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크라테스 | |
| 생년월일 | 미상 |
|---|---|
| 사망일 | 기원전 522년경 |
| 출생지 | 고대 그리스 사모스섬 |
| 직업 | 참주, 정치인 |
| 주요 경력 | 사모스의 참주 (기원전 약 535년~522년) |
폴리크라테스(Πολυκράτης, Polykrates, ? ~ 기원전 522년경)는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사모스섬을 지배했던 참주이다. 기원전 535년 무렵 형제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후 형제를 살해하거나 추방하고 사모스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특히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의 여러 섬과 해안도시를 공격하면서 사모스를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해상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아마시스 2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공하던 시기에는 캄비세스 2세에게 함대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의 통치에는 심각한 문제도 있었다. 그는 해적 활동과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을 추방하거나 제거했다. 특히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여 해외로 보내는 등 강압적인 통치방식을 사용했다.
결국 사모스에서 추방된 정치적 반대자들이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외국 군대가 사모스를 침공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럼에도 폴리크라테스는 스파르타군의 침공을 격퇴했고, 그의 세력은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522년 무렵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방 총독 오로이테스가 재산과 정치적 협력을 미끼로 폴리크라테스를 유인했고, 결국 폴리크라테스는 소아시아 본토에서 붙잡혀 살해당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3권에서 폴리크라테스의 권력과 행운, 외교 및 몰락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특히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의 행운이 너무 오래 지속되자 신들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반지를 바다에 버렸는데, 며칠 뒤 어부가 잡아온 생선의 뱃속에서 그 반지가 발견되었다는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전설로 유명하다.
남의 나라를 약탈하고 형제까지 제거하면서 에게해의 강자가 되었는데, 정작 본인은 금은보화를 준다는 말에 속아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죽은 참주.
ㄴ 이 사람 사모스섬에서 엄청 잘나갔다며?
ㄴ ㅇㅇ. 해군력이 엄청났고 싸우는 전쟁마다 이겼다고 한다.
ㄴ 그럼 명군이었네?
ㄴ 형제를 죽이고 다른 형제는 추방했다.
ㄴ ???
ㄴ 주변 섬들도 약탈했다.
ㄴ 그냥 해적왕 아니야?
ㄴ 그런 면도 있다.
ㄴ 근데 왜 죽었는데?
ㄴ 페르시아 총독이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하니까 직접 받으러 갔다.
ㄴ 설마...
ㄴ 잡혀서 죽었다.
ㄴ 아니 씨발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던 사람이 보물 준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 거야?
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특히 폴리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섬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으로 이주한 배경과 관련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폴리크라테스의 독재적인 통치를 견디기 어려워 사모스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유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후대의 자료에 의존하므로 폴리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를 직접 추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폴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대규모 토목사업과 건축사업도 추진되었다. 특히 사모스섬의 유팔리노스 터널(Tunnel of Eupalinos)은 기원전 6세기에 산의 양쪽에서 동시에 굴착하여 완성한 놀라운 토목시설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사모스의 항구시설과 헤라 신전 역시 당시 사모스가 가지고 있었던 경제력과 기술력을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시설이 모두 폴리크라테스 한 사람의 명령으로 처음부터 건설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섬에서 독재를 하던 사람이다. 피타고라스는 숫자와 우주의 질서를 연구했고, 폴리크라테스는 배를 만들어 남의 섬을 털고 다녔다. 같은 사모스섬 출신인데 하는 짓이 상당히 달랐다.
개요
폴리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치와 해상패권 경쟁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특히 기원전 6세기 후반 에게해 동부에서 강력한 함대를 운영하면서 사모스섬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사모스섬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독립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로서 자체적인 정치제도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현재의 튀르키예 서부 해안에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소아시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해상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6세기 사모스는 해상무역과 선박 건조, 공예 및 건축 등의 분야에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폴리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제적·지리적 조건을 활용하여 권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그가 사모스의 번영을 처음부터 혼자 만들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폴리크라테스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사모스는 에게해의 주요 해상무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폴리크라테스는 이미 발전해 있던 사모스의 해상활동을 더욱 적극적인 군사·정치적 팽창으로 연결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통치방식은 해상무역과 해적 활동, 군사적 정복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과 약탈이 흔히 발생했지만, 폴리크라테스는 특히 친구와 적을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는 기록으로 유명하다.
또한 고대의 참주는 반드시 현대적인 의미의 절대군주나 세습왕과 동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참주(Tyrannos)는 일반적으로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벗어나 개인적인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를 가리켰다.
따라서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의 정통적인 왕위를 계승한 국왕이라기보다 정변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참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역사적 배경
사모스섬
사모스섬은 에게해 동부에 위치한 섬으로, 오늘날 튀르키예의 소아시아 해안과 매우 가깝다.
