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 Sim Yeong | |
| 일본어 이름 | 아오키 진에이(靑木沈影) |
|---|---|
| 본명 | 심재설(沈載卨) |
| 생년월일 | 1910년 9월 3일 |
| 사망일 | 1971년 7월 24일(통설)[1] |
| 국적 | 일본 제국 → 북한 |
정보상자의 사진은 왼쪽이 20대, 오른쪽이 중년기 모습이다.
개요
이완용도 이루지 못한 친일, 종북을 해댄 개쓰레기 민족반역자 새끼.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게서 돈 받고 일본제국을 찬양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참가하도록 독려했다.
진짜 고자됐어도 할말없는 새끼.
배우로서의 유명세가 어마어마해서 이수일과 심순애에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자기처럼 친일하고 월북한 친일 빨갱이 황철에게 실력으로 밀렸다.
해방 후엔 좆되기 싫다고 빨갱이가 되었고 종북짓을 했다. 6.25전쟁 터지기 전에는 주로 전설의 야인시대 64화에서 나온 것처럼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을 선동해 그들이 월북을 하도록 부추겼다. 6.25 전쟁 중에는 전쟁 이전에 월북을 반대했던 예술인들을 납북시켰다.
이 새끼 때문에 50~60년대 초반 대한민국 문화 예술계가 좆망해버렸다.
ㄴ 이 새끼 때문에 대한민국 문화 예술계 망했으니까 우파가 득세하는게 정상인데 왜 좌파가 득세하냐 젠장
나중에는 자신도 월북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숙청 대상에 걸려서 수용소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뒤졌다.
사망에 관련된 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친일 인명 사전에는 1971년에 지병으로 뒤졌거나 삼신탄광에서 일하다 1973년 폐결핵으로 뒤졌다는 설도 존재한다. 오 개꿀
여기 에서 실제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유튜브 영상으로도 추가함.

심영(沈影, 본명 심재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활동한 조선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로, 일제 말기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문화 활동에 참여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북한으로 넘어간 인물이다. 1910년 9월 3일에 태어나 1920년대 말부터 무대에 섰으며, 1930년대에는 당대의 유명 연극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의 영화 제작과 배우 양성에도 참여했으며, 북한으로부터 공훈배우 칭호까지 받았다.[5]
친일 행적은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붙은 것이 아니다. 만주 침략을 미화하는 영화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연극 활동 등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며, 이러한 행적 때문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수록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 연극단체에서 활동하고 북한으로 넘어가 사회주의 체제의 영화 산업에 종사했으니, 정치적 입장이 크게 달라진 인물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다만 해방 후 사상적 전향의 동기가 단순한 친일 경력 은폐였는지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원문에서 언급한 예술인들의 월북 선동과 6.25 전쟁 중 납북 주도에 대해서는 구별이 필요하다. 심영이 해방 이후 좌익 연극계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예술인을 직접 납북시켰다거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쇠퇴를 혼자 초래했다는 주장은 별도의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심영은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남한 내 선동 활동을 그대로 실제 행적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는 배우로서의 작품이나 친일 행적보다도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심영을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이 김두한 일당에게 총을 맞고 고자가 되는 장면으로 훨씬 유명하다. 특히 김영인이 연기한 심영의 대사인 "내가 고자라니!"가 인터넷 합성물의 대표적인 소재로 자리 잡으면서, 실제 역사 속 인물의 행적은 잘 몰라도 이름만큼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만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은 실제 배우 심영으로, 드라마의 등장인물이나 인터넷 합성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심영(야인시대)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생애
출생과 성장
심영은 1910년 9월 3일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과 경성부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함께 존재한다. 철원 출생설에서는 당시 철원군수로 재직하던 심완섭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설명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서울에서 품팔이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어 가족 배경부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철원군수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를 확정된 사실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학력 역시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연극 활동을 벌이다가 퇴학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반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학비 문제로 중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젊은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규 교육보다는 실제 극단 활동을 통해 배우로서 성장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심영이 활동을 시작한 1920년대 말의 조선 연극계는 전통적인 공연 방식에서 근대적인 신극과 대중극으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식 연극의 영향이 커지고 있었고, 새로운 극단들이 만들어지면서 전문 배우라는 직업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심영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배우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극배우로서의 활동
심영은 1929년 토월회의 공연 《간난이의 설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년에는 《남경의 거리》에서 주인공을 맡는 등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박제행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무대 경험을 쌓았으며, 《수일과 순애》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원문에서 언급한 이수일과 심순애와의 관련성도 이 시기의 무대 활동에 해당한다.
