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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량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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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5T10:59:0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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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NovaAdmin: 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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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8T08:37: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DCWiki 복구: 최신본 이식&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신립]]이 [[충주]]로 데려간 군사들의 숫자&lt;br /&gt;
&lt;br /&gt;
&lt;br /&gt;
신립은 체찰사 [[유성룡]]에게 [[장교]] 80명을 받았다.&lt;br /&gt;
&lt;br /&gt;
장교 80명은 한명 당 군사를 100명씩 인솔한다. &lt;br /&gt;
당시 [[서울]] 한성부에는 잡색군([[민방위]])으로 &amp;#039;8만명&amp;#039;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 활 잘 쏘는 대大,소小 한량인 기마병 8천 (삼의사 장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군대면제를 받고있었다.)&lt;br /&gt;
2. (한량의) 개인노비 8천 &lt;br /&gt;
3. (한량에게) 보인종자로 지급된 시정방리인 1만6천명 &lt;br /&gt;
4. 도성 궁가에 남아 수비대로 남을 4500+2500명(서울 아전 , 악공 악생 , 장애인,노약자,병자) (한량에게 면포를 갖다바치는 자들)&lt;br /&gt;
5. 서울 도성 각사 노비(서울 도성 관청 노비) 3만명 (결채하는 자들)&lt;br /&gt;
6. 도성 인근 고을 8천 시정악동 &lt;br /&gt;
&lt;br /&gt;
이중 4번 5번만 빼고 전부 충주로 데려가고 5번은 군량수송대로 삼았다.&lt;br /&gt;
&lt;br /&gt;
신립은 이 병력의 질을 믿지않아 추가로 궁궐호위군 2천(도성무사재관)을 받았는데.&lt;br /&gt;
이들은 상번하는 군사 2천에게 고용된 대립인들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립은 항상 직속철기 500을 데리고다녔는데. 고대일록,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lt;br /&gt;
결국 신립과 작전의 호흡을 같이 맞출 군사는 500 뿐이었던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계갑일록]에 보면 1번 , 2번 , 3번 , 5번 항목은 니탕개 난 당시 북방으로 출정한 경력이 있다.&lt;br /&gt;
니탕개 난 당시 서울의 한량인 8천은 조방장들이 이끄는 80명 용사들을 따라 북방으로 출정했다.&lt;br /&gt;
한량인 8천에게 말,면포를 조공바치고 출정을 면제받는 면제보인 8천명 , 같이 뒤따라가는 종군종자보인 8천+8천을&lt;br /&gt;
서울 시정방리인 중에서 뽑았다. &lt;br /&gt;
한량은 당시엔 신라의 화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lt;br /&gt;
이후에 니탕개 난 사태가 더 위급해지자 율곡이이는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자 1만명을 더 뽑았다.(율곡전서 행장) &lt;br /&gt;
&lt;br /&gt;
이때 서울 5부 각방의 향도들이 이곳 저곳을 뒤지며 활을 당길수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lt;br /&gt;
병조의 색리들은 한 사람 당 면포 5~6필을 내야만 징병면제를 해주겠다고 발표했다. &lt;br /&gt;
노비든 잡것이든 백성이든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뽑게했다.&lt;br /&gt;