고대에는 이오니아 문화권에 속하는 주요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소아시아와 에게해의 여러 섬, 그리스 본토 및 동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사모스의 주민들은 일찍부터 항해와 무역, 선박 건조 및 공예활동을 발전시켰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헤라 여신의 숭배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모스의 헤라 성역은 고대 그리스의 주요 종교시설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사모스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에게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특히 폴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해군력과 건축기술, 문화적인 활동 등이 더욱 발전했다.
그리스의 참주정치
기원전 7~6세기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기존의 귀족정치를 대신하여 개인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참주정치가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와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 등이 있다.
이러한 참주들은 정변이나 정치적 갈등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일부는 군사력과 경제적인 기반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통치했다.
다만 고대 그리스의 참주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폭군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부 참주는 건축사업과 경제활동, 문화예술의 후원을 통해 도시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의 획득과 유지 과정에서 강압적인 통치와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 발생하기도 했다.
폴리크라테스 역시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치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애
출생과 가문
폴리크라테스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폴리크라테스를 아이아케스(Aeaces)의 아들로 소개했다.
또한 폴리크라테스에게는 판타그노토스(Pantagnotus)와 실로손(Syloson)이라는 형제들이 있었다.
그가 집권하기 이전의 생활과 정치적 경력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다.
다만 사모스의 권력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배경만으로 폴리크라테스가 특정한 귀족 가문 전체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기원전 535년 무렵 정변
기원전 535년 무렵 폴리크라테스는 형제인 판타그노토스와 실로손의 도움을 받아 사모스의 권력을 장악했다.
정확한 집권연도는 사료와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되며, 기원전 538년 또는 535년 무렵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처음에는 세 형제가 사모스를 나누어 지배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는 형제들과 권력을 계속 공유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판타그노토스를 살해하고 실로손을 추방하면서 사모스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1]
형제들을 제거하다
폴리크라테스가 단독 지배자가 되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형제들도 희생되었다.
특히 판타그노토스는 살해당했으며, 실로손은 사모스에서 추방되었다.
고대의 왕권과 참주정치에서는 형제와 친족 사이의 권력투쟁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폴리크라테스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실로손은 이후 페르시아와 관계를 맺었으며, 폴리크라테스가 사망한 뒤 사모스의 정치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형제 셋이서 힘을 합쳐 정권을 잡았는데 정작 권력을 얻고 나니 한 명은 죽이고 한 명은 쫓아냈다.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지분을 독차지하려고 공동창업자들을 제거한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쪽은 지분 싸움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사모스의 전성기
강력한 해군
폴리크라테스는 집권 이후 사모스의 해군력을 강화했다.
특히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50개의 노를 가진 군선 100척과 궁수 1,000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50개 노를 가진 군선은 일반적으로 펜테콘토로스(Penteconter)라고 불리는 고대의 선박이다.
이는 후대의 대규모 삼단노선과 구분되는 선박 유형이다.
당시 사모스는 자체적인 선박 건조와 해상무역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폴리크라테스는 이러한 자원을 군사적인 목적으로 적극 활용했다.
특히 강력한 함대를 이용하여 여러 섬과 해안도시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사모스의 영향력은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까지 확대되었다.
다만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선박과 병력의 숫자는 고대의 기록이므로 현대적인 군사통계처럼 정확하게 집계된 수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해적 활동
폴리크라테스의 해상활동에는 해적질과 약탈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그는 적대적인 세력뿐 아니라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세력까지 약탈했다는 기록으로 유명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친구에게서 물건을 빼앗은 뒤 돌려주는 편이 애초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감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폴리크라테스의 통치방식을 설명하는 상당히 인상적인 일화다.
물론 이러한 발언을 폴리크라테스가 실제로 한 말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그를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폴리크라테스에게는 해상무역과 약탈이 국가의 부를 확보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친구 물건도 일단 빼앗은 다음 돌려주면 더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정신 나간 논리 같지만 본인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가 돌려주면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으려는 놈이었다.
에게해의 세력 확장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 주변의 여러 섬과 해안도시를 공격했다.
특히 밀레토스와의 갈등 과정에서는 밀레토스를 지원하러 온 레스보스섬의 군대를 해전에서 격파했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는 포로로 잡힌 레스보스인들이 사모스의 방어시설을 만드는 노동에 동원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폴리크라테스의 군사적인 성공이 실제로 다른 도시의 주민들에게 강제노동과 경제적인 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폴리크라테스는 주변의 여러 섬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지역을 어느 기간 동안 직접적으로 통치했는지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에게해 전체가 폴리크라테스의 영토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레네이아섬과 델로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레네이아섬(Rheneia)을 정복한 뒤 이를 아폴론 신에게 바쳤다.
특히 아폴론의 주요 성역이 있던 델로스섬과 레네이아섬을 사슬로 연결하여 봉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폴리크라테스가 군사력뿐 아니라 종교적인 봉헌을 통해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과시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레네이아섬과 델로스섬 전체가 현대적인 의미의 거대한 다리나 쇠사슬로 영구적으로 연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봉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2]
이집트와의 동맹
아마시스 2세
폴리크라테스는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아마시스 2세(Amasis II)와 외교적인 동맹을 맺었다.
