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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てんめいのだいききん)은 에도 시대 후기인 1782년부터 1787년까지 일본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이다. 1788년까지 그 여파가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교호 대기근, 덴포 대기근과 함께 에도 시대의 3대 기근으로 꼽히며, 특히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파일:浅間山天明大噴火 夜分大焼之図.jpg
1783년 아사마산 대분화를 묘사한 에도 시대의 그림. 이 분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기근을 더욱 악화시켰다.
“

쌀이 없어서 굶어 죽고, 쌀값이 올라서 굶어 죽고, 쌀을 구하러 떠났다가 굶어 죽었다. 그 와중에 높으신 분들은 쌀을 어디에 팔아야 돈이 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

개요

1780년대 일본에서는 수년 동안 이어진 이상저온과 장마, 홍수, 화산 분화 등이 겹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감소했다. 특히 여름철의 낮은 기온은 쌀농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던 도호쿠 지방에서는 사실상 수확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나타났다. 여기에 1783년 아사마산이 대규모로 분화하면서 화산재가 농경지를 뒤덮었고, 쌀값이 급등하면서 농촌과 도시의 식량 사정이 동시에 악화되었다.

그러나 텐메이 대기근이 단순한 자연재해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의 통치 아래 수많은 번이 각자의 영지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생산한 쌀의 상당 부분을 연공으로 납부해야 했으며, 번은 확보한 쌀을 판매하여 재정을 유지하는 구조였다. 농사가 망해도 영주와 무사들의 재정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식량 부족이 심각해진 뒤에도 쌀의 징수와 외부 반출이 계속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일부 번에서는 식량의 외부 유출을 통제했지만, 이러한 조치가 오히려 다른 지역의 부족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지역과 사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전통적인 일본 역사사전에서는 전국적으로 9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수치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통계는 불완전하며 직접적인 아사자와 질병에 의한 사망자, 다른 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도호쿠 지방의 여러 번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당대의 기록과 후대의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1]

기근은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경지 황폐화, 쌀값 폭등, 농민 봉기와 도시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당시 막부의 실력자였던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도한 간세이 개혁에서는 식량 비축과 농촌 재건이 주요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배경

에도 시대의 농업과 쌀 중심 경제

에도 시대 일본의 경제와 재정은 쌀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영주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고쿠다카는 영지의 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산정되었으며, 농민들이 납부하는 연공 역시 기본적으로 쌀과 농업 생산물에 의존했다. 쌀은 식량인 동시에 세금과 재정의 기초였고, 번과 무사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농업 생산량이 감소할 경우 문제가 복잡해졌다. 흉작이 발생하면 농민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영주의 세입도 감소했다. 그렇다고 무사들의 봉록이나 번이 상인에게 빌린 돈까지 자동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재정이 취약한 번에서는 쌀을 외부 시장에 판매하여 현금을 확보하려는 압력이 계속되었다.

18세기에는 에도, 오사카, 교토를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쌀의 유통과 시장 거래도 활발해졌다. 특히 오사카의 쌀시장은 여러 번의 재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평상시에는 식량의 지역 간 이동과 상업 발전에 기여했지만, 흉작이 발생했을 때에는 영지 내의 식량 확보와 상업적 판매가 충돌하는 문제를 만들었다.

일부 번은 도시 상인에게 빌린 돈을 갚거나 무사들에게 봉록을 지급하기 위해 비축된 쌀까지 외부로 반출했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지역에서 거둔 쌀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물론 모든 번이 동일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아니었으며, 비축량과 재정 상태, 지방 관리들의 대응 능력에 따라 피해 규모에도 차이가 나타났다.

도호쿠 지방의 취약한 농업 환경

도호쿠 지방은 에도 시대에도 일본의 중요한 농업 지역이었지만, 벼농사에 불리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 연안에는 여름철에 차갑고 습한 북동풍인 야마세(やませ)가 불어오는데, 이 바람이 강하게 지속되면 기온이 낮아지고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벼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다.

