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
영웅을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ㄴ 기골이 장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놈들을 본다면 하루빨리 정의의 사도들을 호출하여 주십시오.
이 문서 보고 쓰레기 생각한 당신, 당장 쓰레기한테 사과해.
팝콘을 먹으며 이 병신들의 지랄을 감상하다 승리한 병신이 나왔을 때 이렇게 말해 주세요.
"축하한다, 병신아."
통쾌한 대첩을 이끌었거나, 그에 준하는 쾌거를 이룬 세계 각국의 명장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의로움과 지혜, 문무까지도 겸비하여 진정한 군인, 무인(武人)이라 할 만한 인물이기에
가히 본받을 만한 행적은 본받는 게 좋습니다.
ㄴ 이유야 어떻게 됬든 얘 없었으면 신라는 바이바이
| 파일:Portrait of Kim Yushin in the famous portrait photo book of Joseon.jpg | |||||
김유신 Kim Yu-sin 金庾信 | |||||
| 생년월일 | 595년 | ||||
|---|---|---|---|---|---|
| 사망일 | 673년 7월 1일 (79세) | ||||
| 국적 | 신라 | ||||
| 출생지 | 신라 만노군(현 충청북도 진천군) | ||||
| 별명 | 흥무대왕(추존) | ||||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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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유식 : 계백 막겠다.
할애비, 애비 둘다 매국노다.
가야 왕족 출신. 가야왕이던 증조 할아버지가 신라한테 털릴것 같으니 미리 항복해서 대충 신라 진골 취급은 받았지만 쩌리진골이었다.배우자는 지소부인(智炤夫人). 둘째 아들은 김원술
ㄴ 정확히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의 증손자다. 할아버지는 김무력, 아버지는 김서현이며 김서현 대에는 이미 신라의 만노군 태수와 대량주 군주 등을 지낼 정도로 중앙 귀족사회에 진입해 있었다. 가야계라 신라 왕실 본류와 차이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냥 듣보잡 쩌리진골이었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마법사 겸 소드마스터. 검기로 바위를 가르고 메테오로 백제군을 물리쳤다.고 구라깜 근데 과장양념은 전근대시대 서사시의 기본인데 유독 김유신 미화만 지나치게 까는 감이 있다.
ㄴ 이성계는 적들을 털어먹은 기록이 있고 적어도 그 덕에 홍건적이나 왜구가 밀려났는데 김유신은 혼자만 이기고 나머지는 다 깨져서 오히려 신라열세 상황만 오니 그런거다.
ㄴ 상식적으로 성을 30개 털렸단 기록이 나왔는데 아무튼 김유신이 이겼음 이딴기록이 믿겨지냐
ㄴ 숫자는 오히려 30개보다 많다. 642년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했고 바로 다음 달 윤충이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ㄴ 30개만 털린것도 아님 신라가 멸망 직전 까지 몰렸다는게 학계의 정설인데 암튼 이겼음 ㅋㅋ 이니깐 까지
ㄴ 당시 신라가 백제의 공세로 심각한 위기에 몰린 것은 맞지만 '신라가 멸망 직전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까지 단정하면 과하다. 다만 642년 40여 성과 대야성을 연달아 잃고 당항성까지 위협받은 것은 신라 입장에서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자기 조카랑 결혼한 근친충. 근친으로 태어난게 김원술. 급식충때 한 번쯤은 읽어보는 원술랑의 주인공이다.
ㄴ 지소부인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이므로 김유신의 외조카와 결혼한 것 자체는 맞다. 《삼국사기》에는 지소부인 다음에 삼광·원술·원정·장이·원망 등 다섯 아들을 열거하지만 이들 모두가 지소부인의 친생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주석도 있다.
집안이 가야 출신이라고 왕따 당하니까 김유신 애비인 김서현이 금수저 로얄 성골 왕족인 만명부인이랑 결혼 해서 신분상승 좀 해볼라 캤다.
하지만 로얄 성골 금수저 왕족 이었던 만명 애비인 숙흘종이 결혼 반대.
