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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엔료
井上円了
생년월일 1858년 3월 18일
사망일 1919년 6월 5일
국적 일본 제국
출생지 에치고국 산토군 우라촌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학력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
직업 철학자, 교육자, 불교학자, 저술가
경력 도요대학의 전신 철학관 창립
철학회 창립
요괴연구회 창립
교호쿠 중학교 창립
철학당 설립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년 3월 18일 ~ 1919년 6월 5일)는 일본의 철학자, 교육자, 불교학자이자 도요대학의 전신인 철학관을 창립한 인물이다.

일본 근대 철학과 교육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조금 엉뚱한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요괴박사.

다만 이 별명만 보고 요괴를 좋아해서 전국을 돌아다닌 괴담 수집가 정도로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다. 엔료가 요괴를 연구한 이유는 귀신과 미신을 믿으려고 한 게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귀신과 미신을 믿는지를 철학과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코쿠리상, 유령, 도깨비불, 빙의, 점술처럼 당시 사람들이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믿던 것들을 조사하고 이를 착각, 심리현상, 자연현상, 사기 등으로 분류해 설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만든 것이 이른바 요괴학(妖怪学)이다.

그렇다고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을 무조건 "다 구라"라고 때려박은 단순한 계몽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짜 요괴와 인간의 지식으로 아직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봤다.

철학자, 불교개혁론자, 교육자, 세계여행가, 요괴연구자까지 한 사람이 다 하고 다닌 상당히 독특한 인간이다.

생애

이노우에 엔료는 1858년 에치고국 산토군 우라촌, 현재의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정토진종 오타니파의 사찰인 지코지(慈光寺)였고 엔료는 그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웠고 13세에는 불교 승려로 득도했다. 이후 당시 일본에 빠르게 들어오던 서양학문에도 관심을 가져 나가오카의 서양식 학교에서 영어와 서양사, 지리 등을 공부했다.

그의 성장기는 일본이 문자 그대로 뒤집어지던 시기였다.

엔료가 열 살이던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고, 일본 사회에는 서양의 정치제도와 과학, 종교, 철학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불교를 배웠는데 조금 지나니 학교에서는 영어로 서양사를 배우고, 다시 대학에 가서는 서양철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이후 엔료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줬다.

서양문명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 서양철학을 이용해 동양사상을 다시 해석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쿄대학과 철학

1877년 엔료는 교토 히가시혼간지가 운영하던 교사교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히가시혼간지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올라갔다.

도쿄대학 예비문을 거쳐 1881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철학과의 제1기 입학생은 엔료 혼자였다.

대학에서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어려서부터 배워온 불교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엔료가 내린 결론은 꽤 단순했다.

“모든 학문의 기초에는 철학이 있다.”

그에게 철학은 전문 철학자 몇 명이 책상에 앉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사물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동시에 엔료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유행하던 극단적인 서구화에도 비판적이었다.

서양의 과학과 학문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동양이 가진 사상까지 통째로 버릴 이유는 없다고 봤다.

특히 불교 안에는 서양철학과 비교해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철학적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1885년 도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철학관과 도요대학

1887년, 엔료는 29세의 나이에 사립 철학관을 설립했다.

현재 도요대학의 전신이다.

당시 철학관의 목표는 단순히 철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정규 대학에 들어갈 시간이 없는 사람도 철학과 여러 학문을 배울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철학관에서는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종교학 등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더 특이한 것은 학교에 직접 다닐 수 없는 지방 학생들을 위해 관외원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강의록을 받아 집에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통신교육이었다.

제도를 시작한 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1,800명이 넘는 관외원이 참여했다.

또 일요일에는 일반인을 위한 공개강의를 열었다.

1880년대 일본에서 이미 통신교육 + 공개강좌를 돌리고 있었던 셈이다.

철학관은 이후 철학관대학으로 발전했고 1906년 사립 도요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 도요대학은 엔료를 대학의 창립자로 기념하고 있으며, 대학의 교육이념에도 그의 철학관이 강하게 남아 있다.

요괴박사

엔료가 현재까지도 유명한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요괴 연구다.

1890년대 일본에서는 근대 과학과 교육이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귀신, 점술, 주술, 빙의, 코쿠리상 등 다양한 미신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엔료는 이런 현상을 그냥 “미개해서 그렇다” 라고 욕하고 끝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이런 현상을 경험하고 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직접 연구했다.