벼는 성장과 개화, 결실 과정에서 일정한 기온을 필요로 한다. 여름철에 기온이 지나치게 낮으면 벼가 제대로 익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냉해가 발생한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냉해 대응 품종이나 기상예보, 농업시설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여름철 기온이 조금만 불리해져도 수확량이 급감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도호쿠의 여러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논을 개간했지만, 이러한 경작지 가운데 일부는 기후 조건이 좋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농업 생산량 증가에 기여하던 개간이 극단적인 냉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피해 지역을 확대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기근은 이미 이러한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에게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축 체계가 모든 지역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가난한 소작농과 영세 농민들은 한 해의 수확에 크게 의존했으며, 연속적인 흉작을 견딜 만한 여유가 부족했다.

18세기 후반의 기후 이상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한 18세기 후반은 소빙기로 불리는 장기적인 기후 변동이 나타나던 시기에 해당한다. 소빙기는 전 세계가 동일하게 추워졌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여러 지역에서 비교적 낮은 기온과 불안정한 기후가 나타난 시기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178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이미 이상저온과 장기간의 강우가 관측되고 있었다. 특히 1782년부터 농작물의 생육이 나빠지면서 식량 사정이 불안정해졌고, 이듬해의 심각한 냉해가 기근을 본격화했다. 1783년에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화산활동과 기상 이상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각각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개

1782년: 흉작의 시작

1782년, 텐메이 2년부터 일본 각지에서 불규칙한 날씨와 흉작이 발생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저온과 강우로 벼의 생육이 나빠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평년보다 크게 감소한 수확량이 기록되었다. 서일본에서도 기상 악화와 식량 부족이 나타났으나, 이후 기근의 중심은 주로 도호쿠와 간토 지방으로 이동했다.

한 해의 흉작 자체가 곧바로 대규모 아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민들이 이전 수확분을 보관하고 있거나 다른 작물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일정 기간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2년의 흉작은 다음 해에 사용할 식량과 종자를 감소시켰으며, 가난한 농민들은 비축 식량을 소진하거나 돈을 빌려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3년의 대규모 흉작이 발생하자 이미 여유가 없어진 농민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기근이 한 해의 자연재해보다 여러 해에 걸친 연속적인 재해에서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83년: 대흉작과 아사자의 급증

1783년, 텐메이 3년은 대기근의 피해가 폭발적으로 확대된 해였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봄부터 차가운 날씨와 비가 계속되었으며, 여름에도 기온이 충분히 올라가지 못했다. 특히 태평양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야마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벼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한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기온이 낮았다. 벼가 제대로 익지 못하면서 수확량이 급감했으며, 산간 지역과 기후가 불리한 농경지에서는 사실상 수확할 곡식이 없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당시 기록에서는 이를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흉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미 전년도부터 식량이 부족했던 농민들은 쌀뿐 아니라 잡곡과 산나물, 나무뿌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피해가 광범위하게 발생하면서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구입하기도 어려워졌고, 농산물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가축을 처분하거나 농기구와 토지를 담보로 식량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1783년 가을의 수확이 실패하자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저장된 식량이 바닥나면서 아사자가 발생했고, 영양실조와 감염병이 확산하면서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사마산 대분화

파일:Tenmei Eruption 1783 Mount Asama Drawing 5.png
1783년 아사마산 분화 당시를 묘사한 그림.

1783년에는 혼슈 중부에 위치한 아사마산이 대규모로 분화했다. 현재 군마현과 나가노현의 경계에 있는 아사마산은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으로, 1783년의 분화는 일본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화산재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분화 활동은 1783년 5월부터 본격화했으며, 일본의 음력으로는 텐메이 3년 4월부터 대규모 활동이 기록되었다. 이후 분화가 반복되다가 8월 초에는 격렬한 폭발과 화쇄류, 토석류 등이 발생했다. 특히 8월 5일을 전후한 대규모 분화로 산기슭의 여러 마을이 파괴되었고, 화산재가 간토 지방의 넓은 지역에 떨어졌다.

