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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 | |
| 본명 | 최영의(崔永宜) |
|---|---|
| 사망일 | 1994년 4월 26일 |
| 국적 |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
| 직업 | 가라테 무도가, 무술가 |
최배달은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계 가라테 무도가이자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이다. 본명은 최영의(崔永宜), 일본명은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이며 서양권에서는 주로 Mas Oyama로 알려져 있다.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1994년 폐암으로 사망했다.[2]
한국에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설적인 싸움꾼 이미지로 존나 유명하지만, 실제 생애와 후대에 만들어진 무용담 사이의 경계가 매우 흐린 인물이기도 하다. 진짜 존나 센 무도가였다는 것과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부 진짜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름
본명은 최영의이다. 일본명은 오오야마 마스타츠인데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대산배달이다.
'倍達'은 한국식으로 읽으면 '배달'이 되며 한국 민족을 뜻하는 옛 표현인 배달과 연결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최영의 역시 한동안 최배달(崔倍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름이 배달인건 배달민족이라는걸 강조하기 위해서라는데 어차피 공식석상에서는 일본이름을 더 많이 쓰지 않았음? 외국에서도 마스타츠밖에 모름. 구미에서는 마스 오야마.
ㄴ 대체로 맞다. 국제적으로는 Mas Oyama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유명하고 극진회관 공식 기록 역시 Masutatsu Oyama로 표기한다. 다만 '倍達'이라는 이름을 왜 사용했느냐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씩 다르며, 최영의 본인은 일본 잡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본인이 배달민족 강조하려고 직접 지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마스타츠라는 특이한 이름을 듣고 십중팔구의 쪽발이는 '아하 좆센진이구냥!'했다 한다. 일본어 발음도 전라도스럽다.
국적과 정체성
한국, 일본 이중국적이다. 한국이 이중국적이 되냐 싶지만 이중국적이라기 보단 이중 신분이라고 보는게 옳다. 한국 주민등록과 일본 주민등록이 다른사람으로 되어있다. 제이슨 본도 아니고 신분이 다르다. 일제시대 태어난 사람이라 가능 했던 일.
ㄴ 이 설명은 상당히 부정확하다. 최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조선에서 태어났고 해방 이후 한국계 신분을 유지하다가 1968년 일본 국적을 취득해 오오야마 마스타츠를 법적인 이름으로 등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에서 평생 한국·일본 이중국적을 유지한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3]
다만 한국에서는 최영의 또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오오야마 마스타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양쪽에 서로 다른 이름과 가족관계 기록이 남으면서 두 개의 인생을 산 인간 같은 이미지가 생겼다.
고향은 전라북도 김제이다.
ㄴ 이건 맞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1923년 6월 4일 전라북도 김제 출생으로 기록하고 있다.[4]
일본 유학과 무술 수련
일본으로 건너가서 항공학교에 다녔는데 가미카제 타고 자폭하라는 명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뻑큐 날리고 톡겼다.
ㄴ 이 부분은 전설과 실제 기록이 상당히 뒤섞여 있다. 일본의 야마나시 소년항공학교에 다닌 것은 여러 전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가미카제 명령을 받고 거부해 탈영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뒷받침하는 독립적인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오히려 극진회관 계열 공식 연혁에는 1943년 일본 항공부대에 들어갔다거나 1945년 특공대 지원 경력이 있었다는 식으로 정반대의 설명도 존재한다. 따라서 특공대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최배달 전설 가운데 하나 정도로 보는 게 안전하다.
대학은 타쿠쇼쿠 대학을 나왔다. 와세다 대학도 다녔다.
ㄴ 와세다대학교 체육과에 1946년 입학한 것은 학적과 공식 연혁으로 확인된다. 다만 졸업한 것은 아니며 1948년 제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쿠쇼쿠대 관련 경력 역시 여러 전기에 나오지만 "다쿠쇼쿠대를 졸업했다"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원래 집이 나름 잘살아서 공부하라고 일본에 유학시켜놨더니 학교에서 배운 무술로 쌈박질만 하다가 결국 쌈박질로 세계적으로 존나 유명해졌다. 이후 야쿠자의 보디가드 노릇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무도에 목숨을 걸기로 결심한다.
병신들이 영화만보고 무술을 독학한 거라 생각하는데 송도관 가라데, 강유류 가라데를 배웠다. 유도도 배웠고 대동류 합기유술은 면허개전까지 받았다.