아마시스 2세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로, 기원전 570년부터 526년까지 통치했다.
특히 이집트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와 상업적·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폴리크라테스 역시 이집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헤로도토스는 두 사람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폴리크라테스가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자 아마시스가 지나치게 많은 행운은 결국 신들의 질투를 불러올 수 있다고 걱정했다는 전설이 등장한다.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이 사람의 팬들 앞에서 절대로 이분을 까지 마십시오.
정말로 잘못 까다가도 디시위키에서는 안전을 보장해 드리지 않습니다.
모두 레전드에게 예의를 갖춥시다.
폴리크라테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3권 40~43장에 등장한다.
너무 많은 행운
폴리크라테스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여러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고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집트의 아마시스 2세는 폴리크라테스의 행운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당시 그리스와 이집트의 종교적인 관념에는 인간이 지나치게 성공하거나 교만해지면 신들의 질투와 분노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아마시스는 폴리크라테스에게 스스로 어떤 불행을 경험하여 행운의 균형을 맞추라고 충고했다.
소중한 반지를 버리다
폴리크라테스는 아마시스의 충고를 듣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가운데 무엇을 잃어버리면 가장 슬플지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이 매우 아끼던 보석이 박힌 인장 반지를 선택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반지가 사모스의 장인 테오도로스가 제작한 금으로 장식된 보석 인장이라고 설명했다.
폴리크라테스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 뒤 반지를 바다에 던졌다.
특히 다시는 반지를 찾을 수 없도록 깊은 바닷속에 버렸다고 한다.
이후 폴리크라테스는 가장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사실에 슬퍼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생선 뱃속에서 돌아오다
반지를 바다에 버린 지 며칠 뒤, 한 어부가 매우 크고 훌륭한 생선을 잡았다.
어부는 그 생선을 시장에서 팔기보다 폴리크라테스에게 선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어부는 생선을 폴리크라테스에게 바쳤다.
폴리크라테스는 어부의 행동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궁정의 요리사들이 생선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다.
생선의 뱃속에 폴리크라테스가 바다에 버렸던 반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이 일부러 버린 소중한 물건까지 되찾게 되었다.
행운이 너무 좋아서 일부러 불행한 일을 만들겠다고 반지를 바다에 버렸는데 생선이 주워다 줬다. 물고기까지 폴리크라테스의 운명을 도와준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일부러 손해를 보려고 해도 손해를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시스의 불길한 예감
폴리크라테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아마시스에게 알렸다.
그러나 아마시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리크라테스가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려고 해도 실패할 정도로 운이 좋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아마시스는 이처럼 행운이 지나치게 계속되면 결국 피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폴리크라테스와의 관계를 끊기로 했다.
이는 훗날 폴리크라테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결말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 있었던 일인가?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건은 아니다.
반지가 생선의 뱃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헤로도토스가 전한 고대의 일화다.
실제로 해당 반지가 발견되었다는 물질적인 증거가 존재하거나, 사건의 구체적인 과정이 다른 독립적인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지나친 행운과 교만, 신들의 질투 및 인간의 운명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도덕적인 일화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서술과 달리, 역사학에서는 폴리크라테스가 이집트와의 관계를 끊고 페르시아에 접근한 일을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인 선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폴리크라테스가 실제로 반지를 버렸다가 되찾았다는 사실과 이집트와의 동맹관계가 변했다는 역사적 사건은 구분해야 한다.[3]
페르시아와의 관계
아케메네스 왕조의 팽창
기원전 6세기에는 키루스 2세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
특히 기원전 547~546년 무렵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에 정복되면서 소아시아의 정치적 질서가 크게 변화했다.
사모스섬은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소아시아 해안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폴리크라테스 역시 페르시아의 팽창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이집트와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강대국인 페르시아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침공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을 추진했다.
특히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군은 이집트에 침공했으며, 결국 이집트 제26왕조는 멸망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에 함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변경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캄비세스에게 사모스의 해군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반대파를 페르시아로 보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세력 가운데 특히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들을 삼단노선 40척에 태워 페르시아의 이집트 원정에 보내려 했다.
또한 캄비세스에게 이들을 사모스로 다시 돌려보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즉 해외 원정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국내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일부 병사들은 페르시아의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이후 사모스로 돌아와 폴리크라테스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앞서 폴리크라테스가 보유했다고 전해지는 100척의 50노선과 페르시아 원정에 보낸 40척의 삼단노선은 서로 다른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스파르타의 사모스 침공
추방자들의 반란
폴리크라테스에게 반대하던 사모스인들은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특히 페르시아 원정에 동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돌아와 폴리크라테스와 싸웠다.
