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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천주교 그 자체입니다.
이 문서는 천주교의 성인 또는 사람들이 '천주교'하면 쉽게 떠올릴 것이나 인물을 다룹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을 건드는 순간 전세계의 13억 천주교인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 너님에게 파문 어택을 날릴 것입니다.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을 욕보일 시 짱깨인구랑 맞먹는 가톨릭교도들의 마녀사냥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본 대상을 찬양하셔도 좋으나 너무 나가진 마십시오.
파일:요한 바오로 2세.jpg
성 요한 바오로 2세
Ioannes Paulus II
John Paul II
본명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
생년월일1920년 5월 18일
사망일2005년 4월 2일 (84세)
국적폴란드 폴란드
출생지폴란드 바도비체
추가 정보
별명대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직업교황, 가톨릭 성직자
종교가톨릭
경력제264대 교황
1978년 10월 16일 ~ 2005년 4월 2일
크라쿠프 대주교
1964년 ~ 1978년

264대 교황이시다.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로 1920년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이 분은 폴란드 사람인데, 존나 보수적이지만 (젊었을 때 폴란드에서 빨갱이들 조졌다)

ㄴ 정확히는 젊었을 때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다닌 것은 아니다. 청년 시절에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점령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 뒤 사제·주교·추기경이 되면서 공산당 정권 아래에서 종교 자유와 교회의 권리를 두고 정권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ㄴ 교황이 된 뒤 1979년 폴란드를 방문한 것은 폴란드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이후 등장한 연대노조와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강하게 지지했다. 그래서 동유럽 공산권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된다.

요한 23세한테 영향도 받고 해서 나중엔 꽤 유연해진다. 그러다가 교황이 됐다. 무려 400여년 만의 비 이탈리아 계 교황이자 최초의 동유럽 출신 교황.

ㄴ 젊은 주교 시절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직접 참가했다. 공의회는 요한 23세 사후 바오로 6세 때까지 이어졌고 보이티와도 여러 문서 작성에 참여했다.

ㄴ 교리적으로는 낙태·피임·여성 사제서품 등의 문제에서 상당히 보수적이었지만 다른 종교와의 대화,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 세계 각지의 인권 문제 등에서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ㄴ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됐다. 1523년 사망한 하드리아노 6세 이후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며 최초의 폴란드인·슬라브계 교황이었다.

김대중에게 생명의 은인이다.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전두환을 찾아가서 김대중이 죽음과 동시에 너 자동 파문...을 시전하는 바람에 전두환은 어쩔 수 없이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낮췄다가 2년 후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는 조건으로 가석방한 뒤 미국으로 추방했다.

ㄴ 김대중 구명에 직접 나선 것은 사실인데 과정은 조금 다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거나 파문을 협박한 것은 아니고, 1980년 12월 1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김대중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형이 감형되자 교황은 한국 정부에 감사 서한도 보냈다.

ㄴ 미국 정부 역시 김대중 처형에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의 서한 하나만으로 전두환이 물러섰다고 하기는 어렵다. 여러 국제적 압력이 동시에 작용했다.

ㄴ 김대중은 1981년 1월 사형이 확정된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3월에는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같은 해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했다. 단순 가석방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해외 망명에 가까웠으며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둘은 실제로 다시 만났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뒤인 2000년 3월 바티칸을 국빈 방문해 요한 바오로 2세와 회담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상당히 깊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1984년 첫 방한 때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김대건 안드레아를 포함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다. 당시로서는 로마가 아닌 지역에서 열린 매우 이례적인 시성식이었다.

1989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참석을 위해 다시 방한했다.

근데 존나 대인배인 것은, 교황이 길 가다가 뜬금 없이 총 맞고 쓰러졌는데 나중에 쏜 범인을 면전에서 용서해준 것이다. 범인이 감동받아서 울었다고 한다. 요한 23세의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여전히 가톨릭은 시대 흐름을 못 읽는 뒷방 늙은이 꼰대들의 좆목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이 사건 이후로 가톨릭과 교황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개선되었다.

ㄴ 정확히는 1981년 5월 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튀르키예인 메흐메트 알리 아자에게 총격을 당했다. 총탄 두 발을 맞고 중상을 입어 수술까지 받았지만 살아남았다.

ㄴ 놀랍게도 용서는 감옥에 찾아간 뒤에 처음 한 게 아니다. 총격 사건 나흘 뒤 병원에서 이미 자신을 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ㄴ 그리고 1983년 12월 27일 진짜로 아자가 수감된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가 둘이 직접 대화를 나눴고 다시 용서한다고 말했다.

ㄴ 범인이 감동해서 울었다는 부분은 널리 퍼진 이야기지만 당시 공식 기록으로 확인되는 핵심은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눴고 교황이 용서를 재확인했다는 것까지다.

그럼 뭐 하냐 잡혀서 감방 감.

결국 2005년에 나이 드셔서 선종하셨다. 후임은 베네딕토 16세.

ㄴ 정확히는 2005년 4월 2일 84세로 바티칸 사도궁에서 선종했다. 파킨슨병 등 여러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죽은 뒤에는 시성 절차도 존나 빨리 진행됐다. 2011년 5월 1일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됐고,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에 의해 요한 23세와 함께 시성되어 가톨릭의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