ㄴ 앞부분은 맞다. 최영의는 후나코시 기친 계열의 송도관 가라테와 조영주(소 네이추) 등에게 강유류 가라테를 수련했고 유도도 수련했다. 극진회관 공식 기록 역시 후나코시 기친, 야마구치 고겐, 조영주 등을 그의 스승으로 기록하고 있다.[5]
ㄴ 그러나 대동류 합기유술 면허개전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최영의가 요시다 코타로에게 대동류를 배웠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관련 증서도 극진회관 본부에 전시된 적이 있지만, 2025년 무술사 연구에서는 해당 문서를 검토한 결과 면허개전이 아니며 요시다 코타로 자신도 면허개전을 수여할 자격을 가진 위치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6]
배운 건 맞을 수 있는데 면허개전까지 갔다는 부분에서 전설 한 스푼이 추가된 셈.
20대까지 가라데배우고 지가 극진만든다음에 40대부터 홍보하러 돌아다닌거지 무슨...
ㄴ 시기는 조금 다르다. 1950년대부터 이미 오야마 도장을 운영하며 해외 순회와 시범을 했고,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이 정식으로 창설된 것은 1964년이다.[7]
그렇다고 아주 특별히 무술을 배울라고 고수를 찾아 존나 돌아다닌건 아니고 원폭 맞기 전의 좆본은 존나 정신나간 군국주의국가라 초딩들과 아주매미들한테도 미군들 죽이라고 레알 죽창질을 가르지는 짓을 했었고, 당연히 대학이나 학교에서도 유도, 가라테, 유술등을 가르치고 장려했다. 왜냐하면 군대로 끌고갈라고... 최배달도 대학에서 유도배웠다. 그 때 기무라 마사히코랑 친해지기도 했고. 물론 최배달은 징집 피해 존나 도망다녔다. 끌고 가려는 군바리들 줘패고 산으로 도망간게 입산수련 전설로 부풀려 졌다.
ㄴ 전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무도를 적극 장려한 것은 맞지만 최영의가 군인을 줘패고 징집을 피해 산으로 도망간 것이 입산수련의 실제 원인이라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공식 극진 계보에서는 전후 조영주의 권유 등으로 무도에 전념하기 위해 입산했다고 설명한다.
당시의 일본은 원폭으로 참교육 당하기 전이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점령 당하기 전까진 항복 안 할 생각으로 상륙한 미군들 죽이라고 민간인들에게 저런 뻘짓을 가르켰다. 물론 미군은 그걸 알고 참교육 ㄱㄱ 왜냐하면 군대로 끌고갈라고... 최배달도 대학에서 유도배웠다. 그 때 기무라 마사히코랑 친해지기도 했고. 물론 최배달은 징집 피해 존나 도망다녔다. 끌고 가려는 군바리들 줘패고 산으로 도망간게 입산수련 전설로 부풀려 졌다.
ㄴ 위 문단과 거의 같은 내용이 한 번 더 들어갔다. 디시위키식 장인정신으로 보존한다. 다만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주의사항도 동일하다.
입산수련
최배달 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산속에 들어가 혼자 미친듯이 수련했다는 이야기다.
극진회관 공식 연혁은 1946년 미노부산에서 수련했고, 1948년에는 기요스미산에 들어가 약 18개월간 집중수련했다고 기록한다.[8]
따라서 산에 들어가 수련했다는 이야기 자체를 전부 창작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나뭇가지를 주먹으로 부러뜨리고, 돌을 깨고, 수백 번씩 기술을 반복하고,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몇 년 동안 인간을 초월했다는 식으로 살이 존나 붙었다는 것이다.
특히 공수도 바보 일대 같은 만화와 각종 영화가 나오면서 입산수련은 거의 드래곤볼 정신과 시간의 방 수준으로 신격화됐다.
실제로 어느 정도를 어떻게 훈련했는지는 최영의 본인과 극진회관 계열의 회고에 크게 의존한다.
극진 가라테 창설
오직 자신의 피지컬과 판단력에 의지하여 승부를 겨루세요.
하지만 초보자들은 양학 당하기 쉽기 때문에 입문할 땐 조심하세요.
1947년 전후 최초로 열린 전일본 가라테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으로 극진회관 공식 연혁에 기록돼 있다.
1950년대에는 도쿄에서 오야마 도장을 열고 제자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기존 가라테가 형과 약속대련, 슨도메 중심으로 흐르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최영의는 실제로 강하게 때리고 맞는 실전적인 수련을 강조했다.
