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이한림
국적대한민국
출생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안변군
본관평창 이씨
학력만주 신경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군사영어학교, 미국 육군보병학교, 국방대학원
직업군인, 기업인, 관료, 외교관
추가 정보
종교천주교
경력대한민국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건설부 장관, 국제관광공사 총재, 주터키·주호주 대사
계급육군 중장(예비역)
사망2012년 4월 29일
출생1921년 2월 10일
한자李翰林
훈장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이한림(李翰林, 1921년 2월 10일 ~ 2012년 4월 29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기업인, 관료, 외교관이다. 대한민국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1야전군사령관, 건설부 장관, 국제관광공사 총재, 주터키 대사와 주호주 대사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태어났으며,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당시 같은 군관학교를 다녔던 박정희와는 오랜 친분을 맺었지만,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서는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면서 정변 세력과 대립했다.

광복 이후에는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 당시 주요 야전부대와 군사기관을 지휘했다. 특히 육군 제9보병사단장으로 재직하면서 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했다.

1960년 10월 제1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이를 반대했다. 당시 그가 지휘하던 제1야전군은 정변 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주요 군사력으로 평가되었으며, 미국 측에서도 그의 역할을 중요하게 주시했다. 그러나 실제 진압작전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한림은 정변 세력에 의해 체포된 뒤 1961년 8월 강제로 예편되었다.

이후 한동안 군사정권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1963년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아 공기업 경영에 참여했으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건설부 장관을 지냈다. 건설부 장관 재임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으며, 이후 국제관광공사 총재와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개요

박정희와 군관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지만, 정작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이에 반대했던 대한민국 육군의 장군.

이한림은 한국 현대사에서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가진 군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박정희와 함께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참여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주요 지휘관으로 성장했고, 제6군단장과 육군사관학교장을 거쳐 1960년에는 제1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1야전군은 휴전선 방어를 책임지는 대한민국 육군의 핵심적인 전력이었으며, 이한림은 실질적인 병력 지휘권을 가진 최고위급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1961년 5월 16일, 오랜 친구였던 박정희가 일부 장교들과 함께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으며, 서울에 진입한 병력은 방송국과 주요 정부기관을 점령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전체가 정변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제1야전군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은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한림은 정변 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부 예비부대에 출동 대기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당시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 역시 이한림의 제1야전군을 정변 진압이 가능한 핵심 전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군 지휘부의 대응이 엇갈리고, 군사적 충돌이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진압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5·16 군사정변은 성공했고, 이한림은 정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후 중장 계급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군 생활도 끝났다.

군사정변을 일으킨 사람은 군관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는데, 정변을 막으려던 자신은 오히려 군복을 벗어야 했다. 권력을 잡은 친구와 그 친구를 막으려던 장군의 운명이 완전히 갈린 것이다.

그러나 이한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한동안 박정희 정권에 협력하기를 거부했지만, 이후 다시 공직에 복귀하여 박정희 정부의 건설부 장관을 지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될 당시 건설부 장관으로 재직했으며, 이후에는 국제관광공사 총재와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했지만, 훗날 그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정부에서 주요 공직을 맡았다는 점에서 이한림의 생애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생애

출생과 성장

이한림은 1921년 2월 10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창 이씨이며,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문은 한국 천주교 초기의 인물인 이승훈 베드로의 방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한림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생활했다.

그가 태어난 함경남도 안변 지역은 오늘날 북한의 강원도 안변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한반도의 청년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교육과 취업, 군 복무 등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일본이나 만주국의 군사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이한림 역시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에 설치된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와 동기생으로 생활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이한림은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만주국은 1932년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 이후 중국 동북부에 세운 괴뢰국가였다. 만주국군 역시 명목상으로는 만주국의 군대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관동군의 강력한 통제 아래 운영되었다. 따라서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외국의 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것과는 구분되는 경력이다.

특히 당시 만주국군에는 조선인 장교들이 다수 복무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고위 장교로 성장했다. 박정희와 이한림 역시 이러한 경력을 공유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한림과 박정희는 광복 이후 군 생활을 계속했지만, 군의 정치 개입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이한림의 만주국군 복무 경력은 훗날 친일행위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국군 장교 경력 등을 근거로 이한림을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러한 사실은 5·16 군사정변에 반대했다는 행적과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군사정변 당시의 정치적 태도가 일제강점기의 군 경력을 없애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일제강점기의 군 경력만으로 광복 이후 모든 행적을 동일하게 평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광복과 대한민국 국군 창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만주국도 붕괴했다. 이한림은 광복 이후 한반도 남부로 내려와 새로운 군사조직의 창설에 참여했다.

