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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유득공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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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3T01:35:34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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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ovaAdmin: 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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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8T09:29: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흙수저}}&lt;br /&gt;
&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lt;br /&gt;
{{인용| ...그러나 끝내&amp;lt;발해사&amp;gt; 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lt;br /&gt;
                                                                                                       - &amp;lt;발해고&amp;gt; 서문 中 - }}&lt;br /&gt;
&lt;br /&gt;
{{인용|“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amp;lt;이십일도회고시주&amp;gt;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amp;lt;발해고&amp;gt;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lt;br /&gt;
                                                                                                 - 1785년 박제가가 쓴 &amp;lt;발해고&amp;gt; 서문 中 - }} &lt;br /&gt;
                                                                &lt;br /&gt;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이다. &lt;br /&gt;
서얼 출신임에도 정조의 중용에 힘입어 3사 언관직에 준하는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유학자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주로 시인, 역사연구가로 활동하였다&amp;lt;ref&amp;gt;조선 학자들이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글짓기(사서)보다는 성리학 경전 읽기(경학)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 후기에 유득공 같이 시인이나 역사연구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17C-18C를 거치면서 조선에 학문적, 사상적 경향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발해사를 민족사로 인식하여 최초로 남북국시대라는 말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 &lt;br /&gt;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amp;amp;contents_id=19275 아래 글은 해당 링크의 내용을 본 위키러가 축약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유득공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집안의 생계가 점차 어려워지면서 7세 때 외가로 옮겨오게 되었다. &lt;br /&gt;
그러나 아들이 학문하기 좋은 여건에 있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얼마 안가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고 20세 무렵부터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등의 북학파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북학파 실학자들과의 교류는 유득공이 역사지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amp;lt;ref&amp;gt; 참고로 이때 유득공의 어머니는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아들을 공부시켰다ㅠㅠ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7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암울한 나날을 보내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약 100여구란다. 아마도 지금 공시생들이 재수 삼수를 하면서 &amp;#039;씨발 헬조선&amp;#039; 하는것과 같은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lt;br /&gt;
&lt;br /&gt;
그렇게 대과를 포기하고, 역사지리 연구에 몰두하던 그에게도 한줄기 빚이 찾아들었다. [[정조]] 라는 깨우친 임금이 등장해 서얼들을 중용하면서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된 것이다. 이때가 1779년으로 유득공 나이 32세였다. 관직을 갖게 되면서, 유아기때부터 지속되어온 만성적 생활고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lt;br /&gt;
35세 때는 잠시 강화도에 머물며 외규장각 문서들을 조사, 관리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사실 규장각 본연의 역할이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고 수집하는 일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37세부터는 지방관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규장각 검서관 생활을 하면서 연구한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적 사서인 &amp;lt;발해고&amp;gt;를 저술하게 된다.&lt;br /&gt;
풍천부사로 부임할 무렵에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1년여간 지방관 생활을 하다가 1801년(순조 1년) 지방관직을 사임하고 저술활동에만 몰두하였고, 1807년 &lt;br /&gt;
9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역사연구와 시 짓기에 특기가 있었던 학자 답게, 유득공은 서사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amp;lt;발해고&amp;gt; 외 그의 대표작인 &amp;lt;이십일도회고시&amp;gt;는 위만조선의 멸망 ~ 고려까지의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하여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amp;lt;이십일도회고시&amp;gt;는 그의 이름이 중국에도 알려지는데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lt;br /&gt;
유득공은 전 생애에 걸쳐 3번의 중국여행을 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1778년, 첫번째 중국여행지인 심양을 방문하여 &amp;lt;동국지리지&amp;gt;&amp;lt;ref&amp;gt; 17C에 초기 실학자로 평가받는 한백겸이 쓴 역사지리지. 중국 사서에 기록된 초기 국가를 서술하였고 우리 역사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대 지명을 새롭게 증명하였다. 역사지리 연구의 효시로 불린다.&amp;lt;/ref&amp;gt;에서만 보던 만주 땅을 직접 밟았다. &lt;br /&gt;
귀국하던 도중에 개성에서 우연히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박제가와 이덕무를 만났는데, 이들이 북경에 가보지 못한 유득공을 보고 &amp;quot;넌 북경 안가봤지? 우린 가봄 ㅎㅎ&amp;quot;&lt;br /&gt;
하고 놀리자 유득공이 &amp;quot;..심양이든 북경이든 압록강을 건넜으니 그게 그거야..&amp;quot; 하고 정신승리를 시전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놀림에 한이 맺혔는지, 1790년에는 건륭제의 80세 생일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그가 가장 가보고 싶어하던 북경을 방문하였다. &lt;br /&gt;
1801년에는 왕명을 받아 2차 연행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Nova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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