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LOTTE Chemical)은 롯데그룹의 종합화학회사다. 1976년 호남석유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으며, 1979년 롯데그룹에 인수된 뒤 여수·대산·울산을 중심으로 몸집을 미친 듯이 불려왔다. 2012년 케이피케미칼을 흡수합병하면서 현재의 롯데케미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있으며, 국내에서는 여수국가산업단지, 대산석유화학단지, 울산 일대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 해외에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미국 등지에 생산기지를 갖고 있다.
주력사업은 에틸렌, 프로필렌,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에틸렌글리콜, 방향족 제품 같은 전통적인 석유화학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고기능성 합성수지, 자동차·가전용 첨단소재, 전지소재, 정밀화학, 수소에너지까지 이것저것 계속 붙였다.
쉽게 설명하면 기름에서 이것저것 뽑아내서 세상에 있는 플라스틱과 화학소재의 원료를 존나 많이 만드는 회사다.
롯데라는 이름 때문에 백화점에서 껌 팔고 과자 만드는 회사의 공업용 버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롯데케미칼은 롯데그룹 안에서도 사업규모와 투자금액이 상당히 큰 축에 속한다. 2025년 연결 매출은 약 18조 4,830억 원이었고, 2026년 1분기 기준 직원 수는 약 4,300명이다. 연결 자회사까지 합치면 실제 화학사업의 범위는 훨씬 넓다.
그리고 이 회사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호남석유화학으로 태어남 → 돈 벌어서 공장 증설함 → 남의 화학회사 계속 사들임 → 존나 커짐 → 2010년대에는 돈을 쓸어담음 → 중국이 공장을 미친 듯이 지음 → 2020년대에 갑자기 세상이 존나 빡세짐 → 이제는 자기가 키운 NCC를 다시 뜯어고치는 중.
역사
호남석유화학
롯데케미칼의 시작은 1976년 설립된 호남석유화학이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여천석유화학단지, 현재의 여수국가산업단지를 대규모 석유화학기지로 조성하고 있었다. 정유공장에서 나온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만들고, 다시 이를 원료로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 같은 각종 합성수지를 국내에서 생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호남석유화학은 이 과정에서 1976년 3월 설립됐다. 초기에는 일본 미쓰이계 화학회사와 영국 셸 등 해외기업의 기술을 도입해 공장을 건설했고, 1979년 HDPE·PP·EOG 등의 상업생산을 시작했다.
같은 해 롯데그룹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민영화가 완료됐다.
그래서 지금의 롯데케미칼 직원에게 “너네 회사 원래 호남석유화학이었지?” 라고 하면 아재력 테스트가 가능하다.
젊은 직원은 그냥 사내연혁에서 봤을 가능성이 높고, 오래 근무한 직원은 호남석유화학 로고 박힌 서류철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1980년대에는 공장 증설을 계속하면서 생산능력을 늘렸다. HDPE와 PP 설비가 추가됐고, 1986년에는 여수공장에 생산기술연구소를 세웠다. 1991년에는 주식을 상장했고, 1992년에는 자체 나프타분해시설인 NC 공장의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여기서 NC는 게임방이 아니라 Naphtha Cracker다.
석유화학회사에게 크래커는 거의 심장이다. 나프타를 존나 뜨겁게 가열해 분자를 깨부수고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뽑아낸다. 이걸 다시 다른 공장에 보내 PE, PP, EG 등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돈이 된다.
석유화학회사 직원들이 뉴스에서 유가보다도 에틸렌 스프레드, 나프타 가격, NCC 가동률같은 이상한 숫자에 민감한 이유가 이것이다.
공장을 사모으기 시작하다
1990년대까지 호남석유화학이 자체 공장을 키우는 방식으로 성장했다면 2000년대부터는 회사 인수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3년에는 구조조정 과정에 있던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는 데 참여했다.
