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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무풍지대, 야인시대와 달리 실제로는 싸움을 못하는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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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유지광은 역사와 민족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며 이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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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광이 자서전 <대명>에 남긴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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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천시에서 태어난 정치 깡패.
1927년 4월 21일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11월 12일 사망했다. 단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중퇴했고 한국전쟁 당시 갑종장교로 임관해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상세
형사양반, 부부통령과 함께 이천 3대장으로 있으면서 동대문파의 행동 대장으로 활약했다. 게다가 형사양반과 사돈까지 맺어서 동대문파 서열 탑5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호칭이 괴랄한 게 유지광은 형사양반에게 반말을, 형사양반은 유지광에게 존댓말을 했는데 이유인 즉, 전술한 사돈이라는 게 형사양반의 고모와 유지광의 형이 결혼했기 때문에 유지광은 형사양반의 사돈 숙부님이 된다. 그러니까 형사양반의 아버지와 유지광의 형이 동급이라는 얘기다. 형사 양반은 촌수 때문에 유지광을 존대한 것이다. 이 양반이 지휘한 사건 중에서 유명한 게 바로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이었다.
ㄴ 정확히는 유지광의 형 유지덕이 이정재의 고모와 결혼해 두 집안이 사돈 관계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나이와 조직 내 지위만 보면 이정재가 위였지만 족보상으로는 유지광을 함부로 대하기 애매한 관계였다고 전한다.
ㄴ 다만 이 둘이 실제로 평소 유지광은 반말하고 이정재는 존댓말만 썼다는 세부 묘사는 유지광의 회고와 후대 작품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이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나온 것과 달리 싸움을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인정했고 대신 권총을 잘 쐈다고.
ㄴ 유지광 스스로도 자신은 주먹으로 싸우는 쪽보다 조직을 관리하거나 총기를 다루는 쪽이었다는 취지로 회고했다. 후대 무풍지대와 야인시대에서는 전투력이 높은 주먹으로 묘사됐지만 실존인물은 김동진이나 이석재처럼 싸움 실력으로 유명해진 인물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단국대학교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갑종장교를 지원해 한국전쟁에 장교로 임관해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자 중위로 제대했다. 당시 갑종장교는 고졸이면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대학생이라면 지원하면 무조건 합격이었다. 그래서 김후옥(연세대학교 본교인 연희전문학교 출신), 신마적(고려대학교 본교인 보성전문학교 출신이며 실제로도, 야인시대에서도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황병관과 시라소니(시라소니의 형과 황병관이 메이지대를 나왔다.)과 함께 지금 기준으로도 엘리트에 속하는 엘리트 깡패중의 한 명이다.
ㄴ 단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다니다 전쟁이 터지면서 중퇴했고 1950년 가을 대구에서 육군 갑종장교로 임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위로 전역했다. 다만 당시 대학생이라고 지원하면 무조건 합격했다는 표현은 과장이고 갑종간부후보생 선발과 군사교육 과정 자체는 별도로 있었다.
물론 이승만, 윤보선 정권에서 대학생은 병역이 면제되었지만 전쟁통에 장교 신분이면 끗발이 엄청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갑종장교를 했다. 대학생이 병으로 군복무한 건 반인반신이 단기학보병을 만들면서부터였다.
ㄴ 전쟁 당시에는 평시의 대학생 병역연기·면제제도와 실제 전시 동원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으므로 단순히 "대학생이라 군대 안 가도 됐는데 끗발 때문에 장교를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유지광 본인이 어떤 동기로 갑종장교에 지원했는지도 후대 회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
유지광의 정치깡패 경력에서 제일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1957년 5월의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이다.
당시 민주당 등 야권이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자 자유당과 연결된 정치깡패들이 대거 난입해 연단을 부수고 참석자들을 폭행했다. 유지광은 이 현장에서 동대문파 조직원들을 지휘한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1]
4.19 혁명 이후 다시 수사를 받으면서 유지광은 1960년 6월 검찰 조사에서 이정재의 지시를 받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사건 당시에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벌인 것처럼 진술했지만 이후 말을 뒤집은 것이다.[2]
당시 자유당 정권과 정치깡패의 유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금도 한국 정치폭력사를 다룰 때 빠지지 않는다.
