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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경(張仲景, 약 150년~219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의학자로, 이름은 장기(張機), 자가 중경(仲景)이다. 중국에서는 흔히 의성(醫聖), 즉 의학의 성인이라고 불린다.

중국 전통의학에서 이 양반의 위상은 그냥 옛날 유명한 의사 한 명 수준이 아니다. 《황제내경》이 중의학의 이론적 뼈대를 만들었다면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은 그 이론을 실제 환자에게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 존나 구체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평가된다. 증상을 구분하고 그에 맞춰 처방을 선택하는 변증논치의 임상체계를 확립한 인물로 후대에 추앙받았다.[1]

오늘날 전해지는 대표 저작은 《상한론》과 《금궤요략》인데, 원래는 하나의 《상한잡병론》에서 갈라져 전승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

이 때문에 중국·한국·일본의 전통의학에서 장중경의 처방을 경방(經方)이라고 특별취급하며 지금도 존나게 연구한다. 일본의 한방의학에서도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영향이 매우 크다.

다만 명성에 비해 정작 장중경 본인의 생애는 확실하게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부터 대략적인 추정이고, 흔히 알려진 장사태수 경력이나 백성을 관청 대청에서 진료해 좌당의사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후대 전승의 비중이 상당하다. 장사태수 재임 여부를 긍정하는 의학사 연구도 존재하지만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었다.[2]

책은 중의학 역사에서 존나 중요한데 저자 인생은 안개 속에 있는 인물이다.

이름

본명은 장기(張機)이고 중경(仲景)은 자다.

그런데 후대에는 자인 장중경이 워낙 유명해져 본명보다 장중경으로 훨씬 많이 불린다.

중국어 간체자로는

張仲景 → 张仲景

이다.

한국 한자음으로 장중경, 중국어 병음으로는 Zhāng Zhòngjǐng이다.

생애

정확한 생애자료는 많지 않다.

전통적으로 약 150년경 후한 남양군 열양현, 현재의 허난성 난양 일대에서 태어나 219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오늘날 허난성 난양과 덩저우 지역에서는 장중경을 지역의 대표 역사인물로 적극적으로 기념하고 있으며 그의 고향을 둘러싼 지역 전승도 많이 남아 있다.[3]

후한 말은 나라 꼬라지가 아주 화려했다.

황건적의 난, 군벌 난립, 기근, 전쟁, 전염병이 연이어 터졌고 결국 삼국지 시대가 열린다.

장중경과 거의 동시대 인물을 보면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장중경이 의학책 쓰고 있을 때 옆에서는 조조와 원소가 싸우고 유비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시기다.

난세와 전염병

장중경의 의학을 이해하려면 당시 전염병 상황을 봐야 한다.

후한 말에는 전쟁과 기근, 인구이동까지 겹치면서 여러 차례 대규모 역병이 발생했다.

장중경의 《상한잡병론》 서문에는 자신의 친족 가운데 상당수가 질병으로 사망했고 그중 많은 사람이 이른바 상한으로 죽었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다.

이 경험이 장중경에게 큰 충격을 줬고 이후 전염성·급성 질환의 치료체계를 정리하게 된 중요한 동기로 설명된다.[4]

다만 여기서 말하는 상한을 현대의 장티푸스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현대의학에서 typhoid fever라고 부르는 장티푸스는 살모넬라 타이피 감염이라는 특정 질환이다.

고대 중국의 '상한'은 훨씬 넓은 범주의 급성 발열성 질환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1]

현대 질병명으로 억지로 하나씩 대응시키면 오히려 이해를 망친다.

의학 공부

후대 전승에 따르면 장중경은 젊은 시절 같은 남양 지역의 의사 장백조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한다.[3]

장중경은 기존 의학서를 공부하면서 민간에 전해지던 여러 처방과 자신의 임상경험을 결합했다고 전해진다.

《상한잡병론》 서문에는 근구고훈, 박채중방(勤求古訓, 博采衆方), 즉 옛 가르침을 부지런히 찾고 여러 처방을 널리 수집했다는 유명한 표현이 나온다.

중의학계에서는 이 표현을 장중경의 학문태도를 상징하는 말처럼 사용한다.

요즘식으로 번역하면

"옛날 책 존나 읽고 쓸 만한 처방은 다 찾아봤다."

정도가 된다.