그래서 김서현은 만명부인 임신시키고 둘이 야반도주를 한다. 캬 상남자 가락국 왕족. 그 때 혼전임신으로 태어난게 김유신.
ㄴ 《삼국사기》에 둘이 중매 없이 먼저 관계를 맺었다가 숙흘종이 이를 알고 만명을 별채에 가뒀고,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할 때 천둥이 치는 틈을 타 만명이 탈출해서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고 나온다. 다만 임신했기 때문에 야반도주했다고 사료에 직접 적힌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태어난 곳은 경주가 아니라 충북 진천이다. 김유신 아빠 김서현이 그나마 신라에선 싸움을 잘했기에 신라에선 최전방으로 보내서 군복무를 시킨다.
ㄴ 현재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이 남아 있고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김서현이 당시 만노군 태수였다는 기록과도 맞아 진천 출생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김유신 엄마가 성골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엄마랑 경주에서 화랑 같은거 하면서 자랐다. 물론 그 와중에 아빠인 김서현은 대야성 같은 최전방 뺑뺑이를 돌고 있었다.
지금이나 신라시대나 애비가 지방발령 나면 애들은 서울에 냅두고 애비만 가는게 국룰이다.
나라는 못지키는 가락국 왕족이지만 이상하게 싸움은 존나 잘하는 집안이라 할배 때 부터 신라내 싸움 원탑이었다. 다만 신라내 원탑이지 한반도 원탑은 아니다.
후손이 쓴 열전에는 싸움을 존나 잘해서 전쟁만 했다하면 백전 백승에 관우 마냥 단기필마로 적장 모가지 따오는게 취미라고 되어있는데, 본기에선 신라는 백제한데 쳐발려서 망하기 직전이었음.
그리고 이상한점이 647년 백제가 신라를 3천의 병력으로 쳤을때 1만을 이끌고가서 싸웠으나 백제군에게 밀렸으나 부하랑 그 자식 제물로 바치니 이겼다. 같은 기록이 있다. 남의자식 죽여다 승리하는건 이새끼 특수능력인가보다.
근데 신라까들은 김유신열전이 뻥구라 많다고 실제 역사에선 김유신이 아예 졸장급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무리수. 김유신열전 없다 치고 신라본기만 따져도 김유신이 전쟁잘알이 아닌 수준인 건 아니다. 열전 기준으론 무조건 이기는 이순신급이지만 본기 기준으로도 적어도 버티는 싸움의 대가 권율급은 된다. 당시 신라가 선덕여왕이 무능하고 국력이 딸린거지 김유신이 유능한 소방수인 건 맞다.
ㄴ 이시기에 실권잡은놈은 김유신 김춘추가 확실한데 무능한 선덕여왕탓이라보기엔 무리수아니냐? 선덕여왕은 바지사장이라봐도 무방한데
ㄴ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만 선덕여왕이 단순한 바지사장이었다고 볼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말년에 상대등 비담이 여왕의 통치 자체를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왕권과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ㄴ 백전백승이라고 보긴 애매한게 백제가 고구려와 힘을합쳐 성을 30개정도 한번에 뺏은일이 있었는데 이런상황에서 김유신이 딱히 뭘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 전쟁이 소규모일리가 없는데 신라에서 가장 고위직 장수가 코빼기도 안비쳤다는 소리다. 그냥 이길수있는 싸움만 간거아닌가 싶을정도다.
ㄴ 위에서 말했듯 642년에 실제로 백제가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한꺼번에 먹었다. 다만 해당 기사에 김유신 이름이 안 나온다는 것만으로 김유신이 일부러 이길 수 있는 전쟁만 골라 다녔다고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계백은 유명하긴 한데 성충이라든가 하는 역덕들도 잘 모르는 백제 듣보한테도 매일 줘 털리는게 신라현실. 김유신이 그렇게 싸움을 잘하면 왜 백제한테 맨날 쳐발리냐? 아주 그냥 입만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와!
ㄴ 역덕들 무시하냐 백제에 관심있는데 성충을 모르면 병신임
하지만 여전히 신라내 원탑은 맞았기에 선덕여왕 죽을 때 쯤 비담이라는 희대의 로맨티스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물리침.
