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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말과 글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사전을 만들어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ㄴ 조선어학회? 이름만 보면 그냥 국어 공부하는 학회 같은데?

ㄴ 맞다. 국어를 연구하고 사전을 만드는 학회였다.

ㄴ 근데 왜 독립운동 단체로 분류되는 거야?

ㄴ 일본이 조선어를 없애려고 하던 시절에도 우리말을 연구하고 한글을 보급했으니까.

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ㄴ 학자 33명이 잡혀갔고, 그중 2명은 감옥에서 죽었다.

ㄴ ??????

ㄴ 사전 원고도 전부 압수당했다.

ㄴ 사전 만드는 게 그렇게 큰 죄였어?

ㄴ 일제는 그걸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으로 판단했다.

ㄴ 아니 씨발 사전 편찬했다고 내란죄로 잡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어?

ㄴ 일본 제국에는 있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말과 글을 연구하고 표기법을 통일하며,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활동한 민간 학술단체이자 문화적 독립운동 단체이다. 1921년 12월 3일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를 전신으로 하며,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학문을 계승한 국어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이극로와 최현배,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장지영 등 여러 인물이 활동했다.

특히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했으며,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정리하여 한국어 표기와 표준어 체계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29년부터 본격화된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을 통해 전국에서 우리말의 어휘를 수집하고 뜻과 사용법을 정리했다. 이는 단순히 단어를 모으는 작업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도 조선인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연구와 사전 편찬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43년 4월까지 학회원과 후원자 등 33명이 검거되었으며, 이 가운데 16명이 기소되었다. 특히 이윤재와 한징은 수감 중 사망했고, 이극로와 최현배 등 주요 인물들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사전 편찬사업도 중단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작성한 원고들은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살아남은 학회원들이 풀려났으며, 같은 해 9월 8일에는 행방이 묘연하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학회원들은 사전 편찬작업을 재개하여 1947년부터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57년 10월 9일 총 6권으로 구성된 《큰사전》을 완간했다.[1][2]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하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싸웠던 학자들의 조직.

남들은 총과 폭탄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이 사람들은 종이와 연필, 사전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일본은 그게 무서웠는지 국어학자들을 내란죄로 잡아갔다. 자기네 나라에서 쓰는 말을 연구한다고 감옥에 보내는 것을 보면 당시 일제의 통치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개요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 한국어의 연구와 보급, 맞춤법 및 표준어의 통일을 목표로 활동했던 학술단체다. 특히 한국어의 어휘와 문법, 발음 및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전국의 사람들이 공통된 기준에 따라 우리말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오늘날에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띄어쓰기 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이러한 규칙들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에는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거나 지역과 출판물에 따라 표기가 달라지는 일이 많았다.

특히 근대적인 학교교육과 출판, 신문 및 사전 편찬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기법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던 시기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받던 때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일본은 조선의 행정과 교육, 사회제도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어를 식민지 통치의 주요 언어로 사용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황국신민화 정책과 함께 조선어 교육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학교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는 우리말을 연구하고 한글을 보급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사전을 편찬하여 조선어의 어휘와 뜻을 기록하는 것은 민족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활동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판단했고, 결국 1942년 대규모 검거를 통해 학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해방 이후 조선어학회의 연구 성과는 한국어 교육과 표기법 정비, 국어사전 편찬 등에 활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는 한국어 연구의 역사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민족문화 수호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체다.

역사

주시경과 국어연구학회

조선어학회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국어학자 주시경의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시경은 대한제국기부터 우리말과 한글의 연구 및 보급에 힘썼던 인물이다.

특히 한국어의 문법과 표기법을 연구하고 교육을 통해 한글을 널리 보급하려 했으며, 여러 제자들을 양성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은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이후 배달말글몯음과 한글모 등으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우리말과 글에 관한 연구를 이어갔다.

그러나 주시경은 1914년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단체의 활동 역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17년부터는 학회 활동이 한동안 중단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시경이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직접 설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시경은 조선어학회가 정식으로 등장한 1931년보다 약 17년 앞선 1914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이 직접 운영한 조직이라기보다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발전시킨 단체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21년 12월 3일 임경재와 최두선, 이승규 등 주시경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어의 문법과 발음, 철자법 등을 연구하고 우리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당시에는 조선총독부가 학교교육을 위한 한글 표기법을 제정했지만, 이를 두고 국어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비판이 있었다.