효렴

전통적인 전기에서는 장중경이 후한의 인재 추천제도인 효렴으로 천거됐다고 전한다.[1]

효렴은 지역에서 효행과 청렴함으로 평가받은 인물을 중앙에 추천해 관료로 등용하는 제도였다.

후한 관료사회에서 중요한 출세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장중경의 행적 자체가 정사 기록에는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관직경력은 후대 자료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장사태수

장중경 하면 따라붙는 유명한 직함이 장사태수다.

현재의 후난성 창사 일대를 다스리는 지방장관이었다는 이야기다.

후대 전승에서는 장중경이 건안 연간에 장사태수를 지냈다고 한다.

중국 의학사 연구 가운데서는 문헌과 출토자료 등을 근거로 202~205년 또는 207년 무렵 장사태수를 지냈다고 보는 연구도 발표됐다.[2]

하지만 역사학적으로 완전히 깔끔하게 확정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장중경의 생애가 기록된 동시대 사료 자체가 너무 적어서 장사태수설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4]

그래서 문서를 쓸 때

"장중경은 장사태수였다."

라고 아무 설명 없이 박아놓는 것보다는

"전통적으로 장사태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도로 쓰는 게 안전하다.

좌당의사 전설

장사태수설과 함께 존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장중경이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백성들이 병들어도 관청 관리가 개인적으로 진료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관청 대청을 개방해 환자를 진료했다는 것이다.

중국 전승에서는 이걸 좌당행의(坐堂行醫)라고 부른다.[1]

이 때문에 훗날 중국에서 약방이나 진료소 이름에 (堂)을 붙이고, 의사를 좌당의생이라고 부르는 전통의 기원이 장중경이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예를 들어 유명한 중국 약방 이름인 동인당에도 당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다만 이 역시 아주 유명한 전승이지 장중경 당시 관청문서가 남아서

"오늘 장 태수가 외래환자 36명 봄"

같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장중경 기념자료에서는 역사적 사실처럼 소개하지만 현대 역사서술에서는 전승과 확인 가능한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상한잡병론

장중경의 이름이 1800년 뒤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은 후한 말 장중경이 기존 의학지식과 자신의 임상경험을 정리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의학서다.

전통적으로 16권이었다고 한다.[1]

책 제목을 풀면

  • 상한 - 주로 외부 요인에 따른 급성 질환
  • 잡병 - 그 밖의 여러 내부·만성 질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쟁과 사회혼란 속에서 책이 흩어지고 후대에 재편집되면서 오늘날에는 주로

두 책으로 전승됐다.

원본이 없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상한론》은 장중경이 200년경 직접 써놓은 원본 책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니다.

《상한잡병론》 원본은 후한 말 이후 전란 속에서 흩어졌다.

중국 의학사 자체가 워낙 오래돼 고대 의학문헌의 전승과정이 존나 복잡하다.

한대 이전·당대의 의학문헌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상한잡병론》에 실린 처방과 약물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5]

1972년 간쑤성 우웨이에서 발견된 한대 의학 죽간 같은 출토문헌이 《상한잡병론》 이전 의학의 모습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이유다.[5]

왕숙화

장중경 사후 《상한잡병론》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왕숙화가 있다.

왕숙화는 위·서진 시대의 의학자로, 흩어진 장중경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것으로 전해진다.[4]

그가 정리한 상한 관련 부분이 후대 《상한론》 전승의 기초가 됐다고 본다.

이 때문에 장중경이 원저자라면 왕숙화는 후대에 이 책을 살려놓은 편집자에 가까운 존재다.

장중경이 책을 존나 잘 써놨는데 왕숙화 같은 사람이 수습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름조차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상한론

상한론》(傷寒論)은 장중경 의학의 핵심이다.

급성 외감질환의 증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분석하고 각각에 대응하는 치료법과 처방을 제시한다.

특히 유명한 것이 육경변증이다.

  • 태양병
  • 양명병
  • 소양병
  • 태음병
  • 소음병
  • 궐음병

질병이 진행하면서 나타나는 증상을 이런 여섯 범주로 나누고 치료전략을 결정한다.

이걸 현대 감염병의 병기분류와 정확하게 동일시하면 안 된다.

중의학의 전통적인 증후분류체계다.

육경변증

장중경의 임상체계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환자가 어떤 현대 질병명을 가지고 있느냐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나타나는 증후의 조합을 보고 치료한다.