혁명재판
이석재와 함께 동대문파가 좆망하는 혁명재판 때 사형을 면하고 징역만 몇 년 살다 사회로 돌아갔다. 왜 얘가 사형을 면한 건지는 반인반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ㄴ 과정이 좀 복잡하다. 4.19 이후 먼저 일반 법원에서 정치폭력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다시 처벌됐다.
ㄴ 혁명재판에서는 처음 징역형이 나왔다가 이후 사형이 선고됐으며, 다시 무기징역, 이후 징역 15년으로 감형됐다. 정부 기록에도 유지광이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숨을 건졌다고 적혀 있다.[3]
ㄴ 군사혁명검찰부는 1961년 11월 3일 유지광과 임화수에게 사형을 구형했다.[4]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등은 실제로 사형당했지만 유지광은 살아남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가 서로한테 책임을 떠넘길 때 유지광 혼자만 그들의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려고 했고 그 이야기가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 박정희를 롬곡 흘리게 해서 특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ㄴ 이 이야기는 유지광 본인의 회고에서 특히 유명해졌다. 자신이 이정재를 살리려고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 했고 박정희가 그 태도를 높게 평가해 감형해 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감동해서 살려줬다는 것을 입증하는 공식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유지광 자신도 감형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썼으므로 말 그대로 설 중 하나다.
ㄴ 다만 유지광이 재판 과정에서 이정재를 감싸려 한 모습 자체는 여러 후대 기록에서 반복해서 언급된다. 이것이 드라마에서 유지광이 끝까지 이정재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데도 영향을 줬다.
최종적으로는 약 5년 6개월을 복역한 뒤 모범수로 가석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소 이후
출소 후 이천으로 돌아가서 슈퍼도 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살았다.
ㄴ 출소 직후에는 서울 종로3가에서 가게를 운영했고 한동안 조직 관련 인물들과도 계속 교류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후 1970년대 중반 고향 이천으로 내려갔다.
이천에서는 동부연쇄점이라는 유통업체를 비롯해 주류대리점, 용역업체, 식당, 농장, 건축·지하수 개발 등 여러 사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역사회 활동도 많이 했다. 이천농업고등학교 축구부를 지원하고 이천축구동우회와 지역 모임에 참여했으며, 청년들을 모아 선도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ㄴ 다만 이런 말년의 선행담 상당수는 유지광 본인의 회고나 주변인의 증언에서 나온 내용이라 정치깡패 시절의 행적을 세탁하는 서술이 섞였을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
1983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는 이천에 이정재의 묘비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고 밝혔으며, 이정재를 죽은 뒤에도 계속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치깡패 생활 자체에 대해서는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이승만과 자신들의 반공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
자서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데 성공했는지 말년에 <대명>이라는 자신의 자서전 겸 회고록 겸 참회록을 썼다.
ㄴ 유지광은 《정치주먹천하》 등 여러 회고록을 냈고 말년에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대명》을 남겼다. 문서 맨 위의 "역사와 민족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며"라는 문구도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대명》은 유지광 본인이 직접 자기 인생을 서술한 책이라 사료로 볼 때 주의가 필요하다. 정치깡패 시절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지만 본인과 이정재를 의리 있고 신념 있는 주먹으로 묘사하는 부분도 많다.
특히 유지광의 싸움 실력, 조직 내 위치, 이정재와의 관계, 재판 당시 행동 등 후대에 유명해진 일화 상당수가 본인의 회고록을 통해 퍼졌기 때문에 다른 자료와 교차검증 없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대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다. 유지광은 드라마 방영을 보지 못하고 전년도에 죽었다.
사망
결국 1988년 고향 후배 결혼식의 주례를 봐주다가 쓰러져 사망한다.
ㄴ 날짜는 1988년 11월 12일. 당시 61세였다. 강원도 영월의 결혼식장에서 후배의 결혼식 주례를 서던 도중 갑자기 쓰러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5]
평소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전한다.
