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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영화(ピンク映画, Pink film)는 일본에서 1960년대 초부터 발전한 저예산 성인영화 계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어로는 핑크에이가(ピンク映画)라고 부르며, 일반적으로 짧은 러닝타임과 적은 제작비, 제한된 촬영기간을 기반으로 성적 소재와 노출을 전면에 내세운 극장용 영화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냥 극장에서 틀어주는 야동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곤란하다. 실제 핑크 영화 가운데 상당수는 섹스 장면 사이에 범죄극, 멜로드라마, 정치극, 실험영화, 사회비판을 존나 진지하게 욱여넣었다. 제작사는 관객을 끌려고 성적 장면을 요구했는데 감독들은 그 조건만 채우면 나머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돈 없는 젊은 감독들의 실험장이 되는 기묘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 중반에는 일본 전체 영화 제작량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이런 저예산 에로덕션·핑크 영화가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1]

와카마츠 코지, 아다치 마사오 등 일본 영화사와 정치영화에서 중요한 감독들도 이 장르를 거쳐갔으며, 이후 대형 스튜디오 닛카츠가 만든 로망 포르노와 함께 일본 성인영화사의 중요한 계보로 취급된다.

명칭

'핑크 영화'라는 이름은 장르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제작사들이 공식적으로 붙인 명칭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에로덕션(エロダクション, eroduction) 같은 표현이 사용됐다. 에로틱(erotic)과 프로덕션(production)을 합친 말이다.

이후 언론과 업계에서 핑크 영화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면서 정착했다.

영어권에서는 Pink film,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Pinku eiga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핑크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성적이거나 음란한 것을 암시하는 색깔로 자주 사용되던 데서 나온 표현이다.

시작

일반적으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핑크 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은 1962년 고바야시 사토루가 감독한 《육체의 시장》(肉体の市場, Flesh Market)이다.[2]

1962년 2월 27일 도쿄 우에노의 오쿠라 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일본 상업영화 기준으로 상당히 노골적인 여성 누드 장면이 등장했는데, 개봉한 지 이틀 만에 도쿄 경찰이 영사본과 네거티브를 압수했다.[2]

제작진은 남아 있던 촬영분과 사용하지 않은 필름을 다시 이어붙여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한 수정판을 만들었다.

그런데 경찰이 필름을 압수했다는 뉴스가 오히려 기가 막힌 홍보가 됐다.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야하길래 경찰이 필름까지 뺏어갔냐며 몰려들었고 영화는 흥행했다.

등장 배경

핑크 영화가 갑자기 엄청나게 늘어난 데에는 당시 일본 영화산업의 위기가 있었다.

1950년대 일본 영화산업은 전성기를 맞았지만 1960년대 들어 텔레비전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극장 관객이 급감했다.

사람들이 집에서 공짜로 TV를 보기 시작하니 동네 극장들이 존나게 망하기 시작했다.

대형 영화사들도 제작편수를 줄였고 지방의 작은 극장들은 싸게 구입해서 여러 편을 연속 상영할 수 있는 영화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 핑크 영화였다.

제작비가 싸고 러닝타임이 짧으며, 유명 배우나 대규모 세트가 없어도 성인 관객을 일정하게 끌어올 수 있었다.

영화 한 편에 몇 달씩 매달리기보다 일주일 남짓 촬영해서 빠르게 다음 작품을 만들어내는 산업구조가 형성됐다.

특징

저예산

핑크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단 돈이 없다는 것이다.

대형 스튜디오 영화와 비교하면 제작비가 매우 낮았고 촬영기간 역시 며칠에서 1~2주 정도인 경우가 많았다.

로케이션도 돈 안 드는 실제 거리나 아파트, 여관 등을 활용했고 출연진과 제작진 규모도 작았다.

덕분에 정상적인 영화제작 방식이라면 몇 달 걸릴 일을 존나 빨리 끝내야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환경 때문에 젊은 감독들이 카메라 움직임이나 편집, 이야기 구조를 막 실험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차피 회사 입장에서는 요구하는 노출 장면과 러닝타임만 채우고 극장에 납품하면 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감독이 이상한 정치 이야기를 하든 초현실주의 연출을 하든 상대적으로 간섭이 적었다.

짧은 러닝타임

대부분의 작품은 일반 극영화보다 짧았다.

