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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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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4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사건은(는) 병신입니다.
이 문서에 나오는 사건은 정말로 병신같습니다. 어떻게 끝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벨기에가 궁예짓해서 죄없는 나라 개씹창냄

후투족과 투치족들이 지들잘났다고 서로 학살한 사건이다. 원인은 제국주의가 일어난 시대로 거슬로 올라간다.

두치와 뿌꾸도 아니고 부족명들이 하나같이 이상한게 서로 좆대고 발기토질을 했다.

그덕분에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했다.

이 내전을 소재로한 영화 '호텔 르완다'가 있다.

독일 점령 시기

르완다는 소수의 투치족과 다수의 후투족으로 이루어진 왕국이었음

하지만 19세기 부터 유럽에 제국주의가 판을 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침공했는데

당시 르완다는 독일한테 넘어가버린다

독일 식민시절 당시에는 내전 터질 정도에 심각한 갈등이 없었음(물론 독일이 갈등의 씨앗을 뿌린건 사실)

당시 독일은 르완다 내륙까지 들어가기에는 힘들었고 영토 관리하는 군인들 숫자도 부족하자

소수 독일인과 친독일 성향에 아프리카인들을 이주 시키면서 영향력을 확장할려했고

효율적 지배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각기 다른 민족이라 엮어서 나눠버림

그래도 뭐 서로 다른 부족이었고 왕래만 하는 수준이라서 아직 까지는 별 탈은 없었음(이때까지 후투와 투치는 평등했음)

문제가 터진건 이후..

벨기에 점령 시기

독일이 1차대전 패망하고 독일 식민지가 승전국으로 넘어가면서

르완다는 벨기에 한테 넘어간다

문제는 벨기에가 독일 그 이상으로 후투와 투치는 나눴는데

소수에 투치족은 키도 크고 백인과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백인과 비슷하다라는 병신 같은 논리로 투치족 우대 정책을 폈고

후투족에 권리 땅 등이 투치족으로 넘어가버린다

당연히 후투족은 자신들의 권리 땅 직위를 뺏어간 투치족과 벨기에 씹년들에 원망에 커지기 시작함

르완다 공화국 시기

그러다 1959년 투치족들은 르완다 왕국을 세우나 후투족에 반발로 3년만에 공화국으로 바뀜(민주주의 원칙에 다수결이 유리하므로 다수 민족인 후투족이 공화국으로 바뀌면 존나 유리하거든)

그 후 선거로 초대 대통령인 후투족인 카리반다가 당선됬고 카리반다는 투치족을 외래민족으로 정의해 이때부터 반투치족 정치를 핀다( 만명의 투치족들이 학살되고 약 30만에 달하는 투치족들이 해외로 추방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73년 르완다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2대 대통령 그레고르 카이방다(1대랑 이름만 비슷하지 다른인물)를 쫓아내고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집권하면서 더욱더 투치족을 학살하자 이에 투치족들은 르완다민족통일동맹을 결정해 항쟁을 이어간다

1990년 르완다민족통일동맹은 우간다 지원하에 북부 르완다를 침공하며 내전으로 터진다 이때 후투족은 투치족이 존나 나쁜놈들이라고 방송으로 선전해 주민들을 세뇌시킨다

남부 르완다 에서는 군사 쿠데타 정권이 쫓겨나고 민주 선거로 멜키오 은다다예가 정권을 잡자 후투와 투치에 갈등이 조금 나아진다(은다다예가 투치족들을 나름 배려해주는 정책을 핌)

근데 존나 웃긴건 이 정책으로 출세한 투치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안 줄려고 자신들을 배려해준 은다다예를 쫓아낼려고 쿠데타 모의 하다가 걸리고 만다

그렇게 갈등이 다시 고조 될려는 찰라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투치와 후투에 갈등이 터져버리고 불과 100일 동안 양측에 수십만명이 학살당하고 피난민이 100만명 발생하는 헬게이트가 열리고 마다