현대석유화학이 가지고 있던 대산 생산시설을 확보하면서 호남석유화학은 여수에 이어 대산석유화학단지에도 대규모 생산거점을 갖게 됐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2004년에는 케이피케미칼을 인수했다.
케이피케미칼은 고합그룹의 석유화학부문에서 출발한 회사로, 울산에서 PX, PTA, PIA, PET 등 방향족 계열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호남석유화학은 채권단이 보유하던 주식 약 53%를 인수하면서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 두 번의 인수가 상당히 중요했다. 여수에서는 올레핀, 대산에서도 올레핀, 울산에서는 방향족 제품.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석유화학단지 세 곳에 생산시설을 깔아놓게 된 것이다.
화학공장 포켓몬 수집을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한번 맛 들인 M&A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이탄 인수
2010년 호남석유화학은 말레이시아의 대형 석유화학회사 타이탄케미칼을 인수했다.
인수 규모는 약 1조 5천억 원이었다.
당시 국내기업의 해외 M&A 가운데서도 상당히 큰 거래였으며, 타이탄 인수를 통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생산기반을 확보했다.
타이탄은 PE와 PP를 대규모로 생산하는 동남아시아의 주요 석유화학회사였다. 인수 이후 호남석유화학은 에틸렌 생산능력 약 247만 톤, PE 약 180만 톤, PP 약 138만 톤 규모로 확대되면서 아시아권에서 상당한 생산능력을 가진 회사로 올라섰다.
롯데 입장에서도 의미가 컸다. 롯데가 해외에서 마트와 백화점을 사들이던 시기에 화학부문에서는 호남석유화학이 “나는 공장을 사겠습니다” 하고 돌아다닌 것이다.
타이탄은 현재 롯데케미칼타이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롯데케미칼의 동남아 생산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탄생
2012년은 회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다.
호남석유화학은 이미 2004년부터 케이피케미칼의 최대주주였지만 두 회사는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다 2012년 케이피케미칼을 완전히 흡수합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회사는 이미 여수·대산·울산·말레이시아까지 돌아다니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름이 호남석유화학이었다.
해외에서 보면 Honam Petrochemical 인데 롯데 계열사인지도 잘 모르겠고, 호남지역 회사라는 느낌도 강했다.
그래서 36년 동안 사용했던 이름을 버리고 2012년 12월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꿨다. 케이피케미칼 합병도 동시에 완료됐다.
이때부터 지금의 롯데케미칼이 등장했다. 이름은 훨씬 평범해졌지만 회사는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호남석유화학 출신, KP케미칼 출신, 대산 쪽 현대석유화학 계보,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삼성 출신까지 들어오면서 회사 안에 여러 화학회사 DNA가 한꺼번에 섞이게 된다. 회사 이름은 하나인데 족보 까보면 대한민국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역사책이다.
삼성 화학사업까지 먹다
2015년에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롯데그룹이 삼성그룹의 화학사업 일부를 통째로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대상은
- 삼성SDI 케미칼 사업부문
- 삼성정밀화학
- 삼성BP화학
이었다.
거래 규모는 3조 원대였다.
2016년 인수가 완료되면서 삼성정밀화학은 롯데정밀화학, 삼성BP화학은 이후 롯데 계열로 편입됐고, 삼성SDI 케미칼 사업부문은 롯데첨단소재가 됐다.
특히 롯데첨단소재가 중요했다.
기존 롯데케미칼은 PE, PP, EG처럼 생산량 존나 많이 뽑아서 파는 기초화학이 강했는데, 롯데첨단소재는 ABS와 PC 등 자동차·가전·IT기기에 들어가는 고기능성 소재가 주력이었다.
그러니까 기존 회사가 원료 존나 많이 만드는 공장이었다면 삼성에서 가져온 사업은 좀 더 비싸고 까다로운 플라스틱 만드는 공장이었다.
2020년 롯데케미칼은 롯데첨단소재를 다시 흡수합병했다.