ㄴ 실제로 비담은 당시 신라 귀족회의의 수장인 상대등이었다. 반란군은 명활성, 왕군은 월성에 진을 치고 10일 동안 싸웠으니 단순한 소규모 쿠데타라기보다는 경주 일대를 양분한 내전에 가까운 규모였던 것은 맞다.
여튼 당시 신라는 의자왕과 그 꼬붕 성충이나 윤충한테 맨날 쳐발리는 신세임. 존나쎈 계백이는 나오지도 않는다.
신라가 줫나게 털리는 와중에 그나마 원탑인 김유신이 경주 중앙 정예군으로 어찌저찌 신라 멸망만 겨우겨우 막는상황이었음.
그 와중에 김춘추가 고구려에도 가고 당나라에도 가고 왜에도 가고 하여튼 ㅂㄱㅎ 마냥 해외순방 하면서 바짓가랑이 붓들고 아 쫌 도와주쏘! 하는데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고, 왜는 백제 꼬붕이라 당연히 안도와주고 당나라는 너네 선덕여왕이 병신이라 그래 그러니까 당나라 왕족을 보낼테니 선덕여왕이랑 결혼시켜서 신라 왕 시키라고 쫑코나 줌. 하지만 사실이기에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옴.
ㄴ 여기서도 웃긴소리가 있다. 김춘추가 고구려가서 백제 막아달라고 입털다 연개소문이 성충편지받고 김춘추를 가둬버렸다는데 안그래도 멸망직전이라 불끄는데도 바쁠새끼가 1만병력을 뽑아서 고구려를 치겠다하니 고구려가 다급히 풀어줬단 소리가 있다. 시발 그럴힘이 있으면 백제는 왜 못막냐
ㄴ 병력 숫자는 1만이 아니라 3천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이 용사 3천 명을 뽑아 구출하러 갈 준비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 고구려와 전투까지 벌인 것은 아니고 이 움직임과 김춘추 자신의 계책 끝에 석방됐다.
ㄴㄴ성충이 연개소문한테 편지 보냈단 기록은 인용출처도 불분명하게 적어놓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등장하는 기록인데 그걸 그대로 적냐.
여튼그러다가 당나라는 존나 좆밥이라고 생각했던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안시성에서 길막당하고 줘털려서 결국 퇴각함. 우리의 기회주의자 희대의 박쥐맨 김춘추가 때를 놓치지 않고
당나라 찾아가서 "마 당나라 썽님들 백제를 믄저 공객하고 고구려 뒤치기를 하믄 된다 아잉교? 살(쌀)은 우리가 배달해 주께!" 라고 하자 당나라는 백제를 공격한다로 바뀜.
그래서 신라의 명운을 건 쌀배달 쿠팡맨 작전에 신라 원탑 김유신이 신라 병력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5만명으로 만들어서 이끌고, 백제에선 신라 좆밥놈들 5천명이면 충분하다 생각해서 계백이가 5천명 이끌고 막으러감.
ㄴ 사실 왕권강화하느라 호족 조졌는데 반발한 호족이 병력을 내어주지 않은탓이다. 그 호족들의 병력은 백제부흥운동에서 갈린다.
물론 백제 주력군은 배타고 오는 당나라 소정방이 막으러 감.
결국 김유신 조카겸 사위(씨발 이게 무슨 개족보냐)반굴이와 관창이가 카미카제 자살돌격으로 어찌저찌 계백이의 길막을 뚫고 쌀배달은 성공했지만 배송지연됐다고 소정방이한테 쿠사리 먹고 찌질찌질.
ㄴ 반굴은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이므로 김유신의 조카인 것은 맞다. 다만 반굴이 김유신의 사위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창은 김품일의 아들이며 김유신의 조카도 아니다.
하지만 존나쎈 계백이를 그래도 10배 병력으로 이기고 배달 완료 했다고 그것도 업적이라고 남겨놓음.
ㄴ 그나마도 5전 4패 1승이다.