예를 들어

발열
오한
땀
갈증
맥 상태
소화상태

등을 종합해서 특정 패턴을 판단한다.

오늘날 중의학에서 흔히 말하는 변증논치의 대표적인 선구적 형태로 평가된다.[1]

이 방식의 장점이라고 주장되는 부분은 같은 질병도 환자의 현재 상태에 따라 처방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대 연구 관점에서는 이 증후분류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지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계지탕

장중경 처방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다.

계지탕은 《상한론》의 대표적인 처방이다.

전통적으로

  • 계지
  • 작약
  • 생강
  • 대조
  • 감초

등으로 구성된다.

태양중풍 계열 증후에 사용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국과 일본의 한방에서도 매우 유명한 처방이다.

현대인이 감기 걸렸다고 무조건 계지탕 먹으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상한론에서는 같은 발열·오한이라도 땀의 유무 등 증후에 따라 처방을 다르게 한다.

마황탕

마황탕도 상한론의 대표적인 경방이다.

마황, 계지, 행인, 감초 등을 사용한다.

전통적으로 발열·오한이 있으면서 땀이 없는 특정 외감 증후에 사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약재가 마황이다.

마황에는 에페드린 계열 알칼로이드가 포함돼 실제로 기관지확장과 교감신경 자극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약효가 있다는 말은 맞는데 그만큼 심박수 증가, 혈압상승 같은 부작용도 가능하다.

천연약재라고 몸이 봐주는 게 아니다.

소시호탕

소시호탕 역시 상한론 계열에서 매우 유명한 처방이다.

시호, 황금, 인삼, 반하, 생강, 대조, 감초 등을 조합한다.

특히 일본 한방에서도 오랫동안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실제 의약품으로 사용되면서 간질성 폐렴 등 심각한 이상반응도 보고됐다.

이 역시

"2천 년 된 명방 = 무조건 안전"

이라는 공식이 개소리라는 걸 보여준다.

오래된 약도 약이다.

백호탕

백호탕은 고열, 심한 갈증 등 이른바 양명병 열증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처방으로 설명된다.

석고, 지모, 감초, 갱미 등을 사용한다.

상한론을 공부하면 이름이 존나 자주 튀어나오는 처방 중 하나다.

승기탕

장중경 계열의 승기탕 처방들도 유명하다.

대승기탕, 소승기탕, 조위승기탕 등 여러 처방이 있다.

대황 등의 사하약을 사용해 특정 실열·변비 패턴을 치료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처방은 강한 약재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 기준에서도 아무나 건강식품처럼 처먹을 물건은 아니다.

소청룡탕

소청룡탕은 수양성 콧물, 기침, 천식성 증상 등과 연결해 사용하는 고전 처방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도 일반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는 한방 처방 가운데 하나다.

마황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역시 약리작용과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금궤요략

금궤요략》(金匱要略)은 《상한잡병론》의 잡병 부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책이다.

송나라 시기 왕수 등이 발견한 옛 문헌을 바탕으로 임억 등이 정리했다고 전해진다.[1]

《상한론》이 외감성 급성질환에 초점이 강하다면 《금궤요략》은 훨씬 다양한 내과·외과·부인과적 증후를 다룬다.

후대 중의학에서는 이 둘을 장중경 의학의 양대 핵심문헌으로 본다.

경방

장중경의 처방을 흔히 경방(經方)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고전의 정통 처방이라는 의미다.

중의학에서는 후대 의사가 만든 처방과 구분해 장중경 계통의 고전 처방을 특별히 연구하는 학파까지 존재한다.

현대 중국에서도 상한론 경방만 존나 깊게 파는 의사들이 있다.

이쪽에서는 환자 증후만 정확하게 맞추면 1800년 된 처방도 여전히 임상적으로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현대 의학적으로는 당연히 개별 처방과 적응증에 대해 임상시험과 안전성 검증을 해야 한다.

오래됐다는 이유로 효과가 자동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방제학

장중경은 후대 중국 방제학의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상한론》과 《금궤요략》에 실린 처방들은 약물 구성과 용량, 증후, 가감법까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 중의학계에서는 《상한잡병론》 계열 두 책에 실린 처방이 모두 269수 정도라고 설명한다.[6]

이 때문에 장중경은 방서의 조상, 경방의 대가 같은 평가를 받는다.