1954년 메지로에 오야마 도장을 열었고 1956년에는 이케부쿠로의 발레 스튜디오에서 도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1964년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을 정식으로 창설했다.
극진의 특징은 직접타격제다. 상대에게 실제로 타격을 가하며 승부하는 방식으로 당시 일본 가라테계에서는 상당히 과격한 방식이었다.
1969년에는 제1회 전일본 오픈 가라테 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1975년에는 제1회 세계 오픈 가라테 선수권대회를 열었다.[9]
이 시스템은 이후 일본 풀컨택트 가라테와 킥복싱, 종합격투기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설 다 빼더라도 극진 하나 만든 걸로 무술사에 이름 박을 업적은 충분하다.
가족
일본에서 젊은 시절에 일본여자와 결혼했고, 나이 들어서 한국여자와 결혼을 했다. 일본에 딸들이 있고 한국에 세 아들들이 있다.
ㄴ 일본인 부인 치야코와 세 딸이 있었고, 훗날 한국에서 홍순호와의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여러 자료와 가족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한국의 세 아들이 아버지에게 배운 무술을 회고한 인터뷰도 존재한다.
이혼하고 결혼한건 아니고 존나 웃기게 이중 신분이라 한국신분(최영의)으로 한국사람이랑 결혼하고 일본인 신분(오오야마)으로 일본사람이랑 결혼한거다.
ㄴ 가족관계가 복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중국적과 가짜 신분을 이용해 두 나라에서 각각 합법적으로 중혼했다"고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본 귀화와 한국 측 혼인신고 및 가족관계 문제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법적 지위는 전기마다 설명이 다르다.
주병진쇼에 나온 적이 있다.
기무라 마사히코, 시오다 고조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ㄴ 기무라 마사히코와 최영의가 실제로 가까운 무도가였다는 이야기는 여러 관계자의 기록에 나온다. 다만 셋을 단순히 같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묶는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
기무라가 쳐맞자 전설의 역센징 역도산이랑 맞다이 깔라했지만 결국 못 깠다.
ㄴ 1954년 역도산과 기무라 마사히코의 유명한 프로레슬링 경기 뒤 최영의가 역도산에게 격분해 도전을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후대 연구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실제 경기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 사건 자체는 후대 만화에서 존나게 과장됐지만 완전한 창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진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자들과 맞다이를 깠다 하지만 현지언론 기록물과 교차검증이 안되는데다, 대부분 자기 회고록 발췌라 사실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당시 사기빚을 지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못이겨 변제를 할 구실로 내기싸움판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돌 정도다. 그나마 미국에 남아있는 기록도 당시 현지언론과 짜고 치던 대본 레슬링 문화 영향을 많이 받아....실상은...
그냥 세계적으로 돌아다니며 문파 선전을 위한 쇼 비지니스맨이었다고 보면 될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진짜 목숨걸고 맞다이 까고 다니다간 스케줄의 절반도 채우기 전에 옥쇄할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어린소년과 살찐남자에게 철판구이화된 좆본 왜구들은 눈물콧물좆물을 흘리며 '오야마가 우리를 대신해 세계만방에 야마토정신 흩날린death!!' 싸질러대서 유명해진 경향이 크다.
ㄴ 대충 핵심은 맞지만 이것도 반대로 너무 까내리면 안 된다.
최영의가 1950년대 미국을 돌아다니며 실제로 가라테 시범과 프로레슬링 흥행에 참여한 것 자체는 확인된다. 극진회관은 미국에서 11개월 동안 32개 도시를 돌며 시범을 보였고 7번의 대결을 했다고 기록한다.[10]
하지만 이때 벌였다는 수많은 무규칙 실전 결투가 현대 격투기 전적처럼 독립적으로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술사가 Graham Noble이 미국 순회 기록을 추적한 연구에서도 최영의가 당시 프로레슬링 흥행에 실제 참여한 것은 확인되지만, 후대에 전해진 상대 이름과 경기 내용 가운데 일부는 프로레슬링식 각색이나 명백한 창작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11]
쉽게 말하면,
미국 가서 싸움과 시범을 한 것 = 사실
가서 만난 세계 최강자들을 전부 진검승부로 때려눕히고 270전 무패 = 검증 곤란
정도다.
