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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 さくらだもんがいのへん)은 1860년 3월 24일 에도 막부의 최고위 정치관료였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의 사쿠라다문 밖에서 미토번 출신 낭인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집단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의 개항 요구와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고메이 천황의 정식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도록 했으며, 차기 쇼군의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도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관철했다. 이후 이에 반대한 정치인과 학자, 무사들을 대규모로 처벌하면서 막부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이 나오스케의 정치적인 행위에 불만을 가진 미토번 출신 낭인 17명과 사쓰마번 출신 무사 1명이 암살을 계획했다. 이들은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에 등성하는 길목에서 습격을 감행했고, 결국 그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사건은 1860년 3월 24일 오전 9시 무렵 발생했다. 당시 에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으며, 이이 나오스케는 약 60명의 호위 인력과 함께 가마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1]
일본의 최고위 실권자가 수십 명의 호위무사를 대동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막부의 중심지로 출근하다가, 성문 바로 앞에서 18명의 무장집단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에도 막부의 정치적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정과 막부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공무합체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존왕양이 세력의 활동과 정치적인 암살은 오히려 증가했다.
다만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처음부터 막부를 완전히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행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암살자들이 남긴 《참간취의서》(斬奸趣意書)에 따르면, 이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하여 막부의 정치를 바로잡고 천황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혁하려 했다. 자신들이 막부 자체에 반역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명시했다.[2]
그럼에도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막부의 정치적인 권위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후 여러 정치세력이 막부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행동을 추진하면서 막말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기본 정보
| 사쿠라다문 밖의 변 | |
|---|---|
| 일본어 | 桜田門外の変 |
| 영문 | Sakuradamon Incident |
| 발생일 | 1860년 3월 24일 (양력) 안세이 7년 3월 3일 (일본 구력) |
| 발생 시각 | 오전 9시 무렵 |
| 장소 | 에도 막부 에도성 외사쿠라다문 밖 (현 도쿄도 지요다구) |
| 사건 유형 | 정치적 암살, 무장 습격 |
| 암살 대상 | 이이 나오스케 |
| 실행 인원 | 18명 |
| 가담 세력 | 미토번 출신 낭인 17명 사쓰마번 출신 무사 1명 |
| 현장 지휘자 | 세키 데쓰노스케 |
| 주요 실행자 | 아리무라 지자에몬, 사이토 겐모쓰, 하스다 이치고로 등 |
| 주요 원인 | 안세이 대옥, 미일수호통상조약, 쇼군 후계자 문제, 무오밀칙 반환 문제 |
| 결과 | 이이 나오스케 암살, 막부의 정치적 권위 약화, 암살 가담자들에 대한 추적과 처벌 |
명칭과 날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라는 이름은 사건이 발생한 장소인 에도성의 외사쿠라다문(外桜田門)에서 유래했다. 일본어로는 사쿠라다몬가이노 헨(さくらだもんがいのへん)이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이며, 사쿠라다문 외의 변이나 사쿠라다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사쿠라다문 외의 변이라는 뜻의 桜田門外の変이 공식적인 역사 명칭으로 널리 사용된다.
사건은 일본의 구력으로 안세이 7년 3월 3일에 발생했다. 이를 현대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1860년 3월 24일이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자료에 1860년 3월 3일로 기록되어 있더라도 실제 현대 달력의 3월 3일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1860년은 일본의 연호가 안세이(安政)에서 만엔(万延)으로 변경된 해이기 때문에 일부 역사자료에서는 만엔 원년의 사건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다만 사건 당시의 연호는 아직 안세이였으므로 정확한 구력 날짜는 안세이 7년 3월 3일이다.
배경
흑선 내항과 개국 문제
1853년 미국 해군의 매슈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면서 에도 막부는 심각한 외교적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항구를 개방하고 미국 선박에 대한 보급과 외교적 관계를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오랫동안 제한적인 대외교류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양의 근대적인 해군력 앞에서 기존 정책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사실도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경고가 되었다.
막부는 서양 열강과 전쟁을 벌일 경우 일본이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1854년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으며, 이후 서양 국가들과의 통상관계를 확대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는 개국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이 나타났다. 서양의 기술과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통상관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서양 열강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에 반대하는 존왕양이 사상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단순한 외교정책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의 대외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천황과 쇼군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치적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의 집권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히코네번의 번주이자 에도 막부의 최고위 정치관료였다. 그는 1858년 대로(大老)에 취임하면서 막부의 실질적인 최고 정치지도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도 없었다. 이에 따라 차기 쇼군을 누구로 선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갈등으로 떠올랐다.
