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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시마즈 가문(島津氏)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이어진 일본의 유명 가문이다. 규슈 남부의 사쓰마국, 오스미국, 휴가국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전국시대에는 규슈 대부분을 제압할 정도의 세력을 구축하였다. 에도시대에는 사쓰마 번을 다스린 유력 도자마 다이묘 가문이었고, 막말에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주요 세력 가운데 하나로 활동하였다.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칭하였고 본성은 코레무네(惟宗)이었으며 이름에 忠나 久를 많이 넣었다.
메이지 이후 현재에도 이어져 장남의 이름에는 忠를, 차남에겐 久를 넣는다.
시마즈에 암군은 없다(島津に暗君なし)는 말처럼 유능한 인물들이 당주로 역임했기 때문에 가이에키 한 번 없이 소마(相馬), 사가라(相良), 소(宗) 가와 더불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까지 영지를 통치한 세계에서도 드문 가문이다.
다만 '시마즈에 암군은 없다'는 말은 가문의 역사를 평가하는 일종의 관용적인 찬사이지 실제 역대 당주가 모두 유능했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시마즈 가문 역시 내부 분쟁과 영토 상실, 상속 문제 및 정치적 실패를 여러 차례 경험하였다.
또한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동일한 영지를 완전히 변함없이 통치한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막부로부터 슈고직을 부여받은 무사 가문이었고, 이후 영국지배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과 에도 막부의 성립 등으로 영지와 정치적 지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 항목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을 주로 서술하였다.
가문의 특징
시마즈 가문은 일본 무가 가운데서도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으로, 중세부터 근세까지 규슈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시마즈라고 하면 사쓰마 번의 번주를 배출한 종가를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여러 분가와 방계 가문이 존재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문장은 동그라미 안에 십자가 형태의 십자 문양이 들어간 마루니주지(丸に十字)이다. 흔히 시마즈 십자문 또는 시마즈 가문이라고 불리며, 오늘날에도 가고시마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된다.
특히 전국시대의 시마즈 가문은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 형제가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규슈 남부의 여러 세력을 제압하고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규모 원정군에 패배하면서 확장한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에도시대의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일정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나, 막대한 영지와 류큐 왕국을 통한 교역 관계를 기반으로 유력한 다이묘 세력으로 남았다. 막말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주요 인물을 배출하면서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
가마쿠라 시대
초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히사가 사츠마,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맡아 가마쿠라 막부 내의 유력 고케닌이였으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能員の変)에 연좌되어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박탈당하였고 가마쿠라 시대 대대로 사츠마 슈고직을 물려받았다.
타다히사의 적자 타다토키가 조큐의 난(承久の乱) 당시 활약하여 와카사 슈고직과 각지의 마름(地頭)직을 얻었으며 난 후 타다히사는 에치젠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난 당시 사용했던 타치(太刀)는「강절」이라 불러지게 되었으며 겐지의 백기와 타다히사의 오요로이(大鎧)와 같이 시마즈 당주들이 대대로 물려받았다.
1227년, 타다히사의 사망으로 에치젠 슈고직은 타다토키가 상속받았으나 곧 고토 씨(後藤氏)에게로 돌아갔다.
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의 원구 토벌을 계기로 시마즈 가의 사츠마 입부가 시작되었으며 4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무네 대엔 본격화, 타다무네는 사츠마에서 사망한 첫 시마즈 가 당주가 되었다.