1935년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전속극단인 청춘좌의 창단 멤버로 참여하였다. 동양극장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대중극장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문 배우와 극단을 중심으로 흥행 연극을 제작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심영은 이곳에서 《검사와 사형수》의 사형수 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고, 언론에서도 그의 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37년에는 극단 중앙무대에 참여하였으며, 1939년에는 극단 고협의 창립과 운영에 관여하였다. 이 시기 심영은 이미 신인배우가 아니라 여러 극단을 거치며 상당한 경력을 쌓은 중견 연극인이었다.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당시 그의 명성은 영화보다는 무대 연기와 대중극에서 비롯된 부분이 컸다.
배우로서의 실력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배우인 황철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황철 역시 연극과 영화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인물로, 심영과 정치적 행적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다만 황철이 심영보다 연기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는 평가자와 작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서열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활동
심영의 생애에서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일제강점기 후반의 친일 활동이다. 처음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배우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거나 전시 동원에 협력하는 문화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9년 영화 《복지만리》에 출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영화는 만주를 새로운 개척의 땅이자 이상향처럼 묘사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과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만주국을 내세워 중국 동북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조선인들에게도 만주 이주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선전하고 있었다. 심영이 이러한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상업영화 출연과는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6]
1940년대에 들어서는 소속 극단인 고협이 일본의 전시체제에 부응하는 공연 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만주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하기도 했으며, 심영 역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본이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던 시기에 문화예술인으로서 전쟁 수행을 뒷받침한 셈이다.
또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국책영화 《그대와 나》에 출연하고 일본의 정책을 장려하는 글을 발표한 사실도 확인된다.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하는 선전은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려는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활동에는 분명한 정치적 책임이 따른다.
결국 심영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성공한 대중배우였을 뿐 아니라 그 지배체제의 선전 활동에도 가담한 인물이 되었다. 이후 해방된 조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때문에 그 행적은 더욱 자주 비판받는다. 물론 친일 행적과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은 각각의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해야 하지만, 서로 다른 정치체제의 선전 활동에 모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광복 이후와 좌익 활동
1945년 8월 광복 이후 심영은 박제행, 박영호 등과 함께 혁명극장을 창립하고 좌익 성향의 연극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는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가 해방 후에는 혁명과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연극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문화예술계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예술인들은 각자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여러 단체를 결성했으며, 공연과 영화 역시 사회적·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심영은 이 가운데 좌익 연극계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에는 조선연극동맹이 주관한 3·1절 기념 연극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력과 대비되어 비판받는 부분이다. 다만 그가 실제로 어떠한 계기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는지, 단순히 과거의 친일 경력을 숨기기 위해 정치적 입장을 바꾼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친일 경력이 있다는 사실과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확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적인 동기를 단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심영의 좌익 활동은 우익 청년단체와의 갈등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1946년 3월 발생한 총격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이며, 훗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극적으로 각색되면서 본인의 연기 경력보다도 더 유명해졌다.
월북
심영은 1947년에서 1948년 사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검거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영을 비롯한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북한으로 이동하였다.
월북 이후 심영은 북한의 연극·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북한은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영화와 연극을 정치선전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으며, 영화 제작 경험과 기술을 가진 인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경력 있는 배우와 영화인들은 북한 정권에 상당히 필요한 인재였다.
심영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연기과장을 맡았으며,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북한의 첫 극영화인 《내 고향》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북한 정권으로부터 공훈배우 칭호까지 받았다. 적어도 월북 직후에는 배우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으며 북한의 문화예술계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셈이다.
한편 심영이 남한 문화예술인들을 선동하여 월북시키거나 6.25 전쟁 당시 예술인들의 납북을 주도했다는 주장은 구체적인 행적을 구별해서 검토해야 한다. 해방 직후 좌익 연극계에서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과 전쟁 중 특정 인물을 납치하도록 지시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다. 현재 널리 확인되는 전기 자료만으로는 심영 개인이 대규모 납북을 직접 주도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실제 중앙극장 습격사건

1946년 3월 14일에 님의 공연을 끝내고 아내, 아내의 친구(여자)와 같이 집에 가다가 광통교에서 김두한이 붙었다.
김두한은 이들을 끝까지 미행하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심영의 아랫배를 총으로 쐈다.