조선어연구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한국어의 문법과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기적인 모임과 강연, 잡지 발행 및 교육활동을 통해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알렸다.

1921년은 단체가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한 해이며, 오늘날 한글학회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시점으로 다루어진다.

1926년 가갸날

1926년 조선어연구회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한글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갸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가갸는 한글의 자모를 배우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후 1928년에는 한글날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념행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날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다만 당시의 가갸날이 처음부터 양력 10월 9일이었던 것은 아니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음력 9월 29일을 기준으로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오늘날의 10월 9일이라는 날짜는 이후 역사적인 연구와 기념일 제도의 변화를 거쳐 정착되었다.

따라서 조선어연구회가 1926년 가갸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현재 한글날이 양력 10월 9일이라는 사실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글날이 원래부터 공휴일로 딱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나라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자기네 문자라도 기념하겠다고 모여서 가갸날 행사를 열었다. 지금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부터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한글날 행사를 여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었다.

1927년 잡지 《한글》

1927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기관지인 《한글》이 발행되었다.

이 잡지에서는 한국어의 문법과 철자법, 발음 및 어휘 등에 관한 연구 결과가 소개되었다.

또한 한글을 널리 보급하고 일반 국민들이 우리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돕기 위한 글도 실렸다.

특히 단체 내부에서만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과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리려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학문적인 연구와 사회적인 계몽활동을 함께 진행했던 조선어연구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이극로를 비롯한 여러 국어학자와 교육자, 사회운동가 및 후원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전국에서 사용하는 한국어의 어휘를 모아 뜻을 정리하고, 누구나 참고할 수 있는 대규모 국어사전을 편찬하려 했다.

특히 사전은 언어의 어휘와 의미, 발음 및 사용법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대적인 국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표준적인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적을 것인지, 어떤 표현을 표준어로 인정할 것인지,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했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이후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사전을 만들려고 했더니 단어를 어떻게 적을지부터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그래서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정리하고 외래어 표기법까지 만들어야 했다. 사전 한 권 만들려고 시작한 일이 한국어 전체의 규칙을 정하는 대공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칭

1931년 1월 10일 조선어연구회는 총회 결의를 통해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변경했다.

이름을 변경한 뒤에는 단순한 한국어 연구뿐 아니라 맞춤법과 표준어의 통일, 사전 편찬 및 언어 보급 등의 사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이극로가 여러 사업을 조직하고 학회의 활동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여러 학문적·정치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언어 연구와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참여했다.

이처럼 조선어학회는 전문적인 언어 연구단체이면서 동시에 민족문화의 보존을 실천하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주요 활동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는 조선어학회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다.

당시에는 같은 단어라도 신문과 책, 학교 및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히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근대적인 출판과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통된 맞춤법이 필요했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맞춤법 통일을 결의한 뒤 국어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약 3년 동안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쳐 규정을 마련했다.

특히 18명의 제정위원이 참여했으며, 총 125회의 회의와 약 433시간의 토론을 거쳐 통일안을 완성했다.

당시의 통일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 표준말을 기본적인 표기 대상으로 삼을 것
  • 말소리를 고려하되 문법적인 원리도 반영할 것
  • 서울말을 중심으로 표준말을 정할 것
  •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를 규정할 것
  • 한글 자모의 사용과 순서를 정리할 것
  • 한자어와 외래어의 표기 방법을 정할 것

특히 당시 통일안의 주요 원칙은 오늘날 한국어 맞춤법의 기초가 되었다.

다만 1933년 통일안과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한글 맞춤법》이 모든 조항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과 정부 차원의 규범 정비를 거쳐 현재의 맞춤법으로 발전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띄어쓰기 하나 틀렸다고 댓글로 싸우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예 전국에서 통일해서 사용할 맞춤법이 없던 시절에 모여서 125번이나 회의를 했다. 국어 맞춤법을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표준어 정리

조선어학회는 맞춤법을 정리한 뒤 한국어의 표준어를 선정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한국어는 지역마다 다양한 방언이 존재하며, 같은 물건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도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방언은 각각의 지역에서 발전해 온 언어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전국의 학교와 출판물, 행정 및 방송 등에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의 기준도 필요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는 표준어 사정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1934년에는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여러 지역 출신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표준어를 검토했다.

당시 표준어 선정에는 73명의 위원이 참여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의 회의와 의견 수렴을 거쳐 표준어의 범위와 표기를 정리했다.

이후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여기서 사정(査定)은 조사하고 심사하여 결정한다는 의미다.