이이 나오스케는 기이번 출신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했다. 요시토미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모치라는 이름으로 제14대 쇼군이 되었다.
반면 미토번의 전 번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마쓰다이라 슌가쿠 등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지지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이 지지했던 이에모치의 쇼군 계승을 관철했으며, 정치적인 반대파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토번과 히코네번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1858년 미국과 일본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당시 고메이 천황은 서양 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는 조약 체결에 대한 천황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조정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서양 열강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천황의 정식 칙허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결정은 조정과 존왕양이 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막부가 천황의 의사를 무시하고 외국과 중요한 외교조약을 체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고 국가의 존립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당시 일본이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했다.
따라서 이이 나오스케를 단순히 외국의 요구에 굴복한 정치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반면 그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정치적 탄압까지 정당화할 수도 없다.
안세이 대옥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이이 나오스케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진행했다. 이를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이라고 부른다.
안세이 대옥에서는 존왕양이 운동가와 조정의 공경, 여러 번의 정치인들이 체포되거나 근신과 은거 등의 처벌을 받았다. 처벌 대상에는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했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요시다 쇼인과 하시모토 사나이 등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1859년 참수형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다고 해서 막부에 대한 저항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토번을 중심으로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대되었다.
당시 미토번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쇼군 후보였던 요시노부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또한 미토번 내부에는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미토학과 존왕양이 사상의 영향력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미토번 무사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막부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인물로 규정하고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무오밀칙과 미토번
무오밀칙(戊午の密勅)은 1858년 고메이 천황이 미토번에 비밀리에 전달한 칙서다. 당시 천황은 막부가 자신의 허락 없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사실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 칙서에서는 막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유력 번들이 정치적 의견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문제는 조정이 막부를 통하지 않고 미토번에 직접 칙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에도 막부는 오랫동안 조정과 각 번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통제해 왔다. 그러나 무오밀칙은 천황과 유력 번들이 막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를 막부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미토번에 칙서의 반환을 요구했으며,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확대했다.
그러나 미토번 내부에서는 칙서를 반환해야 한다는 입장과 끝까지 보관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일부 존왕양이 운동가들은 칙서의 반환이 천황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은 미토번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또한 일부 무사들이 공식적인 번의 지휘체계를 벗어나 직접적인 행동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암살계획
미토번의 급진파
안세이 대옥 이후 미토번의 존왕양이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가네코 마고지로(金子孫二郎)와 다카하시 다이치로(高橋多一郎)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이 나오스케의 정치적 탄압과 막부의 대외정책에 반발하면서 무력행동을 계획했다.
당초 이들은 사쓰마번의 일부 존왕양이 운동가들과 협력하여 막부의 정치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특히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한 뒤 교토와 에도에서 정치적인 행동을 확대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미토번과 사쓰마번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각 번의 일부 무사와 탈번자들이 비밀리에 협력한 것이었다.
사쓰마번과의 협력
사쓰마번은 이후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다. 그러나 1860년 당시 사쓰마번 전체가 막부 타도나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사쓰마번 무사들은 미토번의 급진파와 협력했지만 번의 지도부는 대규모 무력행동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결국 계획했던 사쓰마번 측의 대규모 행동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쓰마번 출신의 아리무라 지자에몬은 암살계획에 참여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실제로 참여한 18명 가운데 사쓰마번 출신은 아리무라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17명은 미토번 출신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미토번과 사쓰마번의 연합군이 막부를 공격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제로는 미토번 출신 낭인들이 주도했고, 사쓰마번 출신 무사 1명이 가담한 암살사건이었다.
세키 데쓰노스케
세키 데쓰노스케(関鉄之介)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서 현장 지휘를 담당한 인물이다.
그는 미토번 출신 무사로, 이이 나오스케의 정책에 반발하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 이후 탈번하여 동료들과 함께 에도로 이동했다.
세키는 이이 나오스케가 등성하는 경로와 호위 인력, 공격 시점 등을 준비하는 데 참여했다. 사건 당일에는 공격조의 지휘를 담당했지만 직접 가마에 달려들어 이이 나오스케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그는 현장에서 탈출했으며, 약 1년 7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나 1861년 10월 에치고 지역에서 체포되었으며, 1862년 처형되었다.