1945년 12월 5일에는 미군정 아래 설치된 군사영어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교했다. 군사영어학교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으로, 일본군과 만주국군 출신 장교를 비롯하여 여러 군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다.

이한림은 1946년 2월 26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이후 국방경비대의 중대장과 연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7년에는 연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육군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이한림은 이러한 군사조직의 확대와 정비에 참여했다.

1948년에는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유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9년 귀국했다. 이 시기 대한민국 국군은 정규군으로서의 조직과 지휘체계를 정비하고 있었으며,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새로운 군사제도와 전술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한림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6·25 전쟁

전쟁 초기의 활동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한림은 대한민국 육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 초기에 사단장과 군단 참모직 등을 맡았으며, 급속하게 변화하는 전선 상황 속에서 부대의 지휘와 작전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전쟁 초기에는 사단과 군단의 편제 및 지휘체계가 여러 차례 변경되는 혼란을 겪었다.

이한림은 1951년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작전교육국장, 육군보병학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작전과 교육체계의 정비에도 관여했다. 또한 1952년에는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근무했으며, 휴전회담의 한국군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은 그가 단순히 전투부대를 지휘한 장군이 아니라 정보와 작전, 교육, 군사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고위 장교였음을 보여준다.

제9보병사단장과 금화지구 전투

1953년 이한림은 육군 제9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제9보병사단은 6·25 전쟁 당시 중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부대로, 특히 백마고지 전투를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한림은 제9보병사단장으로서 금화지구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대응하는 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금화와 철원, 평강을 연결하는 지역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렸으며, 군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주요 도로와 계곡, 산악지형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선의 방어와 병력 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한림은 제9보병사단을 지휘하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최고 등급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의 은성무공훈장도 수훈했다.

또한 제9보병사단장 시절에는 한 번 결심하면 그대로 추진하는 성격 때문에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다만 이한림이 제9보병사단장으로 활동한 시기와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구분해야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에 벌어졌으며, 이한림이 사단장으로 부임한 것은 그 이후인 1953년이었다.

따라서 이한림을 백마고지 전투의 직접적인 지휘관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1]

제6군단장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이한림은 육군 제6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제6군단은 수도권 북부와 중부전선의 주요 지역을 방어하는 부대로, 대한민국 육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이러한 주요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 근무하면서 군사적 경력을 쌓았으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제6군단장 재직 당시부터 그의 군 생활은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군부에 정치적 협력을 요구하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했다.

이승만 정권과의 갈등

1956년 부통령 선거

1956년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며, 이기붕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한림은 당시 제6군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측에서 군부에 협조를 요구하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가 발생했다. 이한림은 군이 특정한 후보를 지원하는 데 반대했으며,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선거의 공정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 측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한림은 군단장 직책에서 물러나 국방대학원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선거 협조 요구를 거부한 데 따른 보복성 인사로 평가한다.

다만 당시 군부의 선거 개입이 부대마다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이한림에 대한 인사가 정확히 어떠한 절차로 결정되었는지는 관련 군 인사자료와 회고록 등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한림이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면서 당시 집권세력과 갈등을 빚었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1957년 7월 이한림은 제14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60년 10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이 기간 육군 장교들의 교육과 양성에 관여했다.

육군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육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핵심 교육기관이었으며, 특히 6·25 전쟁 이후 군사교육의 현대화와 장교단의 전문성 강화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한림은 이러한 시기에 사관학교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인의 정치적 중립과 군사적 전문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말기에 다시 한번 군의 정치 개입 문제가 발생했다.

3·15 부정선거 협조 거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당시 여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여러 국가기관과 공무원들을 동원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군부에도 선거 협조를 요구했다.

