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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蘇定方
생년월일592년
사망일667년
국적당나라
출생지기주 무읍현
직업장군
추가 정보
경력좌무후중랑장
우둔위장군
좌효위대장군
좌무위대장군
형국공

헬터키와 갓본의 원흉.

본명은 소열(蘇烈)이고 정방(定方)은 자인데, 그냥 소정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서쪽으로는 동돌궐과 서돌궐을 때려잡고 중앙아시아까지 돌아다닌 당나라의 명장이다. 특히 서돌궐을 멸망시키고 백제 멸망전에 직접 참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 새끼가 튀르크인들을 중동으로 내몰아서 오스만 제국이 생겼다거나, 백제를 망하게 해서 일본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하면 중간 과정 몇백 년을 통째로 스킵한 소리다. 그래도 이 인간이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양쪽 역사에 존나 큰 흔적을 남긴 것 자체는 사실이다.

초기

592년 기주 무읍현, 현재 중국 허베이성 일대에서 태어났다.

원래 글에는 10살에 즈그 애비따라 동네 깡패들을 토벌하면서 장군인생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사서에 따라 10여 세 또는 15세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중학생쯤 되는 나이부터 전쟁터에 굴러다닌 건 맞다.

아버지 소옹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향병 수천 명을 이끌고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했는데, 소정방도 따라다니면서 항상 선봉에 섰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부대를 이어받아 반란군 장수 장금칭을 직접 죽이고 양공경의 군대를 수십 리나 추격해 박살냈다.

근데 처음부터 당나라 충신이었던 건 아니다. 수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두건덕 세력에 들어갔고 이후 유흑달 밑에서도 싸웠다. 유흑달 세력이 무너진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훗날 당나라군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인간은 당나라 건국공신 계열도 아니고, 한때는 오히려 당나라가 때려잡던 군벌 쪽에 몸담고 있던 놈이다.

돌궐정벌

630년 이정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공격할 때 소정방도 참전했다. 이정은 소정방에게 기병 200기를 주고 선봉으로 보냈는데, 소정방은 안개를 이용해 돌궐 본진 코앞까지 접근했다. 안개가 걷히자 힐리가한의 본진이 바로 앞에 보였고 그대로 달려들어 수십~100여 명을 죽였다.

힐리가한은 부하들과 함께 좆나게 튀었고 곧이어 이정의 본대가 도착하면서 남은 돌궐군이 항복했다. 이 공으로 소정방은 좌무후중랑장이 됐다. 다만 힐리가한을 이 자리에서 소정방이 직접 잡은 것은 아니고, 힐리가한은 도망쳤다가 이후 다른 당군에게 붙잡혔다. 그래도 기병 200기로 적 가한의 본진에 냅다 박아버린 미친놈인 것은 맞다.

656년에는 정지절을 따라 서돌궐의 아사나하로를 공격했다. 서돌궐 기병 2만 명이 당군과 싸우고 있는데 다른 부족의 기병 2만여 명까지 지원을 왔다. 이때 소정방은 산 너머에서 먼지가 나는 것을 보고 정예 기병 500기만 끌고 바로 달려들었다. 그 결과 서돌궐군이 박살나 20리 넘게 도망갔고 1,500여 명이 죽었으며 말 2,000필을 노획했다. 죽은 말과 버려진 갑옷 및 무기가 산과 들에 널렸다고 한다. 근데 부총관 왕문도가 소정방이 공 세우는 게 아니꼬웠는지 갑자기 "이렇게 싸우면 위험하다"며 군대를 꽁꽁 묶어놓았다. 심지어 황제의 별도 명령이 있다면서 구라까지 쳤다.

그 결과 병사와 말만 지쳐버렸고 제대로 진격도 못했다. 항복한 유목민들을 죽이고 재산을 나눠먹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소정방은 이에 반대하며 약탈품도 혼자 받지 않았다. 아 물론 뇌물을 준 건 아니다. 오히려 안 먹은 쪽이다.

657년에는 드디어 소정방이 직접 행군대총관이 되어 서돌궐 정벌에 나섰다. 아사나하로가 여러 부족을 끌어모아 10만에 가까운 기병을 동원했는데, 소정방 쪽은 회흘군 등을 합쳐 1만여 명 정도였다. 서돌궐은 쪽수가 적은 당군을 보고 만만하게 여겨 사방에서 포위했다.