미토 지역의 향토사 자료에서도 세키 데쓰노스케가 18명의 공격조를 지휘했으며, 체포된 뒤 1862년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
습격자 18명
사건에 참여한 공격조는 총 18명으로 구성되었다.
| 구분 | 인물 |
|---|---|
| 미토번 출신 | 세키 데쓰노스케 (関鉄之介) |
| 미토번 출신 | 오카베 산주로 (岡部三十郎) |
| 미토번 출신 | 사이토 겐모쓰 (斎藤監物) |
| 미토번 출신 | 사노 다케노스케 (佐野竹之介) |
| 미토번 출신 | 오제키 와시치로 (大関和七郎) |
| 미토번 출신 | 히로오카 네노지로 (広岡子之次郎) |
| 미토번 출신 | 이나다 주조 (稲田重蔵) |
| 미토번 출신 | 모리야마 시게노스케 (森山繁之介) |
| 미토번 출신 | 가이고 사키노스케 (海後磋磯之介) |
| 미토번 출신 | 구로사와 주자부로 (黒沢忠三郎) |
| 미토번 출신 | 야마구치 다쓰노스케 (山口辰之介) |
| 미토번 출신 | 스기야마 야이치로 (杉山弥一郎) |
| 미토번 출신 | 마스코 긴파치 (増子金八) |
| 미토번 출신 | 하스다 이치고로 (蓮田市五郎) |
| 미토번 출신 | 고이부치 가나메 (鯉淵要人) |
| 미토번 출신 | 히로키 마쓰노스케 (広木松之介) |
| 미토번 출신 | 모리 고로쿠로 (森五六郎) |
| 사쓰마번 출신 | 아리무라 지자에몬 (有村次左衛門) |
이들 가운데 세키 데쓰노스케는 전체 공격조의 지휘를 담당했으며, 아리무라 지자에몬은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는 행동에 직접 관여했다.
일본대백과전서는 공격조의 인원과 구성, 개별 인물의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2]
사건의 전개
1860년 3월 24일
1860년 3월 24일은 일본의 구력으로 3월 3일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날을 상사(上巳)의 명절로 기념했으며, 막부의 여러 다이묘들이 에도성에 등성하는 날이었다.
이이 나오스케 역시 에도성에 등성하기 위해 자신의 저택을 출발했다. 그의 거처는 에도성의 사쿠라다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시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날의 양력으로 3월 하순에 해당하지만, 에도에는 상당한 눈이 내려 도로와 성문 주변에 눈이 쌓인 상태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약 60명의 호위 인력을 대동하고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이동거리가 짧았고 에도성의 주요 성문을 통과하는 통상적인 등성 행렬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호위무사들의 일부는 눈과 비에 대비하여 도검과 복장을 보호하는 덮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비는 갑작스러운 공격이 발생했을 때 무기를 즉시 사용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쿠라다문 앞에 모인 공격자들
암살계획에 참여한 18명은 사건 당일 이른 아침부터 이동했다.
이들은 에도의 아타고산 부근에 모인 뒤 사쿠라다문으로 향했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이 통과하는 지점에서 공격할 준비를 했다.
공격자들은 이이 나오스케의 가마를 목표로 삼았다. 단순히 호위무사들과 충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막부의 최고 실권자를 직접 제거하려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문서를 준비했다. 이 문서는 이후 《참간취의서》(斬奸趣意書)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암살자들은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뜻을 무시하고 막부의 정치를 어지럽혔다고 주장했다.
총성과 혼란
오전 9시 무렵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이 사쿠라다문 밖에 도착했다.
공격자들은 먼저 행렬의 앞부분을 공격하여 호위무사들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이후 총성이 신호처럼 울리면서 공격자들이 여러 방향에서 가마를 향해 돌진했다.
당시의 기록에는 총성과 함께 공격자들이 호위무사들에게 달려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행렬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이 나오스케의 호위무사들은 칼을 뽑고 저항했지만 준비된 공격자들의 기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눈이 내리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행렬의 질서가 빠르게 무너졌다. 호위무사들 가운데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일부 인원은 현장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호위무사들이 모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도망쳤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제로 상당수의 호위무사들이 공격자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
공격자들은 호위무사들을 제압하거나 분산시킨 뒤 이이 나오스케가 타고 있던 가마에 접근했다.
이들은 가마를 공격했으며, 이이 나오스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후 사쓰마번 출신의 아리무라 지자에몬이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었다.
아리무라는 이이 나오스케의 머리를 가지고 현장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신도 전투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멀리 이동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일본의 역사사전은 공격자들이 총소리를 신호로 삼아 양쪽에서 가마를 습격했으며, 아리무라 지자에몬이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한다.[2]
수십 명의 호위무사를 대동했던 막부의 최고 실권자가 18명의 공격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잘린 채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정치적인 질서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단순히 유력 다이묘 한 사람이 암살당한 것이 아니라 막부의 최고 실권자가 에도성 바로 앞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전투의 피해
습격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끝났다.