약 60~70분 정도인 작품이 많았으며 여러 편을 묶어 동시상영하는 경우가 흔했다.

성인전용 극장에서는 핑크 영화 세 편을 연달아 상영하는 방식도 일반적이었다.

성적 장면

당연히 성적 묘사는 장르의 필수요소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영화검열 때문에 성기 등의 직접적인 표현은 불가능했고, 성행위 역시 성인비디오처럼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 각도, 그림자, 소품, 배우의 신체 일부 등을 이용해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했다.

이 제약이 오히려 핑크 영화 특유의 시각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도 있다.

장르 혼합

핑크 영화는 성적 소재만 들어가면 나머지 장르는 거의 뭐든지 가능했다.

  • 범죄영화
  • 야쿠자 영화
  • 멜로드라마
  • 공포영화
  • 정치영화
  • 사회고발물
  • 코미디
  • 실험영화
  • 스릴러

그래서 제목과 포스터만 보면 그냥 야한 영화인데 막상 틀어보면 갑자기 학생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폭력을 논하는 경우도 있었다.

와카마츠 코지

와카마츠 코지는 핑크 영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하나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저예산 핑크 영화를 만들었으며 성과 폭력뿐 아니라 일본의 좌익운동, 국가권력, 전쟁, 억압 등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집어넣었다.

1965년 《벽 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 Secrets Behind the Wall)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3]

문제는 당시 일본 영화업계가 이걸 존나 싫어했다는 것이다.

해외 영화제에 내보낼 만한 제대로 된 일본 영화를 두고 왜 성인극장에서 상영하는 저예산 핑크 영화를 국제영화제에 갖다 내놓느냐는 반발이었다.

하지만 이후 와카마츠는 일본 독립영화사의 대표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됐다.

그의 작품에서는 성적 장면이 단순한 서비스 장면이라기보다 권력관계나 폭력, 정치적 억압을 표현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다치 마사오

아다치 마사오 역시 핑크 영화와 일본 전위영화 양쪽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니혼대학 영화연구회 등 일본 전위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와카마츠 프로덕션에 참여했고 여러 핑크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4]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와 극좌정치운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일본 영화계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핑크 영화라는 상업적 포맷과 1960년대 일본의 급진정치가 실제로 만났던 대표적인 사례다.

전성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는 핑크 영화의 전성기였다.

텔레비전 때문에 일반 영화관 관객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성인영화 시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관객층을 유지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핑크 영화를 포함한 저예산 에로덕션이 일본 영화 제작량의 거의 절반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도 있다.[1]

성인영화 전문극장이 전국적으로 운영됐고 여러 독립 제작사가 일정한 제작라인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한 해에 수백 편 규모의 핑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제작사

핑크 영화는 주로 독립 제작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회사들이 관련돼 있다.

  • 오쿠라 영화
  • 신토호 영화
  • 고쿠에이
  • 와카마츠 프로덕션
  • OP 영화

오쿠라 영화는 일본 핑크 영화 초기부터 관련 작품을 제작한 대표적인 회사이며, 우에노의 오쿠라 극장도 운영했다.

OP 영화 역시 이후 핑크 영화 제작과 배급을 지속해온 회사다.

닛카츠 로망 포르노

핑크 영화와 자주 혼동되는 것이 닛카츠 로망 포르노다.

둘은 비슷하지만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니다.

핑크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러 독립 제작사가 만든 저예산 성인영화 장르 전체를 의미한다.

반면 로망 포르노는 대형 영화사 닛카츠가 1971년부터 운영한 특정 성인영화 제작 브랜드다.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의 성장과 관객 감소로 닛카츠의 경영이 크게 악화되자 회사는 성인영화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5]

1971년 로망 포르노 제작라인을 시작했고 이후 1,000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다.[6]

로망 포르노 역시 제작비와 촬영기간이 제한돼 있었지만 독립 핑크 영화보다 대형 스튜디오의 인력과 장비를 사용할 수 있어 전반적으로 제작수준이 높았다.

구분 핑크 영화 로망 포르노
시작 1962년경 1971년
제작 독립 제작사 중심 닛카츠
제작비 매우 낮음 상대적으로 높음
상영 성인영화 전문극장 중심 닛카츠 극장망
성격 포괄적인 장르 특정 스튜디오 브랜드

도에이 핑키 바이올런스

또 비슷한 용어로 핑키 바이올런스가 있다.