소정방은 보병들에게 창을 빽빽하게 세워 고지대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따로 진을 쳤다. 서돌궐군은 보병진을 세 번이나 들이받았지만 뚫지 못했고, 지쳐서 진형이 무너지자 소정방이 기병으로 통수를 갈겼다. 그대로 서돌궐군이 붕괴했고 당군은 30리나 추격하며 수만 명의 사람과 말을 죽였다.

아사나하로는 계속 서쪽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석국, 즉 오늘날 타슈켄트 일대에서 붙잡혀 당나라로 압송됐다. 이걸로 서돌궐은 사실상 멸망했고 당나라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뻗었다.

소정방은 이 공으로 좌효위대장군과 형국공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서돌궐 멸망 이후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세력들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원문처럼 "소정방이 튀르크인들을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몰았고 그 후손이 셀주크와 오스만을 세웠다"고 바로 연결하면 좀 많이 나간다. 셀주크 제국을 세운 오구즈 튀르크의 이동은 이보다 몇백 년 뒤 여러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겹친 결과다.

그래도 굳이 디시식으로 요약하면 이 새끼가 중앙아시아 튀르크 세계를 한번 존나 크게 뒤집어놓은 것 정도는 맞다. 이 새끼가 튀르크인들을 서쪽으로 밀어내지만 않았으면 지금까지 로마 제국이 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당연히 개소리지만, 중앙아시아 역사가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 정도는 있다.

사결정벌

원문에는 사결이 중앙아시아에 있던 유목국가라고 되어 있었는데, 정확히는 사결(思結)이라는 철륵계 부족이 관련된 반란이다.

659년 도만이 소륵 등 서역 세력과 함께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우전을 공격하자 당 고종은 소정방을 보내 진압하게 했다. 소정방은 정예병 1만 명과 말 3,000필을 골라 하루 밤낮 동안 약 300리를 강행군해 도만을 기습했다. 도만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수백 리 밖에 있던 당군이 아침에 성 앞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전투에서 패한 도만은 성에 들어가 버텼지만 당나라 본대까지 도착해 사방을 포위하자 항복했다.

여기서 또 소정방 성격을 보여주는 일이 하나 생겼다. 도만을 수도로 끌고 갔더니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역자니까 죽이자고 했는데 소정방이 자기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당 고종도 소정방의 신의를 지켜주겠다며 도만을 살려줬다.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존나게 죽이고 다니면서 이상하게 항복 약속은 지키는 놈이었다.

백제정벌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13만에 달하는 당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당군은 산둥반도를 출발해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했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 일대로 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신라 태자 김법민이 병선 100척을 이끌고 소정방을 맞이했다.

둘은 작전을 짜서 당군은 바다와 금강을 통해 서쪽에서, 신라군은 육로를 통해 동쪽에서 진격한 뒤 7월 10일 사비성 부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원문의 "인천으로 가서 신라 왕자 김법민과 작전을 짠다"는 표현이 놀랍게도 대충 맞다.

사실 백제 멸망은 이 사람의 공이 크다.

솔까말 당시 의자왕은 재위 전반기에 신라를 상대로 상당히 우세했고 수십 개의 성을 빼앗아 신라를 존나게 괴롭히고 있었다.

다만 "소정방이 오기 전까지 의자왕이 신라한테 털린 적은 한번도 없었음 ㅇㅇ"은 과장이다. 전쟁이 몇십 년 동안 이어졌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전승만 한 건 아니고, 전체적으로 백제가 공세를 주도하던 시기가 길었다 정도가 정확하다. 결국 통춘추가 당나라라는 서버 외부 용병을 불러온 순간 게임의 규모가 달라졌다.

당군이 들어온다는 것을 안 백제는 일단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아 금강 하구의 기벌포·웅진구 일대에서 당군을 막으려고 했다. 그 와중에 계백이는 5,000명으로 통유신 5만명을 막으러 갔다. 백제입장에선 통유신같은 좆밥은 1/10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듯. 실제로 계백군은 황산벌에서 초반 네 차례의 전투를 이겼지만 결국 수적 열세를 못 이기고 전멸했다.

한편 소정방의 당군은 금강 하구에서 백제군과 맞붙었다.

