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티쉬는 개인취향이니 존중해 주도록 합시다.
夜這い(よばい)
일본에 실제로 존재했던 미친 풍습.
다만 흔히 인터넷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옛날 일본에는 정조 개념도 강간 개념도 전혀 없었고 아무 여자 집이나 들어가 닥치고 박아도 됐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존나게 과장된 설명이다. 요바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태가 크게 달랐고, 원래는 남성이 여성을 찾아가 구혼하거나 혼인관계를 맺는 통혼·처소혼 계통의 관습을 뜻했다. 후대 일부 농어촌에서 혼전 성관계나 마을 내부의 성적 교류와 결합된 형태가 존재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일본 전국이 야스 프리서버였던 건 아니다.[1]
유교 보급 전 일본의 성문화가 근대 이후보다 개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대와 신분에 따라 혼인규범·간통에 대한 제재·여성의 성적 행동에 대한 규범은 엄연히 있었다. 그러니까 정조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까지 하면 틀린다.
개요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 성행하던, 같은 마을에 사는 여자의 집에 밤에 남자가 찾아가는 풍습을 말한다.
한자로는 夜這い라고 쓰지만 어원 자체는 단순히 밤에 기어들어간다는 뜻에서 시작한 게 아니다. 사전적으로는 고대의 よばう에서 유래하여 남성이 구혼을 위해 여성의 집에 다니는 것을 뜻했고, 일본에서 처소혼·통혼 형태의 혼인이 일반적이던 시기에는 이것 자체가 정상적인 구혼이나 혼인 과정이기도 했다.[1]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남자가 밤에 여자 집에 찾아감 → 여자와 가족이 받아들임 → 계속 찾아다니다 혼인관계로 굳어짐
이라는 시스템도 있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여성이 남성의 집으로 들어가는 혼인방식이 널리 자리잡으면서 원래의 혼인제도로서 의미는 약해졌고, 이후에는 밤중에 이성의 집에 찾아가 성관계를 갖는 관습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해졌다.
민속학자 아카마쓰 게이스케(赤松啓介)가 수집한 긴키 지방 등의 사례가 특히 유명하다. 아카마쓰의 연구는 청년집단, 혼전 성관계, 필오로시(筆おろし, 남성의 첫 성경험), 마을 공동체 내부의 성생활 등 당시 정식 민속학에서 잘 다루지 않던 소재를 존나게 파고들어서 훗날 《夜這いの民俗学》으로 묶여 나왔다.[2]
즉 요바이는 야동에서 만들어낸 설정이 아니라 실제 민속학 연구대상이 맞다.
다만 그 형태가 합의된 연애·구혼에서부터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침입까지 존나 넓었기 때문에 요바이=합의섹스도 아니고 요바이=강간도 아니다. 시대와 마을마다 규칙이 달랐다.
원문의 "그 형태가 강간이든 합의 섹스든 모두 포함된다"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지만 어차피 정조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강간 개념도 없다는 부분은 틀리다.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며, 실제 여러 지역의 민속자료에서도 여성이 거부하거나 가족이 남성을 쫓아내고 두들겨패는 사례가 나온다.
어떻게 했나
인터넷에서는 요바이를 밤에 아무 집이나 들어가 마음에 드는 여자랑 떡치는 풍습정도로 설명하지만 실제 관습은 그렇게 무규칙하지 않았다.
마을에 따라서는 청년이 밤에 마음에 드는 여성의 집을 찾아가고 여성이 받아들이면 관계가 이루어졌다. 여성이 거부하면 돌아가야 했고, 가족이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남자가 몰래 집 안으로 들어오거나 여성이 싫다고 하는데 계속 접근하다가 들키면 집안 어른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개같이 얻어맞는 경우도 있었다.
단, 외부의 남자가 몰래 아가씨의 집에 들어와서 섹스하는 경우 걸리면 집안 어른들한테 개맞듯이 쳐맞는다고 한다. 물론 안 걸리고 유유히 빠져나갔다고 해서 현대 기준으로 합법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마을 내부자와 외부자의 차이였다.
일부 농촌공동체에서 요바이는 단순한 개인의 성관계가 아니라 청년집단과 마을공동체 내부의 관계망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같은 마을 청년에게는 사실상 허용되던 행동이 외지인이 하면 바로 침입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었다.
연애도 마을 공동재산처럼 관리하던 기묘한 시스템인 셈이다.
정조 개념이 없었다?
원문에서는
유교 보급 전 일본에서는 정조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은 그냥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같이 사는 거고 섹스는 그와 별개의 문제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인터넷에서 일본 성풍속 이야기할 때 존나 자주 나오는 과장이다.