현재 롯데케미칼의 첨단소재사업이 여기에서 이어진다.
그래서 첨단소재사업 쪽에 가면 롯데케미칼인데 역사적으로 따지면 삼성 출신 사업장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 대기업 족보라는 게 원래 이렇다.
전성기
2010년대 중후반은 롯데케미칼 직원들이 회사 실적 자랑하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2015년 연결 매출은 약 11조 7천억 원이었는데 영업이익이 1조 6,111억 원이었다.
2016년에는 영업이익이 약 2조 5천억 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2017년에는 매출 약 15조 8,745억 원, 영업이익 약 2조 9,276억 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영업이익을 찍었다.
1분기에만 영업이익이 8,152억 원이었다.
화학회사 한 분기 영업이익이 웬만한 대기업 1년 영업이익보다 컸다.
당시에는 원료가격과 제품가격 사이의 스프레드가 좋았고 에틸렌·PE·PP 등 주요 제품 수익성이 매우 높았다. 공장만 정상적으로 돌리면 돈이 쌓이는 시기였다.
석유화학업계 최고의 재테크가 고장 안 내고 공장 계속 돌리기였던 시대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나프타 넣음 → 에틸렌 나옴 → 돈 나옴 수준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물론 실제 직원 입장에서는 공장이 돈 잘 번다고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공장 최대가동하려고 생산량 존나 밀어붙이고, 정기보수 일정 맞추고, 설비 이상 안 나게 관리하고, 안전사고 안 나게 뛰어다녀야 한다.
회사 실적 발표자료에는 안정적인 공장 운영이라는 한 줄로 나오지만, 공장 직원 관점에서 번역하면 니들이 안 자고 설비 봐서 벌었다에 가깝다.
미국 진출
롯데케미칼은 미국 셰일가스 혁명에도 올라탔다.
미국에서는 천연가스에서 나오는 값싼 에탄을 이용해 에틸렌을 만들 수 있는데, 나프타를 사용하는 한국 NCC보다 원료경쟁력이 좋을 수 있다.
롯데케미칼은 2010년대 중반 미국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에탄크래커와 EG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2019년 공장이 준공됐다.
총 투자비는 약 31억 달러였고, 에탄크래커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간 약 100만 톤이다.
한국 화학기업이 미국에 이런 규모의 석유화학단지를 직접 건설한 것은 처음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한국에서는 나프타, 미국에서는 에탄을 쓰면서 원료를 다변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석유화학 업계는 원료 1톤 가격 차이가 회사 전체 영업이익을 뒤집어버리는 동네라서 원료 다변화가 상당히 중요하다.
직원 입장에서는 아니 공장을 왜 지구 반대편까지 만들어 싶겠지만 경영진 입장에서는 원료가 싸면 간다.
인도네시아 LINE 프로젝트
동남아시아에서도 확장을 계속했다.
롯데케미칼은 기존 롯데케미칼타이탄의 인도네시아 사업을 확대하면서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인 LINE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LINE은 LOTTE Chemical Indonesia New Ethylene의 약자다.
인도네시아 반텐주 찔레곤 지역에 대규모 에틸렌 및 다운스트림 생산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오랜 기간 대규모 자금이 투입됐다.
2025년 11월 프로젝트가 준공됐다.
타이탄을 인수해 동남아 시장에 들어간 뒤 아예 현지에 대규모 신규 크래커까지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롯데케미칼 역사에서 돈 생기면 공장 짓고, 좋은 회사 보이면 사고, 산 회사 옆에 또 공장 짓는다라는 패턴이 보인다.
뭐 만드는 회사인가
롯데케미칼 홈페이지에 가면 제품 이름이
HDPE, LLDPE, LDPE, EVA, PP, PET, EO, EG, EOA, GE, MMA, PIA, BZ, TL, MX...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일반인은 여기서 뒤로가기를 누른다.
화학회사 직원은 여기서 가격과 스프레드를 본다.