백제군 수천 명이 죽고 나머지가 무너지자 당군은 밀물을 이용해 배를 금강으로 밀어올렸다. 원문처럼 백제군이 털리는 순간에 우연히 밀물이 와서 LTE를 탄 것이라기보다는, 당군이 애초에 조수의 흐름을 이용해 대규모 함대를 강 안으로 진입시킨 것에 가깝다.

당군은 수군과 육군이 함께 사비성을 향해 진격했고, 사비성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 주력과 다시 싸워 1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사비성까지 밀고 들어가 '나랑께 빨리 문좀 열어보랑께'를 시전했다.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일단 북쪽으로 도망갔고 왕자 부여태가 사비성에서 혼자 왕을 자처하며 버텼다. 그러자 의자왕의 손자 부여문사가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삼촌이 지금 왕 해먹으면 당군이 물러간 다음 우리 부자는 어떻게 되냐"고 반발하며 성을 넘어 항복했고 백성들도 줄줄이 따라갔다.

결국 부여태도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이후 의자왕까지 당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예식진이 의자왕을 붙잡아 당군에 넘겼다는 이야기도 유명한데, 중국 측 묘지명과 사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쟁이 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대신·장수 88명 및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그러나 백제 전체가 여기서 바로 GG 친 것은 아니었다.

흑치상지, 복신, 도침 등이 각지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소정방이 직접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한 성도 있었다. 소정방이 귀국한 뒤에도 부흥군은 몇 년 동안 버텼으며, 왜까지 군대를 보내 백제 부흥을 지원했다가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함대가 개발살났다.

따라서 "백제 왕족 포함 백성들이 모두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건 틀리다. 다만 상당수의 백제계 왕족·귀족·기술자·지식인들이 왜로 건너간 것은 사실이고, 이들은 이후 일본 고대국가의 문화와 제도 발전에 꽤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억지로 따지면 갓본의 원흉이라는 드립에도 한 세 단계 정도 건너뛴 연결고리는 있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훗날 충청도 대흥 지역에 이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을 모시는 소도독사(蘇都督祠)라는 사당까지 생겼다는 점이다. 백제 최후의 항전지 근처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를 신으로 모신 셈이라 상당히 기묘하다. 다만 이 사당이 정확히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당 현종 때 신라 정부가 백제인을 달래려고 만들었다" 같은 식으로 단정하면 안 된다.

고구려와의 전투

사실 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부터 고구려와도 싸웠다.

655년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자 당나라는 정명진 등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고 소정방도 이 원정에 참가했다. 당군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본 고구려군이 강을 건너 공격해왔는데 소정방 등이 역으로 쳐서 1,0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후 고구려의 외곽 성과 여러 촌락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그러니까 원문에 있던

“

통수를 쳐서 1000명의 기병을 골로보내고 마을 몇개를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

는 숫자와 대상에 약간 오류가 있을 뿐 대충 이런 사건에서 나온 이야기다. 정확히는 기병 1,000명만 죽였다는 기록이 아니라 고구려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숫자가 1,000여 명이라는 기록이다.

661년에는 더 큰 고구려 원정에 참가했다.

이번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총관이 되어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직행했다. 당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했고 소정방은 패강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뒤 마읍산을 점령하고 평양성을 포위했다. 백제를 반 년 만에 날려버렸으니 고구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평양성은 안 떨어졌다.

다른 방면에서 당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보급 상황까지 악화된 데다 겨울 폭설까지 겹치면서 662년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즉 소정방 개인이 전투에서 처참하게 털려 도망간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정복이라는 원정 목표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살아있던 동안 고구려를 끝내 무너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수·당과 수십 년 동안 계속 싸우면서 인구와 물자, 성곽과 주변 동맹국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특히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남쪽 동맹국을 완전히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결국 소정방이 못 뚫은 고구려는 그가 죽은 다음해인 668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내전을 벌이는 사이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했다.

소정방은 그 꼴을 딱 1년 못 보고 667년 76세로 죽었다.

당 고종은 소정방이 죽은 뒤 신하들에게 "이 인간이 나라에 세운 공이 있는데 왜 아무도 추증 얘기를 안 했냐"고 화를 냈고 뒤늦게 유주도독을 추증하고 장(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0대부터 전쟁터에서 뛰기 시작해서 60~70대까지 중앙아시아와 한반도를 왔다갔다하며 나라 몇 개를 직접 박살낸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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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이 괜히 붙어있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