일본에도 고대부터 혼인, 간통, 질투, 혈통, 상속을 둘러싼 규범은 있었다. 귀족사회와 무사사회, 농촌사회도 전부 같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헤이안 시대 귀족사회의 혼인은 오늘날처럼 부부가 바로 한집에서 사는 방식이 아니라 남편이 여성의 거처에 다니는 처소혼 형태가 흔했다. 그러다 관계가 안정되거나 자녀가 생기면 보다 고정된 혼인관계로 발전하는 식이었다.
이걸 현대인이 보면
"남자가 밤마다 여자 집에 가서 섹스함"
이 맞기는 한데 당시 사회에서는 그게 바로 혼인제도의 일부였다.
반대로 에도시대가 되면 무사계급을 비롯한 여러 계층에서 간통에 대한 제재도 엄연히 있었다.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규범도 강해졌으며, 지역과 계층에 따라 성규범 차이도 컸다.
그러므로
옛날 일본인은 섹스를 존나 개방적으로 했다
정도는 사례에 따라 맞을 수 있지만
정조도 결혼도 강간도 개념 자체가 없었다
까지 가면 일본을 무슨 야겜 세계관으로 만들어버린다.
여자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원문에는
아내들도 거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에 높은 신분의 남자의 아이라도 임신하면 자신의 지위도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요바이라는 풍습 전체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확인되는 내용은 아니다.
신분 높은 남성과의 관계나 그 자녀가 여성의 신분에 영향을 미친 사례 자체는 전근대 사회 어디서든 찾을 수 있지만, 이것을 근거로 농촌의 기혼여성들이 요바이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요바이를 자세히 조사한 민속자료를 보면 여성이 특정 남성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청년들 사이에서도 누가 누구를 찾아갈 수 있는지를 둘러싼 룰과 갈등이 존재했다.
동의를 존나 현대적인 계약서처럼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소한 남자가 꼴리는 대로 닥치고 박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는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청년조와 요바이
요바이를 이해할 때 꽤 중요한 게 청년조에 해당하는 일본의 若者組다.
근대 이전 일본 농촌에서는 일정 연령이 된 남성들이 젊은이 집단을 이루고 마을축제, 노동, 치안, 소방 같은 일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는 당연히 연애와 성관계도 얽혔다.
어떤 마을에서는 일정한 나이가 된 남성이 청년조에 들어가면서 성인으로 인정됐고, 그 과정에서 성경험을 갖는 의례가 있었다. 이른바 필오로시(筆おろし)라고 불리는 첫 성경험도 이런 민속과 연결돼 연구된다.[3]
지역에 따라 연상의 여성이 젊은 남성의 첫 성경험을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도 여기서 나온다.
원문에 있는
동네 아주매미들이 소년들 아다를 떼주기도 하고
라는 썰의 기반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이 역시 모든 일본 마을의 공통풍습은 아니고 특정 지역에서 수집된 민속사례다.
현대 기준으로 미성년자와 성인의 성관계가 있었다면 당연히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로 봐야 하며, 옛날 풍습이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현대 기준에서도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변질
근데 이 풍습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퍼지고 형태가 변형되어갔다. 마을 축제와 성적 풍습이 결합하거나, 동네 아주매미들이 소년들 아다를 떼주는 식의 풍습이 일부 지역에서 기록됐다.
원문의 동네 고추 큰 아재들이 어린 소녀들 처녀막을 뚫어주는 식의 이야기는 비슷한 성인식·성교육 풍습에 관한 인터넷 썰이 섞여 퍼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요바이의 일반적인 제도라고 보는 건 곤란하다.
마을 축제에서 배우자를 교환했다는 이야기도 일본 성민속 관련 자료와 인터넷에서 자주 나오지만 마찬가지로 지역별 특수사례를 일본 전체 풍습처럼 확대하면 안 된다.
중요한 건 당시 마을공동체에서는 성관계가 지금처럼 완전히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와 잤는지 마을 사람들이 대충 알고, 연애와 혼인에 청년집단이나 가족이 개입하고, 혼전 성관계를 반드시 인생 끝장나는 죄악으로 보지 않는 마을도 있었다.
민속학 연구에서도 요바이를 단순한 난교가 아니라 마을공동체 내부의 성적 관계와 상호부조 체계의 일부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에서는 근대화와 화폐경제의 침투로 농촌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이러한 관계 역시 쇠퇴했다고 설명한다.[4]
남의 자식은 같이 키웠다?
원문에는 남의 자식을 임신하게 되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니까 마을 사람들이 같이 키웠다고 적혀 있다.
이 역시 특정 공동체의 느슨한 친족관계나 공동양육 사례를 지나치게 일반화한 설명에 가깝다.