1893년에는 요괴연구회를 만들었고, 이후 전국에서 괴이현상 사례를 수집하면서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그 결과물이 대표작 《요괴학강의》다.

책의 분량만 해도 여러 권에 이르는 대작이다.

엔료에게 요괴란 단순히 일본 전통 괴물만 의미하지 않았다.

유령, 빙의, 심령현상, 점술, 기이한 꿈, 기적, 도깨비불, 이상한 소리처럼 사람들이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현상을 포함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철학, 심리학, 물리학, 생리학 등 당시의 여러 학문을 이용해 설명하려 했다.

코쿠리상

엔료가 특히 적극적으로 파고든 것이 코쿠리상이었다.

코쿠리상은 여러 사람이 손가락을 판 위에 올려놓고 질문하면 판이나 동전이 저절로 움직여 답을 알려준다는 놀이로, 서양의 테이블 터닝이나 위저보드와 비슷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실제 영혼이 판을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엔료는 이를 초자연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아주 약하게 손을 움직이는 심리·생리적 작용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말하는 관념운동 효과와 비슷한 설명이다.

엔료 입장에서는 귀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인간 본인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 때문에 엔료는 요괴를 연구했으면서도 정작 일본의 요괴와 미신을 박살내러 다닌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가짜 요괴와 진짜 요괴

그렇다고 엔료가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을 무조건 부정한 것은 아니다.

엔료는 요괴를 여러 종류로 분류했다.

착각이나 심리현상, 자연현상, 사기 등으로 설명 가능한 것은 이른바 가괴(假怪)로 보았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곳의 나뭇가지를 귀신으로 착각하거나, 자연적인 불빛을 도깨비불이라고 믿거나, 사람이 일부러 속임수를 쓴 경우 등이다.

이런 것들은 조사하고 원인을 밝히면 사라지는 요괴다.

반면 당시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도 존재할 수 있다고 봤다.

이를 진괴(真怪)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엔료가 “과학으로 설명 못 했으니 귀신이다” 라고 말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설명 못 한다고 아무거나 귀신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는 태도에 가까웠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상태로 남겨두고 계속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엔료의 요괴학은 단순한 미신타파 운동을 넘어 일본 근대의 과학적·합리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불교

엔료는 승려 집안 출신이었고 불교 연구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전통 불교계를 무조건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서구화와 함께 기독교가 들어왔고, 한편으로는 불교가 낡고 비합리적인 종교라는 비판도 강했다.

엔료는 이에 대해 불교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해 근대사회에서도 의미가 있는 사상으로 만들려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불교활론》 등이 있다.

그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오히려 불교 속에도 오랜 철학적 전통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불교 안에 남아 있던 미신과 비합리적인 관행은 비판했다.

그러니까 불교는 살려야 되는데 미신은 좀 치우자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엔료의 활동은 근대 일본 불교가 서양철학과 과학에 대응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당

엔료는 도쿄 나카노에 철학당을 만들었다.

현재의 철학당공원이다.

1904년 개설된 철학당에는 엔료가 중요하게 생각한 동서양의 철학자들을 상징하는 건물과 시설이 만들어졌다.

특히 엔료는

사성(四聖)으로 선정했다.

불교, 유교, 고대 그리스 철학, 근대 독일철학에서 한 명씩 뽑은 셈이다.

엔료의 머릿속 세계관이 대충 어떤 모양이었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동서양 철학자 올스타전 같은 곳을 실제 공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철학당 내부에는 철학과 종교, 미신, 인간의 정신세계를 소재로 한 독특한 이름의 건물과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현재도 도쿄도 나카노구의 철학당공원으로 남아 있다.

전국 순회강연

엔료는 대학 안에서만 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하기 시작했다.

철도망조차 지금처럼 완성되지 않은 시대에 일본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철학, 교육, 종교, 윤리 등을 강의했다.

강연 대상도 대학생이나 지식인만이 아니었다.

일반 시민과 지방 주민에게도 철학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엔료에게 철학은 어려운 말 존나 쓰면서 철학자들끼리 싸우는 학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이상한지를 판단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래서 학교교육뿐 아니라 통신교육, 공개강의, 전국순회강연을 동시에 진행했다.