에틸렌
석유화학의 쌀이라고 불린다.
나프타나 에탄을 분해해서 만들며 PE, EG, PVC 등 수많은 제품의 원료가 된다.
화학업계에서 쌀이라고 하는 이유는 존나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처럼 NCC를 가진 회사는 이 에틸렌을 얼마나 싸게 안정적으로 만드느냐가 회사 수익성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PE
폴리에틸렌.
비닐봉투, 포장재, 파이프, 각종 용기 등에 엄청나게 사용된다.
HDPE, LDPE, LLDPE 등 밀도와 구조에 따라 종류가 갈린다.
마트에서 비닐봉지 하나 집어들고 “이것도 석유화학의 산물입니다” 하면 아무도 안 궁금해하지만 사실이다.
PP
폴리프로필렌.
자동차부품, 식품용기, 생활용품, 섬유 등 안 들어가는 곳 찾기가 더 힘들다.
롯데케미칼의 핵심 제품 가운데 하나다.
EG
에틸렌글리콜.
PET와 폴리에스터 섬유 등의 원료다.
옷 한 벌 입고 생수병 들고 있으면 이미 석유화학회사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고 있는 셈이다.
PET
페트병의 그 PET가 맞다.
울산 계열 사업에서 오랫동안 생산해온 제품 가운데 하나다.
ABS와 PC
첨단소재사업의 대표적인 제품이다.
자동차 내장재, 가전제품 외장재, IT기기 등에 사용된다.
냉장고나 TV 뒤 플라스틱 보고 “싸구려 플라스틱 아니냐?”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난연성·내충격성·색상·열변형 등 온갖 조건을 맞춰야 한다.
자동차 회사가 “이 부품 영하 30도에서도 안 깨지고 열 받아도 안 변하고 햇빛 맞아도 색 안 빠지고 충돌해도 버텨주세요” 라고 주문하면 소재회사는 그걸 맞춰야 한다.
이게 범용 PE 한 종류 찍어내는 것과는 다른 스페셜티 소재의 세계다.
국내 사업장
여수
롯데케미칼의 뿌리 같은 사업장이다.
호남석유화학이 시작한 곳이 여수국가산업단지이기 때문에 회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생산거점이다.
NCC를 비롯해 PE·PP·EO·EG 등 각종 기초화학 설비가 몰려 있다.
여수산단 자체가 회사 하나의 공장이라기보다 여러 화학회사가 파이프로 연결된 거대한 유기체에 가깝기 때문에 롯데케미칼 공장도 주변 다른 회사와 원료와 제품을 주고받으며 돌아간다.
처음 산단에 온 사람은 파이프랙을 보고 “저게 다 어디로 가는 거냐?” 고 묻는다.
직원도 자기 담당공정 아니면 다 모를 가능성이 높다.
대산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석유화학단지에 있다.
2003년 현대석유화학 인수 과정에서 확보한 생산기반이 뿌리다.
NCC와 각종 다운스트림 설비를 운영해왔으며 여수와 함께 롯데케미칼 기초화학의 핵심거점이었다.
그런데 2020년대 석유화학 공급과잉이 심해지면서 대산공장은 회사 구조조정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2026년 정부가 승인한 석유화학 사업재편 계획에 따라 롯데케미칼 대산사업장의 일부를 분할해 HD현대케미칼과 통합 운영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계획에는 약 110만 톤 규모의 NCC 설비 가동중단도 포함됐다.
옛날에는 에틸렌 캐파 늘리면 장땡이었는데 이제는 "야 이거 너무 많다. 하나 끄자." 가 된 것이다.
석유화학 업황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울산
울산공장의 뿌리는 케이피케미칼이다.
PX, PIA, PET 등 방향족 계열 제품이 강하며 롯데가 2004년 KP케미칼을 인수하면서 편입됐다.