여기서 슈고(守護)는 가마쿠라 막부가 각 지역의 군사·경찰 사무 등을 담당하도록 설치한 직책으로, 후대의 독립적인 영주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었다. 지토(地頭)는 장원과 공령 등의 토지를 관리하고 수취 및 치안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초기 시마즈 가문은 오늘날의 가고시마 지역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지배한 독립 영주라기보다는 가마쿠라 막부의 권한에 기반을 둔 유력 무사 가문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초대 당주 타다히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들이라는 전승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혈통 관계는 후대의 계보 기록과 관련된 논쟁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남북조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쇠퇴하고 반막부의 힘이 강성해지자 5대 당주인 시마즈 사다히사는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토벌운동에 참여하였고 큐슈의 고케닌들과 함께 산제이 탄다이(鎮西探題)[1]를 공략, 다시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받게된다.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이 붕괴하면서 겐무 정권에서 이탈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츠에서의 전쟁에서 패하여 큐슈로 달아나온 것을 도와 타타라하마의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활약하는 등 큐슈 세력의 유력 다이묘로 활약하였다.
사다히사는 적자인 무네히사를 일찍 잃었기에 3남 모로히사와 4남 우지히사에게 각각 사츠마, 오스미의 슈고직을 분배하여 시마즈 씨를 분할 상속시켰다.
모로히사는 카즈사노스케(上総介)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 우지히사는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임명되어 있어 그의 자손은 오슈 시마즈 가(奥州家)로 불리게 되었다.
외척 세력을 상대할 때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였지만 그러한 외척 세력이 사라진 후엔 서로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분할 상속은 중세 일본 무사 가문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시마즈 가문처럼 광범위한 영지를 보유한 가문에서는 장기적인 권력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당시 규슈는 남조와 북조의 세력이 복잡하게 대립하던 지역이었으며, 각 무사 가문은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충성 대상을 바꾸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
타도해야할 적이 사라진 시마즈 양 가는 서로 대립하였으나 7대 당주인 코레히사와 그의 적자 모리히사와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소슈 가에 내분이 발발하려 했으나 오슈 시마즈 가의 당주 모토히사가 중재하여 주었으며 이것에 은의를 느낀 코레히사는 사츠마 슈고직 시마즈 가의 중요 가보를 물려주어 겉으로는 시마즈 가는 통일되었다.
후의 무로마치 막부에도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소슈 시마즈 가문이 멸망한 것이 아니였기에 양가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모토히사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시마즈 가문의 필두 가로였던 이쥬인 요리히사(伊集院 頼久)는 자신의 아들을 시마즈 가의 차기 당주로 세우기 위해 획책했으나 모토히사의 동생, 시마즈 히사토요가 이를 알아채 모토히사의 위패를 앗아가 8대 당주가 되었다.
이에 이쥬인 가는 앙심을 품게되고 이쥬인 가는 본래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쥬인 요리히사의 난(伊集院頼久の乱)을 일으켰으나 히사토요가 진압하였고 시마즈 가의 수호령국제(守護領国制)를 완성시켰다.
9대 타다쿠니의 대에 들어선 시마즈 가는 슈고다이묘로 확립되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으나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점이 존재하였다.
타다쿠니의 동생인 시마즈 모치히사(島津用久)의 명성이 늘어나자 형제간의 대립이 일어났으나 타다쿠니의 승리로 끝났다.
10대 시마즈 타츠히사 대는 오닌의 난이 발발, 동군에 가담하였다.(단 군사를 파병하지는 않았다.)
11대 시마즈 타다마사는 케이안 겐쥬(桂庵玄樹)를 초빙하여 사츠난학파(薩南学派)를 일으키는 등 학문의 연구에 힘썼으나 영지 내의 일족, 토착민의 반란 등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다 자진하였다.
이후 12대, 13대 당주는 모두 요절하여 토착민과 오스미의 키모츠키, 휴가의 이토를 누를 수 없었고 여기에 시마즈 일족들까지 더해져 시마즈 본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윽고 이자쿠 시마즈 가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와 삿슈 시마즈 가의 시마즈 사네히사(島津実久)가 본가에 비해 압도적인 세를 보이고 14대 당주인 카츠히사는 사네히사의 압박에 어머니의 친가인 오토모 가의 분고로 망명하였다.