근데 이때 율곡이이는 병력의 양보단 질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전투말을 사서 바치는 자는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lt;br /&gt;
그래서 순식간에 구름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전투말 1만여마리가 모였다.&lt;br /&gt;
율곡이이는 이때 활을 잘 쏘는 자 1만명을 뽑았지만 이중 활 잘 쏘는 실력을 상 , 중 , 하로 나누어 200명만 장교로 뽑고&lt;br /&gt;
그들에게 보인을 주고 나머지는 예비대로 삼았다.&lt;br /&gt;
200명 장교들은 먼저 선발대로 북방으로 출정했다.&lt;br /&gt;
뒤따라 출정할 부대를 뽑는데.&lt;br /&gt;
전투말도 면포도 바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서울 도성 방리시정 백성들은 활을 못쏨에도 전부 북방전장터로 끌려가 서울 시내가 쓸쓸하게 텅텅 비고 &lt;br /&gt;
결채하는 도성 관청 노비들도 백성들의 탈영을 감시할 보인들로 붙여져 우글우글 끌려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고대일록에 보면 신립의 정예병 500이 충주강물에 빠져 익사했다나옴.&lt;br /&gt;
&lt;br /&gt;
선조수정실록엔 신립이 평소 직속 철기 500을 거느리고 치돌을 즐겨했다나온다.&lt;br /&gt;
&lt;br /&gt;
상촌집에도 신립이 탄금대전투 때 철기 500을 거느리고 단월역 인근 평원광야에서 치돌하다 전부 뒤졌다고 나온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떤 모습의 철기였을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일의 병력 징집 장면 &lt;br /&gt;
&lt;br /&gt;
이일이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경상도로 가려하는데. 기마장교 40명 궁수장교 20명을 비변사에서 받음. &lt;br /&gt;
그리고 도성의 금군 300명을 호위병으로 데려가려하는데.  군적을 보니 유생,역관들이 전부 차지하고있었음.&lt;br /&gt;
병역비리의 끔찍한 현장을 본 이일은 한숨을 쉬고  유생,역관들은 안끌려가려고 지랄하다가 결국 별장 유옥에게 전부 끌려가는데.&lt;br /&gt;
별장 유옥의 장교들이 집들을 일일히 뒤지며 숨은 유생,역관들을 끌고가는데 시간이 걸림.&lt;br /&gt;
유생,역관들은 하도 기생한테 돈을 탕진해서 말도 없이 노비들이랑 함께 걸어감. &lt;br /&gt;
&lt;br /&gt;
그때 이일은 먼저 기마장교 궁수장교 60명과 함께 도성을 출발해 경기감영을 지나며 금군 300명을 호위할 조례(서울아전) 4천명을 호위병으로&lt;br /&gt;
징집함.  이때 호위병들의 짐을 싣고 같이 가줄 보인들도 하나씩 뽑음. &lt;br /&gt;
그렇게해서 전병력이 8천 300 이상이 되었을것이라 추정됨.&lt;br /&gt;
&lt;br /&gt;
그렇게해서 상주로 내려갔는데.   문경을 지나면서 곡식창고 다 털음. 그리고 상주에 도착했는데.&lt;br /&gt;
이일은 함께 온 귀족종사관 2명과 함께 상주 읍성 북쪽 시냇가 북천으로 상주의 민병 800과 상주에 모인 경상도 장사 2천명을 데려와서 &lt;br /&gt;
자기가 데리고온 조례병4000 보인종자 4000  장교 60  금군 300과 합체시켜 전투병 6000 이상  ,  보인종자 6000이 됨.&lt;br /&gt;
&lt;br /&gt;
4월 25일 충청도 조령을 방어하는 방어사 겸 조방장 변기와 종사관 1명이 충청도군현병 8천을 이끌고 이일을 후원하러 상주로 와서 이일과 합류했는데.&lt;br /&gt;
&lt;br /&gt;
이들 중 민병 800만 북천시냇가에서 진법훈련을 시키는척하며 왜군의 밥으로 내어준후 나머지 군사는 전부 뒤편 숲속을 통해 변기의 도움 하에 무사히 퇴각시킴.&lt;br /&gt;
(4월 25일)&lt;br /&gt;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때 상주에서 이일 변기의 연합군병력 2만을 만났는데.  이 2만 중 1천만 격파하고 나머지는 놓침. &lt;br /&gt;
&lt;br /&gt;
이일이 떨구고간 역관 1명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 조선조정이 4월 28일 충주에서 항복하기로했으니까 어서 오셈하고 유인함. &lt;br /&gt;
&lt;br /&gt;
이일과 변기는 함께 총병력 2만을 이끌고 조령을 지나 단월역 근방으로 오던 중에 급히 오는 신립 김여물과 만나서 급히 &amp;#039;조령작전회의&amp;#039;를 염.&lt;/div&gt;</summary>
		<author><name>Nova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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