여수·대산이 NCC 중심의 올레핀 이미지가 강하다면 울산은 아로마틱 계열 색깔이 좀 더 강하다.
회사 조직도 안에서는 그냥 롯데케미칼 사업장이지만 역사 족보까지 파면
여수 = 호남석유화학
대산 = 현대석유화학 계통
울산 = 고합/KP케미칼 계통
이라는 서로 다른 뿌리가 나온다.
공장 다니는 사람들의 세계
롯데케미칼 같은 대형 석유화학회사에서 회사 다닌다는 말은 직무에 따라 생활이 완전히 달라진다.
본사에서 전략·재무·영업하는 사람은 롯데월드타워에서 엑셀과 PPT를 보고 있고, 연구원은 대전 등에서 소재를 만지고 있으며, 공장 엔지니어는 배관·펌프·압축기·반응기와 싸우고 있고, 생산직은 24시간 돌아가는 공정을 교대로 지킨다.
같은 사원증 차고 있는데 한쪽은 “EBITDA가...” 하고 있고 다른 쪽은 “P-203A 진동 왜 이러냐.” 하고 있는 회사다.
석유화학 공장은 한번 켰다가 필요할 때 컴퓨터처럼 껐다 켜는 물건이 아니다.
수백 도, 수십 기압에서 대량의 가연성 물질이 계속 흐르고 있고 공정 하나가 앞뒤 공정과 연결돼 있다.
그래서 설비 하나 멈추면 “아 저 펌프 고장났네” 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앞단 생산량 줄이고 → 뒷단 원료 부족하고 → 저장탱크 레벨 계산하고 → 제품 출하 일정 조정하고 → 고객사 전화하고
까지 줄줄이 일이 생긴다. 이런 회사에서 생산계획 담당자는 화학공학도 아니고 엑셀도 아니고 일종의 테트리스 장인이다.
정기보수
석유화학회사 직원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정기보수다.
영어로는 Turnaround, 줄여서 TA라고 많이 부른다.
공장은 평소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에 내부 설비를 제대로 뜯어 검사하려면 일정 기간 공장 전체 또는 일부를 멈춰야 한다. 이때 수년 동안 못 뜯었던 열교환기, 배관, 반응기, 압축기 등을 한꺼번에 검사하고 정비한다.
평소보다 인력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
협력업체와 외부 정비인력까지 수천 명이 투입될 수 있고 공장 주변 숙박업소가 꽉 차기도 한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계획된 기간 안에 안전하게 정비 완료하고 재가동한 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현장 입장에서는 몇 달 준비하고 몇 주 존나 바쁘고 재가동할 때 또 긴장하는 대형 이벤트다.
특히 공장 재가동 때는 온도·압력·유량을 하나씩 올려야 하기 때문에 그냥 전원버튼 누르면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재가동 직후 뭔가 하나 안 되면 모두의 표정이 굳는다.
안전
석유화학회사는 안전을 아무리 강조해도 과장이 아니다.
공장 안에 있는 물질 상당수가 불 잘 붙음, 압력 높음, 뜨거움, 유독함 중 하나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하면 네 개 다 해당된다.
그래서 일반 회사에서 안전교육이 계단에서 뛰지 마세요 정도라면 화학공장에서는 잘못하면 진짜로 큰 사고가 난다.
작업허가서, 가스측정, LOTO, 밀폐공간, 화기작업, 보호구 같은 절차가 귀찮아 보여도 전부 이유가 있다.
현장에서는 “이거 5분이면 하는데 허가서 받느라 30분 걸리네” 싶을 수 있지만 그 30분이 사람 목숨 살리는 절차일 수도 있다.
석유화학 공장은 생산량을 많이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 일 없이 어제처럼 오늘도 돌아가는 것 자체가 상당한 성과다.
다시 찾아온 지옥
문제는 2020년대에 들어오면서 옛날 방식의 석유화학 황금기가 끝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다.