이한림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요구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그의 사망 당시 보도된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군 지휘부와 관계기관이 육군사관학교에 협조를 요구했지만 이한림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교장직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이한림은 부당한 인사에 반발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행적은 이한림이 5·16 군사정변 이전부터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에 비교적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다만 이한림이 3·15 부정선거 전체를 막았다거나 군부의 정치 개입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는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으로서 자신이 지휘하는 조직의 선거 개입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던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제1야전군사령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제2공화국에서는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내각을 이끌었으며, 군 내부에서도 이승만 정권 시기의 정치적 개입과 부정부패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졌다.

1960년 10월 이한림은 제1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1야전군은 한반도 중부 및 동부전선의 주요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조직으로, 북한의 공격에 대응하는 핵심적인 전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제1야전군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중요한 야전 지휘관 가운데 하나였으며,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1야전군은 서울에서 군사정변이 발생했을 때 진압군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한림은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재직한 지 약 7개월 만에 5·16 군사정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5·16 군사정변

군사정변의 발생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정변 세력은 서울의 주요 군사시설과 정부기관, 방송국 등을 점령했으며,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장면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정변에 참여한 병력은 대한민국 육군 전체와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울의 주요 시설을 신속하게 장악했고, 육군 지휘부와 정부의 대응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정변을 확대했다.

특히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은 정변 세력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으며, 장면 국무총리는 정변 소식을 듣고 피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법정부를 지지하면서 실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주요 지휘관 가운데 하나가 이한림이었다.

박정희와의 대립

이한림과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함께 다닌 동기생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두 사람은 대한민국 육군에서 계속 근무했으며, 오랜 기간 서로를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러나 이한림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과거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군의 선거 개입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장면 정부를 군사력으로 무너뜨리려는 박정희의 행동에도 반대했다.

특히 이한림은 군사정변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변 세력에게 중요한 위협이 되었다.

박정희와 이한림의 관계는 단순한 개인적 갈등이라기보다, 군의 정치적 역할을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이 충돌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군관학교에서는 동기였지만, 군인이 정치를 해도 되는지를 놓고는 서로 정반대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미국 측의 진압 구상

5·16 군사정변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와 군부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부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변 진압에 한국군을 동원하는 문제에서도 미국 측의 판단이 중요했다.

유엔군사령관이었던 카터 매그루더 장군은 군사정변 발생 직후 합법적인 장면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기존의 군사적 지휘체계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매그루더는 이한림의 제1야전군에 주목했다.

1961년 5월 17일 매그루더가 미국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한림의 제1야전군은 서울의 정변 세력을 압도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매그루더는 이한림이 예비부대 네 개 사단에 대기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합법정부에서 진압명령이 내려진다면 이를 실행할 의사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매그루더는 이한림의 권고에 따라 합법정부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측은 스스로 한국군에 진압작전을 명령하는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특히 장면 총리가 피신한 상태였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인물들이 병력 동원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매그루더는 미국 측의 독자적인 판단만으로 제1야전군을 서울에 투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정변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이 존재했고, 이를 지휘하던 이한림에게도 진압 의사가 있었지만, 정치적·군사적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2]

진압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이유

이한림이 군사정변을 반대했음에도 실제로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선 합법정부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장면 총리는 정변 발생 직후 피신하여 정부와의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적 충돌을 통한 진압에 반대했다.

또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정변을 진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정변 세력과의 관계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으며, 이후 정변 세력이 조직한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참여했다.

여기에 미국 측도 독자적인 진압명령을 내리는 데 신중했다.

당시에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 대규모 유혈충돌이 발생하면 전선의 방어태세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한림 역시 자신의 병력을 동원하여 정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인들끼리 충돌하고, 상황이 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한림이 처음부터 정변 진압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의 외교문서에는 그가 예비사단에 대기명령을 내렸고, 합법정부의 명령이 있다면 진압작전에 참여할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한림이 군사정변을 반대하면서도 단순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진압을 위한 준비와 의사는 있었지만, 최종적인 병력 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3]

체포와 강제 예편

군사정변 세력이 서울을 장악하고 군부의 주요 지휘관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이한림의 입지는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1961년 5월 18일 이한림은 정변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당시 제1야전군사령관이 정변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변 세력이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려 한 조치로 이해된다.

이한림의 체포로 제1야전군을 동원한 정변 진압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졌다.

이후 그는 반혁명 혐의로 구금되었으며, 1961년 8월 24일 육군 중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군인으로서는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만 이한림의 예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구금 및 조사 과정과 구체적인 법적 조치에 대해서는 보도와 회고록의 서술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를 모두 동일한 사건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이한림은 군사정변 당시 정변 세력에 반대한 주요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며, 군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공직활동도 중단했다.