그러나 사모스 내부에서 그를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그리스 본토의 강대국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스파르타의 개입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의 추방자들이 스파르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이들이 처음에는 지나치게 긴 연설을 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인들이 앞부분의 내용은 잊어버리고 뒷부분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추방자들은 다시 나타나 간단한 말로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스파르타인들이 장황한 설명보다 짧고 직접적인 표현을 선호한다는 고대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스파르타는 결국 사모스의 추방자들을 돕기로 결정했다.
또한 코린토스 역시 원정에 참여했다.
코린토스가 참여한 이유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크라테스의 사모스를 공격했다.
헤로도토스는 코린토스가 과거 사모스인들과 갈등을 겪었던 일을 원정에 참여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소개했다.
특히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가 케르키라섬의 소년 300명을 소아시아로 보내 거세하려 했는데, 사모스인들이 그 소년들을 구출했다는 이야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코린토스와 사모스 사이에는 오랫동안 악감정이 존재했다.
다만 이러한 사건은 폴리크라테스의 집권 이전에 발생한 일로 전해지므로 폴리크라테스 개인이 직접 소년들을 구출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기원전 525년 무렵 침공
스파르타와 코린토스는 기원전 525년 무렵 사모스를 공격했다.
특히 스파르타의 군대는 사모스의 방어시설을 공격하고 일부 지역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양측 사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은 40일 동안 사모스를 포위했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따라서 스파르타가 폴리크라테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4]
포위전 이후
스파르타군이 철수한 뒤에도 폴리크라테스에게 반대하던 사모스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주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시프노스섬을 공격하거나 크레타섬으로 이동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의 참주정은 유지되었다.
특히 외국 군대의 침공을 격퇴했다는 사실은 그의 군사적 기반이 여전히 강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스파르타까지 쳐들어왔는데 40일을 버티고 결국 돌려보냈다. 폴리크라테스가 해적질만 잘하던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군사적인 능력과 권력 유지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건축사업
사모스의 토목기술
폴리크라테스의 시대는 사모스의 건축과 토목기술이 발전했던 시기와 겹친다.
특히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건축물 세 가지를 소개했다.
- 산을 관통하여 건설한 유팔리노스 수로
- 바다에 건설한 대규모 항구 방파제
- 헤라 여신을 위한 거대한 신전
이러한 시설은 당시 사모스의 경제력과 공학적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 가지 시설이 모두 폴리크라테스의 명령으로 처음부터 완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특히 일부 건축사업은 폴리크라테스 집권 이전부터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건설과 완공 시점에 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유팔리노스 터널
유팔리노스 터널(Tunnel of Eupalinos)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토목시설 가운데 하나다.
기원전 6세기 사모스의 도시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건설했다.
특히 터널의 전체 길이는 약 1,036m에 달한다.
이 터널이 놀라운 이유는 산의 양쪽에서 동시에 굴착하여 중간에서 연결했다는 점이다.
현대에는 정밀한 측량장비와 컴퓨터를 이용하여 터널을 건설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장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산의 양쪽에서 굴착한 터널을 연결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측량과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시설의 설계자로 메가라 출신의 유팔리노스(Eupalinos)를 소개했다.
또한 수로와 별도의 배수·송수시설을 이용하여 도시로 물을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유팔리노스 터널은 오늘날에도 고대 토목공학을 대표하는 시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92년 사모스의 피타고레이온과 헤라이온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5]
2,500년 전에 산 양쪽에서 터널을 파기 시작해서 중간에서 만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GPS도 없고 레이저 측량장비도 없었다. 이런 걸 생각하면 고대 그리스의 기술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모스의 항구
사모스는 해상무역과 군사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국가였다.
특히 항구시설은 선박의 정박과 물자의 운송, 해군의 운영 등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의 거대한 방파제를 당시 그리스 세계의 뛰어난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소개했다.
이는 사모스가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경제적·기술적인 기반을 보여준다.
다만 방파제의 정확한 건설 시기와 공사 기간을 폴리크라테스의 집권기에 모두 한정하기는 어렵다.
헤라 신전
사모스섬은 고대 그리스에서 헤라 여신을 숭배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헤라이온(Heraion)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성역이 존재했다.
사모스의 헤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기원전 8세기부터 종교적인 시설이 발전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거대한 신전 건축이 진행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의 헤라 신전을 자신이 본 가장 큰 신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성역의 역사는 폴리크라테스의 집권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따라서 폴리크라테스가 헤라 숭배를 처음 시작하거나 헤라 신전의 모든 건축물을 처음부터 건설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특히 사모스의 건축사업은 여러 세대에 걸쳐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문화와 학문의 후원
아나크레온
아나크레온(Anacreon)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사랑과 술, 잔치 등의 주제를 다룬 시로 유명하다.
그는 폴리크라테스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폴리크라테스가 군사적인 팽창뿐 아니라 시인과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들을 후원했다는 사실만으로 폴리크라테스의 통치가 민주적이거나 온건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고대의 여러 참주와 군주들은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예술을 후원했다.