1970년대 도에이가 제작한 여성 액션·범죄영화 계열을 주로 가리킨다.

여성 주인공, 폭력, 범죄, 에로티시즘을 섞은 영화로 스케반이나 여성 야쿠자 캐릭터가 자주 등장했다.

핑크 영화와 겹치는 요소가 상당히 많지만 일반적인 독립 핑크 영화와는 별개의 상업영화 계열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검열

일본 핑크 영화 역사에서 검열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서는 형법 제175조에 따라 음란물 배포가 제한됐으며 영화 역시 관련 심사를 받아야 했다.

성기나 음모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래서 감독들은 중요한 부분을 프레임 밖으로 빼거나 물건으로 가리거나 촬영각도를 조절하는 식으로 검열을 피했다.

핑크 영화 감독들은 이런 제한 속에서 얼마나 성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지를 계속 실험했다.

단순히 야하게 찍는 것뿐만 아니라 검열을 피해 표현하는 기술 자체가 연출 스타일이 됐다.

표현의 자유 논쟁

핑크 영화는 일본의 표현의 자유 문제와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1965년 다케치 데쓰지의 《검은 눈》(黒い雪)은 외설 혐의로 감독이 체포되면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예술에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법정과 언론에서 논쟁됐다.

1970년대에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 더욱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다만 《감각의 제국》은 일반적인 핑크 영화라고 분류하기에는 제작방식과 목적이 상당히 다르다.

오시마 자신도 당시 닛카츠 로망 포르노 등을 보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제 성행위를 촬영하고 이를 정치적·예술적 표현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기존 핑크 영화의 소프트코어 체계와는 다른 작품이었다.[7]

감독의 등용문

핑크 영화가 일본 영화사에서 의외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돈은 없는데 영화는 찍고 싶은 젊은 감독들에게 핑크 영화는 가장 현실적인 입문로 중 하나였다.

대형 영화사는 신입 감독에게 장편영화를 맡기지 않았지만 핑크 영화 제작사는 적은 돈으로 빨리 찍을 수 있는 감독을 계속 필요로 했다.

제작사가 요구하는 일정량의 성적 장면만 넣으면 이야기나 연출에 상당한 자유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감독 입장에서는 계약상 필요한 장면을 찍은 다음 남은 러닝타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식도 가능했다.

이런 환경에서 실력을 쌓은 감독들이 이후 일반 극영화로 진출하기도 했다.

핑크 영화가 단순한 성인영화 산업이 아니라 일본 독립영화의 인력양성소 역할까지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8]

예술영화와의 경계

핑크 영화 중 일부가 영화평론가나 영화제에서 재평가되면서 장르와 예술영화의 경계도 상당히 애매해졌다.

예를 들어 와카마츠 코지 작품은 노출과 성적 소재만 보면 전형적인 핑크 영화인데 내용은 일본 좌익운동, 전쟁책임, 국가폭력 등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1967년 야마토야 아츠시의 《황야의 다치와이프》 역시 에로티시즘과 야쿠자 범죄극, 초현실주의적 영상을 섞은 작품으로 이후 컬트영화로 재평가됐다.[9]

그러다 보니 해외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는 옛날 성인극장에서 돌던 작품을 복원해서 예술영화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일도 생겼다.

AV와의 차이

핑크 영화와 AV는 다른 것이다.

핑크 영화는 기본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다.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하고 각본과 이야기 구조가 있으며 일본 영화검열 기준 안에서 성적 묘사를 한다.

반면 AV는 성행위 자체를 주요 상품으로 삼는 영상매체다.

핑크 영화에서는 성행위가 연기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직접적인 성기 표현도 검열됐다.

1980년대 가정용 VHS와 AV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사람들이 굳이 야한 것 보겠다고 성인극장까지 갈 이유가 줄어들었고, 이것이 핑크 영화 산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8]

쇠퇴

1980년대 이후 핑크 영화 시장은 크게 축소됐다.

결정적인 원인은 비디오AV였다.

집에서 원하는 시간에 더 노골적인 성인영상을 볼 수 있는데 낡은 성인극장에 가서 한 시간짜리 저예산 영화를 세 편 연속 볼 이유가 점점 사라졌다.

여기에 일반 영화관의 멀티플렉스화와 오래된 단관극장 폐업이 겹쳤다.