사실 이건 김두한이 머리를 존나 잘 쓴 것이다. 문맹이라고 다 멍청하지 않다는 증거다.
김두한은 이 '광통교'라는 곳이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선에 있어서 그걸 이용해서 심영을 저격하고 구 경계선을 넘어서 사라졌다.
그러니 이 사건이 하필 이런데서 일어나는 바람에 종로구 관할인지 중구 관할인지 애매해졌고 결국 김두한을 잡기는 커녕 양쪽 구에서 서로 떠넘겨 사건이 흐지부지됐다.
이후에 김두한은 백병원을 찾아가 진짜로 심영을 죽이려 했으나 심영의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살려주게 되었다.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이 아니라 상하이 조가 총을 쏘고, 심영이 고환에 2발을 맞은 다음 고자가 되는 걸로 각색했는데 황당하게도 방송 당시에는 아무 반응이 없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5년 후에 대박이 났다.
생각해보니까 집에 가는 길에 인적 드문 곳에서 쐈던걸 극장에서 쐈다고 각색한건 존나게 미화한거 아니냐?
ㄴ'미화'라기보단 '왜곡'에 가까운데 드라마니까...
실제 사건의 경위
1946년 3월 14일 오후 8시 30분경, 심영은 서울 명치정의 국제극장에서 3·1절 기념 연극 《님》의 공연을 마친 뒤 아내와 함께 귀가하던 중 광통교 부근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했다. 이 사건은 1946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으며,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심영은 오른쪽 하복부를 총탄에 관통당하여 중상을 입었다. 사건 직후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김성진 외과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신문은 범인을 특정하지 않았으며, 심영의 증언을 바탕으로 범인이 누런 외투를 입은 장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즉 실제 피격 사건 자체는 당대의 언론 보도로 확인되지만, 총격범이 누구였는지는 당시 보도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훗날 김두한이 자신이 심영을 쐈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김두한의 대표적인 반공 활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7]
사건 장소 역시 흔히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다. 심영은 극장에서 공연하던 도중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공연을 마친 뒤 귀가하다가 총격을 당했다. 또한 광통교가 종로와 중구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경찰의 관할권 분쟁을 유도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일화에 가깝다. 실제로 경찰 사이에서 관할권 다툼이 벌어져 사건이 흐지부지되었다는 내용을 입증하는 당대의 명확한 수사기록은 확인하기 어렵다.
결국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심영이 1946년 3월 14일 광통교 부근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었고, 이후 치료를 받고 생존했다는 사실이다. 총격범과 범행 동기, 병원에서 다시 살해하려 했다는 이야기 등은 당대의 사건 기록과 후일의 회고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두한의 증언
총격범이 김두한이라는 이야기는 김두한 본인이 훗날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과정에서 심영을 저격했다고 주장하면서 널리 퍼졌다. 당시 김두한은 우익 청년단체와 관련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며, 해방 정국에서 좌익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한 인물이었다.
김두한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좌익 연극 활동을 벌이던 심영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으며,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심영을 뒤쫓아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또한 심영이 병원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찾아가 살해하려 했지만 심영의 어머니가 애원하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세부적인 이야기는 상당 부분 김두한의 후일 증언에 의존한다. 특히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과 당시 경찰의 수사 결과가 일치하는지, 실제로 병원을 다시 방문했는지 등은 별도로 검증해야 할 사항이다. 김두한은 자신의 과거 활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기억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 경우가 있어, 그의 증언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김두한이 우익 성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을 정당한 정치활동이라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당시 심영의 친일 행적과 좌익 활동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이를 이유로 사적인 무장집단이 배우를 총격한 행위는 별개의 폭력 사건이다. 해방 직후 정치적 대립이 얼마나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자가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 심영이 고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당시 신문은 총격으로 심영의 오른쪽 하복부가 관통되었다고 보도했으며, 고환이나 생식기에 직접 총탄을 맞았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이후 심영은 치료를 받고 배우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으로 넘어간 뒤에도 오랫동안 영화와 연극에 출연했다.
물론 하복부에 총을 맞았다고 해서 생식 기능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실제로 생식 기능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려면 의료기록이나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만으로는 이러한 주장을 확정할 수 없다.