변증논치

장중경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변증논치는 환자의 증상과 징후를 종합해 특정 증후를 판단하고 그에 맞는 치료법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쉽게 비교하면 현대의학에서는

"이 환자는 인플루엔자 A형이다."

처럼 병원체와 질병진단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중의학에서는 추가로

"현재 이 환자의 한열·허실·표리 등이 어떤 패턴인가."

를 판단해 치료법을 선택하는 식이다.

물론 현대 중의학에서도 CT, 혈액검사, 병원체 검사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둘이 현실에서는 완전히 분리돼 있지는 않다.

장중경은 이런 증후와 처방의 연결을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으로 평가된다.[1]

이론보다 임상

장중경 의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황제내경》이 음양·장부·경락 등 기본이론을 폭넓게 다룬다면 《상한론》은

"환자한테 이런 증상이 나오면 이 처방을 써라."

가 존나 많이 나온다.

그래서 중의학 내부에서도 상한론은 특히 임상서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후대 의사들이 장중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철학적인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증상과 처방의 대응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의성

중국에서는 장중경을 의성(醫聖)이라고 부른다.[1]

한국어로 하면 의학의 성인.

중국 역사에서 특정 분야 존나 잘한 사람에게 '성' 붙이는 전통이 있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중의학 내부에서는 끝판왕급 위상이다.

다만 장중경 생전부터 사람들이

"의성님 오셨다."

라고 부른 건 아니다.

후대 의학계에서 장중경의 권위가 커지면서 붙은 존칭이다.

화타와 비교

화타와 장중경은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의사라 자주 같이 언급된다.

둘의 후대 이미지는 상당히 다르다.

화타

  • 외과
  • 마취
  • 수술
  • 오금희
  • 전설적인 명의 이미지

장중경

  • 내과
  • 처방
  • 감염·발열성 질환
  • 변증
  • 의학서
  • 이론과 임상체계 정립

화타는 소설과 민간설화 덕분에 일반 대중 인지도가 훨씬 높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 뼈 긁어서 독 빼고 조조 머리 열려고 하는 양반으로 나오는 덕분이다.

반대로 장중경은 삼국지에서 거의 안 나오기 때문에 일반인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전통의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남긴 책 때문에 장중경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

화타의 의학저술은 대부분 소실됐지만 장중경 계열 문헌은 후대 임상체계의 핵심이 됐다.

조조와 같은 시대

장중경은 대략 조조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조조가 155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니 나이도 비슷하다.

장중경이 219년경 사망했다는 전통적 연대를 따르면 관우가 죽은 해와도 거의 같다.

그러니까 삼국지 후반부가 한창 개판일 때 장중경도 생을 마친 셈이다.

그런데 《삼국지》 정사에는 화타와 달리 장중경의 상세한 전기가 없다.

덕분에 1800년 뒤 중국에서 의성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정작 생애 추적하려고 하면 사료가 존나 부족한 기묘한 상황이 됐다.

사료 부족

장중경 연구의 가장 큰 문제다.

그의 이름과 의학적 업적은 후대 자료에서 엄청나게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동시대 역사자료에서 생애기록은 희박하다.

허난성 관련 공식 자료에서도 장중경의 효렴 천거, 장사태수, 고향 등 여러 문제가 1800년 동안 논쟁돼온 역사적 미스터리라고 소개할 정도다.[4]

따라서

  • 정확한 출생지
  • 생몰년
  • 스승
  • 관직경력
  • 장사태수 재임
  • 좌당진료

같은 세부사항은 전승과 후대 기록의 비중을 고려해야 한다.

역사인물 문서에서 제일 위험한 게 후대 위인전 내용을 동시대 기록인 것처럼 복붙하는 것이다.

상한잡병론 제목 논쟁

심지어 책 제목까지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傷寒雜病論》, 즉 《상한잡병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부 문헌학 연구에서는 원래 제목이 《傷寒卒病論》, 즉 상한졸병론이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반대로 이를 반박하는 연구도 있다.

중국 의학사에서 이 문제는 오래된 문헌학 논쟁이다.[7]

현재 일반적인 명칭은 여전히 《상한잡병론》이다.

책 한 권 제목 한 글자 가지고 수백 년 뒤 학자들이 존나 싸우는 걸 보면 이 책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후대 영향

장중경 이후 중국 의학에서 《상한론》 연구는 하나의 거대한 학문분야가 됐다.

