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

노바위키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
결과도난 유물 회수, 범인 일당 검거
관련 방송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46회 (2026년 11월 5일)
국가유산 지정국보 제76호 (당시 지정번호)
도난 대상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 이순신 친필 유물
발생 장소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현충사 유물전시관
추가 정보 (10개)
발생일1967년 12월 31일
범행 목적도난 유물의 일본 밀반출 및 판매
사건 유형국가유산 절도, 국보 도난, 해외 밀반출 시도
수사 기관대한민국 경찰, 부산시경 등
수사 전환점1968년 1월 8일 대통령 특별 담화, 1월 9일 시민 제보
유물 회수일1968년 1월 9일 밤~10일 새벽
주범유근필 (일명 유 선생)
주범 형량징역 5년
주요 관련 인물박정희, 유근필
회수 장소부산의 한 인쇄업자 주택 연탄창고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은 1967년 12월 31일 충청남도 아산군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친필 기록물인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 등이 도난당한 사건이다.

당시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유물이 통째로 사라지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경찰이 전국적인 수사에 나섰고, 급기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특별 담화까지 발표했을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을 받았다.

범행을 주도한 인물은 일명 유 선생이라고 불리던 문화재 전문 절도범 유근필이었다. 그는 여러 공범을 모집해 사전에 현충사를 답사하고, 유물 절도와 보관, 운반 및 해외 밀반출까지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범행을 계획했다.

범인들의 최종 목적은 훔친 유물을 일본에 팔아넘겨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유물이 무엇인가?

바로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였다.

“ 이순신이 일본군을 때려잡던 기록을 훔쳐 일본에 팔아먹으려 했다. ”

정말 여러모로 기가 막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1968년 1월 9일 부산에서 들어온 시민들의 제보를 계기로 수사가 급진전했고, 경찰은 도난당한 국보를 일본으로 밀반출하기 직전에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사건 발생 약 열흘 만이었다.

이 사건은 1968년 1월 19일 제작된 《대한뉴스》 제658호에서 소개됐으며, 2026년 1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다시 다뤄지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1]

개요

1967년 마지막 날,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돼 있던 국보급 문화유산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적지로, 이순신이 남긴 유물과 기록물들이 보관돼 있었다.

사라진 유물 가운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직접 작성한 《난중일기》가 있었다.

난중일기는 단순한 개인 일기가 아니라 전쟁 당시 조선 수군의 작전과 전투 상황, 지휘관의 심정 등을 기록한 역사 자료다.

원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값비싼 골동품을 잃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책을 다시 인쇄할 수는 있어도 이순신이 직접 쓴 원본을 다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난당한 유물은 난중일기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군사 보고문서인 《임진장초》와 친필 편지를 모은 《서간첩》 등도 함께 사라졌다.

경찰은 전국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초기에는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 8일 특별 담화를 발표했고, 바로 다음 날 부산에서 결정적인 제보가 접수됐다.

조사 결과 사건은 유근필이 주도한 조직적인 문화유산 절도 범행으로 드러났다.

항목 내용
사건 발생 1967년 12월 31일
장소 충남 아산군 현충사 유물전시관
주요 피해 유물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
국보 지정 1962년 12월 20일
주범 유근필 (유 선생)
범행 성격 조직적인 문화유산 절도
목적 일본 밀반출 및 판매
대통령 특별 담화 1968년 1월 8일
결정적 제보 1968년 1월 9일
도난 유물 회수 1968년 1월 9일 밤~10일 새벽
결과 유물 회수 및 관련자 검거

사건의 배경

난중일기란 무엇인가?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의 무신 이순신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작성한 친필 일기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약 7년에 걸친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순신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자신의 일상과 군사 활동, 날씨, 부하 장수들의 행동, 전투 준비 및 가족에 대한 걱정 등을 직접 기록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이 실제 현장에서 작성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일반적으로 역사서에서는 특정 사건이 발생한 이후 편찬자가 자료를 수집해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난중일기는 전쟁을 지휘하던 당사자가 당시 상황을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이순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판단까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군사사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와 생활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다.

현재 전해지는 난중일기 친필본은 총 7책이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2]

따라서 1967년 도난 사건은 단순한 고서 절도가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가진 기록물이 사라질 뻔한 사건이었다.

국보 제76호

난중일기를 비롯한 관련 유물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됐다.

당시 공식 명칭은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였다.

현재는 지정번호를 앞세우지 않는 국가유산 명칭 체계에 따라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로 관리되고 있다.

이 국보는 다음과 같은 기록물들로 구성된다.