전근대 농촌에서 친척과 이웃이 노동과 육아를 서로 돕는 것은 흔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농촌에서 친부를 모르든 말든 모든 아이를 마을 공동소유처럼 키운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도 혈통과 가문인 이에(家)는 상속과 재산의 기본단위였고 친자관계는 존나 중요했다.
요바이가 존재했던 지역에서도 부부와 가족은 있었다.
따라서
아무랑이나 섹스함 → 누구 애인지 모름 → 동네에서 대충 키움
이라는 설명은 너무 야동 설정에 가깝다.
외지인과의 관계
오히려 타지에서 온 남자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반겼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요바이 관련 썰에서 자주 나온다.
좁은 마을 내부에서 계속 혼인하면 혈연관계가 가까워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외부인과의 혼인을 선호하거나 외부 혈통을 받아들이는 마을이 존재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도 근친상간으로 개판이 된 유전자를 희석하기 위해 외지인을 일부러 요바이시켰다라는 국가적·보편적 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혼인권은 마을마다 달랐다. 오히려 외지 남성이 마을 여성을 건드리면 존나게 맞고 쫓겨났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외부 남성과의 관계를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였다는 기록도 있다.
요바이라는 이름 하나 아래에 서로 정반대인 사례가 같이 들어가 있는 이유다.
강간과 요바이
요바이 관련 인터넷글에서 제일 위험하게 퍼진 오해가 그 시대에는 강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현대와 같은 형법과 동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라도 강제적인 성행위와 합의된 관계의 차이는 존재했다.
여성이 남성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소리쳐 가족을 부르고, 침입한 남성을 쫓아내거나 폭행하는 관습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특히 마을의 룰을 어긴 외지인이나 허가받지 않은 남성이 여성의 집에 침입하는 것은 그냥 두들겨맞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과거 사회의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기준이 현대보다 훨씬 허술했고, 공동체가 피해자 개인의 의사보다 집안이나 마을 체면을 우선시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요바이를 설명하면서 강간까지 허용된 좋은 일본문화라고 하면 당시 사람들의 복잡한 규칙을 싹 지우고 AV 설정만 남겨버리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되면서 이런 마을 단위 성풍속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어느 날 일본 정부가 오늘부터 정조 장착합니다하고 요바이를 전국금지해서 하루아침에 끝난 것은 아니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적인 호적·학교·징병·경찰제도와 국가 법률이 농촌까지 들어왔고, 도시화와 화폐경제가 확산되면서 기존 마을공동체와 청년조가 약해졌다. 혼인도 점점 근대적인 가족제도 안으로 편입됐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 역시 메이지 이후 토지소유 집중과 화폐경제 침투로 공동체의 상호부조 관계가 붕괴하면서 요바이 역시 쇠퇴한 것으로 분석한다.[4]
특히 청년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빠져나가고 학교교육과 군복무를 경험하면서, 마을 청년조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전통적 성관습이 유지될 기반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도 시골에서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았다.
민속학자들이 쇼와 시대에 직접 노인들을 인터뷰해 요바이 경험을 채록할 수 있었던 것도 20세기 초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 관습의 기억과 실제 사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마쓰 게이스케 자신도 요바이가 특정 역사단계에서 발생했다가 쇠퇴한 민속이라고 봤고, 지역에 따라서 그 소멸시기도 상당히 달랐다고 기록했다.[3]
그래서 요바이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은 지역에 따라서는 얼추 맞을 수 있지만 일본 전체에 적용되는 정확한 종료연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메이지 정부의 혼혈 정책?
원문에는
메이지 유신 때 인종을 개량하기 위해 백형, 흑형들과 유전자를 섞은 혼혈 정책도 일종의 요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건 빼고 봐야 한다.
메이지 일본에서 서양인을 두고 일본인의 체격이나 인종개량을 논한 지식인들의 우생학적 주장은 존재했지만, 정부가 백인·흑인과 일본 여성을 조직적으로 교배시키는 혼혈정책을 시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정책이 있었다고 해도 요바이는 마을사회에서 발생한 혼인·성풍속을 뜻하므로 국가 주도의 인종정책과 같은 개념으로 묶기도 어렵다.
인터넷에 가끔 메이지 일본이 백인 남성을 수입해 일본 여성을 임신시켰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아다니는데 역사적 근거가 빈약한 썰에 가깝다.
왜 일본 서부 이야기가 많나
요바이 이야기를 찾아보면 효고, 오사카 북부, 시코쿠, 규슈 등 서일본 사례가 유독 많이 나온다.
대표 연구자인 아카마쓰 게이스케의 주요 조사지역 자체가 효고현 하리마·셋쓰 일대였다는 영향이 크다.
아카마쓰는 당시 정통 민속학에서 외면하던 성생활을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존나 캐물어서 자료를 모았다. 그래서 오늘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 젊은이가 밤에 여자 집에 간다.