이비코스
이비코스(Ibycus)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서정시인이다.
그 역시 폴리크라테스의 궁정과 관련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사랑과 신화, 찬양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시인들이 사모스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당시 폴리크라테스의 궁정이 정치적인 권력뿐 아니라 문화적인 후원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인과 예술가
폴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건축과 조각, 금속공예 등 여러 분야의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특히 폴리크라테스의 반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테오도로스는 사모스 출신의 장인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인물들의 활동은 사모스의 예술과 공예기술이 발전했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특정한 장인이 폴리크라테스의 궁정에서 활동했다는 전승이 있다고 해서 그가 남긴 모든 작품을 폴리크라테스가 직접 주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피타고라스와의 관계
같은 사모스섬 출신
피타고라스는 폴리크라테스와 같은 사모스섬 출신이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 무렵 태어났으며, 이후 숫자와 음악, 철학 및 영혼의 윤회에 관한 사상으로 유명해졌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으로 이주하여 피타고라스 학파를 형성했다.
피타고라스가 사모스를 떠난 시기는 폴리크라테스의 집권기와 관련되어 있다.
피타고라스가 떠난 이유
후대의 고대 기록에서는 피타고라스가 폴리크라테스의 참주정치를 견디기 어려워 사모스를 떠났다고 설명한다.
특히 아리스토크세노스의 전승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약 40세 무렵 사모스를 떠났다.
그 이유는 폴리크라테스의 독재적인 통치 아래에서 자유롭게 철학을 연구하며 생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타고라스가 크로톤으로 이주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데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를 직접 체포하거나 추방했다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또한 피타고라스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상당 부분 후대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과 연도에는 논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피타고라스가 폴리크라테스의 통치를 피해 사모스를 떠났다는 전승은 소개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직접적인 정치적 갈등을 벌였다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6]
크로톤에서의 활동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30년 무렵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제자들을 모아 철학과 종교적인 생활규범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했다.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는 숫자와 비율, 음악 및 우주의 질서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 역시 단순한 수학 연구단체가 아니라 종교와 정치적인 활동이 결합된 공동체였다.
특히 크로톤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정치세력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공격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피타고라스가 독재적인 정치환경을 피해 사모스를 떠났다는 전승과, 이후 그가 형성한 학파가 정치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폴리크라테스가 독재를 하는 게 싫어서 사모스를 떠났다고 하는데, 정작 이탈리아로 이주한 뒤 만든 피타고라스 학파도 정치에 참여했다가 공격당했다. 정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철학자에게도 현실 정치가 따라다녔던 셈이다.
폴리크라테스의 최후
페르시아 총독 오로이테스
오로이테스(Oroetes)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방 총독이었다.
특히 소아시아의 리디아와 프리기아 및 이오니아 지역과 관련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 통치자였지만 상당한 독자적인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 지방 총독 사이에서 권력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로이테스가 폴리크라테스를 제거하려 했던 정확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치적인 갈등 등을 배경으로 소개했지만 실제 사건의 원인은 불분명하다.
특히 당시 페르시아의 세력이 에게해 동부로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폴리크라테스의 해상세력이 페르시아의 지방 권력과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다.
금은보화를 미끼로 유인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에게 자신이 페르시아 왕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와 협력하고 싶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이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막대한 함대와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많은 자원이 필요했으므로 새로운 재산을 확보하려는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는 오로이테스의 제안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부하인 마이안드리오스(Maiandrios)를 보내 실제로 재산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가짜 금은보화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가 보낸 사자가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여러 개의 상자를 준비했다.
그러나 상자 전체를 금은보화로 채운 것은 아니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오로이테스는 상자 대부분을 돌로 채운 뒤 위쪽에만 금을 올려놓았다.
이렇게 하면 상자를 열어보는 사람은 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폴리크라테스의 사자는 실제로 상자를 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에게 오로이테스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폴리크라테스는 직접 오로이테스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배를 100척씩 굴리고 형제까지 제거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던 사람이 금이 가득한 상자를 보여주자 넘어갔다. 근데 알고 보니 상자 안은 돌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금괴가 가득한 금고를 보여줬는데 알고 보니 맨 위에 있는 것만 진짜였던 셈이다.
딸의 불길한 꿈
폴리크라테스가 오로이테스를 만나러 가려 하자 주변에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특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딸은 꿈속에서 아버지가 하늘 높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제우스가 아버지를 씻기고 태양이 아버지에게 기름을 바르는 듯한 장면을 보았다.
딸은 이 꿈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여 폴리크라테스에게 여행을 포기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는 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면 딸이 오랫동안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를 잃는 것보다 결혼하지 못하는 편이 낫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 폴리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결되는 예언적인 장면으로 사용된다.