성인영화 전문극장도 계속 줄어들었다.

닛카츠 역시 1988년 기존 로망 포르노 제작을 종료했다.

1990년대 이후

산업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음에도 핑크 영화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부 제작사와 성인극장이 계속 신작을 제작·상영했고, 독립영화 감독의 등용문이라는 기능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핑크 영화 출신 감독 가운데 작품성을 인정받는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해외 영화제에서도 관심을 받았다.

기존 핑크 영화의 형식을 이용하되 성적인 장면보다 인물과 사회문제를 더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도 늘어났다.

로망 포르노 리부트

닛카츠는 로망 포르노 탄생 45주년을 맞아 2016년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키사다 이사오, 시오타 아키히코, 시라이시 가즈야 등 일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에서 활동하던 감독들이 새로운 로망 포르노 작품을 제작했다.[6]

과거 일본 성인영화의 제작조건을 현대적으로 다시 적용해보는 프로젝트였으며, 핑크 영화와 로망 포르노가 단순한 흑역사로 폐기된 것이 아니라 일본 영화사의 한 장르로 재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대표적인 감독

핑크 영화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감독으로는 다음 인물들이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이후 일반 상업영화나 독립영화에서 활동하며 유명해졌다.

대표 작품

육체의 시장

《육체의 시장》(肉体の市場)은 1962년 고바야시 사토루가 감독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핑크 영화로 평가된다.[2]

벽 속의 비사

《벽 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는 1965년 와카마츠 코지 감독 작품이다.

성적 관계뿐 아니라 전후 일본사회와 정치적 좌절 등을 다룬 작품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큰 논란이 됐다.[3]

태아가 밀렵할 때

《태아가 밀렵할 때》(胎児が密猟する時)는 와카마츠 코지의 1966년작이다.

매우 제한된 공간과 적은 등장인물로 만들어진 저예산 작품으로, 핑크 영화의 제작조건을 실험적인 영화문법으로 연결한 사례로 평가된다.

황야의 다치와이프

1967년 야마토야 아츠시 감독의 작품이다.

에로틱 영화에 범죄극과 몽환적인 이미지를 섞었으며 이후 컬트영화로 재평가됐다.[9]

한국에서의 인식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영화 자체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수입이 제한됐기 때문에 핑크 영화라는 장르가 대중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일본문화 개방 이후에도 일반적인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핑크 영화의 대중적 인지도는 낮다.

한국에서는 핑크 영화라는 말을 들으면 AV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사적으로는 별도의 극장용 저예산 영화장르다.

일부 작품은 국내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DVD 등을 통해 소개됐다.

평가

핑크 영화는 작품 수준의 편차가 존나게 큰 장르다.

애초에 매주 극장에 새 영화를 공급해야 해서 공장처럼 찍어낸 영화도 많았고, 성적 장면만 적당히 넣고 이야기는 대충 이어붙인 작품도 당연히 많았다.

그런데 그런 산업 안에서 당시 대형 스튜디오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정치적·사회적·미학적 실험을 한 감독들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핑크 영화 전체를 예술영화라고 포장하는 것도 이상하고, 전부 싸구려 야한 영화라고 무시하는 것도 일본 영화사의 상당 부분을 날려먹는 설명이 된다.

특히 1960~70년대 일본 영화산업이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와 텔레비전의 성장에 대응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변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핑크 영화와 로망 포르노를 빼놓기 어렵다.[5]

여담

  • 일본어 표기는 ピンク映画다.
  • 단순히 '핑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 장르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1962년 《육체의 시장》으로 본다.[2]
  • 1960년대 중반에는 핑크 영화 계열 작품이 일본 영화 제작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1]
  • 로망 포르노는 핑크 영화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닛카츠가 1971년 시작한 별도의 제작 브랜드다.
  • 와카마츠 코지는 핑크 영화 출신 감독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 AV 산업이 성장한 1980년대부터 극장용 핑크 영화 시장은 크게 축소됐다.
  • 핑크 영화에는 계약상 필요한 성적 장면만 넣으면 나머지 연출에 비교적 자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덕분에 돈도 시간도 없는데 이상하게 감독 개성은 존나 강한 영화들이 튀어나왔다.
  • 과거에는 싸구려 성인물 취급을 받던 작품들이 현재는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에서 복원·상영되는 경우도 있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