과거 중국은 한국산 PE, PP, EG 등 석유화학제품을 엄청나게 사갔다.
한국 회사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만듦 → 배에 실음 → 중국에 팜 → 돈 범이라는 아름다운 구조가 있었다.
그런데 중국도 바보가 아니다.
자기들이 세계에서 플라스틱 제일 많이 쓰면서 언제까지 한국산 원료를 사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고 대규모 석유화학설비를 미친 듯이 깔았다.
중국의 자급률이 올라가고 신증설 물량이 시장에 쏟아지면서 아시아 석유화학제품 공급은 넘쳐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중동은 값싼 에탄을 쓰고, 미국은 셰일가스를 쓰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비싼 나프타 비중이 높다.
수요는 예전만큼 빨리 안 느는데 공장은 전 세계에서 계속 생겼다.
결국 제품 가격 - 원료 가격 = 우리가 먹을 돈이 좁아졌다.
2025년의 처참한 성적표
2025년 롯데케미칼 연결 매출액은 18조 4,830억 원이었다.
숫자만 보면 와 18조 회사 ㄷㄷ 싶다.
그런데 영업손실이 9,436억 원이었다. 2024년에도 영업손실 약 9,145억 원을 기록했기 때문에 2년 연속 큰 적자를 냈다.
매출 18조 하는데 9천억을 잃는 세계. 이게 범용 석유화학의 무서운 점이다.
물건을 존나 많이 팔아도 마진이 안 남으면 열심히 만들수록 매출은 큰데 돈은 없는 괴상한 일이 생긴다.
2017년에는 영업이익이 2조 9천억 원이었는데 8년 뒤에는 영업손실이 9천억 원대가 됐다.
같은 회사 맞다.
이래서 화학회사는 업황을 탄다는 말이 나온다.
공장 직원들이 갑자기 화학을 못하게 된 것도 아니고, 설비가 하루아침에 병신이 된 것도 아니다.
세상에 같은 물건 만드는 공장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구조조정
결국 롯데케미칼도 존버하면 언젠가 다시 2017년 오겠지만 외칠 수 없게 됐다.
2025~2026년에는 범용 석유화학 비중을 줄이고 공장과 사업을 재편하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첫 번째 큰 변화가 대산이다.
2026년 2월 정부는 롯데케미칼·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이 제출한 석유화학 사업재편계획을 승인했다. 롯데케미칼 대산사업장을 분할한 뒤 현대케미칼과 통합하고, 중복되는 설비를 줄여 효율성을 높이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약 110만 톤 규모 롯데케미칼 NCC 설비의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여수다.
2026년 7월에는 롯데케미칼, 여천NCC, 한화솔루션, DL케미칼이 참여하는 여수지역 사업재편계획도 정부 승인을 받았다.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의 NCC와 PE·PP 등 기초소재 사업 일부를 물적분할해 여천NCC와 통합하는 방향이다.
즉 롯데케미칼은 자기 회사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여수 기초화학사업까지 구조를 다시 뜯어고치는 중이다.
과거에는 캐파 증설! 이라고 써야 임원이 좋아했다면, 2020년대 중반에는 캐파 합리화! 라고 써야 한다.
2026년 반등
그래도 회사가 계속 적자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26년 1분기 롯데케미칼은 연결 영업이익 약 740억 원을 기록하며 흑자전환했고, 2분기에는 매출 약 5조 6,864억 원, 영업이익 약 1,101억 원을 기록했다.
2개 분기 연속 흑자다.
회사는 공장 운영 최적화, 범용사업 재편, 고부가 소재 확대, 비핵심자산 정리 등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다만 두 분기 흑자 = 석유화학 불황 끝이라고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중국 공급과잉과 원료경쟁력 문제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일단 피는 멎었는데 이제 체질개선 해야 함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하다.
전지소재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만 붙잡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전지소재에도 상당히 투자했다.
2023년에는 동박업체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했고 회사 이름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로 변경했다.