유물 내용
난중일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일기
임진장초 조정에 보고한 군사 관련 장계의 초안
서간첩 이순신의 편지를 모은 기록물

국가유산청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합계 9책에 해당하며,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서 관리되고 있다.[3]

이 때문에 1967년 도난 사건은 난중일기 한 권만 없어진 사건이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여러 기록물이 함께 사라진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충남 아산에 위치하며, 조선시대부터 이순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1960년대에는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추진됐다.

이 사업을 통해 현충사 주변 시설과 경내가 정비됐으며, 관련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한 시설도 마련됐다.

이순신의 후손들이 관리하던 친필 기록물과 유품들도 이러한 시설에 보관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가적인 사업을 통해 관리하기 시작한 국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난당한 것이다.

당시 정부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충무공의 유산을 보존하겠다고 시설을 정비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를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1967년 12월 31일

1967년 12월 31일 새벽,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전시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들은 전시관의 철문을 훼손하고 내부에 침입한 뒤 난중일기 등 이순신의 친필 기록물을 훔쳐 달아났다.

2026년 《꼬꼬무》 방송에서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범인들은 전시관의 철문을 뚫고 침입했으며, 범행 당시 손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장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또한 사건 전후로 눈이 내리면서 현장에 남았을 수 있는 발자국 등 일부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경찰은 현장 감식을 통해 범인의 침입 경로와 범행 수법을 조사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범행이 전문적인 문화유산 절도범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2008년 《일요신문》에 실린 당시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팀은 처음에 전시관 주변의 철망과 담장이 훼손된 모습 등을 보고 현지 주민에 의한 단순 절도 가능성도 검토했다.[4]

하지만 실제 범인은 외부에서 현충사를 찾아온 전문 절도 조직이었다.

도난 사실의 발견

현충사에서 국보급 유물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계기관에 비상이 걸렸다.

단순한 지역 절도 사건과 달리 도난 대상이 국가를 대표하는 역사 유물이었기 때문에 사건의 파장이 컸다.

특히 난중일기는 역사적 상징성이 강한 기록물이었다.

경찰은 도난당한 유물을 찾기 위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경찰은 문화유산과 골동품 거래에 관련된 업자들을 조사하고, 유사한 범행 전력이 있는 인물들을 추적했다.

또한 유물이 해외로 반출될 가능성에 대비해 공항과 항만 등에서 관련 경계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범인들의 신원과 유물의 행방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훔친 것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었다

범인들이 훔친 난중일기는 16세기에 작성된 원본 기록물이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역사책이나 복제본처럼 다시 구입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다.

이순신이 직접 사용했던 종이와 먹, 당시 작성한 글씨 자체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전쟁이었다.

당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순신의 친필 일기를 훔쳐 일본에 팔려 했다는 점은 사건이 알려진 이후 더욱 큰 공분을 불러일으킨 요소였다.

“ 이순신이 일본군을 물리친 기록을 일본에 팔아넘기려던 도둑들. ”

그야말로 역사책을 보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범행이었다.

범인 일당

유 선생의 정체

이 사건의 주범은 유근필이었다.

당시 일명 유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문화유산 절도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단독으로 현충사에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모집하고 역할을 나눠 범행을 계획했다.

1968년 1월 19일 정부가 제작한 《대한뉴스》 제658호에서도 유근필 등이 난중일기를 훔쳐 판매하려다가 검거됐다고 소개됐다.

유근필은 과거 교육계에 몸담은 경력이 있었으며, 이후 문화유산 절도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6년 《꼬꼬무》에서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범행을 지시하면서 자신은 배후에서 움직인 인물로 소개됐다.

조직적인 범행

경찰 수사 결과 이번 사건은 단순히 도둑 한두 명이 우연히 현충사에 들어간 사건이 아니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현충사를 답사하고 도난 유물의 판매와 운반, 보관 등의 역할을 나눴다.

2026년 《꼬꼬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주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소개됐다.

인물 주요 역할
유 선생 전체 범행 계획 및 공범 모집
포마드 리 현장 절도 실행
정 선수 현장 절도 실행
강 사장 표구사 운영, 유물 보관 및 전달
이 사장 인쇄업자, 유물 보관
마도로스 박 해외 밀반출 관련 역할

위 별칭과 역할은 방송에서 소개한 구성을 기준으로 한다.

실제 수사자료에는 인물의 실명과 가명, 별칭이 혼재되어 있으므로 방송상의 별칭을 모두 공식적인 신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당시 사건은 여러 사람이 연결된 문화유산 전문 절도 범행이었으며, 2008년 수사 관계자 회고에는 총 8명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소개돼 있다.

일본 밀반출 계획

범인들의 주요 목적은 경제적인 이익이었다.