이이 나오스케의 호위 인력 가운데 여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일본의 역사사전에서는 현장에서 사망했거나 이후 상처로 사망한 히코네번 측 무사가 8명이었다고 설명한다.[2]
그러나 당시의 기록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집계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현장 즉사자와 이후 사망자를 따로 구분한다.
공격자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부는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부상으로 자결하거나 막부의 관료에게 자수했다.
따라서 암살자들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뒤 모두 무사히 도주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아리무라 지자에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次左衛門)은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참여한 유일한 사쓰마번 출신 무사다.
그는 미토번 출신 낭인들과 협력하여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계획에 참여했다.
사건 당일 아리무라는 다른 공격자들과 함께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을 습격했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의 가마에 접근하여 그의 목을 베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이 나오스케의 머리를 가지고 현장을 벗어나려 했지만 멀리 이동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가 사용한 칼은 사쓰마번의 무사인 나라하라 기하치로에게 빌린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역사잡지는 이 칼이 세키 마고로쿠 계열의 도검이었다고 설명한다.[4]
아리무라는 사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직접 실행자 가운데 하나다.
다만 그가 사쓰마번 출신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사쓰마번 전체가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암살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번의 공식적인 명령체계를 벗어나 행동한 낭인들이 중심이었다.
참간취의서
참간취의서(斬奸趣意書)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가담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정치적인 문서다.
'참간'(斬奸)은 간악한 인물을 베어 제거한다는 의미이며, '취의서'(趣意書)는 어떤 행동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는 문서다.
따라서 참간취의서는 자신들이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한 이유를 설명하는 정치적 선언문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비판
암살자들은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뜻을 무시하고 서양 열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또한 막부의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충성스러운 정치인들을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국가의 정치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암살자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반영한 것이며, 문서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비난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막부 타도가 목적이었는가?
흥미로운 점은 참간취의서에 자신들이 막부 자체에 반역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암살자들은 막부의 정치가 올바른 방향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는 그들의 직접적인 목표가 막부라는 정치체제를 즉시 해체하는 것보다는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하고 막부의 정책을 변경하는 데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대백과전서는 이 문서를 근거로 공격자들의 당시 목적이 막부 타도 자체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2]
따라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메이지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혁명세력의 계획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암살자들 입장에서는 막부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막부의 정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최고 실권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실제로 정치적인 암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건 이후의 정치적 변화가 암살자들의 의도와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암살자들의 최후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참여한 공격자들은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에 성공했지만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일부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부상으로 자결하거나 막부의 처벌을 받았다.
현장에서의 사망
공격자 가운데 이나다 주조는 전투 중 사망했다.
또한 아리무라 지자에몬과 야마구치 다쓰노스케, 고이부치 가나메, 히로오카 네노지로 등은 중상을 입은 뒤 자결했다.
다른 일부 공격자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사망했다.
따라서 공격에 참여한 18명이 모두 살아남아 정치적인 활동을 계속한 것은 아니다.
자수와 처형
사건 직후 일부 공격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막부의 관료에게 자수했다.
대표적으로 사이토 겐모쓰와 사노 다케노스케, 구로사와 주자부로, 하스다 이치고로 등이 있다.
이들은 노중이었던 와키사카 야스타카의 저택으로 이동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막부는 이들을 체포하고 수감했다.
이후 일부는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정식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암살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도주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치적인 명분을 가진 행위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가의 최고위 정치인을 암살한 행위에 대하여 막부가 형사적인 처벌을 진행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세키 데쓰노스케의 도피
현장 지휘자였던 세키 데쓰노스케는 암살 이후 도주했다.
그는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신분을 감추고 생활했다.
그러나 1861년 에치고 지역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에도로 이송되어 1862년 6월 8일 처형되었다.
세키는 암살계획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었지만 사건 이후 약 1년 7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다른 가담자들과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이후 소설과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살아남은 가담자들
사건에 참여한 공격자 가운데 장기간 생존한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일본의 역사사전에서는 18명의 현장 가담자 가운데 가이고 사키노스케와 마스코 긴파치가 목숨을 유지한 인물로 기록된다.[2]
다른 가담자들은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이후 수사와 처벌, 도피생활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결과는 정치적인 암살에 성공했다고 해서 가담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안정적으로 실현하거나 새로운 권력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8명이 모여 막부의 최고 실권자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바꾸려고 했던 일본의 정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 은폐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막부와 히코네번이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을 즉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사건 현장에서 목이 잘려 사망했다.