ㄴ 《삼국사기》에는 신라군이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고 명확히 나온다. 이후 반굴과 관창의 전사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해 이겼으므로 흔히 5전 4패 1승이라고 정리하지만, 원문이 마지막 공격을 별도의 '제5전'이라고 세어놓은 것은 아니다.
ㄴ 가끔 소규모교전뿐이라 4패에서 피해가 별거 아니란소리 하는애들이 있는데 애초에 지휘관 아들들 소규모로 보낸다쳐도 5만병력 데려다놓고 소규모병력 네번보내서 모가지까지 따일정도면 애초에 그작 전을 세운새끼는 그냥 병신이거나 보낸새끼들을 애초에 죽으라고 보낸거다. 그것도 병력우세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내용에서 봤듯이 이순신급 명장은 아닌데 정치질을 존나 잘해서 유명함. 다른 장수들과 달리 정잘알이라 유언비어 퍼트리고 명분 찾기에 대가였다.
일단 선덕여왕 때 성골이 여자인 김승만 밖에 없어서 차차기 왕위 계승권이 유력한 김춘추랑 자기 여동생이랑 원나잇 질싸 하게 해서 임신공격으로 김춘추랑 사돈 맺는다.
ㄴ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극적으로 전해지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김유신 가문과 김춘추 가문의 정치적 결속을 설명하는 설화적 성격도 강하다고 본다.
아빠 때도 임신공격으로 진골이랑 사돈 맺더니 자식 대에도 임신공격으로 진골이랑 사돈 맺는다. 이 쯤 되면 임신공격이 집안 내력.
여튼 김유신과 함께 적당히 비선으로 권력장악해서 선덕여왕 시절 정권장악하다가 당시 2인자인 비담이 반발해서 반란 일으키자 발릴 뻔 하지만 어찌 저찌 잘 막음.
ㄴ 본인무력이 압도적이라면서 국가간 전쟁보다 소규모일 자국내 쿠테타를 간신히 막아내는거 보면 비담은 신라 군재 2인자쯤 되는거냐?
ㄴ 2인자 맞는데?
ㄴ 정확히 말하면 군재 2인자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비담이 645년부터 상대등이었던 최고위 진골귀족인 것은 맞다. 반란군이 명활성에 자리잡고 10일이나 버틴 걸 보면 정치·군사적으로 만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솔까 이긴놈이 장땡이라고 비담의 난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냥 내전임. 연날리기로 막았다는데, 여튼 이게 우리나라에선 가장 오래된 연날리기 기록이다.
ㄴ 연 이야기는 진짜 《삼국사기》에 나온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지자 반란군이 여왕 패망의 징조라고 선전했고, 김유신이 불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린 뒤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사기를 되돌렸다고 기록돼 있다.
뭐 백제한텐 맨날 쳐발려도 신라에선 제일 싸움 잘한건 사실인가 봉가.
비담 조지면서 반대파 숙청하고 김승만을 진덕여왕시키면서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후에 매제인 김춘추를 왕 시키고 자기 동생은 왕비 시킴.
ㄴ 김춘추 즉위에 김유신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진덕여왕 사후 귀족들은 처음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알천이 사양하고 김춘추를 추천했고, 김유신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다만 진덕여왕이 김유신·김춘추의 단순한 바지사장이었다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
가락국 왕족 피가 신라왕실에 들어갔으니 가락국 왕족 입장에선 넘나 좋은것. 그래서 후대에 흥무대왕이라고 왕대접 시켜줌.
ㄴ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한 것은 맞다. 생전에 왕이었다는 뜻은 아니고 사후 추숭이다.
그러면서 자기 조카이자 왕의딸=공주인 지소부인이랑 결혼함. 근친충에 페도가 틀림없음.