군마현에 있었던 가마하라촌은 화산 분출물에 의해 사실상 매몰되었다. 당시 마을 주민 수백 명이 사망했으며, 화산재와 토석류는 농경지와 주거지뿐 아니라 하천과 교통로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일본 내각부의 재해사 연구 보고서는 1783년 아사마산 분화와 관련한 직접적인 사망자를 1,624명으로 정리하고 있다.[2]

화산재는 멀리 에도와 현재의 지바현 일대에서도 관측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농경지가 화산재로 덮이면서 작물의 생육이 방해받았고, 농업용수와 하천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화산 분출물이 하천에 쌓이면서 이후의 홍수 피해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다만 아사마산 분화가 텐메이 대기근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1782년부터 이미 흉작과 기상 이상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아사마산이 본격적으로 분화하기 전부터 도호쿠 지방에서는 냉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화산 분화는 기존의 식량 위기를 더욱 악화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3]

1784년: 기근의 참상

1784년, 텐메이 4년에는 이전 해의 수확 실패로 인한 피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도호쿠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는 먹을 것이 바닥나면서 주민들이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의 상당수가 사라지거나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공동체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기근이 극심해지자 사람들은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던 식물의 뿌리와 나무껍질, 풀 등을 먹기 시작했다. 가축과 개, 고양이 등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지만, 개별 사례의 사실관계나 발생 범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므로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일처럼 확대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영양 상태가 악화된 사람들은 감염병에도 취약해졌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의료체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근을 피해 이동하던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질병이 확산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망자 상당수는 식량 부족에 따른 직접적인 아사뿐 아니라 영양실조와 질병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망한 것으로 이해된다.

기근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사라지고, 가축이 줄어들며, 종자로 보관해야 할 곡식까지 먹어 치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살아남은 농민들도 다음 해 농사를 시작할 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므로 농업 생산의 회복은 더욱 지연되었다.

1785~1787년: 장기화와 폭동

1785년 이후에도 일본의 식량 사정은 곧바로 정상화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이 회복되었지만, 인구 감소와 농경지 황폐화, 가축과 종자의 부족 등으로 피해가 장기간 이어졌다. 여기에 1786년에는 다시 흉작과 홍수 등이 발생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악화되었다.

1787년에는 쌀값의 급등과 유통 부족으로 인해 도시에서도 심각한 혼란이 발생했다. 에도에서는 쌀을 판매하는 상인과 부유한 상인들의 집이나 상점을 공격하는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라고 불리는 집단행동이 확산했다. 이는 생활이 어려워진 도시 주민들이 쌀의 매점매석과 가격 상승, 관리들의 무능한 대응에 항의하며 상점과 시설을 파괴하는 행동이었다.

에도 막부는 쌀의 확보와 판매를 위한 조치를 추진했지만 대응이 늦었으며, 주민들이 제출한 구제 요청이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발생했다. 도시의 치안과 식량 공급을 유지하는 문제는 막부의 권위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폭동은 정치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다.

참고로 다누마 오키쓰구는 1786년에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실각했으므로, 1787년의 에도 대규모 폭동이 다누마를 직접 실각시켰다는 설명은 시간 순서가 맞지 않는다. 다만 앞서 발생한 기근과 사회적 혼란이 그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4]

주요 원인

냉해와 장마

텐메이 대기근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수년간 지속된 저온과 불규칙한 강우였다. 벼농사는 기온과 일조량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여름철 냉해가 발생하면 수확량이 급격히 감소할 수 있다. 특히 도호쿠 지방은 여름철 야마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에 장기간의 저온에 취약했다.

1783년에는 이러한 냉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났으며, 벼가 익지 않은 채 가을을 맞이하는 농경지가 많았다. 농민들이 수확할 수 있는 곡식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쌀값을 통제하거나 상인들을 단속하는 조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화산 활동과 기후 변화

1783년의 아사마산 분화는 대기근과 밀접하게 연결된 대표적인 자연재해이다. 그러나 화산재가 직접 농경지를 뒤덮어 발생한 피해와 화산 분출물이 대기에 영향을 미쳐 기후를 변화시키는 현상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화산재에 의한 직접적인 농업 피해는 아사마산 주변과 간토 지방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반면 일본 전역의 이상저온을 이 분화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기근은 아사마산의 대분화보다 먼저 시작되었으며, 기존의 기후 변동과 해양 및 대기 순환의 변화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같은 해인 1783년 6월에는 아이슬란드에서도 라키 화산의 대규모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 분화는 막대한 양의 화산가스를 대기 중으로 방출하여 북반구의 대기 환경과 기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두 화산의 분화가 같은 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라키 화산이 일본의 기근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따라서 텐메이 대기근을 설명할 때에는 냉해와 강우, 화산재에 의한 농업 피해, 장기간의 기후 변동을 구분하고, 이를 하나의 단순한 인과관계로 연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5]