강제 예편 이후

미국 체류

1961년 군에서 예편된 이후 이한림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에서 국제정치와 경제학 등을 공부했으며,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에서 수학한 경력이 공식 인물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군사정변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군에서 물러난 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한림은 오랫동안 박정희와 친분을 유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가 군사정변에 반대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군 경력과 행정능력을 갖춘 고위 장교 출신이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 측에서는 이한림에게 공직 복귀를 권유했으며, 이한림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정권 아래에서 국가의 행정업무에 참여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회복

이한림은 군사정변 직후에는 박정희 정권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이후 관계를 회복했다.

일부 회고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한림에게 여러 차례 공직 복귀를 요청했으며, 이한림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결국 경제개발과 공기업 운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63년 그는 수산개발공사 사장을 맡았다.

이후 1968년에는 진해화학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공기업과 산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 과정은 이한림의 정치적 행적을 평가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5·16 군사정변에 반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후 박정희 정부의 공직에 참여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한림을 평생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반정부 인사라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반대로 그가 이후 공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961년 당시 군사정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이한림은 군사정변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정변 이후 수립된 정부에서는 주요 행정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건설부 장관

건설부 장관 취임

1969년 2월 이한림은 박정희 정부의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건설부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토개발과 도로, 주택, 건설행정 등을 담당하던 중앙행정기관이었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산업시설과 도로, 항만 등 기반시설을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주요 공업지역과 항만을 연결하는 교통망의 확충을 중요한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다.

이한림은 이러한 시기에 건설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1971년 6월까지 재직했다.

그의 장관 재임 기간에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여러 사회간접자본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특히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은 그의 공직 경력 가운데 중요한 사건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완공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산업과 교통 기반시설은 오늘날과 비교하여 크게 부족했으며, 서울과 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물류와 산업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건설에는 막대한 재정과 기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사비와 경제적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존재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여러 건설업체와 군 공병부대 등이 참여하여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한림은 당시 건설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주무 부처의 행정업무와 사업 추진에 참여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도 참석했으며, 훗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되었다.

다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이한림 개인이 단독으로 추진하거나 완성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사업은 박정희 정부의 국가적 정책 아래 건설부와 여러 공공기관, 민간 건설업체, 군 공병부대 등 많은 조직과 사람들이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이한림은 해당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의 건설부 장관으로서 행정적 책임을 맡았던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4]

1961년에는 박정희의 군사정변을 막으려다가 군복을 벗었는데, 1970년에는 박정희와 함께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정치와 인간관계라는 것이 참 복잡하다.

국제관광공사 총재

1972년 7월 이한림은 제7대 국제관광공사 총재로 취임했다.

국제관광공사는 오늘날 한국관광공사의 전신으로, 대한민국의 관광산업을 육성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관광산업을 외화 획득과 경제발전의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1974년 2월까지 국제관광공사 총재로 재직하면서 관광산업과 관련된 공공사업의 운영을 맡았다.

그의 학력과 주요 공직 경력은 한국관광공사의 역대 최고경영자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5]

외교관 활동

주터키 대사

1974년 이한림은 대한민국의 주터키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터키는 한국전쟁에서 형성된 군사적·외교적 관계를 바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터키는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병력을 파견한 국가였으며, 대한민국은 이러한 역사적 관계를 중요한 외교적 자산으로 여겼다.

이한림은 군인 출신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와의 군사적·외교적 교류에서도 이러한 배경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떠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외교문서와 대사관 기록 등을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의 대사 재직 자체를 특정한 외교정책의 성공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주호주 대사

1977년에는 주호주 대사로 부임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과 수출 확대를 추진하면서 호주를 비롯한 여러 국가와 경제적·외교적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주호주 대사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 무렵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공개적인 정치활동이나 고위 공직에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후 언론 인터뷰 등을 거의 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사망

이한림은 2012년 4월 29일 오전 0시 30분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였다.

그의 사망 당시 언론에서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던 장군이자 5·16 군사정변에 반대한 주요 군 지휘관으로서의 행적을 소개했다.