이자쿠 시마즈 가의 타다요시・타카히사 부자는 사네히사와의 전투를 통해 사츠마와 오스미를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타카히사는 15대 당주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내분은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슈고 가문이 전국시대의 영국지배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 슈고라는 명목상의 지위만으로는 영지의 무사와 토착 세력을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실제 군사력과 가신단의 지지가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시마즈 타다요시와 그의 아들 타카히사의 등장은 본가의 권위를 회복하고 사쓰마 일대의 여러 세력을 재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전국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16대 시마즈 요시히사는 휴가의 이토 가를 구축하고 3주를 통일하였다.
1578년 큐슈 최대의 세력이였던 오토모 군을 미미가와 전투에서 박살내었으며 1581년 히토요시의 사가라(相良)를 항복시켰다.
미미가와 이후 쇠퇴한 오토모 대신 큐슈 최대의 세력이 된 히젠의 류조지(龍造寺)를 오키타나와테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박살내면서 큐슈 최대의 전국다이묘로 성장, 분고와 부젠 일부를 남겨놓고 큐슈 통일을 목전에 둔 시마즈는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러한 급성장에는 실전을 통해 익힌 철포 전술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얼마못가 1587년 오토모 소린의 구원요청에 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세가 큐슈정벌을 시작하자 몇 번의 전투 끝에 항복, 사츠마와 오스미, 그리고 휴가의 일부분만을 통치하게 된다.
시마즈 4형제
전국시대 시마즈 가문의 전성기는 시마즈 타카히사의 아들들인 요시히사,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 4형제의 활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시마즈 가문의 16대 당주로, 가문의 정치적 지도자이자 규슈 정복 사업을 이끌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이후에도 가문의 존속과 영지 보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시마즈 가문의 대표적인 무장 가운데 하나로, 미미가와 전투와 오키타나와테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후대에는 오니시마즈(鬼島津)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 시마즈 도시히사(島津歳久):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판단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며, 도요토미 정권과의 관계가 악화된 끝에 1592년 사망하였다.
-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무장으로 유명하다. 1587년에 사망했으며, 후대의 사쓰마 번주가 된 동명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본래 이름 타다츠네)와는 다른 인물이다.
특히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는 시마즈 이에히사와 아리마 하루노부의 연합군이 류조지 다카노부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전사하면서 규슈의 세력 균형이 크게 바뀌었다.
전술적 특징
시마즈군은 조총을 활용한 전술과 지형을 이용한 매복 및 유인 전술로 유명하다. 특히 적군을 유인한 뒤 측면에서 공격하는 방식은 흔히 츠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마즈군이 모든 전투에서 압도적인 소수 병력만으로 대군을 격파했다는 식의 설명은 후대의 군기물과 대중문화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전투의 병력 규모와 지휘체계, 전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조총의 활용이 시마즈 가문만의 독점적인 전술이었던 것도 아니다.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여러 다이묘가 조총을 도입하고 전술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시마즈 가문 역시 이러한 군사적 변화 속에서 전투 경험을 축적한 세력이었다.
규슈 정벌과 항복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규슈 정벌을 시작하면서 시마즈 가문의 확장은 중단되었다. 당시 시마즈 가문은 규슈 대부분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동원한 전국적인 군사력에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시마즈 요시히사는 항복하였고, 시마즈 가문은 새롭게 점령한 지역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주요 영지인 사쓰마와 오스미 및 휴가 일부 지역의 지배는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시마즈 가문은 규슈 통일에는 실패했지만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유력 다이묘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도시대
세키가하라의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도쿠가와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될뻔하였지만 순순히 항복하자 영지 안도를 인정받게된다.
이후 사츠마 번으로서 막번 체제에 포함되었으며 분가하여 사도와라 번(佐土原藩)이 탄생하였다.
오사카의 진 당시 한 번도 참전하지 않았기에 훗날 히데요리가 사츠마로 도주하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지만 별일 없이 넘어갔다.