이러니 결국 유엔에서 제재가 떨어졌고 양측을 말릴려고 평화유지군을 파병할려고 준비중에 벨기에 이 병신 주제 파악못하고 혼자서 군대 파견을 강력히 요청한다

결국 르완다 인종갈등 만든 장본인인 벨기에는 존나 욕쳐먹고 혼자서 군대를 파견하나 르완다 사정은 훨씬 헬게이트 였고 결국 바로 철수한다

어찌어찌 학살을 막았으나 아직도 갈등이 심하다

옆동네 부룬디도 비슷한 꼬라지가 났다. 비슷하게 후투족과 투치족이 사는 동네여서 그렇다. 거기에 덤으로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도망친 이 두 족속들이 콩고에서까지 지들끼리 죽여 대며 국제 문제를 일으켜 콩고 전쟁이란 빅똥의 서막이 된다.

르완다 내전과 르완다 집단학살의 차이

헷갈리기 쉬운데 르완다 내전르완다 집단학살은 같은 말이 아니다.

르완다 내전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르완다 정부군과 르완다 애국전선, 즉 RPF가 싸운 전쟁이다.

르완다 집단학살은 그 내전 막판인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투치와 온건 후투를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러니까 구조는 이렇다.

내전은 군대끼리 싸운 전쟁이고, 집단학살은 민간인을 민족 딱지 붙여서 죽인 제노사이드다.

물론 실제 현장에서는 둘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전쟁, 선전, 난민, 보복, 민병대, 정권붕괴, 외세 개입이 한꺼번에 섞이면서 나라가 통째로 피떡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내전이라는 불판 위에 집단학살이라는 지옥불이 올라간 것이다.

시작은 난민 문제였다

RPF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악의 조직이 아니다.

1959년 이후 후투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투치들이 우간다, 부룬디, 탄자니아, 자이르 등으로 도망갔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난민으로 살았다.

근데 난민도 하루이틀이지, 몇십 년을 밖에서 살면 빡칠 수밖에 없다.

고향은 있는데 못 돌아간다. 국적은 애매하다. 정치적 권리도 없다. 자식 세대는 난민촌과 망명지에서 자란다.

이러면 "우리도 고향 돌아가자"는 무장조직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게 RPF였다.

물론 그렇다고 총 들고 침공한 게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전의 출발점이 단순히 "투치가 갑자기 후투를 공격함" 같은 초딩식 설명은 아니라는 뜻이다.

벨기에가 민족 구분으로 불을 붙이고, 후투 정권이 투치를 밀어내고, 난민 문제가 쌓이고, 우간다에서 군사 경험을 얻은 망명 투치들이 다시 총 들고 들어온 것이다.

역사가 이렇게 누적되면 나중에는 누가 처음 때렸냐 따지는 것도 골치 아파진다. 모두가 자기 억울함을 들고 있고, 총은 이미 장전돼 있다.

RPF

르완다 애국전선, 영어로 Rwandan Patriotic Front. 줄여서 RPF.

주로 우간다에 있던 투치 난민과 그 후손들이 중심이 된 반군 조직이다. 무장조직 쪽은 RPA라고도 불렸다.

초기 지도자는 프레드 르위게마였고, 그가 전사한 뒤 폴 카가메가 실질적인 지도자로 떠올랐다.

RPF는 1990년 10월 우간다 쪽에서 르완다 북부를 침공했다. 이게 르완다 내전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르완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건 외국에서 들어온 반군 침공이었다. RPF 입장에서는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난민들의 해방전쟁이었다. 후투 극단주의자 입장에서는 투치가 나라를 다시 먹으려는 음모였다. 국제사회 입장에서는 또 아프리카에서 뭔가 터졌네 정도였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뭔가 터졌네" 하고 느긋하게 보는 동안, 현장은 진짜로 터졌다.