마그네시아에서 처형
결국 폴리크라테스는 오로이테스를 만나기 위해 소아시아 본토로 이동했다.
그는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마그네시아(Magnesia)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를 협력자로 대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폴리크라테스는 붙잡혀 살해당했다.
헤로도토스는 그가 매우 비참한 방식으로 죽었다고 설명하며, 살해된 뒤 시신이 십자가형 또는 말뚝형에 가까운 방식으로 높이 매달렸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처형 방법은 번역과 해석에 차이가 있지만, 폴리크라테스가 오로이테스에게 살해당하고 시신이 공개적으로 매달렸다는 내용은 고대 전승의 핵심이다.
이 사건은 기원전 522년 무렵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정확한 날짜와 사건의 세부적인 과정에 관해서는 불확실한 부분이 존재한다.[7]
딸의 꿈이 실현되다
헤로도토스는 폴리크라테스가 죽은 뒤 시신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딸의 꿈과 연결했다.
특히 비가 내리면 시신이 젖었으므로 제우스가 아버지를 씻겼다는 꿈과 일치했다.
또한 햇볕을 받아 시신에서 수분이 흘러나오는 모습은 태양이 기름을 바르는 것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딸이 꿈에서 보았던 불길한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 역시 고대의 종교적·문학적인 전승이다.
역사적으로 폴리크라테스가 처형되었다는 사실과 딸의 꿈이 실제로 미래를 예언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딸이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보물을 받으러 갔다가 죽었다. 반지까지 바다에서 돌아올 정도로 운이 좋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사기꾼의 금상자에 속아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후의 사모스
마이안드리오스
폴리크라테스가 사망한 이후 사모스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폴리크라테스의 측근이었던 마이안드리오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이후 실제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참주가 사망한 뒤에도 기존의 권력구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로손의 귀환
폴리크라테스에게 추방당했던 형제 실로손은 이후 다시 사모스의 정치에 등장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실로손은 과거 다리우스가 아직 왕이 아니던 시절 이집트에서 그에게 망토를 선물했다.
이후 다리우스가 페르시아의 왕이 되자 실로손은 그 인연을 이용하여 사모스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다.
결국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사모스로 돌아왔다.
다만 이는 폴리크라테스가 사망한 이후의 사건으로, 실로손이 독자적인 군사력만으로 사모스를 정복한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의 영향력 확대
폴리크라테스가 사망한 이후 사모스는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다리우스 1세는 실로손을 지원하여 사모스의 정치에 개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소아시아와 에게해 동부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사모스의 통치구조와 페르시아의 지배방식은 여러 단계에 걸쳐 변화했으므로 폴리크라테스가 사망한 바로 그날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페르시아 직할령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오로이테스의 최후
폴리크라테스를 살해했던 오로이테스 역시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여러 인물을 살해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가 권력을 장악한 뒤 오로이테스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결국 다리우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오로이테스는 페르시아 측의 공작으로 살해당했다.
이는 폴리크라테스를 속여 살해했던 인물이 이후 자신도 정치적인 권력투쟁 속에서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다.[8]
폴리크라테스를 속여 죽였던 오로이테스도 결국 다리우스에게 제거당했다. 남의 나라 참주를 잡아 죽일 정도로 힘이 있었지만 정작 페르시아 황제의 권력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 평가
뛰어난 해상 전략가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의 해군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여러 섬과 해안도시를 공격했으며,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침공을 격퇴했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단순히 우연한 행운만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해상무역과 군사력을 결합하여 사모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해상 지배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는 약탈과 강압적인 지배방식이 함께 존재했다.
폭력적인 참주
폴리크라테스는 형제를 제거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추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또한 적과 친구를 가리지 않는 해상 약탈로 유명했다.
특히 반대세력을 페르시아의 원정에 동원하여 사모스에서 제거하려 했다는 기록은 그의 통치가 상당히 강압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모스가 그의 통치 아래 번영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무조건 선정을 베푼 통치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건축과 문화의 발전
폴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사모스에서 대규모 토목사업과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유팔리노스 터널과 항구시설, 헤라 신전 등은 당시 사모스의 기술적·경제적 역량을 보여준다.
또한 아나크레온과 이비코스 등의 시인들이 사모스의 궁정에서 활동했다.
이는 폴리크라테스의 통치가 군사적인 팽창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건축사업과 문화적 성과를 폴리크라테스 개인의 업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특히 사모스는 폴리크라테스 집권 이전부터 이미 발전한 도시국가였다.
지나친 행운과 몰락
폴리크라테스가 서양의 역사와 문학에서 유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행운과 몰락의 극적인 대비다.
특히 그는 전쟁과 외교에서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록으로 유명하지만, 마지막에는 페르시아 총독의 함정에 빠져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사건을 인간의 지나친 성공과 신들의 질투,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서술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폴리크라테스의 죽음을 신들의 질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의 팽창과 소아시아의 정치적인 경쟁, 오로이테스의 권력 및 폴리크라테스의 외교적인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중문화와 문학
헤로도토스의 역사
폴리크라테스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고대 자료 가운데 하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이다.