에도시대 초기에 류큐를 침공, 정벌에 성공하여 아마미 제도와 류큐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호레키 치수와 같은 막부의 번 약화 정책을 겪는 등 압박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 타케히메가 시마즈 츠구토요의 후처로 시집 오거나 나리아키라의 양녀, 텐쇼인으로 유명한 아츠히메가 13대 쇼군인 이에사다의 정실이 되는 등 토자마 다이묘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막부와의 혼인관계도 맺었다.
막말에 이르러 28대 나리아키라 때 서양식 제철, 조선, 방직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막부와 깊은 족벌관계를 맺으면서도 반막부인 모리(초슈)와 손을 잡아 삿초동맹을 맺고 토막파의 중심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시마즈의 퇴각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측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끝났고, 시마즈군 역시 전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병력은 적군의 공격을 피해 전장에서 탈출하였는데, 이 사건은 시마즈의 퇴각(島津の退き口)으로 유명하다.
특히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해 일부 병력이 남아서 후방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철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시마즈 도요히사와 조카야마 도요히사 등 여러 무장이 전사하거나 희생되었다.
후대에는 이 퇴각을 시마즈군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묘사하였다. 다만 퇴각 당시의 정확한 병력 규모와 전술, 세부 경과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은 패배한 서군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시마즈 측과 도쿠가와 정권 사이에서 교섭이 진행되었고, 결국 본래의 주요 영지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는 시마즈 가문의 군사적 기반과 규슈 남부의 지리적 조건, 도쿠가와 정권의 정치적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류큐 왕국 침공
1609년 사쓰마 번은 에도 막부의 승인을 받아 류큐 왕국을 침공하였다. 시마즈 가문은 군대를 파견하여 아마미 제도와 오키나와 일대에 진출하였으며, 결국 류큐의 수도인 슈리성을 점령하고 국왕 쇼네이를 포로로 잡았다.
이 사건 이후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만 왕국 자체가 즉시 폐지된 것은 아니었으며, 국왕과 왕국의 행정체계가 일정 부분 유지되었다.
특히 류큐는 중국과의 조공·교역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사쓰마 번과 에도 막부는 이러한 관계에서 경제적·외교적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따라서 1609년의 류큐 침공은 단순히 시마즈 가문이 영토를 넓힌 사건을 넘어,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속된 류큐의 복합적인 정치적 지위와도 연결된다.
류큐 왕국은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점차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들어갔으며, 1879년 류큐 처분으로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다.
막말과 메이지 유신
19세기 중반 사쓰마 번은 서양 열강의 접근과 막부 체제의 위기 속에서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서양식 기술과 군사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며, 가고시마 지역에서 집성관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산업화 사업은 제철, 조선, 유리 제조 및 군사 기술 등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일본 근대 산업 형성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1862년의 나마무기 사건과 1863년의 사쓰에이 전쟁은 사쓰마 번이 서양 열강의 군사력을 직접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쓰마 번은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 이후 관계를 개선하고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후 사쓰마 번은 초슈 번과 협력하여 1866년 삿초동맹을 성립시켰으며, 막부 타도와 왕정복고를 추진하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쓰마 출신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군사·행정·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메이지 초기의 정치적 변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사쓰마 번 출신 세력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유신 이후에는 정부의 정책과 무사 계층의 처우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도 발생하였다.
메이지 이후
메이지에 이르러 시마즈 타다요시의 본가와 아버지 히사미츠의 타마자토 시마즈 분가 2집 모두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황가와 인척관계가 있는 사도와라 시마즈 가는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다수의 분가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의 외할머니는 시마즈 타다요시의 7녀, 치카코로 현재도 황실과 혈연관계에 있다.
위 문장의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는 과거에 작성된 표현이다. 아키히토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 일본 천황으로 재위하였으며, 2019년 4월 30일 퇴위하였다. 2019년 5월 1일부터는 그의 아들인 나루히토가 천황으로 재위하고 있다.