ㄴ 지소부인이 외조카인 것은 맞고 김유신이 무열왕 즉위 다음 해인 655년경 혼인했으므로 김유신은 당시 60세 전후였다. 다만 지소부인의 출생연도는 전하지 않으므로 나이 차가 얼마나 났는지, 현대적 의미에서 페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거기다 당나라가 백제 멸망시키고 원래 목적인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까진 대충 당나라 편들면서 백제랑 고구려 조지다가 슬슬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먹을라고 하니까
백제부흥운동 하는놈들이랑 고구려 부흥운동 하는 놈들한테 마! 그래도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적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
그 와중에 당나라는 측천무후 땜시 지들 문제로 복잡해지고 요동이랑 만주는 걸사비우로 환생한 비담이랑 김춘추 복제인간인 대조영이 깽판 놓고 있길래 대동강 밑으로 일단 알박기 성공시킴. 지가 잘싸운건 하나도 없음.
ㄴ 여기는 시기가 섞였다. 나당전쟁은 대체로 670~676년에 벌어졌고 김유신은 673년에 사망했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것은 698년이며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한 것도 690년이다. 신라가 당 세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밀어낸 것은 매소성·기벌포 전투 등 나당전쟁의 결과이며 발해 건국은 그보다 뒤 이야기다.
그래서 된게 대충 통일신라. 역시 싸움보단 정치가 짱이다.
도굴왕이다. 당나라응딩이에 메달려서 백제를 멸망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백제 선대왕릉을 죄 파헤친 것이다.
ㄴ 김유신이 백제 멸망 직후 선대 왕릉들을 직접 파헤쳤다는 주장은 확인되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찾기 어렵다. 이 부분은 근거가 있으면 출처를 붙이는 게 좋다.
는 씨발 김유신이 예전 수도인 송파에 백제왕릉 있는지 몰랐나 보지. 뭐 여튼 풍납동 주민들은 재개발도 못하고 좆ㅋ망ㅋ. 당장 익산쌍릉만 해도 백제 30대 무왕릉으로 거의 확정된 마당에
시발 풍납동에 재개발 노리고 집산 큰엄마가 명절에 풍납토성 발굴 뉴스를 보고 넋나간 표정을 짓던게 20년이 지나도 기억난다.
근데 신라가 파뒤집어놓은것도 이후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결정적으로 다 털린건 가루베 지온 개씹 원숭이 새끼 때문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것때문에 신라빠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이완용 취급을 받는데 신라 입장에선 이후 수백년의 통일신라시대를 연 사기캐
김유신 때문에 만주 잃었다는 역알못들이 있는데 걔네들한테는 발해는 한국사가 아닌가보다. 그리고 솔까 고구려는 당나라가 멸망시킨거다.
ㄴ 고구려 멸망전에는 신라도 참여했지만 668년 최종 평양성 공격의 주력은 당군이었고, 김유신 자신은 당시 풍질 때문에 경주에 남아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 못했다. 다만 신라의 군사·보급과 전쟁 전체의 전략 수립에는 계속 관여했다.
여담이지만 실제 고향은 경상도가 아닌 충북 진천군이다.
ㄴ 595년 만노군, 현재의 충북 진천 일대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진천의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은 현재 국가 사적이다.
알고 보면 치욕스러운 경험
ㄴ 이하의 '왕이 될 수 있었는데 문무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태대각간으로 달래졌다'는 내용은 사료 근거가 없다. 김유신이 왕위를 요구했다거나 문무왕 즉위를 치욕스럽게 여겼다는 기록은 없으며, 태대각간은 668년 고구려 멸망의 공을 포상하기 위해 만든 특별관등이라고 《삼국사기》 직관지에 명시되어 있다.
사실 내가 김유신이었더라면 태대각간을 굉장히 치욕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김유신의 등급은 왕이 되는 거라서다. 김춘추와 같은 혈통이라 왕이 되는 게 충분히 가능한 게 김유신이다.
ㄴ 김춘추와 김유신은 같은 혈통이 아니다. 김춘추는 신라 진지왕의 손자인 기존 신라 김씨 왕족이고,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 김구해의 증손자로 신라에 편입된 가야계 김씨다. 양쪽 모두 진골 대우를 받았지만 왕통상 같은 가문으로 취급할 수 없다.
