br /&gt;
[[이탈리아군]] - 로마군의 덜떨어진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군대]]&lt;br /&gt;
&lt;br /&gt;
[[분류:역사]]&lt;/div&gt;</summary>
		<author><name>Nova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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