당시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일당은 부산에서 모여 난중일기를 훔친 뒤 일본에 팔아넘길 계획을 논의했다.

이들은 유물을 일본에 판매하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언론과 수사 회고에서는 약 1,000만 원의 판매 대금을 기대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1960년대 후반의 1,000만 원은 상당한 액수였다.

다만 실제로 거래가 성사된 것은 아니므로 이 금액을 난중일기의 객관적인 가치나 실제 판매가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유물을 반출할 계획이었다.

2008년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는 1968년 1월 10일 새벽 일본 이즈하라 방면의 밀수 경로를 이용하려 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즉, 경찰이 도난 유물을 회수한 시점은 해외 반출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과거의 문화유산 절도 전력

유근필은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처음으로 알려진 범행이 아니었다.

2026년 《꼬꼬무》에서는 그가 이전에도 문화유산 절도에 연루됐던 사실이 소개됐다.

1963년에는 서울 봉은사에서 승려 행세를 하며 머물던 중 청동 은입사 향완을 훔쳐 판매하려 한 사건에 연루됐다.

1966년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의 향로와 감로병, 철불상 등을 훔친 사건에도 연루된 것으로 전해진다.

사찰에서 승려 행세를 하며 문화유산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범행의 계획성과 상습성이 드러난다.

“ 이번에는 국보를 훔쳤는데 알고 보니 전에도 보물을 훔친 놈이었다. ”

단순히 우연히 귀중한 물건을 발견해서 훔친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 자체를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수사 과정

전국적인 수사

사건 발생 이후 경찰은 현충사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도난 유물의 목록을 작성해 배포했으며, 문화유산 거래와 관련된 업체 및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진행했다.

당시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경찰은 서울 지역의 골동품 판매업자 약 1,000명과 유사한 범행 전력이 있는 인물 약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수사 대상이 서울과 부산 등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사건은 지역 경찰의 일반적인 절도 수사를 넘어서는 규모가 됐다.

그러나 현충사 주변에서 확보한 단서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수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범인들이 이미 충남 아산을 떠나 부산으로 이동했다는 점도 수사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특별 담화

1968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난중일기 도난 사건과 관련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국보가 사라진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받아들였으며, 경찰과 관련 수사기관에 범인 검거와 유물 회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특별 담화에서는 자수하거나 사건 해결에 협조하는 사람에 대한 조치와 범인에 대한 엄벌 방침 등이 언급됐다.

당시 대통령이 직접 개별 문화유산 도난 사건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는 점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관심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직접 추진했던 박정희 정부로서는 유물 도난 사건이 더욱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전국 경찰은 수사 역량을 집중했고, 같은 날 서울에서는 별도의 특별수사전담반도 구성됐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나섰는데도 곧바로 범인이 잡힌 것은 아니었다.

수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바로 다음 날 부산에서 들어온 제보였다.

1968년 1월 9일: 부산에서 온 제보

1968년 1월 9일 오전, 부산에 거주하던 한 30대 청년이 경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2008년 《일요신문》에 실린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이 청년은 아버지로부터 동네의 한 표구사에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표구사에서 일하던 17세 직원에게 접근해 관련 이야기를 확인했다.

직원은 최근 표구사에 사람들이 모여 난중일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봤으며, 실제로 문제의 유물이 표구사에 들어온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청년은 해당 내용을 부산 경찰에 제보했다.

당시 수사에서는 시민의 관심과 관련자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창한 첨단 수사기술이 아니라 수상한 이야기를 들은 시민이 직접 확인하고 신고한 것이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 셈이다.

또 다른 제보

같은 날 청와대에도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전화 제보가 들어왔다.

2008년 수사 회고에서는 이 제보자가 범행을 위한 현장답사에 참여했던 공범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됐다.

그는 범행에 연루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관련자들의 신원과 도난 유물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범인들이 난중일기를 일본으로 밀반출할 계획이라는 사실도 설명했다.

이처럼 부산의 시민 제보와 관련자의 자수가 이어지면서 경찰은 범인들의 연결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제보자의 실명은 언론의 회고 기사에서 가명으로 처리됐으므로, 해당 가명을 실제 신원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범인 검거

제보를 확보한 경찰은 관련 표구사와 골동품 거래업자들을 추적했다.

표구사 운영자와 관련자들을 조사하면서 도난 유물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유물의 실제 보관 장소를 찾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관련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유물을 넘겼다고 진술하거나 보관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여러 사람의 진술을 대조하면서 유물의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결국 부산의 한 인쇄업자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이후 경찰이 해당 장소를 수색하면서 난중일기를 비롯한 도난 유물을 발견했다.