시마즈 가문은 메이지 정부가 도입한 화족 제도 아래에서 일본의 유력 귀족 가문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일본의 전후 헌법 시행에 따라 화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법적 신분과 특권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가문 자체는 계속 이어졌으며, 역사적 유산과 사당, 문화재 및 지역사회와 관련된 활동을 통해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역대 당주
다음은 시마즈 종가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당주 계보를 기준으로 정리한 명단이다. 중세의 분가 및 상속 과정과 17대 당주의 지위 등에 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
- 1대 당주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 사츠마・오스미・휴가・에치젠 등의 슈고. 장원인 시마즈에서 따와 시마즈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 2대 당주 시마즈 타다토키(島津忠時):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義)였으나 개명하였다. 시마즈 슈고였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의 시종으로서 섬겼다.
- 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島津久経): 이전 이름은 히사토키(久時)였으나 개명하였다. 시마즈 슈고였으며 시마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시마즈에 입국하였다.원구[2] 당시 활약하였다.
- 4대 당주 시마즈 타다무네(島津忠宗): 사츠마의 슈고로 시마즈 가의 사츠마 입부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시마즈 가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사츠마에서 죽었다.
- 5대 당주 시마즈 사다히사(島津貞久): 사츠마・오스미・휴고의 슈고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가담하여 활약하여 3주의 슈고직을 회복하였다.
- 6대 당주 시마즈 모로히사(島津師久): 사츠마 슈고로 사다히사의 3남이다. 소슈 시마즈 가의 초대 당주이다.
- 6대 당주 시마즈 우지히사(島津氏久): 오스미・휴가・치쿠고의 슈고로 사다히사의 4남이다. 오슈 시마즈 가의 초대 당주이다.
- 7대 당주 시마즈 코레히사(島津伊久): 사츠마 슈고로 모로히사의 장남이다. 소슈 시마즈 가의 2대 당주이며 모토히사에게 조상 대대로의 가보를 물려주었다.
- 7대 당주 시마즈 모토히사(島津元久): 이전 이름은 타카히사(孝久)로 사츠마・오스미・휴고의 슈고이다. 우지히사의 장남으로 오슈 시마즈 가의 2대로 가독을 통일하였다.
- 8대 당주 시마즈 히사토요(島津久豊):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우지히사의 차남이다. 시마즈 가문의 슈고 다이묘화를 확립하였다.
- 9대 당주 시마즈 타다쿠니(島津忠国): 이전 이름은 타카히사(貴久)로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이다. 시마즈 가문을 슈고 다이묘로서 안정시켰다.
- 10대 당주 시마즈 타츠히사(島津立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속하였다.
- 11대 당주 시마즈 타다마사(島津忠昌): 본래의 이름은 타케히사(武久)로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이다. 학문을 즐겼으나 국내 소란으로 괴로워하다 자진하였다.
- 12대 당주 시마즈 타다하루(島津忠治):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장남이다.
- 13대 당주 시마즈 타다타카(島津忠隆):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차남이다
- 14대 당주 시마즈 카츠히사(島津勝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삼남이다. 사츠마노카미 사네히사(薩摩守実久)의 횡포에 괴로워하다 후에 분고 국으로 도망갔으며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 15대 당주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카츠히사의 양자이며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의 적자이다. 9대 당주인 타다쿠니의 현손이었으며 내란으로 혼란한 사쓰마를 통일하였다.
- 16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良), 요시타츠(義辰)이며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3주를 통일하여 일시적으로 큐슈의 통일을 목전에 둔 시마즈 가의 전성기를 누렸다.
-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이전 이름은 타다히라(忠平)로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오니시마즈(鬼石曼子)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 18대 당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라고도 하며 초대 카고시마의 번주이다. 요시히사의 양자이며 요시로의 3남이다. 카고시마 성을 축성하였다.
- 19대 당주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이전 이름은 타다모토(忠元)로 카고시마 번의 2대 번주이다. 번주의 별장인 센간엔을 조성하였다.
