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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징비록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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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3T17:53:43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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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ovaAdmin: 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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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8T10:22: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드라마를 찾으면 [[징비록(드라마)]]로&lt;br /&gt;
&lt;br /&gt;
&amp;#039;&amp;#039;&amp;#039;국보 132호&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인용문2|&amp;lt;big&amp;gt;懲毖錄者何 記亂後事也&amp;lt;/big&amp;gt;&amp;lt;br&amp;gt;“징비록이란 어떤 기록인가? 난후(亂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유성룡 자서(自序) 中}}&lt;br /&gt;
&lt;br /&gt;
징비록은(懲毖錄)은 선조 때 재상이었던 문신 유성룡이 사직 후 임란(壬亂)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전기(戰記)이며 저자가 영면하기 3년 전에 기술한 책이다. 일견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저자가 정밀하고 체계적인 문체로 기록했다.&lt;br /&gt;
&lt;br /&gt;
징비록이란 서명 자체는 시경(詩經) 소비(小毖)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amp;lt;u&amp;gt;&amp;#039;&amp;#039;&amp;#039;懲&amp;#039;&amp;#039;&amp;#039;&amp;lt;/u&amp;gt;而&amp;lt;u&amp;gt;&amp;#039;&amp;#039;&amp;#039;毖&amp;#039;&amp;#039;&amp;#039;&amp;lt;/u&amp;gt;後患) &amp;quot;내가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amp;quot;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며 이것이 저자가 징비록을 집필한 집필한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1633년 유성룡의 아들 유진이 유성의 문집 &amp;#039;서애집&amp;#039;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수록하여 처음 간행하였다.&lt;br /&gt;
== 내용 ==&lt;br /&gt;
저자가 밝히고 있듯 비단 임진왜란 발발 후의 7년간의 일 뿐만 아니라 발발 전의 조정의 여론, 분쟁, 전시 대비 상황 등 역시 기록하고 있다. &lt;br /&gt;
히데요시가 조선에 시비를 거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는 등 슬슬 꼴같잖게 나대는 국면, &amp;quot;우리는 자주 사신 보냈는데 니네는 왜 안 보냄 우리 무시함?&amp;quot; 거의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내고 사신을 요청하는 내용. 결국 통신사가 갖다온 뒤 전쟁 징후에 대한 찬반론. 그리고 그에 따른 허술한 전시 대비 상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했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前 전적(典籍) 이로(李魯)도 내게 글을 보냈다.&lt;br /&gt;
 &amp;#039;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넘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답답하오.&amp;#039;&lt;br /&gt;
 &amp;#039;&amp;#039;&amp;#039;아니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한 왜적을 그깟 한 줄기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이러했고 홍문관 또한 그런 의견을 내놓곤 했다.&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amp;#039;&amp;#039;&amp;#039;-징비록 中-&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 평가 ==&lt;br /&gt;
난중일기와 함께 당시 전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며 이로서 우리나라의 국보 132호에 지정되어있다. 또 일본에서 간행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도 적잖이 읽혔던 모양이지만 나쁜 평가도 다소 있다.&lt;br /&gt;
&lt;br /&gt;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lt;br /&gt;
 &lt;br /&gt;
 &amp;#039;&amp;#039;&amp;#039;-선조수정실록 유성룡 졸기(卒記)-&amp;#039;&amp;#039;&amp;#039;&lt;br /&gt;
&lt;br /&gt;
물론 위의 기록은 당대 사관의 기록일뿐이고, 당시 실제 서평 중론이 어떠했든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징비록이 유려한 문체로 쓰인 명저이자 실질적인 사료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lt;br /&gt;
== 기타 ==&lt;br /&gt;
*서울대에서 선정한 인문 고전 50선 중 한 책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유성룡 作, 김흥식 譯 &amp;lt;징비록&amp;gt;&lt;br /&gt;
*국가기록유산 사이트 징비록 원문 열람&lt;br /&gt;
== 같이보기 ==&lt;br /&gt;
*[[임진왜란]]&lt;br /&gt;
*[[류성룡]]&lt;/div&gt;</summary>
		<author><name>Nova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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