수많은 의사가 주석을 달고 처방을 해석했다.

손사막도 장중경 처방을 높이 평가했으며 후대에는 상한론 연구만 전문적으로 하는 상한학파가 형성됐다.

송나라 이후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판본이 정리돼 더욱 널리 퍼졌다.

청나라에 이르면 상한론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놓고 또 여러 학파가 존나게 싸운다.

전통의학 역사에서 고전 하나가 1,500년 동안 댓글창이 닫히지 않은 셈이다.

온병학과의 논쟁

명·청대에는 온병학이 발전했다.

온병학자들은 장중경의 상한론만으로 당시 유행하는 여러 급성 열성질환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남방지역에서 나타나는 온열성 질환을 별도로 분석하면서 새로운 이론과 처방을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한론이면 다 된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장중경 처방만 외워서 뭐하냐."

에 가까운 논쟁도 생겼다.

결국 중의학 내부에서도 장중경을 무조건 절대화한 것은 아니다.

후대 질병환경과 임상경험에 따라 계속 수정·확장됐다.

일본에 끼친 영향

장중경의 영향은 중국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의학문헌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은 일본 한방의학 형성에도 큰 영향을 줬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고방파라는 학파가 등장해 후대 중국 의학의 복잡한 이론을 걷어내고 장중경의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요시마스 토도 등이 있다.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는 보험 한방제제 가운데도 장중경 계열 처방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 갈근탕
  • 소시호탕
  • 대건중탕
  • 소청룡탕
  • 마황탕
  • 계지탕

등이다.

중국 지방 의학자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책이 1,800년 뒤 일본 병원에서도 처방되고 있으니 역사적 영향력 하나는 미쳤다.

한국에 끼친 영향

한국 전통의학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줬다.

중국 의학서가 삼국·고려·조선으로 계속 유입되면서 《상한론》 처방과 이론도 전해졌다.

동의보감에도 장중경 및 상한론 계열 의학의 영향이 반영돼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여러 의학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국내 경험과 처방을 추가해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현대 한국 한의과대학에서도 《상한론》과 《금궤요략》은 고전의학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헌이다.

경방파

현대 중의학에도 이른바 경방파가 있다.

장중경의 처방을 중심으로 임상하는 의사들을 넓게 부르는 표현이다.

이들은 복잡한 후대 이론보다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증상-처방 대응을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현대 중국 인터넷에서도 경방을 둘러싸고 의사들끼리 존나 싸운다.

어떤 사람은

"장중경의 처방은 증만 맞으면 기가 막히게 듣는다."

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한나라 시대 질병분류를 현대 환자에게 그대로 대입하는 건 위험하다."

고 한다.

1800년 전 의사가 아직도 현직 의사들 사이에서 논쟁을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영향력이다.

현대 과학에서

장중경을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것과 《상한론》의 모든 이론과 처방이 현대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고전 처방에는 실제 생리활성 성분을 가진 약재가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마황에는 에페드린이 있고 감초에는 글리시리진 등이 있다.

따라서 실제 약리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현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장중경 계열 처방의 약리작용과 임상효과를 연구하는 논문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8]

하지만 복합 한약처방은 성분이 많고 환자별 변증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임상시험 설계와 효과 분석이 복잡하다.

처방마다 근거수준도 다르다.

따라서

"장중경이 의성이니까 상한론 처방은 전부 효과 있음."

은 과학적 논리가 아니다.

반대로

"1800년 전 책이니까 다 쓰레기임."

도 연구 없이 내릴 결론은 아니다.

약이면 결국 하나씩 까보면 된다.

현대 감염병과 상한론

상한론이 급성 발열질환을 많이 다루기 때문에 코로나19 같은 현대 감염병이 등장할 때마다

"장중경이 이미 1800년 전에 치료법을 다 만들었다."

같은 주장이 튀어나온다.

이건 존나 조심해야 한다.

장중경이 관찰한 급성 열성질환 가운데 현대 감염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병이 당연히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바이러스, 세균, 면역학, 산소포화도, 폐렴의 영상진단 같은 개념이 없었다.