- 20대 당주 시마즈 츠나타카(島津綱貴): 이전 이름은 노부히사(延久)로 카고시마 번의 3대 번주이다. 시마즈 츠나히사(島津綱久)의 적남이며 미츠히사의 적손이다.
- 21대 당주 시마즈 요시타카(島津吉貴): 이전 이름은 타다타케(忠竹)로 카고시마 번의 4대 번주이다. 키리시마 신궁(霧島神宮)의 신전을 조영하였다.
- 22대 당주 시마즈 츠구토요(島津継豊): 이전 이름은 타다야스(忠休)로 카고시마 번의 5대 번주이다.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타케히메와 결혼하여 에도 쇼군가와 인척관계가 되었다.
- 23대 당주 시마즈 무네노부(島津宗信): 이전 이름은 타다아키(忠顕)로 카고시마 번의 6대 번주이다. 츠구토요의 장남이다.
- 24대 당주 시마즈 시게토시(島津重年): 이전 이름은 히사카도(久門)로 카고시마 번의 7대 번주이다. 츠구토요의 차남으로 호레키 치수(宝暦治水)[3] 등 막부의 토목 공사에 고생하였다.
- 25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이전 이름은 시게카타(久方)로 카고시마 번의 8대 번주이다. 딸인 시게히메가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정실,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
- 26대 당주 시마즈 나리노부(島津斉宣): 이전 이름은 타다타카(忠堯)로 카고시마 번의 9대 번주이다. 분카 붕당 사건으로 실각하여 은거하였다.
- 27대 당주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温)[4]로 카고시마 번의 10대 번주이다. 번의 정치개혁을 강행하여 번의 재정을 회복하였으나 오유라 소동으로 실각하여 은거하였다.
-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이전 이름은 타다카타(忠方)로 카고시마 번의 11대 번주이다. 문명 개화적인 막말의 사현후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다.
- 29대 당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 이전 이름은 타다노리(忠徳)로 카고시마 번의 12대 번주이다. 나리아키라의 양자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적남이며 27대 당주 나리오키의 손자이다. 유신 후 공작이 되었다.
- 30대 당주 시마즈 타다시게(島津忠重): 공작이였으며 해군 소장을 역임하였다.
- 31대 당주 시마즈 타다히데(島津忠秀): 수산학자이다.
- 32대 당주 시마즈 노부히사(島津修久): 테루쿠니 신사[5]의 궁사[6]이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손자이며 일본의 제 79대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사촌관계이다. 1938년생으로 한국나이로 77세이다.
- 33대 당주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裕): 2024년에 시마즈 가문의 당주를 계승한 인물이다. 메이지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시마즈 종가의 계승을 보여준다.
- 32대 당주에 대한 원문의 나이 설명은 과거에 작성된 것으로 현재 시점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위 목록은 가문의 전통적인 계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중세의 일부 당주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학적 논쟁이 존재한다.
17대 당주에 대하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당주로 표기한 첫 사료는 막말에 편찬된『시마즈씨 정통계보(島津氏正統系図)』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17대 당주=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인식이 정착되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큐슈정벌 후 요시히사에게 오스미, 요시히로에게 사츠마를 하사하여 사츠마=시마즈라는 인식과 겹쳐져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니시모토 세이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요시히로는 17대 당주가 아니다라는 파가 생성, 여러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해 시마즈 종가가 요시히로를 시마즈 17대 당주로 인정하는데.