즉 전국에서 사용하던 여러 표현을 조사한 뒤 공통으로 사용할 표준말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표준어를 제정했다고 해서 다른 지역의 방언이 모두 잘못된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는 공식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기준이며, 방언 역시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언어다.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조선어학회는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도 연구했다.

당시에는 같은 외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많았다.

특히 외국어의 발음을 한국어의 음운체계에 맞추어 어떻게 적을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31년부터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언어학자들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 1940년 6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 완성·발표되었다.

그리고 1941년에는 이를 정리한 책자가 간행되었다.

이 규정은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새로운 문자나 부호를 무분별하게 추가하기보다는 한국어의 음운과 한글의 기존 체계를 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다만 오늘날 사용하는 《외래어 표기법》은 이후 별도로 개정·정비된 규범이므로 1940년의 통일안과 모든 내용이 같지는 않다.[3]

외국 사람 이름 하나를 적는 것도 사람마다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외국어까지 어떻게 한글로 적을지 규칙을 만들었다. 우리말 사전 하나 만드는 일이 외국어 발음 연구로까지 확대된 셈이다.

문맹퇴치운동

조선어학회는 학술 연구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당시에는 학교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한글을 읽거나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따라 여러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이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교육을 위한 교재를 만들고 강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활동에 협력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진행한 문자 보급 및 브나로드 운동 등에 참여하여 한글 교육을 지원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활동을 민족의식을 높이는 행위로 의심하며 통제했다.

특히 조선인이 자신의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문자 보급과 교육활동도 여러 차례 제한되었다.

조선어 사전 편찬

조선어학회가 오랫동안 추진한 가장 큰 사업 가운데 하나는 우리말 사전 편찬이었다.

당시 연구자들은 전국에서 사용하던 한국어의 어휘를 수집하고 뜻과 사용법을 정리했다.

또한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활용하여 사전의 표제어를 통일했다.

사전 편찬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후원자들이 참여했다.

특히 이극로와 이윤재, 정인승, 한징, 정태진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전의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단어 하나를 정리하려 해도 발음과 뜻, 사용 사례 및 관련 표현 등을 검토해야 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른 표현도 조사해야 했다.

특히 당시에는 컴퓨터나 전자적인 자료 검색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원고와 자료를 직접 작성하고 분류해야 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수년에 걸쳐 방대한 양의 원고를 정리했다.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사전의 출판허가를 신청하여 일부 수정과 삭제 등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1942년에는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하여 실제로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전 편찬이 중단되었다.

13년 동안 전국에서 단어를 모으고 뜻을 정리해서 이제 겨우 책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잡아갔다. 지금 같으면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을 원고도 당시에는 모두 종이로 되어 있었으니 압수당하면 그대로 끝장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대규모 검거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우리말과 글의 보존 및 연구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규정하고 관련 인물들을 검거·기소한 사건이다.

특히 단순한 학술단체의 해산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고문과 투옥을 겪고, 그중 두 사람이 옥중에서 사망한 중대한 탄압 사건이었다.

일제의 조선어 탄압

1930년대 후반 일본 제국은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고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거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는 단체와 인물을 감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사전 편찬 등을 통해 우리말을 보존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활동을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에는 국어학자뿐 아니라 여러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학회를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

1942년 여름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조선말로 대화한 일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경찰은 학생들의 조선어 사용과 관련하여 조사했으며, 이후 학생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까지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던 교사들과 관련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과거 영생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이후 서울에서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던 정태진이 수사 대상이 되었다.

1942년 9월 5일 정태진이 체포되었으며, 경찰은 가혹한 취조를 통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받아냈다.

이후 조선어학회를 대규모로 탄압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다만 사건의 발단이 된 여학생의 이름과 일기 내용 등은 일부 역사자료에서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세부적인 이야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보다는 여학생들의 조선어 사용과 일기장에 관한 조사를 구실로 조선어학회 탄압이 확대되었다는 점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1942년 10월 대규모 검거

1942년 10월 1일 일본 경찰은 서울에 있던 조선어학회의 주요 인물들을 검거했다.

처음에는 이극로와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등 학회와 관련된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학회에 참여했던 국어학자와 사전 편찬 관계자, 후원자들까지 검거 대상이 확대되었다.

1943년 4월까지 사건과 관련하여 총 33명이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29명은 구속되었으며, 여러 인물이 증인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특히 일본 경찰은 학회원들이 사전 편찬과 한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을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학회원들은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사전의 원고와 관련 서류도 경찰에 압수되었다.