상한론의 태양병·양명병 등을 현대의 코로나19 병기와 1:1 대응시키는 것은 역사적·의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코로나19 당시 중약과 현대의학을 병용한 치료법을 많이 연구했지만 고전이 있다는 것만으로 효과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의성사

중국 허난성 난양에는 장중경을 기념하는 의성사(醫聖祠)가 있다.

장중경의 묘로 전해지는 장소를 중심으로 조성된 기념시설이다.[9]

현재는 장중경박물관 기능도 하며 고대 의학자료와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2021년 시진핑도 난양 방문 중 의성사를 찾아 장중경과 중의약 발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9]

중국 정부가 장중경을 단순한 고대 의사가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취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 정부의 장중경 띄우기

현대 중국에서 장중경의 위상은 의학사 영역을 넘어 문화정책과도 연결된다.

중국 정부는 중의약을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 자산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장중경은 그 상징으로 쓰기 존나 좋은 인물이다.

고향인 난양에서는 장중경 문화축제, 학술대회, 제사 행사, 관광사업 등이 이루어진다.

2022년 중국우정은 장중경을 소재로 한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1]

지역에서는 병원, 제약회사, 도로, 학교 등에 중경이라는 이름이 존나 많이 붙는다.

의학계의 이순신 + 허준 + 지역관광 마스코트가 섞인 느낌이다.

장중경 제약

중국에는 장중경 이름을 내건 중약 기업과 의료기관도 많다.

특히 허난성 난양은 장중경의 고향이라는 지역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중의약 산업에 이용한다.

장중경 본인이 1800년 뒤 자기 이름으로 건강식품과 약이 존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슨 생각을 할지는 알 수 없다.

역사적 권위가 상업적 브랜드로 사용되는 것은 중국 중의약 산업에서도 흔한 현상이다.

교자 발명설

중국 인터넷에서 꽤 유명한 전설이다.

장중경이 겨울에 가난한 백성들의 귀가 동상에 걸린 것을 보고 양고기와 약재를 다져 밀가루피에 싸서 귀 모양으로 만들고 삶아 먹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음식을 교이(嬌耳)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교자(饺子)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장중경이 만든 처방 이름은

거한교이탕

즉 추위를 몰아내는 귀 모양 음식탕 정도다.

스토리는 존나 완벽하다.

의성 장중경이 가난한 백성을 보고 안타까워함 → 귀 닮은 만두 만들어 줌 → 사람들이 동상에서 회복 → 중국 최대 명절음식 탄생.

문제는 역사적으로 장중경이 교자를 발명했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할 동시대 자료가 없다.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민간전승에 가깝다.

교자와 유사한 밀가루 음식의 역사는 복잡하고 고고학 자료도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어느 날 발명했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중경은 만두 발명자다."

라고 역사적 사실처럼 쓰면 곤란하다.

다만 난양 지역에서는 장중경을 기념해 동지에 교자를 먹는 이야기와 연결해서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동지와 교자

중국 북방에는 동지에 교자를 먹는 풍습이 있다.

여기에 장중경의 거한교이탕 전설이 결합돼

"동지에 교자를 안 먹으면 귀가 얼어 떨어진다."

같은 속담성 표현도 전해진다.

의학자 하나가 1800년 뒤 중국 겨울 만두문화까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후대 이미지

후대 중국에서 장중경은 이상적인 의사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 벼슬보다 환자를 우선함
  •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치료함
  •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고 의학 연구
  • 고전을 공부하면서 민간처방까지 수집
  • 장사태수 시절 관청에서 진료
  • 평생 연구해 상한잡병론 완성

위인전으로 만들기에 재료가 존나 좋다.

다만 역사문서를 볼 때는 이런 서사가 후대에 미화·정리됐을 가능성도 항상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장중경의 생애에는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4]

의학적 영향력이 크다는 것과 위인전의 모든 일화가 사실이라는 것은 별개다.

장중경과 허준

한국에서는 장중경을 허준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둘 다 후대 전통의학에서 엄청난 권위를 얻었고 대표적인 의학서를 남겼다.

하지만 시대와 역할은 완전히 다르다.

장중경 허준
시대 후한 말 조선
활동시기 2~3세기 16~17세기
대표 저서 《상한잡병론》 《동의보감》
주요 영향 변증과 경방 체계 조선 의학의 종합 정리
후대 별칭 의성 의성으로 부르기도 하나 한국에서는 명의 이미지가 강함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할 때 이미 장중경은 약 1,400년 전 사람이다.