연공과 번의 재정 문제

에도 시대의 번은 농민에게서 징수한 연공과 각종 수입을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흉작이 발생하더라도 번의 부채와 무사들의 봉록 지급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부 번에서는 주민의 식량 확보보다 재정 수입의 유지를 우선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대도시의 상인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쌀을 판매하거나 외부로 운송하는 관행은 식량이 부족한 지역에서 문제가 되었다.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데 영주가 확보한 쌀은 다른 지역의 시장으로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식량 부족이 심해지면 일부 번에서는 쌀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반출 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해당 번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공급 부족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정치적 경계와 식량 수급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 번이 자국의 식량만 확보하려 하면 전체적인 유통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당시의 모든 관리와 영주가 주민들의 생존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비축미를 방출하거나 구호시설을 설치했고, 부유한 주민과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 능력과 비축량, 행정 조직의 차이 때문에 구호의 효과는 지역별로 크게 달랐다.

빈부격차와 식량 접근성

기근의 피해는 모든 계층에 동일하게 발생하지 않았다. 토지와 식량을 보유하고 있던 부유한 농민은 일정 기간을 버틸 수 있었지만, 토지가 적거나 없는 농민과 소작인, 도시의 일용노동자 등은 식량 가격이 상승하는 즉시 생계에 위협을 받았다.

쌀값이 올라가더라도 돈이 충분한 사람들은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시장에 쌀이 남아 있더라도 구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기근이 단순한 생산량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농민들은 흉작이 발생하면 먹을 곡식뿐 아니라 토지와 가축, 농기구까지 잃을 수 있었다. 이는 다음 해의 생산 능력을 더욱 약화시켜 빈곤과 기근이 반복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지역별 피해

쓰가루번

현재의 아오모리현 서부에 해당하는 쓰가루 지방은 텐메이 대기근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 지역은 히로사키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기후 조건이 불리한 농경지에서도 쌀을 생산하고 있었다.

1783년의 냉해로 벼가 제대로 익지 않으면서 쌀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주민들은 주변의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찾았으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겨울이 시작된 뒤에는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쓰가루번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수치가 전해지지만, 약 8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오모리시가 소개한 향토사 자료에서도 당시 히로사키번의 인구 약 25만 명 가운데 약 8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영지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6]

특히 산간 지역에서는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아오모리현 나미오카 지역의 호소노촌과 아이자와촌에 관한 1791년의 마을 그림에는 60채의 가옥 가운데 28채에 주민이 모두 사망해 비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관련 인구 기록을 대조한 연구에서는 두 마을의 전체 주민 319명 가운데 최소 138명이 이러한 가구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기근이 단순히 수확량을 감소시킨 사건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 전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었던 재난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치노헤번

현재의 아오모리현 남동부와 이와테현 북부 일부에 해당하는 하치노헤번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여 여름철의 차가운 야마세가 농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하치노헤번의 공식적인 고쿠다카는 2만 석이었으나, 1783년의 흉작으로 농업 생산이 크게 감소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약 6만 3천~6만 5천 명에 이르던 번 인구 가운데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약 3만 명에 달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로, 번의 경제와 사회구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7]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으며, 일부 마을에서는 경작할 농민이 부족해 농지가 방치되었다. 기근 이후에도 농업 생산이 회복되지 않으면서 번의 재정 문제는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부담은 후대의 연공 정책과 농민 저항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리오카번과 도호쿠 남부

모리오카번을 비롯한 도호쿠의 다른 번에서도 대규모 흉작과 인구 감소가 발생했다. 특히 벼농사에 의존하면서도 냉해에 취약했던 지역에서는 수확량 감소가 곧바로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산과 들에서 채취한 식물이나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했으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주민들의 이동과 사망은 마을별 인구 기록에도 반영되었지만, 실제 사망자 수를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다. 사망한 사람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다른 번으로 떠난 사람들도 기존 거주지의 인구 통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식량 부족과 전염병은 농민뿐 아니라 도시와 지방의 하층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농민의 감소는 번의 연공 수입을 줄여 지방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간토 지방

간토 지방은 1783년의 아사마산 분화와 관련된 직접적인 피해가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화산재가 농경지와 마을에 쌓였으며, 분화로 발생한 화산쇄설물과 토석류가 하천을 따라 이동하면서 대규모 인명 피해와 시설 파괴를 일으켰다.