《야인시대》에서는 총탄이 하복부가 아니라 고환에 명중한 것으로 각색되었고, 의사가 심영에게 더 이상 성관계를 할 수 없다고 통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심영이 절규하는 장면이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실제 심영 역시 고자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총을 맞고 살아남은 배우인데, 드라마에서는 고자가 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아예 고자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평생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면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건만 후세에 남은 대표적인 이미지는 고자라니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와의 차이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이 좌익 선전극을 공연하던 중 김두한 일당의 습격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실제 총격은 상하이 조가 담당한다. 극 중 심영은 고환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가며, 치료를 마친 뒤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자 절규한다. 이어서 김두한이 병원을 찾아가 다시 위협하지만 심영의 어머니가 애원하자 살려주는 전개가 이어진다.
실제 역사와 드라마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구분 | 실제 역사 | 드라마 《야인시대》 |
|---|---|---|
| 총격 날짜 | 1946년 3월 14일 | 1946년 3월을 배경으로 한 사건 |
| 총격 장소 | 광통교 부근의 귀갓길 | 극장 내부 |
| 총격범 | 당시에는 신원 미상으로 보도, 김두한이 훗날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 | 상하이 조 |
| 총격 부위 | 오른쪽 하복부 | 고환 |
| 고자가 되었는가? | 확인되지 않음 | 고자가 된 것으로 묘사 |
| 병원 방문 | 김두한의 후일 증언에 등장하나 독립적인 검증이 부족함 | 김두한이 병원을 찾아가 심영을 위협 |
| 이후 행적 | 치료 후 배우 활동을 이어가다가 1947~1948년경 월북 | 드라마의 전개에 따라 월북 |
특히 극장에서 공개적으로 총격을 당하는 장면은 극적인 연출을 위한 각색에 해당한다. 실제로는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배우를 뒤따라가 공격한 것이므로 사건의 성격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부분들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해당 장면이 방송된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폭발적인 인터넷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동영상 합성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심영의 절규가 재발굴되었고, 이후 한국 인터넷 문화의 대표적인 소재로 자리 잡았다. 결국 드라마 제작진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엉뚱한 방향으로 불멸의 명장면이 탄생한 것이다.
북한에서의 활동
영화 내 고향
심영은 월북 이후 북한의 초기 영화 산업에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1949년 제작된 《내 고향》으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가 제작한 최초의 극영화이다. 이 작품은 강홍식이 연출하였으며, 심영을 비롯해 문예봉, 박학 등 월북한 영화인들이 참여하였다.[8]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농촌을 배경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인 관필이 지주의 횡포와 일제의 탄압을 겪다가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린다. 작품의 중심적인 메시지는 항일무장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심영은 이 작품에서 유격대 공작원인 김학준 역으로 출연하였다. 북한의 첫 극영화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당시 그가 북한 영화계에서 차지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영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영화에 출연했는데, 월북한 뒤에는 항일투쟁과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 셈이다.
작품 자체는 북한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내용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 선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만 작품의 선전성과 별개로 초기 북한영화의 제작기술, 서사구조, 월북 영화인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배우와 영화계 간부
《내 고향》 이후에도 심영은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정찰병》,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 《두만강》, 《다시 찾은 이름》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다. 작품에 따라 북한의 혁명적 인물뿐 아니라 지주나 미군 장교 등의 적대적 인물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영화 출연 외에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후배 배우들을 교육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북한 정권은 그의 경력과 활동을 인정하여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러한 경력은 심영이 월북 직후 곧바로 몰락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오랜 연기 경력을 바탕으로 주요 영화에 출연하고 조직 운영과 배우 양성에도 참여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상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의 문화예술계는 정치적 변화에 따라 예술인의 지위가 크게 흔들리는 구조였다. 특히 남한에서 월북한 인사들은 북한 정권의 내부 권력투쟁과 사상검열에 취약한 위치에 있었으며, 심영 역시 말년에 숙청과 관련된 여러 증언의 대상이 되었다.
말년과 사망
1971년 사망설
심영의 사망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록은 1971년 7월 24일에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이러한 기록을 채택하고 있으며,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생애를 마친 것으로 설명한다.