내란죄 적용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단순한 학문 연구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으로 보았다.

특히 조선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사전을 만드는 것이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활동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과 검찰은 학회 인사들에게 치안유지법에 따른 내란 관련 혐의를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과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제정, 한글 교육 및 기념행사 등의 활동이 모두 탄압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단순히 정치적인 독립운동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의 보존 활동까지 억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글 맞춤법을 정하고 사전을 만드는 일을 내란죄로 몰아갔다. 나라를 빼앗아 놓고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말까지 정리하지 못하게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통치방식이다.

이윤재와 한징의 옥사

조선어학회 사건에서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 수감 중 사망했다.

이윤재는 1943년 12월 8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한징은 1944년 2월 22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두 사람은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과 한국어 연구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이윤재는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며, 사전 편찬사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징 역시 사전 편찬의 실무에 참여하면서 우리말을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죽음은 조선어학회 사건이 단순히 학회의 활동을 제한한 사건이 아니라 실제 인명 피해까지 발생한 일제의 탄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재판과 형량

1943년 9월 검찰은 사건 관련자 가운데 16명을 기소했다.

이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1945년 1월 주요 피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인물 형량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징역 2년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 등 6명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

※ 위 표는 주요 선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사건 관련자 가운데 일부는 재판 이전에 옥사하거나 공소가 소멸하여 최종 공판에 참여하지 못했다.

특히 이극로와 최현배 등 4명은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했지만 1945년 8월 13일 기각되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이 광복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주요 수감자들은 8월 17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4]

광복 이후

학회 재건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살아남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던 한글 연구와 교육, 사전 편찬사업 등을 복구하는 일이 중요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일본어 중심으로 운영되던 학교교육과 행정제도를 한국어 중심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 동안 정리했던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군정기에는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통일안이 교육과 공공언어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국어 교과서 편찬과 교사 양성, 한글 보급 및 언어정책 수립 등에 참여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가 해방 이후 수행한 역할은 사전 편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사전 원고의 발견

1945년 9월 8일, 조선어학회에 있어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에 압수되어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의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다.

해당 원고는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이 작성했던 방대한 사전 편찬 자료였다.

특히 단어와 뜻풀이, 여러 수정 내용 등이 포함된 자료로,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이 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본 경찰에 압수된 뒤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나 광복 직후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학회원들은 사전 편찬사업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원고가 사라졌거나 파괴되었다면 수년에 걸쳐 진행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원고는 이후 《큰사전》 편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사전 원고가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뒤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는데 광복 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감옥에 갔다가 돌아오고 원고는 창고에 있다가 돌아온 셈이다. 당시 학회원들 입장에서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를 되찾은 것이었다.

《큰사전》 출판

조선어학회는 되찾은 원고를 바탕으로 사전 편찬을 재개했다.

이후 1947년부터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처음 두 권은 《조선말 큰사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사전 편찬작업은 해방 이후에도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6.25 전쟁으로 인해 출판과 교육환경이 혼란에 빠지면서 작업을 지속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남은 원고를 정리하고 교정하면서 출판을 이어갔다.

마침내 1957년 10월 9일 제6권이 출간되면서 총 6권의 사전이 완간되었다.

이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활동이 시작된 지 약 28년 만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조선어학회 사건, 해방 및 6.25 전쟁을 거쳐서야 사전 편찬사업이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다만 이 사전이 한글로 작성된 역사상 최초의 모든 사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시경을 비롯한 이전의 국어학자들도 사전 편찬을 시도했으며, 여러 종류의 한국어 관련 사전이 존재했다.

《큰사전》은 조선어학회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전국의 우리말 어휘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한 대규모 한국어 사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

1949년 9월 5일 조선어학회는 정기총회에서 이름을 한글학회로 변경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남게 되었지만 학회의 조직과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한글학회는 한국어와 한글에 관한 연구 및 보급을 진행하면서 《한글》 등의 간행물을 발행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완전히 해산되어 사라진 단체가 아니다.

현재의 한글학회가 조선어학회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5]

주요 인물

주시경

주시경은 조선어학회의 직접적인 창립자라기보다 학회의 정신적·학문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대한제국기부터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면서 여러 제자를 양성했다.

특히 우리말의 문법과 표기법을 연구하고 한글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14년 사망했으므로 1931년 조선어학회의 개칭이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이극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다.