최배달이 존경받는 것은 육체적인 강함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며, 무도의 세계화를 위해서 개척해나간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술 고수라고 하면서 전세계를 순회하는데, 무기 든 양키, 흑형들 앞에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 행위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최배달이하는 목숨을 건 쇼 비지니스의 ㅅ도 시작하지 못할 것이다.
ㄴ 전설을 걷어내더라도 1950년대에 동양 무술가가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기 무술을 홍보하고 실제 도장을 국제적으로 확장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최배달이 진짜 잘했던 건 싸움뿐 아니라 자기 무술을 세계에 팔아먹는 능력이었다.
동시대 활동인인 좆도산과 비슷하다. 다만 좆도산에 비해 인성이 상당히 훌륭했다고 평가받는다.
근데 악력은 존나 쌨다. 이건 팩트다.
ㄴ 악력뿐 아니라 병목을 수도로 쳐서 잘라내는 격파 시범 등 강한 신체능력을 보여준 영상과 사진은 실제로 남아 있다. 다만 당시 격파용 물체의 조건까지 현대 스포츠과학식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니 초능력처럼 받아들이지는 말자.
그리고 사실 최배달 선생 본인이 자신이 쓰는 이 무술 자체가 모두 거품이니까 환상은 모두 버리라고 몇번이고 고백했었다.
ㄴ 최영의가 무술에서 끝없는 수련과 자기반성을 강조한 것은 실제 그의 공식 좌우명에도 나타나지만, "극진은 전부 거품이다"라고 고백했다는 정확한 발언 출처는 확인이 필요하다.
단신으로 혼자 훈련하며 제자를 두지 않는 성격탓에 각지에서 배우려고 찾아오는 풋내기들도 돌아가기 일쑤였는데 어디서 영웅뽕에 존나 심취해갖고 제발 제자로 받아주십사 찾아온 어중이 떠중이들한테 실전공수를 가르쳤더니 건달양아치로 돌변해서 툭하면 밖에서 사고치고 다른 무도인들이랑 쌈빡질하고 중상으로 때려눕히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러서 최배달은 이 제자들때문에 말년까지도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무도가 아니라 비겁한 싸움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는 오명까지 뒤집어 썼으니..
ㄴ 초기 오야마 도장이 싸움 잘하는 젊은 무도가들이 모여드는 상당히 거친 도장이었던 것은 여러 극진 관계자 회고에도 나타난다. 다만 제자들이 살인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최배달이 직접 책임을 졌다는 식의 개별 사건은 출처를 붙이지 않는 이상 일반화하기 어렵다.
솔까 서두원이 이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kC35VbWGvw&feature=emb_title 극진의 현실이다. 결국 저새끼도 결국 나중에 복싱으로 변경했다.
ㄴ 현대 종합격투기 선수를 1950년대 무도가와 붙여놓고 누가 이긴다고 하는 건 그냥 시대가 다른 게임 캐릭터 스펙 비교다. 현대 선수는 스포츠과학, 레슬링, 주짓수, 복싱, 킥복싱을 체계적으로 섞어 배우므로 당연히 기술환경 자체가 다르다.
소와의 싸움
최배달 전설의 끝판왕.
소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극진회관 공식 연혁에도 1950년부터 치바현 다테야마에서 소와 대결했다고 적혀 있으며 1954년에는 실제로 투우 장면을 촬영한 영화가 제작됐다.[12]
즉 소랑 싸운 것 자체가 구라는 아니다.
문제는 후대로 갈수록 숫자가 미친듯이 커졌다.
52마리와 싸웠다, 여러 마리의 뿔을 수도로 잘랐다, 세 마리를 한 방에 죽였다 등 온갖 이야기가 붙었는데 대부분 극진 내부 전승과 최영의 관련 출판물에서 나온 이야기라 독립적인 검증은 어렵다.
실제 촬영된 투우 역시 오늘날의 격투기 경기처럼 야생 황소와 아무 준비 없이 맞짱을 뜬 것은 아니고 시범·흥행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도 소 앞에 맨손으로 서보라고 하면 대부분 인간은 격투기고 뭐고 울면서 도망간다.
미친 짓을 실제로 한 것은 맞는데 전설에서 더 미친 짓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공수도 바보 일대와 전설의 탄생
정보가 조만간 거품이 되어 사라져도 디시위키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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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에 간다 한방에 간다 그러더니 그 한 방이 어디 갔습니까? 거품입니다, 거품!"
너 이새끼 화이팅
최배달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면 안 되는 것이 일본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다.