그러나 히코네번은 그가 습격을 받았지만 부상을 입은 상태로 귀가했다는 취지의 보고를 제출했다.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당시 일본의 번은 다이묘의 가문 계승과 영지 유지가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였다.
특히 다이묘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가문의 존속과 영지의 처리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히코네번에서는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을 즉시 발표하지 않고, 후계자와 영지 문제를 정리할 시간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의 문서에는 이이 나오스케가 습격을 받았지만 부상으로 귀가했으며, 일단 치료와 휴식을 취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미 현장에서 참수당한 상태였다.
아이치현 공문서관이 보존한 당시의 사료에는 이이 나오스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작성된 보고서가 남아 있다.[1]
목이 잘려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을 일단 다쳤으니 집에서 쉬고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암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가문 계승과 영지 제도 속에서 다이묘의 사망 발표가 심각한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혼란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으로 막부에서는 최고위 실권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또한 히코네번에서는 가문의 정치적인 지위와 후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따라 막부와 히코네번의 정치인들은 사건 이후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대로였던 이이 나오스케가 사라지면서 막부의 정치적인 의사결정체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이 사건 이후 막부에서는 대로를 대신하여 노중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히코네번에서는 이이 나오스케와 측근 나가노 슈젠의 정치적 연결이 약화되고 가로들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설명한다.[5]
결과적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한 개인의 사망을 넘어 막부와 히코네번의 정치적 권력구조를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막부의 정치적인 권위 약화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에도 막부에 심각한 정치적인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의 최고 실권자였으며, 대외정책과 쇼군의 후계자 선정, 반대파에 대한 처벌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 에도성 바로 앞에서 암살되면서 막부가 수도의 치안과 최고위 정치인의 안전조차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정치적인 반대세력이 국가의 고위 정치인을 직접 공격하는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막부는 암살자들을 추적하고 처벌했지만,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 이후 정치적 혼란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존왕양이 운동과 정치적인 암살,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했다.
그러나 사쿠라다문 밖의 변 하나로 막부의 붕괴가 확정되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에도 막부는 이후에도 약 7년 동안 정치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막부의 붕괴를 직접적으로 결정한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막부의 권위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공무합체 정책
이이 나오스케의 사망 이후 막부는 조정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당시 막부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는 가운데 고메이 천황과 조정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었다.
막부는 천황과 쇼군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회복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이 공무합체(公武合体)였다.
공무합체는 조정의 권위와 막부의 정치적인 권력을 결합하여 일본의 통치체제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이다.
가즈노미야는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이었다.
1862년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조정과 막부 사이의 정치적 협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존왕양이 운동을 비롯한 여러 정치세력의 반발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일부 급진적인 정치세력은 기존의 막부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는 방식으로는 일본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 말기의 정치적인 갈등은 계속 확대되었다.
존왕양이 운동과의 관계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존왕양이 운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존왕양이는 천황의 권위를 존중하고 서양 열강의 정치적·군사적 압력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당시 일본에서는 막부의 개항정책과 조정의 정치적 권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러한 사상이 확대되고 있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가담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행동을 천황의 뜻과 국가의 정치적인 질서를 지키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막부를 유지하면서 정책을 개혁하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막부 자체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과의 통상 자체를 거부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했다.
따라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다양한 존왕양이 운동 가운데 무장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시다 쇼인과의 관계
요시다 쇼인은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발생하기 전인 1859년 11월 21일 처형되었다.
따라서 그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을 실행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건은 정치적인 배경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쇼인은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했던 안세이 대옥으로 처형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막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고 천황 중심의 정치적 질서를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막부의 고위 정치인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쇼인의 사상과 행동은 막말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된다.
그러나 쇼카손주쿠의 제자들이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직접 조직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사건을 실행한 세력은 주로 미토번 출신 낭인들이었으며, 쇼인의 주요 제자들이 활동했던 조슈번과는 정치적인 기반이 달랐다.
또한 쇼인의 제자들과 미토번 출신 암살자들이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두 사건 모두 막부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반발이 급진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정치적인 반대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처형되었고, 이듬해에는 다른 지역의 급진적인 무사들이 실제로 막부의 최고 실권자를 암살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막말의 정치적 갈등이 점차 무력적인 충돌과 암살로 확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과의 관계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에서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막부의 정치적인 권위를 약화시키고 여러 번들이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막부의 최고 실권자가 무장집단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기존 정치질서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을 확대했다.
이후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 여러 지역의 정치세력들은 막부에 대한 반발과 정치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서 미토번과 사쓰마번이 곧바로 막부 타도를 위한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정치적인 연합은 이후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또한 막부의 붕괴에는 서양 열강의 압력과 국가재정 문제,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여러 번의 군사개혁 등 복합적인 원인이 존재했다.