특히 아사마산 북쪽의 가마하라촌은 대규모 화산쇄설물에 매몰되어 사실상 파괴되었다. 분화의 영향은 인근의 여러 마을과 도네강 유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화산재와 토사 유입은 농업과 교통, 하천 관리에 장기적인 문제를 남겼다.

농경지의 피해는 직접적인 식량 생산 감소로 이어졌다. 또한 하천의 퇴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홍수 위험이 증가했고, 이미 흉작과 높은 식량 가격으로 어려움을 겪던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에도와 주요 도시

에도를 비롯한 도시에서는 농촌과 다른 형태의 위기가 나타났다. 도시 주민의 상당수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시장에서 쌀과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농촌에서 생산량이 감소하고 쌀의 유통이 불안정해지자 도시에서도 식량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특히 가난한 일용노동자와 하층민은 쌀값의 변동에 취약했다. 1787년에는 쌀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심화하면서 주민들이 상인들에게 항의하고 상점과 시설을 파괴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도쿄도 히노시의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1787년 5월 중순에는 에도에서 금 1냥으로 구입할 수 있는 쌀이 약 1두 8승까지 감소했다. 이는 평상시보다 쌀의 구매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의미이며, 식량 가격의 급등이 도시 주민들의 생활에 미친 충격을 보여준다.[8]

인명 피해와 사회적 참상

사망자 규모

텐메이 대기근의 전체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당시 일본에는 현대적인 인구조사와 사망원인 통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역별 기록도 조사 시기와 집계 방식이 달랐다. 특히 아사자와 질병 사망자, 행방불명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분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일부 역사사전에서는 전국적으로 9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당시의 불완전한 인구 통계와 후대의 추산에 기초한 것이므로 완전히 확정된 사망자 수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인구 감소에는 사망뿐 아니라 이동과 출생 감소 등도 영향을 미쳤다.

1977년에 발표된 아키야마 후사오 등의 연구에서는 텐메이 시기 오우 지방의 사망자를 약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기근과 함께 발생한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분석했다. 연구는 자연환경뿐 아니라 지방 통치체제와 사회경제적 조건이 피해를 확대했다고 설명했다.[9]

따라서 텐메이 대기근의 피해를 설명할 때에는 사망자 수만을 제시하기보다는 지역별 기록과 인구 감소의 원인, 조사 방법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다만 여러 지역에서 인구의 상당한 비율이 사망하거나 사라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 근세사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인구 재난이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이견이 적다.

기아와 질병

기근으로 인해 영양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사람들은 다양한 질병에 취약해졌다.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신체의 저항력이 약화되며, 열악한 위생 환경과 밀집된 생활공간은 감염병의 확산을 촉진할 수 있다.

당시의 기록에는 굶주림과 부종, 발열 및 각종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여행 중에 사망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병에 걸리는 사례도 나타났다.

기근과 질병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식량 부족은 사람들을 질병에 취약하게 만들었고, 질병은 노동력을 감소시켜 농사와 식량 확보를 더욱 어렵게 했다. 이러한 악순환은 식량 생산이 일부 회복된 이후에도 사회적 피해가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가족과 마을의 붕괴

대기근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모두 사망하는 사례가 발생했으며, 일부 마을에서는 거주민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주민이 감소한 마을에서는 논과 밭을 경작할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농기구와 가축이 사라지고 종자로 사용할 곡식도 소진되면서 생존자들은 다음 농사를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기근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기근 이후에는 마을의 인구를 회복하고 농경지를 다시 경작하기 위한 정책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영주의 입장에서도 농민이 줄어들면 장기적으로 연공을 징수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농촌의 회복은 주민의 생존과 번의 재정 모두에 필수적인 문제였다.