1971년부터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작품으로 가지와라 잇키가 원작을 맡았으며 최영의를 거의 인간병기로 묘사했다.
소 때려잡기, 세계 각국 최강자와의 목숨 건 결투, 산속 초인수련 등 현재 사람들이 알고 있는 최배달 신화 상당수가 이 작품을 거쳐 대중화됐다.
당연히 전기가 아니라 극화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을 존나게 각색했다.
문제는 작품이 너무 흥해서 나중에는 만화 내용을 보고 실제 최배달의 삶이라고 믿는 사람이 엄청나게 생겼다.
한국에서도 영화 《바람의 파이터》 등의 영향으로 비슷한 현상이 생겼다.
그래서 최배달 관련 자료를 볼 때에는 대충 세 종류로 나눠 읽는 게 좋다.
- 독립적인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
- 최영의와 극진 관계자의 회고
- 《공수도 바보 일대》급의 영웅전설
2번과 3번을 1번으로 착각하기 시작하면 주먹으로 소 머리 깨고 미국 챔피언 270명 잡은 초사이어인이 탄생한다.
그의 띵언
링컨 대통령께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언 대다수가 사실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명인의 명언을 인용할 때는 해당인이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인터넷에 최배달의 발언으로 돌아다니는 문구가 존나 많지만 정확한 원전이 확인되지 않는 문장도 섞여 있다. 극진회관이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대산배달 좌우명 11개 조항은 별도로 존재하며 예의, 끊임없는 수련, 사적 싸움을 피할 것, 돈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집착하지 말 것, 자기반성 등을 강조한다.[13]
- 너희들 길에서 누가 너희 어깨를 치고 발을 밟고 시비를 건다면 사과를 해라 상대방이 먼저 싸움을 건다면 도망가지 말고 싸워라. 무엇때문에 무술을 수련했는데... 그런 패기도 없다면 무술을 때려쳐라...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극진의 역사다
위 말은 다른 극진 도장 관장이 자꾸 문하생새끼들이 야쿠자랑 쌈박질 하고 다녀서 이미지 씹창난다고 징징대자 일침을 가한 것이라고 한다.
- 돈을 쫒지 마라 여자와 명예도 마찬가지다 돈,여자,명예가 쫒아오는 남자가 돼라
- 싸움은 단 한번뿐이다. 오늘 패배해도 다음엔 이긴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 무사는 칼을 갈지만 명분이 없으면 절대 뽑지 않는다
-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 정의없는 힘은 무능이다 하지만 힘없는 정의도 무능이다
ㄴ 위 두 문장은 서로 내용도 뒤집혀 있다. 인터넷에서 명언이 복붙되는 과정이 얼마나 개판인지를 보여준다.
- 진정한 무도란 남을 괴롭혀 때려 부수는것도 아니요 실력을 뽐내기 위해 혹은 멋있을라고 배우는것도 아니다.내 몸의 심신수련이 첫째요 둘째는 나를 지키기 위함이고 셋째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을 잊지말아라.
- 체력은 유한하나 정신력은 무한하다
- 무도의 본질은 활법이며 증오가 아닌 사랑이다
그의 전적
죄다 최배달이 주병진쇼에 나와 직접 인터뷰 한 거나 회고록에 적힌것만 적어놨으니까 지랄 할려면 나한테 말고 최배달한테 해라.
ㄴ 그래서 아래 전적은 현대 프로 격투기 선수의 Sherdog 전적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당시 흥행경기, 프로레슬링, 시범, 후대 회고가 뒤섞여 있다.
- 복싱 헤비급 출신 프로레슬러 톰라이스와 붙어서 이김
ㄴ 톰 라이스(Tom Rice)라는 프로레슬러가 실제로 존재한 것은 확인된다. 1952년 최영의 미국 순회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이스와 싸웠다는 이야기도 오래전부터 전해진다. 그러나 라이스를 단순히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확하고, 해당 경기가 현대적인 의미의 무규칙 진검승부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14]
- 목검 든 검도 7단 료마와 싸워 이김. 위에서 내려치는 칼을 합장으로 잡고 누워서 차서 이겼다고 함
ㄴ 독립적으로 확인할 만한 당시 기록을 찾기 어렵다. 전설 항목.
- 소와 싸워서 이김
ㄴ 실제 소와의 시범 영상은 있다. 다만 몇 마리를 어떻게 이겼는지에 관한 상세 전적은 전설이 많이 섞여 있다.