동박은 리튬이온 배터리 음극의 집전체로 사용되는 얇은 구리막이다.
그냥 구리 포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배터리용은 두께와 표면품질, 강도 등을 매우 까다롭게 관리해야 한다.
롯데는 이를 통해 석유화학 → 자동차 소재 → 배터리 소재로 사업영역을 넓히려 했다.
현재 롯데케미칼은 리튬이온배터리용 소재와 차세대 배터리 소재, 배터리 외장재 등을 미래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양극박 공장 건설도 진행 중이다.
다만 전기차 시장 역시 미래산업이라고 투자하면 무조건 돈 벌겠지 라고 할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어서 이것도 결국 수익성을 증명해야 한다.
정밀화학
롯데정밀화학도 롯데 화학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신은 삼성정밀화학이다.
가성소다, ECH, 암모니아, 셀룰로스계 고부가 소재 등을 다룬다.
범용 PE·PP와 비교하면 제품 성격과 시장구조가 꽤 다르기 때문에 기초석유화학 업황이 나쁠 때 포트폴리오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롯데케미칼은 삼성 인수 당시 확보한 지분을 이후 추가로 사들이며 지배력을 높였고, 2022년부터 롯데정밀화학을 연결 종속기업으로 편입했다.
롯데케미칼 홈페이지에서 사업영역에 정밀화학이 같이 뜨는 이유가 이쪽이다.
수소
롯데케미칼은 수소에너지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석유화학공장은 이미 공정과정에서 수소를 대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수소사업과 전혀 생뚱맞은 회사는 아니다.
회사는 수소 생산·유통·활용과 발전사업 등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수소연료전지 발전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회사 홍보자료만 보면 화석연료로 큰 회사가 수소로 지구를 구하러 갑니다 느낌이 조금 있는데, 실제로 기존 석유화학 설비와 인프라를 에너지전환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결국 문제는 늘 같다. 돈이 되면서 친환경이어야 한다. 기업은 환경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롯데라는 이름과 화학회사
일반 소비자에게 롯데는
- 롯데백화점
- 롯데마트
- 롯데리아
- 롯데월드
- 빼빼로
- 자이언츠
같은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그래서 롯데케미칼이 그룹 핵심 계열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과자회사 옆에 무슨 화학회사 하나 있겠지 생각하기 쉽다.
현실은 반대다.
석유화학은 경기 좋을 때 영업이익 단위가 조 단위로 올라가며 대규모 설비투자 한 번에 몇 조 원씩 들어가는 사업이다.
2017년 롯데케미칼 영업이익 2조 9천억 원은 당시 롯데그룹 전체에서도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껌 팔아서 번 돈보다 에틸렌 팔아서 번 돈이 훨씬 무섭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롯데그룹이 유통과 식품만 하는 회사라고 생각하면 그룹 절반 정도밖에 못 본 것이다.
사내에서 제품 이름을 듣다 보면
석유화학회사의 재미있는 점은 직원끼리는 너무 당연하게 쓰는 말이 외부인에게는 거의 암호라는 것이다.
NCC TA 후 PE 가동률 올리고 EG 스프레드 보면서 feed 조정한다.
일반인에게는 외계어지만, 회사 직원에게는 대충 말이 된다.
화학약자들이 대부분 영문 이름의 앞글자라 처음 들어오면 제품 이름 외우는 것부터 일이다.
PP는 폴리프로필렌,
PE는 폴리에틸렌,
HDPE는 고밀도 폴리에틸렌,
LLDPE는 선형저밀도 폴리에틸렌,
EG는 에틸렌글리콜,
EO는 에틸렌옥사이드,
BD는 부타디엔,
BZ는 벤젠,
PX는 파라자일렌,
PIA는 고순도 이소프탈산...
신입사원이 화학 전공 아니면 처음엔
이게 회사 조직 약자인지 제품인지 설비인지 구분부터 해야 한다.