극단적인 생존 방식

기근의 참상이 심각해지면서 평상시에는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던 식물이 비상식량으로 활용되었다. 잡곡과 산나물은 물론 나무껍질과 풀뿌리 등을 이용한 대용식이 등장했으며, 식량 부족이 극심한 지역에서는 가축과 동물의 고기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일부 사료에는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는 실제 사건을 서술한 것과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극단적인 사례가 지역 전체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록은 기근이 인간의 생존 조건을 어느 정도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재난을 기록하고 전달하던 사람들의 인식도 반영한다.

에도 막부의 대응

식량 구호와 비축미 방출

에도 막부와 각 번은 기근이 확대되자 비축된 쌀을 방출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구호 정책을 시행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임시 구호시설이 마련되었으며, 죽이나 곡식을 제공하는 활동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효과가 달랐다. 비축된 식량 자체가 부족하거나 재정이 악화된 번에서는 구호를 충분히 시행하기 어려웠다. 또한 교통과 유통의 제약으로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신속하게 조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막부는 식량의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가격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도 취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 상태에서는 행정 명령만으로 부족한 식량을 만들어낼 수 없었으며, 실질적인 구호를 위해서는 충분한 비축량과 유통망이 필요했다.

쌀 유통 통제

각 번은 자국의 식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쌀의 외부 반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마다 이러한 조치가 시행되면서 쌀이 부족한 다른 지역으로 식량이 이동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일부 번에서는 재정 확보를 위해 연공미와 비축미를 외부로 판매했다. 따라서 쌀의 반출을 통제하려는 정책과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쌀을 판매하려는 정책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기근 이후에는 단순히 쌀의 가격을 통제하는 것보다 평상시에 식량을 비축하고 재난 상황에서 이를 적절히 배분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농민 봉기와 도시 폭동

농민들의 저항

기근이 심각해지면서 농민들은 연공 감면과 식량 구호를 요구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영주와 관리에게 집단적으로 청원하거나 쌀의 외부 반출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집단적인 저항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저항은 단순히 세금을 내기 싫다는 이유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 상황에서 기존의 부담을 유지하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조차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봉기는 당시 지방 통치체제가 농업 생산과 주민의 생존을 안정적으로 보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1787년의 우치코와시

1787년에는 에도와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서 쌀값 상승에 항의하는 우치코와시가 발생했다. 우치코와시는 주로 주민들이 집단으로 상인이나 부유층의 시설에 몰려가 문과 창고, 집기 등을 파괴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당시 주민들은 쌀을 매점매석하거나 가격 상승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고 여겨지는 상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의 구호가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쌀값은 상승했고, 도시의 빈민들은 식량을 구입할 능력을 상실해 갔다.

에도의 우치코와시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했으며, 막부가 도시의 식량 공급과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기근이 농촌의 자연재해에서 도시의 사회적·정치적 위기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정치적 영향

다누마 오키쓰구의 실각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하던 시기 막부의 실력자는 다누마 오키쓰구였다. 다누마는 상업과 유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막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상인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경제 운영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근과 물가 상승, 사회적 혼란이 확대되면서 다누마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상업 활동을 장려하는 정책이 일부 상인에게 특혜를 제공하고 부패를 확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기근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의 불만은 막부의 정치 운영 전반으로 향했다.

1786년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한 뒤 다누마의 정치적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는 실각했다. 다누마의 실각에는 쇼군 사망에 따른 권력관계 변화와 정치적 대립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으므로 기근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텐메이 대기근이 그의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간세이 개혁

1787년에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막부의 로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간세이 개혁을 추진했다. 사다노부는 농촌의 회복과 재정 건전성, 사회질서의 안정 등을 강조했으며, 다누마 시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간세이 개혁에서는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추진되었고, 식량을 비축하는 제도를 강화하려 했다. 또한 흉작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곡식을 확보하도록 하고, 도시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도 정비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곡물을 저장해 재난에 대비하는 가코이마이(囲米)와 에도의 지역사회에서 구호 재원을 적립하는 시치부쓰미킨(七分積金) 등이 있다. 이러한 제도는 평상시의 식량과 재원을 재난 발생 시 구호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치였다.[10]

다만 간세이 개혁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엄격한 사회질서 유지와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는 반발을 불러왔으며, 농촌의 생산성과 식량 수급 문제는 장기적인 과제로 남았다.