이 논쟁은 전통적인 가문 계보와 실제 역사적 권력 계승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와 관련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문을 대표하는 유명한 무장이었지만, 당시 시마즈 요시히사가 행사한 권한과 실제 가독의 계승 관계를 고려하면 요시히로가 정식으로 당주 지위를 승계했는지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따라서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표기하는 전통적인 계보와, 그를 독립적인 당주로 보지 않는 역사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시마즈 가의 분가
에도 시대 이전의 분가
- 에치젠 시마즈 가(越前家)
- 이자쿠 시마즈 가(伊作家)
- 오슈 시마즈 가(奥州家)
- 삿슈 시마즈 가(薩州家)
-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
- 소슈 시마즈 가(相州家)
- 호슈 시마즈 가(豊州家)
- 소슈 시마즈 가(羽州家)
- 하쿠슈 시마즈 가(伯州家)
- 신슈 시마즈 가(信州家)[7]
에도 시대 이후의 분가
- 카지키 시마즈 가(加治木家)
- 타루미즈 시마즈 가(垂水家)
- 시게토미 시마즈 가(重富家)[8]
- 타마자토 시마즈 가(玉里家)
-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今和泉家)
- 미야노조 시마즈 가(宮之城家)
- 나가요시 시마즈 가(永吉家)
- 히오키 시마즈 가(日置家)
- 사도와라 시마즈 가(佐土原家)[9]
- 하나오카 시마즈 가(花岡家)
- 신시로 시마즈 가(新城家)
- 토쿠시 시마즈 가(佐志家)
서가(庶家)
- 아소타니 씨(阿蘇谷氏)
- 이쥬인 씨(伊集院氏)
- 이즈미 씨(和泉氏)
- 우스키 씨(宇宿氏)
- 카츠라 씨(桂氏)
- 카바야마 씨(樺山氏)
- 카와카미 씨(川上氏)
- 키이레 씨(喜入氏)
- 사코미즈 씨(迫水氏)
- 사타 씨(佐多氏)
- 니이로 씨(新納氏)
- 노노야마 씨(野々山氏)
- 혼고 씨(北郷氏)
- 마치다 씨(町田氏)
- 야마다 씨(山田氏)
- 요시오카 씨(義岡氏)
- 요시미츠 씨(吉満氏)
분가의 정치적 의미
시마즈 가문은 장기간 규슈 남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여러 분가와 방계 가문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분가는 각자의 영지와 가신단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종가의 지배를 보조하거나 때로는 종가와 대립하기도 했다.
특히 남북조 시대에 분리된 소슈 시마즈 가와 오슈 시마즈 가의 대립은 가문의 상속 문제와 지역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국시대 이후 종가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주요 분가들은 시마즈 가문의 지배체계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사쓰마 번의 지배체계 아래에서 일문과 중신 가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일부 분가는 별도의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 가문으로 존속하였다.
공식 서명에서 사용하는 성
시마즈 당주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양자가 된 무로마치 초기에는「코레무네 아소미[10](惟宗朝臣) ○○」라고 서명하였으나 전국시대부터 닛타류 겐지를 자칭하면서부터「후지와라 아소미 ○○」라고 서명하였다.
에도시대부터 도쿠가와 가에서 마츠다이라 성을 부여받으면서「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 ○○」라고 서명하였다.
단 에도시대 중기의 문서에「미나모토 아소미 ○○」라고 서명한 것을 보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서명 방식의 변화는 일본 중세와 근세의 무사 가문들이 정치적 지위와 혈통적 정당성을 표현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당시 무사 가문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문 이름 외에도 고대의 씨성이나 조정에서 부여받은 관직명 등을 공식 문서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시마즈라는 가문 이름과 코레무네, 미나모토, 마츠다이라 등의 명칭이 동시에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서로 다른 가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련 서적
- 시마즈 가문서(島津家文書)
- 시마즈 사료집(島津史料集)
- 미키 야스시(三木靖)의『사츠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
- 『전국큐슈군기(戦国九州軍記)』
- 무라카와 코헤이(村川浩平)의「사츠마 씨에의 마츠다이라 씨 하사」『일본근세무가정부론(日本近世武家政権論)』
- 『렌파쿠 시마즈전기(裂帛 島津戦記)』
- 요시나가 마사하루(吉永正春)의『큐슈전국합전기(九州戦国合戦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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