- 북미 레슬링 챔피언 레드 아이와 싸워서 이김
ㄴ 상대의 신원과 해당 타이틀을 뒷받침하는 당시 미국 스포츠 기록을 확인하기 어렵다. 미국 원정 전설 가운데 일부 상대는 후대 조사에서 실존 확인조차 어려웠다.
- 태국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브라와 싸워서 이김
ㄴ 이 역시 최배달 개인의 확정적인 공식전으로 보기 어렵다. 1964년 태국 무에타이와의 유명한 대항전에서는 오야마 도장의 제자들이 태국에 파견돼 3전 2승을 기록한 것이 공식 극진 계보에 남아 있다. 최영의 본인이 직접 태국 챔피언과 싸워 이겼다는 전설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보면 알겠지만 도박판이다. 이정도면 무도가라기 보단 비즈니스맨이다.
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도가이면서 동시에 존나 뛰어난 흥행가·조직가였다. 후대 전설 가운데 상당 부분이 과장됐다는 것과 실제로 극진공수를 만들어 세계적인 무술조직으로 성장시킨 업적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평가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배달을 평가할 때 가장 병신같은 접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소를 맨손으로 50마리 죽이고 세계 최강자 270명을 모두 실전에서 박살낸 무적의 초인"이라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설이 과장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사기꾼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확인되는 이력만 놓고 봐도 전후 일본 가라테 대회에서 우승했고, 여러 계통의 가라테와 유도를 수련했으며, 1950년대부터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 가라테 시범과 지도를 했고, 오야마 도장을 만들었으며, 1964년 극진회관을 창설했다. 이어 1969년 전일본대회와 1975년 세계대회를 출범시키며 직접타격 방식의 가라테를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chatgpt-content-reference{index="1"}
후대의 킥복싱과 풀컨택트 가라테, 종합격투기에 극진 출신 무도가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영향력 역시 상당했다.
반대로 개인의 싸움 전적과 입산수련의 세부내용, 수십 마리의 소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 등은 자기 회고와 극진 내부의 홍보자료, 만화의 각색이 얽혀 있어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구분해야 한다.
전설을 반으로 깎아도 존나 특이한 인생이고, 전설을 그대로 믿으면 인간이 아니다.
사망과 이후
1994년 4월 26일 도쿄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0세.[15]
최영의 사후 극진회관의 후계 문제를 놓고 조직이 여러 갈래로 분열했다. 마쓰이 쇼케이 계열 IKO를 비롯해 여러 극진 단체가 현재까지 서로 별개의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극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계속 수련되고 있다. 2026년에도 최영의의 직계 제자 세대가 각 극진계 단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뤄질 정도로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16]
여담
- 출생일이 자료에 따라 1923년 6월 4일과 7월 27일로 갈리기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현재 극진회관 공식 페이지는 6월 4일을 사용하며, 일부 해외 극진 계보에서는 7월 27일을 사용한다.
- 서양에서는 Masutatsu Oyama보다 줄인 Mas Oyama라는 이름이 훨씬 널리 알려졌다.
- 일본에서 God Hand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병목을 수도로 격파하는 시범이 특히 유명했다.
- 바키 시리즈의 오로치 돗포 등 여러 격투만화 캐릭터의 모델에 영향을 준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 전설을 만든 주범 중 하나인 《공수도 바보 일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기억하는 최배달의 이미지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 실제 공식 극진회관이 공개한 좌우명에는 "무도에도 돈은 귀중하지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항목이 있다. 돈 필요 없다는 정신승리가 아니라 돈은 필요한데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의외로 현실적인 말이다.
- 생전에 쓴 가라테 서적도 많다. 《What is Karate?》 등의 책이 해외에 번역되면서 극진의 국제화에 꽤 큰 역할을 했다.
- ↑ 1968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영의」 및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창시자 연혁.
- ↑ 일본 인명사전과 여러 극진 관련 기록은 1968년 일본 귀화를 기록하고 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영의」.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Sosai Masutatsu Oyama」.
- ↑ Richárd Gábor Gottner, 2025년 대산배달의 대동류 수련 관련 연구.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Graham Noble, 「Mas Oyama in America」.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대산배달 총재 좌우명 11개조」.
- ↑ Graham Noble, 「Mas Oyama in America」.
- ↑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공식 연혁.
- ↑ 2026년 연합뉴스의 노초웅 별세 기사에서도 최영의를 극진공수도 창시자로 소개하고 최영의 사후 여러 극진 단체로 분열됐음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