ㄴ 성골이 소멸한 뒤 진골도 왕이 될 수 있게 된 것은 맞지만 모든 진골이 동일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김유신이 왕위계승 후보로 논의됐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하지만 김춘추가 왕이 된 이후 661년에 김춘추가 사망하자 이 때 김유신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본인이 사망하는 673년까지 왕이 되지 못했고 김춘추의 후임 왕으로 김법민이 즉위했다.
ㄴ 김법민은 이미 655년 태자로 책봉된 무열왕의 장남이었다. 661년 무열왕이 죽자 태자였던 김법민이 그대로 문무왕으로 즉위한 것이므로 김유신과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 내가 김유신이었더라면 김법민이 왕이 되었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땅을 치며 분개했을 것이다. 왕은 내가 돼야 하는 거였다!라면서 말이지.
ㄴ 오히려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이다.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가 김유신의 친여동생 문희라서 무열왕계 왕실과 김유신 가문은 이미 아주 강하게 결합돼 있었다.
따라서 신라 역사상 김유신만 유일하게 재직했다는 관직인 태대각간은 사실 위로성 관직일 가능성이 크다.
ㄴ 아니다. 《삼국사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뒤 김유신의 으뜸가는 지략을 포상하기 위해 기존 17관등과 대각간보다 위에 태대각간을 더했다고 이유까지 명시한다. 김유신에게 특별대우를 한 관등인 것은 맞지만 왕위를 못 준 위로상이라는 근거는 없다.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고 업적도 어느 정도 있는 김유신인데도 불구하고 왕이 되지 못했기에 그런 김유신에게 왕은 아니지만 왕 비슷한 대우라도 해 드리자. 이런 의도로 오직 김유신에게만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게 태대각간이다.
ㄴ 김유신을 위해 처음 설치된 특별관등이라는 부분은 맞다. 다만 이후 김인문에게도 사후 태대각간이 추증됐고 《삼국유사》에는 다른 사례도 전하므로 문자 그대로 김유신 한 명만을 위한 영구적 1인 관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왕이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김유신이 왕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신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김유신을 달래야만 했다.
ㄴ 이런 기록은 없다.
그래서 태대각간이라는, 있지도 않던 걸 새로 만들어서 이건 대신 중 제일 높은 대각간보다 더 높은 거고 오직 김유신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든 관직이라며 김유신을 최대한 달래야만 했다.
ㄴ 대각간보다 위인 특별관등을 새로 만든 것은 맞지만 목적은 달래기가 아니라 고구려 멸망 공로에 대한 포상이라고 기록돼 있다. 태대각간과 함께 식읍 500호, 수레와 지팡이까지 하사해 최고 원로로 예우했다.
김유신은 태대각간을 받았을 때 백퍼 분통을 터뜨렸을 거다. 왕이 되어야 했는데 이런 병신 관직으로 얼버무려진 것이다. 김유신은 태대각간을 받는 것 자체를 치욕으로 여길만 했던게 김유신은 본인이 왕이 되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ㄴ 김유신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을 했다는 기록도, 태대각간을 치욕으로 여겼다는 기록도 없다. 오히려 죽기 직전 문무왕이 직접 병문안을 오자 김유신이 왕에게 국가를 잘 보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태대각간은 관직의 계급장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관직이 배치된 위치는 조선으로 따지면 대원군과 같은 위치에 놓인 것이다. 둘 다 왕은 아니지만 왕 대우를 받는 게 공통점이다.
ㄴ 대원군과 같은 지위였다고 볼 제도적 근거도 없다. 태대각간은 어디까지나 신라 관등체계의 최상위에 추가된 비상위 특별관등이다.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위로성 관직의 성격이 더 강하다. 왕은 오직 1명만 제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ㄴ 결론적으로 특별포상 성격은 맞지만 '왕 대신 준 위로직'이라는 해석은 빼는 게 맞다.