따라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하나이지만, 메이지 유신을 직접적으로 결정한 유일한 사건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사쿠라다문
사건이 발생한 사쿠라다문은 에도성의 주요 성문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에는 도쿄도 지요다구에 위치한 고쿄의 외곽 성문으로 남아 있다.
정식 명칭은 외사쿠라다문(外桜田門)이다.
에도 시대에는 외사쿠라다문과 내사쿠라다문을 구분했다.
현재 외사쿠라다문은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성문의 일부는 에도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수리와 복원을 거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도쿄도 공식 문화재 안내에 따르면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발생한 장소는 현재의 경시청 앞 부근에 해당한다.[6]
흥미롭게도 오늘날 일본에서는 경시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쿠라다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경시청 본부가 사쿠라다문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쿠라다문은 일본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면서 현대 일본 경찰조직과도 관련된 지명이다.
특히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와 오늘날 경시청이 있는 장소가 서로 가까워 역사적인 장소로서의 의미가 남아 있다.
당시의 기록과 그림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록과 그림도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공격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남긴 문서와 사건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 중요하다.
하스다 이치고로의 그림
공격에 참여했던 하스다 이치고로(蓮田市五郎)는 이후 자신이 경험한 전투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 그림은 《사쿠라다문 밖의 변도》(桜田門外之変図)라고 불린다.
하스다는 암살사건 이후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생활 중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특히 이 그림에는 공격자들과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 전투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자료는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이 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재 원본은 일본 이바라키현의 현립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바라키현립도서관은 해당 그림의 디지털 자료와 해설을 제공한다.[7]
그러나 직접 가담자가 제작한 그림이라고 해서 모든 장면이 실제 사건을 완전히 정확하게 재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그림에는 제작자의 기억과 정치적인 입장, 표현방식 등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기록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라타 조로쿠의 편지
오무라 마스지로는 당시 무라타 조로쿠(村田蔵六)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사건 발생 12일 뒤인 1860년 구력 3월 15일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에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이 습격당한 상황과 공격자들의 이름, 양측의 피해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문화유산 온라인은 이 편지가 사건 발생 직후의 정보를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하는 자료라고 설명한다.[8]
이러한 자료는 사건이 발생한 뒤 일본의 여러 지역에 얼마나 빠르게 소식이 전달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정보가 반드시 정확하게 전달되었던 것은 아니므로 여러 기록을 비교하여 사건의 실제 경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이 가문의 기록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이이 가문과 관련된 역사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하고 있다.
특히 《이이 가문 사료》 제26권에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 이후 막부와 히코네번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공격자들이 제출한 문서와 히코네번의 보고서, 사건 이후의 조사와 정치적인 대응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암살사건의 실제 전개뿐 아니라 당시 막부가 정치적인 위기를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5]
대중문화
소설 사쿠라다문 밖의 변
일본의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는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소재로 역사소설을 집필했다.
작품의 제목은 《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ノ変)이다.
이 소설은 암살사건의 준비 과정과 실행, 이후 가담자들의 도피와 처벌 등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현장 지휘자였던 세키 데쓰노스케의 생애를 중심으로 사건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이후 영화로 제작되었다.
2010년 영화
2010년에는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개봉했다.
감독은 사토 준야이며, 주연은 오사와 다카오가 맡았다.
오사와 다카오는 세키 데쓰노스케를 연기했으며, 기타오지 긴야가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이부 마사토가 이이 나오스케를 연기했다.
영화는 암살계획과 사건의 실행, 이후 가담자들의 도피와 처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암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2010년 10월 16일 일본에서 개봉했으며, 상영시간은 약 137분이다.[9]
다만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극영화이므로 실제 기록과 극적인 연출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평가
막부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타격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막부의 최고 실권자가 수도의 중심부에서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에도 막부는 약 250년 동안 일본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쇼군과 막부의 정치적인 권위는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막부가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이 나오스케가 추진했던 정치적 탄압이 오히려 급진적인 반발을 확대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치적 암살의 문제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국가의 정치적인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의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의 고위 인사를 살해한 사건이다.
특히 자신들의 정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무력과 암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이이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을 통해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사실과 그를 암살한 행동이 정당했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다.
따라서 이 사건을 단순히 선량한 개혁파가 독재자를 처단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복잡한 측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암살자들은 막부의 정치적 탄압에 반발했지만 자신들 역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하는 행동을 선택했다.
결과와 의도의 차이
암살자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하면 막부의 정치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막부의 정치적 권위가 더욱 약화되고 여러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과 폭력적인 충돌이 확대되었다.