《동의보감》에도 장중경의 의학적 유산이 여러 경로로 들어가 있다.

장중경과 손사막

손사막은 장중경보다 약 400년 뒤인 수·당 시대의 의학자다.

손사막은 《천금요방》과 《천금익방》을 남겼고 후대에 약왕이라고 불렸다.

손사막 역시 장중경의 저술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시에도 장중경 문헌 일부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4]

오늘날 중의학 역사에서

장중경 = 의성
손사막 = 약왕

같은 투톱 이미지가 강하다.

처방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

장중경의 가장 놀라운 점은 1800년 전에 적었다고 전해지는 처방 이름들이 아직도 병원과 약국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고전 철학자 책을 현대인이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실제 환자에게 쓰는 처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에 약재, 용량, 제조법과 적응증이 계속 변했고 현대 규제와 연구도 추가됐다.

그럼에도

계지탕
갈근탕
마황탕
소시호탕
소청룡탕
대건중탕

같은 이름이 지금도 중국·한국·일본에서 살아 있다.

의학사에서 이 정도 장기 생존력을 가진 처방집은 흔치 않다.

평가

역사적 영향력은 논쟁하기 어렵다.

장중경의 책은 중국 전통의학의 임상사고와 처방체계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줬고 그 영향은 한국과 일본까지 퍼졌다.

현대 중의학에서도 《상한론》과 《금궤요략》은 여전히 핵심 고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극단이 생긴다.

한쪽에서는

"1800년 동안 살아남았으니 장중경 처방은 현대 의약품보다 우월하다."

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세균도 모르던 2세기 사람이 쓴 책인데 볼 가치가 없다."

고 한다.

둘 다 너무 간단하다.

장중경이 활동한 시대에는 병원체와 면역학을 몰랐지만 환자의 발열, 발한, 구토, 설사, 통증, 맥 등 실제 임상현상을 관찰하고 반복되는 증상패턴과 처방경험을 정리하려 했다.

이것은 의학사적으로 상당한 발전이었다.

반면 그 시대의 음양·육경 이론을 현대 병리학적 사실로 그대로 인정하거나 모든 처방의 효과를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옳지 않다.

장중경의 역사적 위대함과 현대 치료효과 검증은 별개의 질문이다.

현대적으로 보면

장중경이 2세기에 한 일을 현대적인 언어로 아주 거칠게 번역하면

"환자 증상을 존나 많이 모아 비슷한 패턴끼리 분류하고, 어떤 처방을 썼을 때 어떻게 됐는지 정리해 임상 매뉴얼을 만든 사람"

에 가깝다.

당연히 오늘날의 무작위대조시험도 없고 혈액검사도 없고 CT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질병을 귀신이나 운명 탓으로만 돌리는 대신 관찰 가능한 증상과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결과물이 과학적으로 완성된 현대 의학은 아니지만 동아시아 임상의학사에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담

  • 본명은 장기(張機), 자가 중경(仲景)이다.
  • 약 150년에 태어나 219년경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1]
  • 후한 말 사람이다.
  • 조조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 중국에서는 의성이라고 불린다.
  • 대표 저작은 《상한잡병론》이다.
  • 《상한잡병론》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 후대에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나뉘어 전승됐다.[1]
  • 왕숙화가 흩어진 장중경 문헌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4]
  • 전통적으로 장사태수를 지냈다고 알려져 있으나 생애기록이 빈약해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2][4]
  • 관청 대청에서 백성을 진료해 중국의 '좌당의사'라는 표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1]
  • 중국 허난성 난양에 장중경을 기념하는 의성사가 있다.[9]
  • 중국에서는 2022년 장중경 기념우표도 발행했다.[1]
  • 교자를 발명했다는 유명한 민간전승이 있지만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 장중경 계열 처방은 지금도 중국·한국·일본에서 사용된다.
  • 일본 한방의학에서 영향력이 특히 크다.
  • 장중경 처방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의학전통을 경방 계열이라고 부른다.
  • 《상한론》의 '상한'은 현대 질병인 장티푸스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1]
  • 책 제목을 《상한잡병론》이 아니라 《상한졸병론》으로 봐야 한다는 문헌학적 논쟁도 있었다.[7]
  • 생애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생각보다 존나 적은데 의학적 영향력은 동아시아에서 1800년째 살아 있는 기묘한 인물이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