장기적 영향

인구 감소와 농촌 황폐화

텐메이 대기근은 도호쿠 지방의 인구와 경제에 장기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주민이 사망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농촌의 노동력이 감소했고, 일부 농경지는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농촌 인구의 감소는 농업 생산량을 줄였으며, 생산량 감소는 다시 번의 재정 수입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지방 영주들은 새로운 농민의 정착을 장려하거나 기존 주민들이 농경지를 회복하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인구와 농업 생산이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가족 전체가 사망한 마을이나 주요 농업 노동력이 사라진 지역에서는 정상적인 농업 활동을 재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식량 비축 제도의 강화

기근 이후 막부와 여러 번에서는 흉작에 대비한 식량 비축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평상시에 곡물을 저장하고 재난 발생 시 이를 방출하는 정책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텐메이 대기근은 이러한 제도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흉작에 강한 농작물과 재배 방법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잡곡과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거나 냉해에 상대적으로 강한 벼 품종을 개발하는 노력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비상식량과 대용식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구황서의 필요성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이후 발생한 기근에서 주민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데 활용되었다.

후대 기근과의 비교

에도 시대에는 텐메이 대기근 이후에도 대규모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30년대의 덴포 대기근이다. 덴포 대기근 역시 냉해와 흉작, 식량 가격 상승 등으로 많은 피해를 발생시켰지만, 텐메이 대기근과 비교하면 피해가 발생한 시기와 지역, 행정적 대응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기근들은 일본의 농업 생산이 기후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쌀 중심의 재정과 지역별로 분리된 통치구조가 식량 위기를 확대시킬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평가

텐메이 대기근은 에도 막부의 통치체제와 당시 일본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자연환경의 악화가 기근의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피해의 규모와 지속 기간은 농업 기술, 식량 유통, 조세제도, 지방 재정, 사회계층의 차이 등에 의해 크게 달라졌다.

특히 도호쿠 지방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인명 피해는 단순한 자연재해의 결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냉해가 광범위하게 발생한 가운데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며, 번의 재정과 쌀 유통에 관한 정책은 때때로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켰다.

또한 기근으로 인한 사망과 이주, 농경지 황폐화는 경제 전체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농업 노동력이 감소하면 다음 해의 식량 생산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기근은 일시적인 식량 부족을 넘어 장기적인 빈곤과 인구 감소를 초래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기근과 사회적 혼란이 막부 운영에 대한 불만을 확대했고, 다누마 정치의 퇴조와 간세이 개혁이라는 정치적 변화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막부가 식량 비축과 빈민 구호, 농촌 재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텐메이 대기근은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가 사회적 취약성과 결합할 경우 피해가 얼마나 확대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같은 재난을 겪더라도 지역의 경제력과 행정 능력, 식량 비축, 유통망, 주민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생존 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여담

  • 일본에서 에도 시대의 3대 기근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교호 대기근, 텐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을 가리킨다. 세 기근 모두 심각한 피해를 일으켰지만 발생 원인과 주요 피해 지역에는 차이가 있다.
  • 텐메이(天明)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연호이며, 기근은 해당 연호가 사용되던 시기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린다. 기근의 시작과 종료를 어느 해로 설정하는지에는 연구와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 1783년의 아사마산 분화는 화산재해 자체로도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특히 가마하라촌의 매몰은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적 화산재해 사례로 연구되고 있으며, 발굴조사에서는 희생자의 유해와 당시의 생활 흔적이 발견되었다.
  • 1783년에는 일본의 아사마산뿐 아니라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도 대규모로 분화했다. 따라서 같은 해에 북반구의 여러 지역에서 화산활동과 기후 이상이 나타났다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두 화산이 일본의 냉해와 기근에 미친 영향을 단순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기근이 극심했던 지역의 사망자 수는 당시 주민들이 남긴 기록과 후대의 역사 연구를 통해 전해진다. 다만 기록마다 집계 시기와 방식이 다르므로 숫자만 비교해서 특정 번의 피해가 더 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 1787년 에도에서 발생한 우치코와시는 단순한 약탈 사건으로만 보기 어렵다. 당시 주민들의 요구에는 식량 가격의 안정과 구호 확대, 매점매석에 대한 단속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막부의 구호 정책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집단행동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