또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후 사망하거나 처벌받았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정치적인 암살이 계획한 목표와 실제 역사적 결과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암살자들은 막부를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막부의 붕괴를 앞당기는 정치적 혼란을 확대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결과가 암살자들이 처음부터 막부의 붕괴를 의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남긴 문서는 막부 자체에 대한 반역을 부인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
사쿠라다문 밖의 변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여러 정치적인 사건과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했다.
1862년에는 사카시타문 밖의 변이 발생했으며, 1864년에는 금문의 변, 1866년에는 삿초동맹 등이 이어졌다.
또한 1867년 대정봉환과 1868년 보신전쟁을 거치면서 막부의 정치체제가 붕괴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이 사쿠라다문 밖의 변 하나의 결과로 발생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의 군사적 압력과 여러 번의 정치적 이해관계, 사회경제적인 변화 등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일본의 정치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연표
| 날짜 | 사건 |
|---|---|
| 1853년 | 매슈 페리의 일본 내항 |
| 1854년 | 미일화친조약 체결 |
| 1858년 | 이이 나오스케 대로 취임 |
| 1858년 7월 29일 |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
| 1858년 |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쇼군 계승 |
| 1858년 | 무오밀칙 전달 |
| 1858~1859년 | 안세이 대옥 |
| 1859년 11월 1일 | 하시모토 사나이 처형 |
| 1859년 11월 21일 | 요시다 쇼인 처형 |
| 1860년 초 | 미토번 출신 낭인들의 이이 나오스케 암살계획 구체화 |
| 1860년 3월 24일 | 사쿠라다문 밖의 변 발생, 이이 나오스케 암살 |
| 1860년 | 암살 가담자들에 대한 추적과 처벌 |
| 1861년 | 세키 데쓰노스케 체포 |
| 1862년 6월 8일 | 세키 데쓰노스케 처형 |
| 1862년 | 사카시타문 밖의 변 |
| 1862년 |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가즈노미야의 결혼 |
| 1866년 | 삿초동맹 |
| 1867년 | 대정봉환 |
| 1868년 | 메이지 유신 |
| 2010년 | 영화 《사쿠라다문 밖의 변》 개봉 |
여담
- 1860년 3월 24일 발생한 정치적 암살사건이다. 일본의 구력으로는 안세이 7년 3월 3일이었다.
-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에도성의 외사쿠라다문 밖이다.
- 현재의 도쿄도 지요다구에 해당하며, 오늘날에는 경시청 본부 앞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 당시 에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양력으로 3월 하순에 해당하지만 상당한 눈이 내렸다는 점에서 사건을 묘사한 역사화와 소설 등에 눈이 자주 등장한다.
- 이이 나오스케는 약 60명의 호위 인력을 대동하고 에도성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암살에 참여한 사람은 18명이었다.
- 이 가운데 미토번 출신이 17명이었으며, 사쓰마번 출신은 단 한 명이었다.
- 따라서 미토번과 사쓰마번이 공식적인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막부를 공격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 실제로는 각 번의 공식적인 명령체계를 벗어난 낭인들이 중심이 된 암살이었다.
- 암살자들의 현장 지휘자는 세키 데쓰노스케였다.
- 사쓰마번 출신의 아리무라 지자에몬은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베는 데 직접 관여했다.
- 그러나 아리무라 역시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으며, 현장에서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은 약 60명의 호위 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습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 그렇다고 호위무사들이 모두 도망쳤던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이 공격자들과 전투를 벌이다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 히코네번 측에서는 현장이나 이후 부상으로 사망한 무사가 8명이었다고 기록하는 자료가 있다.
- 공격자들 역시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 일부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다른 사람들은 부상으로 자결하거나 막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암살에 성공했다고 해서 가담자들이 이후 새로운 권력자가 된 것은 아니다.
- 가담자 대부분은 메이지 유신을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 현장 지휘자였던 세키 데쓰노스케는 약 1년 7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1862년 처형되었다.
- 사건의 중요한 배경은 안세이 대옥이다.
- 이이 나오스케는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반대로 미토번의 급진적인 무사들이 암살을 계획하는 원인이 되었다.
-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제거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 정작 막부의 최고위 실권자가 자신이 다스리는 에도의 중심부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의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준다.
- 흥미롭게도 히코네번은 이이 나오스케가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즉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당시에는 다이묘의 가문 계승과 영지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망을 공식적으로 처리할 시간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 실제로는 목이 잘려 사망했지만 일단 부상을 입고 귀가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 목이 잘려 죽은 사람을 일단 다쳐서 집에서 쉬고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 이는 당시 일본의 번과 가문 계승제도가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참간취의서》를 남겼다.