또한 6·25 전쟁 당시의 군사적 공적과 건설부 장관, 국제관광공사 총재, 외교관 등의 경력도 함께 조명되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승훈을 비롯한 1남 3녀가 있었으며, 장례식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그는 생전에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여러 훈장을 수훈했다.

평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장군

이한림은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참여하고 6·25 전쟁에서 주요 부대를 지휘했던 고위 장교로, 특히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승만 정권 말기의 선거 개입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도 군인들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반대했다.

이러한 행적은 당시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도 군사정변에 대한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제1야전군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은 정변 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한 지휘관이었으므로, 그의 선택은 5·16 군사정변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미국의 당시 외교문서에도 이한림과 제1야전군이 정변 진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한림이 실제로 군사정변을 진압한 것은 아니었다.

합법정부의 정치적 지휘체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병력 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군사정변은 성공했다.

따라서 이한림의 역할은 군사정변을 막아 낸 인물이라기보다 군사정변에 반대했으며 실제 진압 가능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를 동원하지 못한 군 지휘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만주국군 경력과 친일 문제

이한림의 생애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일제강점기의 군 경력이다.

그는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일본의 통제 아래 있었던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만주국은 일본 제국이 중국 동북부에 세운 괴뢰국가였으며, 만주국군 역시 일본의 군사적·정치적 지배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한림은 이러한 경력을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그의 군사정변 반대 행적과 일제강점기의 군 복무 경력은 서로 구분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61년 군사정변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일제강점기의 행적에 대한 비판을 자동으로 없애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다는 사실만으로 광복 이후의 전쟁 수행과 군사정변 반대 행적까지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행적을 각각의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해야 한다.[6]

박정희 정부에서의 공직 활동

이한림에 대한 평가에서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5·16 군사정변에 반대한 뒤 박정희 정부의 주요 공직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어 강제로 예편되었지만, 이후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아 공기업 경영과 정부 행정에 참여했다.

특히 건설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부고속도로의 완공 시기를 함께했으며, 이후 국제관광공사 총재와 외교관을 역임했다.

이러한 경력은 군사정변 자체에 대한 반대와 정변 이후의 정부에 참여하는 행위가 반드시 동일한 정치적 판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한림이 공직 복귀를 결정한 구체적인 동기와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정치적 인식은 회고록과 관련 사료 등을 통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정권에 저항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동시에 공직에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1961년 당시 군사정변에 반대한 그의 태도가 처음부터 형식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한림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의 만주국군 장교,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 인물, 6·25 전쟁의 지휘관, 군사정변에 반대한 장군, 이후 박정희 정부의 장관과 외교관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역할이 한 인물에게 공존한 사례다.

여담

  • 이한림은 1921년 2월 10일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태어났으며, 2012년 4월 29일 사망했다. 향년 91세였다.
  • 본관은 평창 이씨이며, 천주교 신자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의 인물인 이승훈 베드로의 방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 박정희와 만주 신경군관학교 및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 그러나 같은 군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과 정치적 견해는 별개였다. 이한림은 1961년 박정희의 군사정변에 반대했다.
  •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했으며, 1946년 2월 임관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참여했다.
  • 6·25 전쟁 당시 제9보병사단장으로 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활동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 1953년 국가기록원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한림과 여러 장군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이 기록사진으로 남아 있다.
  • 제9보병사단장 시절에는 결심한 일을 강하게 추진하는 성격 때문에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 1956년 부통령 선거와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군의 선거 개입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57년 7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제14대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다.
  • 1960년 10월 제1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재임 도중인 1961년 5·16 군사정변을 맞았다.
  • 미국의 당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제1야전군은 군사정변을 진압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한림은 예비부대 네 개 사단에 대기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 그러나 정치적 지휘체계의 혼란과 군사적 충돌에 대한 우려 등으로 실제 진압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이한림은 1961년 5월 18일 정변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8월 24일 육군 중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 예편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에서 국제정치와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 이후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아 공기업 경영과 정부 행정에 참여했다.
  •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건설부 장관으로 재직했으며, 이 기간인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전 구간 개통되었다.
  • 1972년 7월부터 1974년 2월까지 제7대 국제관광공사 총재를 역임했다.
  • 1974년부터 주터키 대사를, 1977년부터 주호주 대사를 지냈다.
  •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에 포함되었다.
  • 이한림의 생애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반대와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의 공직활동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