생애 동안 방문한 지역과 강연 횟수가 워낙 많아 도요대학에서는 엔료를 여행하는 철학자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해외여행

엔료는 해외에도 상당히 많이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비행기도 없고 해외여행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는데 세 차례에 걸쳐 장기간 해외를 방문했다.

첫 번째 해외시찰은 1888년부터 1889년까지였으며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두 번째는 1902년부터 1903년, 세 번째는 1911년부터 1912년에 이루어졌다.

해외에서는 대학과 교육기관, 종교시설, 사회제도 등을 살펴봤다.

엔료가 해외여행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도 단순 관광은 아니었다.

서양을 직접 보고 배워야 일본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서양문명을 그대로 복사하기보다는 동양과 일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철학관 사건

1902년에는 이른바 철학관 사건이 발생했다.

철학관의 윤리학 시험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되었고, 학생의 답안과 학교의 교육방침을 둘러싸고 문부성이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철학관은 졸업생에게 주어지던 중등학교 교원 무시험 검정 특전을 박탈당했다.

학교 입장에서는 상당한 타격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국가가 사립교육과 윤리교육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엔료는 이후에도 학교 운영을 계속했지만 1906년 철학관대학 학장과 교호쿠 중학교 교장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는 전국순회강연과 사회교육 활동에 더욱 집중했다.

사망

1919년 엔료는 중국을 방문해 강연활동을 하고 있었다.

6월 5일 다롄에서 강연 중 쓰러졌고 그대로 사망했다.

향년 61세.

죽기 직전까지도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고 있었던 셈이다.

평생 학교 만들고 → 책 쓰고 → 전국 돌아다니며 강연하고 → 해외 돌아다니고 → 요괴 조사하고를 반복하다가 마지막도 해외 강연 도중 끝났다.

그의 사망 소식은 해외 통신사를 통해 외국에도 전해졌다.

평가

이노우에 엔료는 일본 근대교육과 철학사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가장 큰 업적은 도요대학을 만든 것이지만 그의 활동범위는 대학 설립자라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서양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동시에 동양철학과 불교의 가치를 재평가했고, 대학에 올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통신교육을 만들었으며,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반인을 상대로 철학을 강의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귀신이라고 부르던 현상까지 “일단 한번 조사해봅시다” 하고 연구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요괴학은 현대의 민속학과 심리학, 종교학, 과학사 연구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엔료의 과학적 설명 가운데 시대적 한계가 있는 부분도 당연히 존재한다. 19세기 말의 과학지식을 가지고 연구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태도였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바로 귀신이라고 결론 내리지 말고 원인부터 조사한다.

이 사고방식 자체가 엔료가 평생 강조했던 철학적 태도와 연결된다.

여담

  • 도요대학의 창립자다.
  • 일본에서는 요괴박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 그렇지만 요괴를 믿은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요괴를 과학적으로 해체하려 했던 사람에 가깝다.
  • 1893년 요괴연구회를 만들었다.
  •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가 《요괴학강의》다.
  • 코쿠리상도 연구했다. 귀신의 힘보다는 참가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움직임으로 설명했다.
  • 전통적인 괴담뿐 아니라 최면, 꿈, 점술, 심령현상 등 당시 사람들이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던 것을 굉장히 폭넓게 연구했다.
  • 불교 승려 집안에서 태어나 실제로 득도까지 했지만, 불교 내부의 미신적 요소에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 동서양 철학을 종합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철학당에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이마누엘 칸트를 함께 모셔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현재 도쿄 나카노구에 있는 철학당공원은 엔료가 만든 철학 교육시설에서 출발했다.
  • 29세에 철학관을 만들었다. 현재 기준으로 생각해도 상당히 젊은 나이에 대학의 전신을 만든 것이다.
  • 철학관에서는 지방 사람들을 위한 관외원 제도를 운영했다. 오늘날의 통신교육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 첫해부터 전국에서 상당한 수의 학생이 몰렸고, 설립 다음 해에는 관외원이 1,800명을 넘어섰다.
  • 해외시찰을 세 차례나 했다. 당시 일본에서 세계를 여러 차례 돌아다닌 민간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 마지막까지 순회강연을 계속했고 1919년 중국 다롄에서 강연 도중 쓰러져 사망했다.
  • 이름의 일본어 발음은 いのうえ えんりょう이다.
  • 한자는 과거 표기인 井上圓了로 적기도 한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