- 이 문서에서는 이이 나오스케가 막부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천황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암살자들은 자신들이 막부 자체에 반역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밝혔다.
- 따라서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은 막부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하여 막부의 정치를 개혁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그럼에도 사건 이후 막부의 정치적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 암살자들의 의도와 실제 역사적 결과가 서로 달랐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다.
- 당시 일본에서는 정치적인 반대파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었다.
-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폭력은 일본의 정치적인 문제를 즉시 해결하지 못했다.
- 오히려 이후에도 여러 정치인과 관료들이 암살당했으며,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했다.
- 요시다 쇼인은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발생하기 4개월 전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 다만 쇼인 역시 정치적인 암살계획을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막말의 급진적인 정치사상과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다.
- 쇼인의 제자들은 주로 조슈번 출신이었으며,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미토번 출신 낭인들이 주도했다.
- 따라서 사건을 쇼카손주쿠 출신들이 직접 계획한 암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 사쿠라다문 밖의 변 이후 막부는 조정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했다.
- 대표적인 사례가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이었다.
-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막부의 권위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 이이 나오스케가 사망한 뒤에도 막부는 약 7년 동안 정치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 따라서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막부가 바로 붕괴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 현재의 외사쿠라다문은 일본의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 오늘날 일본에서는 경시청 본부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쿠라다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 현장은 현재 경시청 건물 부근에 위치한다.
- 1860년 당시의 사건을 묘사한 그림도 여러 점 남아 있다.
- 그 가운데 공격에 참여했던 하스다 이치고로가 직접 그린 《사쿠라다문 밖의 변도》는 중요한 사료다.
- 당시의 모습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이 그림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 그러나 직접 참여한 사람이 그렸다고 해서 모든 장면이 완전히 정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 기록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 2010년에는 사건을 소재로 한 일본 영화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개봉했다.
- 주연 배우는 오사와 다카오이며, 세키 데쓰노스케의 생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 이 영화는 암살 자체뿐 아니라 사건 이후 가담자들의 도피와 처벌까지 다룬다.
-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정의로운 개혁파가 악한 독재자를 제거한 사건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이이 나오스케는 서양 열강의 군사적인 압력을 피하기 위해 개국을 추진했지만 정치적인 반대파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 반면 암살자들은 정치적인 탄압에 반발했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폭력을 선택했다.
- 이러한 사실은 양측의 정치적인 행동을 서로 다른 기준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 결국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정치적인 탄압이 무장 암살을 불러왔고, 그 암살이 다시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정치적인 혼란을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관련 문서
- 안세이 대옥
- 이이 나오스케
- 세키 데쓰노스케
- 아리무라 지자에몬
- 요시다 쇼인
- 하시모토 사나이
- 나가노 슈젠
- 마나베 아키카쓰
- 도쿠가와 나리아키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도쿠가와 이에모치
- 도쿠가와 이에사다
- 고메이 천황
- 가네코 마고지로
- 다카하시 다이치로
- 사이토 겐모쓰
- 하스다 이치고로
- 사카시타문 밖의 변
- 미토번
- 사쓰마번
- 히코네번
- 에도 막부
- 에도성
- 사쿠라다문
- 고쿄
- 경시청
- 무오밀칙
- 미일수호통상조약
- 미일화친조약
- 흑선 내항
- 매슈 페리
- 존왕양이
- 미토학
- 공무합체
- 가즈노미야 지카코
- 막말
- 메이지 유신
- 대정봉환
- 보신전쟁
- 삿초동맹
- 금문의 변
- 정치적 암살
- 정치적 탄압
- 일본의 역사
각주
- ↑ 1.0 1.1 아이치현 공문서관 - 사료로 읽는 막말유신의 중대 사건
- ↑ 2.0 2.1 2.2 2.3 2.4 2.5 일본대백과전서 - 사쿠라다문 밖의 변
- ↑ 미토 검정 - 사쿠라다문 밖의 변 관련 역사자료
- ↑ WEB 역사 가도 - 사쿠라다문 밖의 변과 미토 낭인들의 도검
- ↑ 5.0 5.1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 이이 가문 사료 제26권
- ↑ 도쿄도 문화재 안내 - 고쿄와 외사쿠라다문
- ↑ 이바라키현립도서관 - 《사쿠라다문 밖의 변도》
- ↑ 일본 문화유산 온라인 - 무라타 조로쿠의 서신
- ↑ 영화닷컴 - 《사쿠라다문 밖의 변》(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