몇 년 지나면 자기도 일반인한테 “그거 EG 쪽이라...” 하고 말해놓고 상대가 못 알아듣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업황충들의 회사
롯데케미칼 같은 범용 석유화학회사 실적을 이해하려면 직원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만 보면 안 된다.
유가,
나프타 가격,
에탄 가격,
중국 가동률,
중국 신규증설,
해상운임,
환율,
제품 스프레드,
정기보수,
경기,
전쟁
같은 것이 다 영향을 준다.
공장에서는 똑같이 PE를 존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작년에는 돈이 되고 올해는 적자가 날 수도 있다.
그래서 석유화학 투자자들은 “업황 턴어라운드 옵니다” 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문제는 그 턴어라운드가 언제 오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회사 직원도 모른다.
애널리스트도 모른다.
중국이 공장 더 지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 같이 그래프 그려놓고 예상한다.
여담
- 1976년 호남석유화학으로 설립됐다.
- 1979년 롯데그룹이 인수했다.
- 1991년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종목코드는 011170이다.
- 2012년 케이피케미칼을 흡수합병하고 회사 이름을 롯데케미칼로 바꿨다.
- 직원 중에는 아직도 과거 조직의 흔적 때문에 "호남", "KP", "첨단" 같은 계보를 의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회사가 M&A를 워낙 많이 했다.
- 국내 주요 생산거점은 여수·대산·울산이다. 이것만 외워도 회사 역사 절반은 이해한다.
- 2010년 말레이시아 타이탄을 약 1조 5천억 원 규모로 인수했다.
- 2016년 삼성 화학계열 인수로 삼성SDI 케미칼사업이 롯데첨단소재가 됐다.
- 롯데첨단소재는 2020년 롯데케미칼에 합병됐다.
- 2019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에탄크래커가 준공됐다.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간 약 100만 톤이다.
- 2023년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로 변경했다.
- 2025년 인도네시아 LINE 프로젝트가 준공됐다.
- 2017년 영업이익은 약 2조 9,276억 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였다.
- 2025년 영업손실은 약 9,436억 원이었다. 8년 사이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했다.
- 2026년 1·2분기는 다시 흑자를 기록했다.
- 2026년 현재 대산과 여수에서 범용 기초석유화학 사업의 대규모 재편이 진행 중이다.
- 여수에서 시작한 회사가 수십 년 동안 증설과 M&A를 반복한 뒤, 2026년에는 다시 여수 NCC를 다른 회사와 합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기업 역사라는 게 참 돌고 돈다.
- 화학공장은 멀리서 보면 밤에 조명 켜져서 사이버펑크 도시처럼 멋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직원은 야경 감상할 정신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 공장 플레어에서 불이 올라온다고 무조건 공장 터진 것은 아니다. 공정에서 발생한 가스를 안전하게 연소시키는 시설이다. 물론 평소보다 존나 크게 타고 있으면 안에서 누군가는 매우 바쁠 수 있다.
- 화학회사에서 안전하게 정상가동은 별것 아닌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실적 중 하나다.
- 사무직은 실적발표에서 가동률을 보고, 현장직은 가동률을 실제로 만든다.
- 석유화학업황이 좋을 때는 "공장이 돈을 찍는다"고 하고, 나쁠 때는 "공장이 현금을 태운다"고 한다. 같은 공장이다.
- PE와 PP는 인류가 플라스틱을 쓰는 한 사라질 제품은 아니지만, 문제는 누가 가장 싸게 만드냐다. 중국·중동·미국과 싸워야 하는 국내 NCC 업체들의 고민도 정확히 여기에 있다.
- 롯데케미칼 다닌다고 하면 일반인은 롯데월드 할인부터 물어볼 수도 있지만 본인은 나프타 가격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 그룹 홈페이지에서는 롯데케미칼을 "글로벌 화학기업"이라고 설명한다. 직원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직무와 그날 공장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