독일에서 학문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맞춤법과 표준어 정리, 사전 편찬 등의 사업을 조직하고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1945년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광복 이후 석방되었다.

이후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북한에 남아 언어정책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다.

최현배

최현배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국어학자다.

특히 한글 맞춤법과 국어 문법의 연구 및 보급에 힘썼으며, 조선어학회의 중요한 사업에 참여했다.

1942년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한글 전용과 국어교육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한글학회의 주요 인물로도 활동했다.

이윤재

이윤재는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어학회의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우리말의 어휘와 뜻을 정리하고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 활동에 힘썼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1943년 12월 8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다.

한징

한징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한 국어학자다.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했으며, 1942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1944년 2월 22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희생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희승

이희승은 한국의 국어학자이자 문인이다.

조선어학회의 맞춤법과 표준어 연구에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 국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재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국어학과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다.

정인승

정인승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과 국어 연구에 참여한 인물이다.

특히 《큰사전》 편찬에서 중요한 실무를 담당했다.

1942년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광복 이후에도 사전 편찬사업을 이어갔다.

그는 《큰사전》이 완간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태진

정태진은 교사이자 국어학자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과거 함흥 영생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이후 서울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942년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 수사에서 체포된 주요 인물이다.

재판에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1945년 7월 복역을 마치고 출옥했다.

이병기

이병기는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에 참여했으며, 문학과 국어 연구를 통해 한국의 언어문화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시조와 고전문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 정리

연도 주요 사건
1908년 주시경 등이 국어연구학회 조직
1921년 조선어연구회 조직
1926년 가갸날 기념행사 시작
1927년 잡지 《한글》 발간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칭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발표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표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완성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책자 간행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1943~1944년 이윤재와 한징 옥사
1945년 광복, 학회 재건 및 사전 원고 발견
1947년 《조선말 큰사전》 간행 시작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
1957년 《큰사전》 전 6권 완간

역사적 의의

언어를 통한 독립운동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반적인 무장 독립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일본군과 싸우거나 무장조직을 결성한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활동 역시 중요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민족적 정체성을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조선어학회는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육함으로써 조선인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제가 이러한 활동을 탄압한 것은 학회의 연구와 교육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의 언어운동은 일제강점기의 문화적·민족적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현대 한국어의 기초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은 이후 한국어의 표기체계와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33년의 맞춤법 통일안은 현대 한국어 표기법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36년의 표준어 정리와 1940년의 외래어 표기법 연구는 이후 한국어 규범을 마련하는 데 활용되었다.

다만 오늘날의 한국어 표기법이 모두 조선어학회 시절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제로 한국어 표기법은 광복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또한 남북 분단 이후에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언어정책을 발전시키면서 일부 규범에도 차이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의 연구 성과는 현대 한국어의 표기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토대다.

사전 편찬의 가치

《큰사전》은 조선어학회의 오랜 연구 성과가 집약된 자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전국에서 수집한 우리말의 어휘와 뜻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사전 편찬에 사용된 원고는 일제에 압수되었다가 광복 직후 발견되었으며, 이후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았다.

2012년에는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특히 이 원고는 1929년부터 1942년까지 국어학자들이 작성한 자료로, 사전 편찬 과정의 수정과 연구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6]

대중문화에서

영화 말모이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활동과 일제의 탄압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유해진과 윤계상 등이 출연했으며,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보존하기 위해 단어를 수집하고 사전을 만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당시 일본어 교육과 조선어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어의 어휘를 기록하려 했던 학자들의 활동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이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극적인 전개를 위해 창작된 인물과 상황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영화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 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별도의 사료와 연구자료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특히 영화의 제목인 말모이는 주시경 등이 편찬을 시도했던 초기 국어사전의 이름과도 관련되어 있다.

다만 주시경의 《말모이》와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추진된 사전 편찬사업이다.

역사교육

조선어학회는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수호운동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특히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조선어학회 사건은 국어 연구가 어떻게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된다.

또한 이윤재와 한징처럼 옥중에서 사망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일제의 조선어 탄압이 단순한 교육정책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해

주시경이 직접 조선어학회를 만들었다?

정확하지 않다.

주시경은 1914년에 사망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1년에 조직되었으며,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은 1931년부터 사용되었다.

따라서 주시경이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직접 설립하고 운영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다만 주시경이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고 여러 제자를 양성한 활동이 조선어학회의 중요한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어학회가 한글을 만들었다?