특히 제3권에서는 폴리크라테스의 집권과 해상활동, 이집트와의 외교, 반지 전설, 스파르타의 침공 및 최후 등이 자세하게 소개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보다 후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기록한 모든 대화와 일화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반지 이야기와 딸의 꿈, 신들의 질투 등은 역사적인 사건과 문학적인 의미가 결합된 서술이다.
실러의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1797년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전설을 소재로 한 발라드 《폴리크라테스의 반지》(Der Ring des Polykrates)를 작성했다.
이 작품은 1798년판 《무젠알마나흐》(Musen-Almanach)에 수록되었다.
작품에서는 계속해서 행운을 누리는 폴리크라테스와 그것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이집트 왕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인간의 지나친 성공이 오히려 불행의 징조가 될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룬다.
이 작품은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모든 장면이 고대의 역사적 사실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실러는 반지 전설을 문학적인 주제에 맞추어 재구성했다.[9]
오해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의 왕이었다?
정확하게는 참주였다.
폴리크라테스는 기존의 왕위를 정상적으로 계승하여 통치한 인물이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뒤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를 왕이라고 부르는 문학적 표현이 존재하더라도 역사적인 정치체제를 설명할 때에는 참주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모스의 모든 건축물은 폴리크라테스가 만들었다?
아니다.
폴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여러 대규모 건축사업이 진행되었지만 사모스의 건축과 토목기술은 그보다 이전부터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헤라 성역은 폴리크라테스의 집권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팔리노스 터널 역시 기원전 6세기의 대표적인 시설이지만 정확한 건설연대와 폴리크라테스의 직접적인 관여 정도에 관한 논의가 존재한다.
반지가 생선 뱃속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다?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다.
헤로도토스가 소개한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특히 지나친 행운과 신들의 질투, 인간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일화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폴리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를 직접 추방했다?
확정할 수 없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피타고라스가 폴리크라테스의 독재를 피해 사모스를 떠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폴리크라테스가 직접 추방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확실한 초기 기록은 없다.
폴리크라테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아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와 코린토스는 사모스를 약 40일 동안 포위했으나 결국 폴리크라테스를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했다.
폴리크라테스는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죽었다?
아니다.
폴리크라테스는 페르시아군과의 정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페르시아 지방 총독 오로이테스의 초대를 받아 소아시아 본토로 이동했다가 붙잡혀 살해당했다.
주요 사건 연표
| 시기 | 주요 사건 |
|---|---|
| 기원전 535년경 | 판타그노토스, 실로손과 함께 사모스의 권력 장악 |
| 집권 초기 | 판타그노토스 살해, 실로손 추방 및 단독 참주정 확립 |
| 기원전 530년대 |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의 세력 확장 |
| 기원전 530년경 | 피타고라스가 사모스를 떠나 크로톤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 |
| 기원전 530~520년대 | 이집트의 아마시스 2세와 우호관계 유지 |
| 기원전 525년경 |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 함대 지원 추진 |
| 기원전 525년경 |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사모스 침공 격퇴 |
| 기원전 522년경 | 오로이테스의 함정에 빠져 소아시아 본토에서 처형 |
| 사망 이후 | 마이안드리오스의 집권과 실로손의 귀환 |
| 다리우스 1세 시대 | 페르시아의 사모스 정치 개입 및 영향력 확대 |
※ 고대의 사건이므로 일부 연도는 연구자에 따라 추정에 차이가 있다.
여담
- 폴리크라테스는 기원전 6세기 사모스섬을 통치했던 참주다.
- 일반적으로 기원전 535년 무렵부터 522년 무렵까지 집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아버지는 아이아케스였다.
- 형제로는 판타그노토스와 실로손이 있었다.
- 처음에는 형제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 이후 한 형제는 살해하고 다른 형제는 추방했다.
형제들과 함께 정권을 잡았는데 결국 혼자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쯤 되면 형제들이 도대체 왜 처음부터 폴리크라테스를 믿었는지 궁금해진다.- 폴리크라테스는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사모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100척의 50노선과 1,000명의 궁수를 보유했다.
- 주변의 여러 섬과 해안도시를 공격했다.
- 밀레토스를 지원하러 온 레스보스인들을 해전에서 격파했다.
- 포로로 잡힌 레스보스인들이 사모스의 방어시설 건설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적과 친구를 가리지 않는 해적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친구 물건을 빼앗았다가 돌려주면 더 고마워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친구 입장에서는 그냥 처음부터 안 훔쳐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마시스 2세와 동맹을 맺었다.
-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한다.
-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반지를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 그러나 며칠 뒤 어부가 잡아온 생선의 뱃속에서 그 반지가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존재한다.