다만 북한에서 활동한 월북 인사들의 말년은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심영 역시 실제로 언제부터 건강이 나빠졌는지,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말년에 정치적인 불이익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1973년 사망설과 숙청 의혹
다른 기록에서는 심영이 1971년에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추방되었고,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귀순한 김용규의 회고록 《시효인간》 등에 등장하며, 2014년 《주간경향》에서도 해당 증언을 소개한 바 있다.[9]
이 증언에 따르면 심영은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했으나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1953년 남로당계 인사들의 숙청 때 위기를 겪었으며, 1960년대에도 사상검토를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평양의 삼신탄광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노동을 하다가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심영이 죽기 전에 공산주의를 따랐던 것을 후회하고 자신을 서울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다만 이 내용 역시 회고록에 등장하는 증언으로, 실제 발언을 확인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자료는 부족하다.
반면 신상옥과 최은희 부부의 회고에 근거한 다른 이야기에서는 심영이 숙청으로 지위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탄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연극영화학교의 교원으로 지내다가 비교적 평온하게 생을 마쳤다는 설명도 전해진다. 이 역시 직접적인 목격 기록이 아니라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어 확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결국 심영의 말년과 정확한 사망 경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1971년 7월 2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1973년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증언과 기타 숙청 관련 기록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다만 정치적 숙청으로 탄광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확정된 사실처럼 서술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탄광 숙청설이 사실이라면 일본 제국주의를 선전하다가 해방 후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북한으로 넘어간 배우가 결국 자신이 선택한 체제의 정치적 숙청으로 몰락한 셈이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결말이지만, 역사적 아이러니와 실제로 확인된 사실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출연 작품
연극
- 《간난이의 설움》(1929년) - 본격적인 연극 활동의 시작으로 알려진 작품.
- 《남경의 거리》(1930년) - 주인공으로 출연한 초기 작품.
- 《수일과 순애》 -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
- 《검사와 사형수》 - 사형수 역으로 이름을 알린 대표적인 공연.
- 《춘향전》 - 방자 역 등으로 출연.
- 《빙하》
- 《상아탑에서》
- 《해당화 피는 섬》
- 《아름다운 고향》
- 《님》(1946년) - 3·1절 기념 공연으로, 이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피격당했다.
- 《원야》
- 《태백산맥》
- 《별하나》
영화
- 《아름다운 희생》 - 일제강점기 출연작.
- 《바다여 말하라》 - 일제강점기 출연작.
- 《은하에 흐르는 정열》 - 일제강점기 출연작.
- 《복지만리》(1939년) - 일본의 만주 개척과 침략을 미화한 작품.
- 《그대와 나》 - 일본의 지원병 정책을 선전하는 국책영화.
- 《망루의 결사대》 - 일제강점기 전쟁영화.
- 《내 고향》(1949년) - 북한의 첫 극영화. 김학준 역.
-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 여성 포수의 남편 역.
- 《정찰병》 - 미군 사단장 역.
-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 - 왕호 역.
- 《두만강》 - 지주 역.
- 《다시 찾은 이름》 - 지주 역.
평가와 논란
배우로서의 평가
심영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전문 연극배우였으며, 동양극장과 여러 극단에서 주연급 배우로 활약하였다. 특히 《검사와 사형수》에서 보여준 연기는 당대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대중극이 발전하던 시기에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했던 인물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주요 영화에 출연하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배우로서의 경력 자체는 결코 짧거나 보잘것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 연극사와 초기 북한 영화사를 연구할 때 빠뜨리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성취가 정치적 행적에 대한 비판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는 작품에 참여한 사실은 예술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으며,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북한 정권의 선전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즉 연기 경력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정치적 목적에 자신의 연기와 명성을 활용했는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반대로 정치적 행적이 비판받는다고 해서 그가 배우로서 쌓은 모든 경력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의 정치적 변화
심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활동과 해방 이후의 좌익 활동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일본군을 위문하고 국책영화에 출연했으며, 일본이 패망하자 좌익 연극단체에서 활동하고 결국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 때문에 심영은 정치적 신념보다 시대의 권력에 순응했던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을 미화한 인물이 북한에서 항일투쟁을 선전하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모순으로 지적된다.
다만 이러한 행적만으로 그의 정치적 동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출세와 생존에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해방 직후의 좌익 활동은 당시 문화예술계에서 나타난 폭넓은 정치적 변화의 일부였으며, 실제로 일제강점기 친일 경력이 없던 예술인들 역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심영 개인의 기회주의적 성향을 평가하려면 구체적인 발언과 행동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그럼에도 친일 경력과 북한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특정 정치체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중적 영향력을 침략전쟁이나 독재체제의 선전 활동에 활용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역사적 인물과 인터넷 캐릭터의 괴리
오늘날 심영이라는 이름을 접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강점기 연극계나 초기 북한 영화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대신 드라마 《야인시대》의 고자 장면이나 이를 활용한 인터넷 합성물을 통해 심영을 기억한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인물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캐릭터가 원래의 인물보다 훨씬 유명해진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 심영은 친일 행적과 월북 경력을 가진 배우였지만, 인터넷에서의 심영은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절규하는 코미디 캐릭터에 가까워졌다.