하뱌리마나 정권

쥐베날 하뱌리마나는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투계 대통령이었다.

초기에는 카이방다 정권보다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고, 북부 중심의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나라를 통제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정권도 후투 중심 권위주의 체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뱌리마나 정권 주변에는 아카주(Akazu)라고 불리는 권력 핵심 집단이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대통령 주변의 친인척, 측근, 군부, 극단주의 정치세력이 엮인 권력 카르텔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이런 놈들이 보통 제일 위험하다.

왜냐면 평화협정이 되면 자기 권력이 줄어든다. 민주화가 되면 자기 특권이 흔들린다. 반군과 권력 나누자고 하면 자기 자리부터 위험하다.

그래서 극단주의자들은 RPF와의 타협을 배신으로 봤고, 투치 전체를 적으로 몰아가는 선전을 강화했다.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총 때문만이 아니다. 총보다 먼저 라디오와 신문이 사람 머리를 썰어놓는다.

선전과 라디오

르완다 집단학살에서 라디오는 악마의 확성기 역할을 했다.

후투 극단주의 매체들은 투치를 바퀴벌레 취급하고, RPF와 일반 투치 민간인을 한 덩어리로 묶었다. 이건 전형적인 학살 준비 과정이다.

먼저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그다음 죽여도 된다고 말한다. 그다음 이웃이 이웃을 죽인다.

칼은 손에 들기 전에 말에서 먼저 나온다.

르완다의 경우 라디오가 특히 중요했다. 문맹률도 있고, 신문보다 라디오가 훨씬 넓게 퍼졌다. 그래서 선동 방송은 그냥 떠드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살인 지시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이쯤 되면 방송국이 아니라 학살 콜센터다.

아루샤 협정

1993년 8월, 르완다 정부와 RPF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게 바로 아루샤 협정이다.

내용은 대충 권력분점, 과도정부 구성, RPF의 정치 참여, 정부군과 RPF 병력 통합, 난민 귀환 같은 것들이었다.

말로만 보면 꽤 합리적이다.

싸우지 말고 권력을 나누자. 난민도 돌아오게 하자. 군대도 통합하자. 새 정부를 만들자.

문제는 현실이 협정보다 훨씬 더 개판이었다는 점이다.

후투 극단주의자들은 이걸 투치에게 나라를 내주는 항복문서처럼 봤다. RPF도 정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정부군도 RPF를 싫어했고, 민병대는 이미 무장을 하고 있었다.

평화협정은 종이에 적혔는데, 현장은 이미 칼을 갈고 있었다.

아루샤 협정은 평화를 만들 기회였지만, 동시에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지금 안 죽이면 우리가 밀린다"는 공포를 키운 계기가 되었다.

평화협정이 실패하면 그냥 실패가 아니다. 가끔은 더 큰 폭발의 카운트다운이 된다.

UNAMIR

아루샤 협정 이후 유엔은 르완다에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이 임무가 UNAMIR이다. 지휘관은 캐나다군 장교 로메오 달레르였다.

문제는 권한이 약했다.

UNAMIR는 평화유지군이지, 전쟁을 강제로 멈추는 군대가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싸우지 마세요"는 할 수 있는데, 누가 칼 들고 학살을 시작했을 때 진짜로 쏴서 막을 권한과 병력이 부족했다.

달레르는 학살 위험을 경고했지만, 유엔과 강대국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는 다들 아는 그 지옥이다.

국제사회는 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데 막상 일이 터지면 회의하고, 문구 조정하고, 책임 미루고, 철수부터 고민한다. 외교관들이 단어 고르는 동안 사람들은 칼에 죽는다.

대통령 전용기 격추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탄 비행기가 키갈리 근처에서 격추되었다.

이 사건이 학살의 직접적인 방아쇠가 되었다.