운이 너무 좋으니까 일부러 불행한 일을 만들려고 반지를 버렸는데 생선이 다시 가져왔다. 정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불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마시스는 지나친 행운이 결국 재앙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 그러나 반지 전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 기원전 525년 무렵 페르시아의 이집트 원정에 함대를 보내려 했다.
- 특히 정치적 반대자들을 40척의 군선에 태워 보내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 결국 일부 반대자들이 사모스로 돌아와 반란을 시도했다.
- 스파르타와 코린토스는 이들을 지원하여 사모스를 침공했다.
-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은 약 40일 동안 사모스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유능했던 모양이다. 해적질도 하고 주변 지역을 정복하면서 스파르타의 침공까지 막아냈다.- 사모스의 유팔리노스 터널은 기원전 6세기의 대표적인 토목시설이다.
- 터널의 길이는 약 1,036m다.
- 산의 양쪽에서 동시에 굴착하여 연결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당시에는 GPS도 컴퓨터도 없었는데 산 양쪽에서 터널을 파서 중간에서 만나게 만들었다. 토목기술 하나는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다.- 사모스의 헤라 신전 역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거대 신전 가운데 하나다.
- 다만 헤라 성역은 폴리크라테스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 1992년에는 사모스의 피타고레이온과 헤라이온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폴리크라테스의 궁정에서는 아나크레온과 이비코스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
- 그는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모스섬 출신이다.
- 후대의 전승에서는 피타고라스가 폴리크라테스의 독재를 피해 사모스를 떠났다고 설명한다.
- 그러나 폴리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를 직접 추방했다는 사실은 확정되지 않는다.
- 폴리크라테스는 페르시아의 총독 오로이테스에 의해 살해당했다.
- 오로이테스는 막대한 재산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으로 폴리크라테스를 유인했다.
- 실제로는 상자의 아래쪽에 돌을 채우고 위쪽에만 금을 놓았다고 한다.
- 폴리크라테스는 부하를 보내 재산을 확인한 뒤 직접 만나러 갔다.
형제도 죽이고 수많은 섬을 정복할 만큼 치밀했던 사람이 상자 위쪽에 놓인 금을 보고 판단을 잘못했다. 돈 앞에서는 누구나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딸은 폴리크라테스가 죽을 것이라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 그러나 폴리크라테스는 딸의 충고를 무시했다.
- 결국 기원전 522년 무렵 마그네시아에서 살해당했다.
- 시신이 높은 곳에 매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 헤로도토스는 이 죽음을 딸의 꿈과 연결하여 설명했다.
- 폴리크라테스를 살해한 오로이테스도 이후 다리우스 1세의 명령으로 제거되었다.
- 폴리크라테스가 죽은 뒤 측근이었던 마이안드리오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 이후 추방되었던 동생 실로손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사모스로 돌아왔다.
- 실로손은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되기 전에 그에게 망토를 선물한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폴리크라테스는 보물 때문에 죽었는데 동생 실로손은 망토 하나를 선물한 인연으로 페르시아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형제들의 운명이 참으로 극단적이다.- 폴리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지나친 행운과 비극적인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1797년 《폴리크라테스의 반지》라는 작품을 썼다.
- 이 작품 역시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운이 너무 좋아서 걱정하다가 결국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해상약탈과 외교적인 계산으로 권력을 유지하다가 정치적인 함정에 빠진 인물이었다.-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의 해군력과 경제적인 기반을 이용하여 에게해의 강자가 되었지만, 강압적인 참주정치와 위험한 외교적 선택 끝에 페르시아 총독에게 살해당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참주이다.
관련 문서
- 피타고라스
- 피타고라스 학파
- 사모스섬
- 고대 그리스
- 고대 그리스의 역사
- 이오니아
- 마그나 그라이키아
- 크로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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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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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이테스
- 스파르타
- 코린토스
- 페리안드로스
- 펠로폰네소스반도
- 헤로도토스
- 역사(헤로도토스)
- 투키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아나크레온
- 이비코스
- 프리드리히 실러
- 고대 그리스 철학
외부 링크
- text:1999.01.0126:book=3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39~60장 - 폴리크라테스의 집권과 반지, 스파르타 원정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118~149장 - 폴리크라테스의 최후와 사모스의 운명
- Oxford Classical Dictionary - Polycrates
- text:1999.04.0104:entry=polycrates-bio-1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 Polycrates
- Encyclopaedia Iranica - Oroite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Pythagoras
- UNESCO - Pythagoreion and Heraion of Samos
- 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 Tunnel of Eupalinos
- Klassik Stiftung Weimar - Der Ring des Polykrates
각주
-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39장
-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3권 104장
-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40~43장
-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44~56장
- ↑ UNESCO - Pythagoreion and Heraion of Samos
-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Pythagoras
- ↑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125장
- ↑ Encyclopaedia Iranica - Oroites
- ↑ Klassik Stiftung Weimar - Der Ring des Polykr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