특히 합성물에서는 원래 드라마의 대사와 상황을 전혀 다른 맥락에 끼워 넣는 경우가 많아, 심영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인터넷 밈으로 독립하였다. 따라서 실제 심영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야인시대》의 심영을 활용한 유머는 구분해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정작 본인은 평생 배우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는데, 후세에는 자신이 직접 연기하지도 않은 드라마의 고자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 묘한 부분이다. 물론 그 드라마에서 자신을 연기한 배우는 김영인으로, 실제 심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담
"내고향" 이라는 이름의 북괴에서 처음 만들어진 영화에 출연했던 사실이 근래에 재발굴되었다.
여기서 이 새끼는 김학준 선생이라는 빨갱이(?)로 20분 정도 등장했다가 표정 연기가 병신이 된 채로 뒤지면서 퇴장한다. 그리고 실제 무뇌봉 또한 옥단역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북괴답게 스토리는 "님은 바로 혹부리우스가 이끄는 사회주의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는 드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북괴 새끼들이 영화 만든 뒤에 병신같이 후시 녹음을 해서 그런지 입 모양과 말이 안 맞는다. 이걸 심영물에 쓰이기엔 잘못 가져다 썼다가 남산에서 코렁탕 풀코스를 돌리거나 종북 낙인을 찍혀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기 때문에 소스로 쓰이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요즘은 심영물 자체도 퇴물이 되기도 했고.
- 실제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이며, 심영이라는 이름은 배우 활동에 사용한 예명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오키 진에이(靑木沈影)라는 창씨명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생년월일은 1910년 9월 3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출생지와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철원군수의 아들이었다는 설명과 서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설명이 함께 존재한다.
- 1930년대 동양극장의 인기 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연극 《검사와 사형수》를 통해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의 이미지와는 달리 당대에는 나름대로 유명한 배우였다.
- 황철과는 일제강점기부터 배우로 활동하다가 친일 행적을 남겼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연극계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 1946년 실제 총격 사건에서 총에 맞은 부위는 오른쪽 하복부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로 고자가 되었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오늘날 널리 알려진 고자 설정은 드라마의 각색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심영을 저격한 인물이 김두한이라는 이야기는 김두한의 후일 증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당시 신문에서는 범인을 신원 미상의 괴한으로 보도했으므로, 사건 자체와 범인의 신원에 관한 기록은 구분해야 한다.
- 월북 이후에는 북한의 첫 극영화 《내 고향》에 출연했다. 1949년 작품인 만큼 오늘날의 영화와 비교하면 연출이나 녹음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북한 영화사의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 북한에서는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월북 직후에는 상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 말년에 숙청되어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1971년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과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증언이 서로 엇갈린다.
- 실제 심영은 《야인시대》가 방영되기 수십 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이 고자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 쌓은 배우 경력이 고자라니 한마디에 묻힌다는 사실은 상당히 황당한 일이다.
- 드라마 속 심영을 연기한 김영인은 이 배역 이후 인터넷 합성물의 인기에 힘입어 널리 알려졌다. 실제 심영보다 그를 연기한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가 더 유명해진 셈이다.
- 인터넷에서는 심영이 총에 맞은 부위와 관련된 농담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실제 인물이 친일 활동과 월북 경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 인물의 정치적 행적과 대중문화 속 캐릭터의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달라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관련 문서
각주
- ↑ 《친일인명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71년 7월 24일을 사망일로 기록한다. 다만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존재하여 논란이 있다.
- ↑ 철원 출생설에 따르면 옛 철원관아 객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경성부 출생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생애 초기의 가족관계와 학력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 ↑ 다른 기록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학비 문제로 중퇴한 것으로 설명한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역시 퇴학과 졸업 기록이 엇갈린다.
- ↑ 가족관계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며 일부 세부사항은 확인이 어렵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영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영의 일제강점기 활동
- ↑ North Korea Humanities - 심영의 생애와 피격 사건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내 고향
- ↑ 주간경향 - 심영의 말년에 관한 김용규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