- 연상의 여성이 젊은 남자의 첫 경험 상대가 된다.
- 마을 청년들에게 연애의 암묵적인 순서가 있다.
- 외지 남자가 끼어들면 얻어맞는다.
- 마을 사람들은 누가 누구랑 자는지 대충 알고 있다.
같은 이야기 상당수가 이 계열의 민속조사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연구자가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는 이유로 서일본 전체가 요바이 천국이었다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요바이와 결혼
현대 기준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섹스와 혼인이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었던 지역이 있다는 점이다.
혼전 성관계가 있어도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여러 번 찾아가 관계를 맺다가 둘이 합의해 결혼하기도 했다.
반대로 처음부터 결혼상대를 찾기 위한 구혼방식인 요바이도 있었다.
그러니까
요바이 → 섹스
가 항상 정답도 아니고
요바이 → 결혼
이 항상 정답도 아니다.
사전에서 원래 의미를 남성이 구혼하기 위해 여성을 찾아가는 것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이것이다.[1]
현대 일본어에서 夜這い라고 하면 야밤에 상대의 잠자리로 들어가 성관계를 시도한다는 야한 의미가 거의 압도적이지만, 역사적 어원은 훨씬 넓다.
현대 서브컬처에서
페티쉬는 개인취향이니 존중해 주도록 합시다.
현대 일본에서 실제 풍습으로서의 요바이는 사실상 사라졌지만 단어는 존나 잘 살아남았다.
야동, 에로게, 동인지, 라이트 노벨 등에서는 밤에 여자 방으로 몰래 기어들어가는 장면을 夜這い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쪽에서는 역사적 통혼이고 마을공동체고 나발이고 그냥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감이라는 의미로 거의 다 소비된다.
그래서 현대 일본인에게 夜這い라고 하면 민속학 논문보다 이쪽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온천여관, 수학여행, 합숙, 시골마을 같은 배경에서 존나게 많이 등장한다.
"오늘 밤 요바이하러 간다"라는 대사는 이제 전통혼인을 신청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 방에 슬쩍 기어들어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던 단어가 수백 년 뒤 야동 태그로 살아남은 셈이다.
현대 일본에 아직도 하나?
메이지 이후에도 일부 오지에서 오래 남아 있었던 것은 맞지만 현재 일본 시골에서 전통 요바이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인할 만한 근거는 없다.
민속학에서 다루는 요바이는 기본적으로 이미 소멸한 과거의 풍속이다.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 성관계를 허용하는 관습이 오늘날까지 유지된다면 현대 일본 형법과 성폭력 관련 법률, 주거침입죄 등과 충돌하기 때문에 "옛날 풍습이니 괜찮다"는 것도 당연히 안 통한다.
뭐 어쩌면 일본 시골 마을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이 개인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건 요바이 전통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섹스하는 것이다.
어느 섬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일어나는 걸로 보아 역시 섬은 위험하다.
다만 현대의 성범죄 사건이나 스와핑 문화를 역사적 요바이와 같은 풍습이라고 보는 것은 민속학적으로는 별개의 이야기다. 공통점이라 해봐야 남녀가 섹스한다는 것 정도라 그런 식이면 틴더도 요바이가 된다.
여담
요바이는 일본의 성문화가 예전부터 존나 문란했다는 떡밥으로 인터넷에서 아주 사랑받는다.
실제로 전근대 일본의 일부 지역이 근대 이후보다 혼전 성관계에 관대한 편이었고, 마을 단위로 성생활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카마쓰 게이스케가 수집한 사례를 보면 현대인 눈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다.[2]
하지만 그걸
옛날 일본인은 누구나 남의 마누라랑 자고 어린 여자도 마음대로 따먹었으며 강간 개념도 없었다
로 압축하면 실제 역사보다 야동 설정을 설명하는 문서가 된다.
오히려 요바이가 재밌는 이유는 당시 농촌에서 연애와 섹스와 결혼이 지금처럼 완전히 개인의 일이 아니었고, 마을공동체의 규칙과 청년집단, 가족관계까지 한꺼번에 엮여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현대 일본에서는 그 복잡한 사회사적 의미는 거의 다 증발하고 밤에 남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기라는 훌륭한 야동용 단어만 살아남았다.
- ↑ 1.0 1.1 1.2 よばい, コトバンク.
- ↑ 2.0 2.1 赤松啓介『夜這いの民俗学・夜這いの性愛論』, 国立国会図書館.
- ↑ 3.0 3.1 民俗社会に見る青年の性, 青年心理学研究.
- ↑ 4.0 4.1 夜這いの解体・村の崩壊, 国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48,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