누가 격추했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많다. RPF가 했다는 주장도 있고, 평화협정에 반대하던 후투 극단주의 세력이 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이 사건 직후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죽자마자 학살 명단이 돌고, 도로 검문소가 생기고, 투치와 온건 후투가 잡혀 죽었다.

즉 이건 우발적 폭동이라기보다는, 이미 준비된 학살 기계가 시동 걸린 것에 가까웠다.

비행기가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지만, 그 뒤에 열린 지옥문은 100일 동안 닫히지 않았다.

100일 학살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약 100일 동안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보통 약 80만 명 전후로 많이 말한다. 투치뿐 아니라 온건 후투도 죽었다. "투치와 공존하자", "학살은 안 된다", "RPF와 협상하자" 같은 입장을 가진 후투들도 배신자로 몰려 죽었다.

이건 후투 대 투치의 단순 부족싸움이 아니다.

후투 극단주의 권력자들이 투치를 절멸 대상으로 만들고, 온건 후투까지 제거한 정치적 제노사이드였다.

민족 갈등은 재료였고, 권력투쟁은 불쏘시개였고, 선전매체는 기름이었고, 민병대는 칼이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소화기 들고 옆에서 구경하다가 사용법 회의하고 있었다.

르완다 내전의 결말

집단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RPF는 공세를 계속했다.

결국 1994년 7월 RPF가 키갈리를 장악하고 르완다 정부군과 후투 극단주의 세력은 무너졌다. 내전은 RPF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폴 카가메와 RPF가 르완다의 핵심 권력이 되었다.

이걸 RPF 입장에서는 해방이라고 한다. 후투 난민 입장에서는 보복 공포와 대탈출이었다. 현대 르완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가 재건의 시작이다. 비판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의 시작이기도 하다.

즉 내전은 끝났지만, 문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쟁은 국경을 넘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흘러갔다. 후투 극단주의 잔당과 난민, 르완다군, 콩고 반군, 주변국 군대가 얽히면서 콩고 전쟁이라는 더 큰 똥덩어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르완다 내전은 르완다 안에서 끝난 게 아니라, 중앙아프리카 전체에 후폭풍을 뿌렸다.

프랑스

르완다 내전에서 프랑스의 역할도 논란이 많다.

프랑스는 하뱌리마나 정권과 가까웠고,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래서 르완다 정부군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자기 영향권을 지키려 한 것이다. 현장에서는 그 영향권 안에서 학살 정권이 자라고 있었다.

나중에 프랑스는 1994년 오페라시옹 튀르쿠아즈라는 군사작전을 벌여 인도주의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이 작전이 학살 가담자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강대국들이 "안정"을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 안정이 현지 주민의 안정인지, 자기 영향력의 안정인지 봐야 한다.

벨기에

벨기에는 르완다 비극의 원죄 지분이 크다.

독일도 식민지 지배를 했지만, 벨기에는 후투와 투치 구분을 행정적으로 더 굳히고, 투치 우대 정책을 펴다가 나중에는 후투 쪽으로 갈아타는 식으로 사회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즉 벨기에는 불을 지피고, 장작을 쌓고, 기름을 뿌리고, 나중에 "아이고 불났네" 한 셈이다.

1994년 집단학살 초기에 벨기에 평화유지군 10명이 살해되자 벨기에는 철수를 결정했고, 그 영향으로 UNAMIR의 힘은 더 약해졌다.

물론 벨기에 병사들이 죽은 건 비극이다. 하지만 르완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벨기에는 식민통치 때도 문제였고, 학살 때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나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는 떠난 뒤에도 나라를 망친다. 진짜 AS가 최악인 상품이다.

부룬디와 헷갈리지 말자

위 문단 중 멜키오 은다다예 이야기는 사실 부룬디 쪽 사건이다.