장례식에는 과거 주먹계 인사들이 대거 모였고 일본 야쿠자나 중화권 조직 관계자들까지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해외 조직의 구체적인 참석 규모는 후대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이석재도 유지광 장례식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덕분에 이석재가 적어도 1988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간접 근거로도 자주 언급된다.
대명을 토대로 한 무풍지대에선 나한일이 유지광 역을 맡았고 나한일은 야인시대에서 금강으로 나온다.
ㄴ 무풍지대는 유지광의 《대명》을 원작으로 1989년 KBS에서 방영됐다. 유지광 자신이 죽은 다음해에 방송된 작품이라 본인은 완성된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실제 인물과 드라마의 차이
무풍지대와 야인시대 때문에 유지광을 동대문파 최강급 싸움꾼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인물의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유지광 본인부터 자신이 주먹싸움을 잘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동대문파에서도 직접 맞짱을 뜨는 싸움꾼보다는 이정재의 측근으로 조직을 관리하고 행동대원들을 지휘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반대로 군 장교 출신이고 권총을 잘 다뤘다는 이야기는 실제 유지광 관련 기록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또 드라마에서는 이정재와 유지광의 관계가 상당히 이상적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동대문파는 자유당 정권과 결탁해 야당 집회를 폭력으로 방해하고 반대파를 공격한 정치폭력조직이었다. 1960년 정부 기록영상에도 유지광이 재판에서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습격사건은 반공청년단과 경찰이 공모한 것이라고 폭로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6]
야인시대에서

실제 역사에서의 행보를 따라간다. 수감 후 이정재를 비롯한 모두를 배신한 임화수에게 죽빵을 날린다.
이정재와는 사돈 관계로 등장하며 이정재가 유지광에게 상당히 깍듯하게 대한다. 제대 후 설봉사에서 내려온 유지광에게 이정재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파에 들어간다.
실존인물과 달리 싸움 실력도 꽤 강하게 나온다. 작중에서는 지휘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직접 싸워도 웬만한 조직원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묘사된다.
정치깡패 활동과 혁명재판 역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정재의 죄를 자신이 대신 뒤집어쓰려고 하는 의리남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돼 있다.
이 부분은 유지광 본인이 《대명》에서 남긴 회고를 상당 부분 그대로 받아들인 설정이라 실제 역사보다 미화됐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무풍지대
1989년 KBS에서 방영된 무풍지대에서는 나한일이 유지광 역을 맡았다.
아예 유지광의 자서전 《대명》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 유지광이 사실상의 주인공이다.
드라마 시작부터 유지광이 후배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다가 쓰러지는 실제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 나오고 이후 그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지광 본인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지광과 이정재 쪽을 상당히 좋게 묘사한다. 정치폭력과 조직폭력의 실상을 다루면서도 의리와 반공 신념을 강조해 방영 당시에도 조폭 미화 논란이 있었다.
여담
- 본명은 유지광(柳志光)이며 1927년 4월 21일생으로 알려져 있다.
- 단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중퇴했다.
- 한국전쟁에서 갑종장교로 임관해 중위로 전역했다.
- 이정재, 곽영주와 함께 흔히 이천 3인방으로 불린다.
- 이정재와는 사돈 관계였다.
- 1957년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에 직접 가담했고 4.19 이후 이정재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2]
- 혁명재판에서 사형 판결까지 받았지만 무기징역, 다시 징역 15년으로 감형돼 살아남았다.[3]
- 실제로는 싸움 자체가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출소 후 이천에서 여러 사업과 지역사회 활동을 했다.
- 1988년 11월 12일 결혼식 주례 도중 쓰러져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5]
- 《대명》을 비롯한 유지광 자신의 회고록은 당시 주먹계와 정치깡패 연구에 참고되는 자료이긴 하지만 자기미화가 상당히 섞인 자료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 무풍지대는 유지광 사망 다음해인 1989년 방영됐다.
-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유태웅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