아니다.

한글은 15세기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다.

조선어학회가 활동한 것은 그보다 약 500년 뒤인 20세기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새롭게 창제한 단체가 아니라 한글의 표기법과 한국어의 규범을 연구하고 보급한 단체다.

특히 현대적인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어학회는 사전만 만들었다?

그렇지 않다.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의 대표적인 사업이지만, 그 외에도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및 외래어 표기법의 정리, 한글 교육과 문맹퇴치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국에 보급하려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전 편찬단체보다 활동 범위가 넓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든 회원이 사망했다?

아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여러 사람이 고문과 수감생활을 겪었다.

그러나 주요 회원 가운데 상당수는 광복 이후 살아남아 다시 활동했다.

특히 이극로와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은 1945년 석방되어 이후에도 국어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이후 없어졌다?

아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재건되었으며,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따라서 현재의 한글학회가 조선어학회의 역사와 활동을 계승하고 있다.

여담

  •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어와 한글의 연구 및 보급을 위해 활동한 민간 학술단체다.
  • 전신은 1921년 12월 3일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다.
  •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은 1931년 1월 10일부터 사용되었다.
  •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 주시경은 1914년 사망했으므로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직접 활동한 것은 아니다.
  • 1926년에는 가갸날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 이 행사는 오늘날 한글날의 역사적인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 1927년에는 잡지 《한글》을 발행했다.
  •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 맞춤법 통일안은 약 3년에 걸쳐 125회의 회의를 통해 완성되었다.
  • 국어 맞춤법 하나를 정하는 데 회의를 125번이나 했다. 지금도 맞춤법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당시에도 의견을 통일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 1936년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완성했으며, 1941년에는 이를 책자로 간행했다.
  •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뿐 아니라 전국의 문맹퇴치운동과 한글 교육에도 참여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문자 보급운동에도 협력했다.
  • 일제는 이러한 활동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판단했다.
  •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 당시 조선어학회는 대규모 한국어 사전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 1943년 4월까지 사건 관련자 33명이 검거되었다.
  • 이 가운데 16명이 기소되었다.
  • 학회원들이 작성한 사전 원고도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 수년에 걸쳐 사전을 만들었더니 일본 경찰이 책 대신 수갑을 가져왔다. 국어학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한 걸 보면 당시 일제는 한국어 사전을 상당히 무서워했던 모양이다.
  • 이윤재는 1943년 12월 8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 한징은 1944년 2월 22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 이극로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 최현배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 이희승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 정인승과 정태진은 각각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이극로와 최현배 등 4명의 상고는 1945년 8월 13일 기각되었다.
  •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이 광복을 맞이했다.
  • 주요 수감자들은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다.
  • 상고가 기각되어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불과 이틀 뒤 일본이 항복했다. 일본 법원이 허락하지 않은 자유를 결국 역사가 되찾아준 셈이다.
  • 1945년 9월 8일에는 압수당했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 해당 원고는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작성된 자료였다.
  • 이후 이를 바탕으로 사전 편찬이 재개되었다.
  • 1947년부터 《조선말 큰사전》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 1957년 10월 9일에는 총 6권의 《큰사전》이 완간되었다.
  • 1929년 사전 편찬사업이 시작된 지 약 28년 만이었다.
  • 사전 하나를 완성하는 데 28년이 걸렸다. 중간에 학자들이 잡혀가고, 두 사람이 감옥에서 죽고, 나라가 해방되고, 전쟁까지 치렀다. 사전의 제작 과정만 놓고 보면 웬만한 대하드라마보다 사건이 많다.
  •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조선어학회의 연구 성과는 광복 이후 한국어 교육과 표기법 정비에 활용되었다.
  • 1949년 이후에는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이 이어졌다.
  •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사업과 탄압을 소재로 했다.
  • 다만 영화의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 요즘에는 맞춤법이 틀려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알아서 고쳐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자동수정 기능도 결국 사람이 정한 맞춤법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 맞춤법의 역사에는 조선어학회 같은 학자들의 오랜 노력이 있다.
  • 당시 학자들은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하고 보급하겠다고 사전을 만들었다. 일본은 그게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해서 학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스스로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민족운동이었는지 인정해 준 꼴이 되었다.
  •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말과 글을 지키는 것도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이 자기네 말을 쓰지 말라고 압박하던 시대였으니 더욱 그랬다.
  • 조선어학회는 한국어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보존과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다.

관련 문서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