개족보
- 김유신 여동생 = 김춘추 아내
- 김춘추 딸(김유신 여동생의 딸) = 김유신 아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ㄴ 그 정도면 신라에서는 정상혼이다. 심지어 미실의 수많은 남편들 중 하나가 그 친남동생인 미생이었다. 근데 굳이 신라를 탓할 문제는 아니고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가문도 이랬다. 그래서 파라오네 집안은 유전병이 쩔어서 투탕카멘은 19살에 천수를 모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ㄴ 미실과 미생의 관계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근거로 한 이야기인데 해당 문헌의 진위 자체가 학계에서 논쟁적이므로 확정 사실처럼 쓰기는 어렵다. 김유신과 지소부인의 혼인은 《삼국사기》에 명확히 기록돼 있고, 당시 신라 귀족사회에서는 이런 중첩 혼인이 관습상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본다.
ㄴ 예순에 손녀랑 결혼한거 보면 아주 페도새끼다.
ㄴ 지소부인의 출생연도가 전하지 않아 당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안습한 후손
김유신을 척결하자는 새끼들이 다름아닌 김유신의 직계후손 김해김씨들이다. ←김해김씨들 패륜아 만들고 있네
정상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문서를 정리하여 주십시오.
차라리 원균이 김유신보다 평가가 훨씬 좋다.
왜냐 하면 원균은 천하의 증오를 한몸에 받을 지언정 평택 시민들과 자기 직계후손들은 어케든 원균을 빨려 그러는데
김유신은 김유신 직계후손이 되려 김유신을 깐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유신 저새끼 때문에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자치구가 중국땅 되부렀고 고구려가 삼국통일했으면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자치구가 한국땅이었다라고 착각한다.
근데 만주가 중국땅 된 건 김유신 책임이 아니다. 발해가 망하면서 한국사에서 이탈하게 된거다. 김유신이 죽고 나서 발해가 건국됐고 발해는 거란족이 멸망시켰는데 그게 어째서 김유신 책임이냐? 고구려빠 새끼들이 은근히 발해를 존나 무시한다.
살아생전에는 태대각간이니 뭐니 합네 하면서 없는 관직까지 만들어주며 예우했는데 죽은 뒤 한참 지나자 김유신의 직계후손들이 김유신에게 침뱉는다.
더 웃긴 건 통일 이후 무열왕계 왕들이 전제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화랑세력이 축출당하면서 김유신의 자손들도 화를 입게 되는데, 이 시기에 김유신의 혼령이 나타나 대성통곡을 하면서 무덤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다. 자기는 죽어서도 후손들 생각했는데 이젠 역으로 욕먹고 있으니
ㄴ 《삼국유사》에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에 찾아가 자기 후손이 죄 없이 죽임당한 것을 하소연했다는 설화가 실제로 있다. 770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김융을 김유신의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여기서 나왔다.
ㄴ 위에 병신새끼가 뭔개소리이냐 원균은 천하의 다신 나오면 안되는 개씹폐급쓰레기새끼인데 그딴 씹새끼랑 김유신이랑 비교하면 김유신만 불쌍하잖아
여담
관련인물로는 김유식이 있...을려나?
풍류는 또 알아서 술먹고 꽐라되서 말에 자빠져서 음주운전을 하고 도착해보니 말이 알아서 색시집으로 모셔가서 오빠오빠하더라.
이에 부끄러운 나머지 애꿎은 말목만 친걸 미담이랍시고 대대손손 전하고 자랑이다.
현대식으로 어레인지하면 음주운전한 금수저 2세가 자동운전되는 최고급 외제차에 내비에 우리집 쳐서 가보니 오피가 나왔다고 빡쳐서 차를 때려부순걸 미담이라고 전하는것과 같다.
물론 그 말은 용마라고도 하는 명마였으므로 외제차를 때려부순거 정도가 되려나?
나중에 백제, 고구려가 적당히 망하자 그 기방녀 이름 따다붙인 천관사라는 절까지 지어놓고 순애보의 귀감이라고 빨리고있다. 물론 이때 빡쳐서 벤 말은 잊혀졌다.
ㄴ 천관녀와 말 목을 벤 이야기는 실제로 전해진다. 다만 김유신 사후에 지어진 《삼국유사》 계통 설화라 세부사항까지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별개다. 천관의 옛집에 천관사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있다.
후손들 꼬라지보면 그냥 당나라에 태어나서 반도를 밀어버려도 할말없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