멜키오 은다다예는 르완다 대통령이 아니라 부룬디 대통령이었다. 그는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 선거로 집권한 후투계 대통령이었지만, 투치계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부룬디 내전을 악화시켰고, 르완다의 후투 극단주의자들에게도 "투치와 권력을 나누면 우리도 저렇게 당한다"는 공포 선전 재료가 되었다.

그러니까 은다다예 사건은 르완다 내전의 직접 사건은 아니지만, 르완다 주변 정세와 후투·투치 갈등을 더 불태운 사건으로 보면 된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둘 다 후투와 투치 문제가 있고, 둘 다 벨기에 식민통치를 겪었고, 둘 다 내전과 학살을 겪었다.

그래서 자꾸 섞인다. 근데 섞으면 역사 문서가 국밥이 아니라 잡탕찌개가 된다. 구분은 해두자.

호텔 르완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 내전 그 자체보다는 1994년 집단학살 시기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는 키갈리의 호텔 밀 콜린스에서 사람들을 보호한 인물로 알려졌다. 영화는 국제사회가 방치한 르완다의 참상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영화는 영화다.

실제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는 이후 논란도 많고, 르완다 정부와 루세사바기나의 관계도 매우 나빠졌다. 루세사바기나는 훗날 르완다 정부에 의해 테러 관련 혐의로 체포·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국제적 압박 속에 석방되었다.

그러니까 호텔 르완다는 입문용으로는 좋지만, 그걸 보고 르완다 현대사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영화 한 편으로 이해될 역사였으면 애초에 나라가 그렇게 터지지도 않았다.

이후 영향

르완다 내전과 집단학살의 후폭풍은 콩고까지 번졌다.

학살에 가담한 후투 극단주의자들과 수많은 난민들이 자이르, 지금의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무장세력이 재편되고, 르완다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콩고에 개입했다.

이게 제1차 콩고 전쟁, 제2차 콩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즉 르완다 내전은 단순히 르완다 한 나라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르완다에서 시작된 피난민과 무장세력 문제가 콩고라는 거대한 헬게이트에 들어가면서 중앙아프리카 전체가 흔들렸다.

콩고 전쟁은 아프리카의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졌다.

르완다 내전은 작은 나라의 전쟁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절대 작지 않았다.

평가

르완다 내전은 식민주의, 민족정치, 난민 문제, 독재, 선전, 국제사회의 무능이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다.

후투와 투치가 원래부터 서로 죽이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벨기에가 민족 구분을 행정적으로 박아넣고, 후투 정권이 투치를 밀어내고, 투치 난민들이 무장화되고, 독재정권이 권력을 지키려고 공포를 팔고, 국제사회가 방치하면서 일이 커졌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유럽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학살을 실행한 건 현지 극단주의자들이고, 선동한 것도 현지 권력자들이며, 칼을 든 것도 현지 사람들이었다. 벨기에는 불쏘시개를 만들었지만, 1994년에 실제로 사람을 죽인 자들의 책임은 따로 있다.

그러니까 르완다 내전은 이렇게 봐야 한다.

  • 식민주의가 구조를 망침
  • 독재정권이 갈등을 이용함
  • 난민 문제가 무장투쟁으로 번짐
  • 극단주의자들이 학살을 준비함
  • 국제사회가 사실상 방치함
  • 결과는 현대사 최악급 참사

그야말로 역사적 병신력의 종합선물세트다. 근데 선물상자 안에 들어있던 건 사람 목숨이었다.

요약

벨기에가 후투·투치 갈라치기 시스템 깔아놓고 튀고, 후투 정권은 권력 지키겠다고 투치 혐오 선동하고, 망명 투치들은 RPF 만들어 총 들고 돌아오고, 평화협정은 종이쪼가리 되고, 대통령 비행기 떨어지자 100일 학살 터지고, 유엔은 옆에서 회의하다가 나라 하나가 피바다가 된 사건.

기타

스트로매의 아버지가 이 전쟁 때문에 사망하셨다.


관련 문서

르완다 관련

주변국 및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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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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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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