사건 발생 약 열흘 만에 국가적인 도난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도난 유물 회수

연탄창고에서 발견된 국보

경찰이 난중일기를 발견한 곳은 부산의 한 인쇄업자 주택에 있는 연탄창고였다.

당시 유물들은 마당의 연탄창고에 보관돼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국보가 도난당한 뒤 일반 주택의 연탄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다.

“ 400년 전 이순신이 직접 쓴 국보가 연탄창고에서 발견됐다. ”

국가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온도와 습도 관리가 이루어지는 수장고도 아니었고, 특별한 보안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장소였다.

범인들에게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기록물이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숨겨놓은 장물에 가까웠던 셈이다.

다행히 경찰은 유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전에 이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불에 타버릴 뻔한 친필 편지

2026년 《꼬꼬무》 방송에서는 유물 회수 과정에서 벌어진 또 다른 위기도 소개됐다.

표구사 사장의 아내가 범행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순신의 친필 편지 3장을 아궁이에 던졌다는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형사들이 이를 발견하고 편지를 구해낸 것으로 방송됐다.

종이로 만들어진 친필 기록물은 불에 타면 원본을 복구하기 어렵다.

특히 이순신의 친필 편지는 단순히 문서의 내용뿐 아니라 실제 필적과 원본 자체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때문에 편지가 훼손되지 않은 채 회수됐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26년 방송 보도에 따르면 도난당한 주요 유물들은 손실 없이 회수됐다.[5]

일본 밀반출 직전 회수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범인들은 1968년 1월 10일 새벽 일본으로 향하는 밀수 경로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이 1월 9일 밤부터 관련자들을 추적하고 유물을 확보하면서 이 계획은 실패했다.

당시 일부 범인들은 해외 밀반출에 협조할 선원 등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조금만 늦게 유물을 회수했다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실제 일본 반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물이 영구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해외로 반출된 고문서를 추적하고 회수하는 작업은 국내에 보관된 장물을 찾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문화유산의 해외 밀반출이 이루어지기 전에 회수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회수 이후의 이동

2008년 《일요신문》에 실린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회수된 난중일기는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헬리콥터로 이송됐다.

이후 당시 문교부 장관을 거쳐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됐다가 다시 현충사로 옮겨졌다.

이러한 과정은 정부가 회수된 국보의 안전한 보관과 관리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보여준다.

현재 난중일기 원본과 관련 기록물은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상설 전시보다는 보존을 중심으로 관리된다.

범인들의 처벌

유근필 징역 5년

사건 이후 검거된 관련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2008년 《일요신문》의 수사 회고와 2026년 《꼬꼬무》 방송 보도에 따르면 주범 유근필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관련 공범들도 범행 가담 정도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았다.

당시 재판에서는 도난 유물이 회수된 사실과 피고인들의 범행 전력, 반성 여부 등이 양형에 고려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범행의 대상이 국가적인 상징성을 가진 국보였다는 점에서 국민적인 공분은 상당했다.

특히 이전에도 문화유산 절도 전력이 있었던 인물이 다시 국보를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이어졌다.

검거 이후의 태도

유근필은 검거 이후에도 자신의 범행을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수사 관계자 회고에 따르면 그는 선조들이 만든 귀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만져본 것에 만족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2026년 《꼬꼬무》에서도 그가 국보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소개됐다.

범행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상당히 뻔뻔한 발언이었다.

“ 훔친 국보를 만져봤으니 만족한다는 식의 태도였다. ”

다만 실제 발언의 문구는 당시 회고 자료와 2026년 방송에서 소개된 표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동일한 직접 인용문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출소 이후에도 이어진 범행

더욱 놀라운 점은 유근필이 형을 살고 나온 이후에도 문화유산 관련 범행에 연루됐다는 사실이다.

2026년 《꼬꼬무》 방송에서는 그가 1974년 동혈사에서 추사 김정희의 현판인 구국제민을 훔쳐 판매했다고 소개됐다.

또한 1975년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탑사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의 장물 거래를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6년 다시 검거됐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현판은 2026년 방송 기준으로도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전해졌다.

난중일기는 운 좋게 회수됐지만 다른 문화유산까지 모두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전력은 유근필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문화유산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6]

사건 이후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

난중일기 도난 사건은 국가가 관리하는 중요한 문화유산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유물이라고 해도 현대적인 보안시설과 감시체계가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다.

특히 전문 절도범들은 유물의 보관 장소와 관리 상황을 사전에 조사하고 범행을 계획했다.

따라서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도난 이후 범인을 검거하는 것뿐 아니라 사전에 보안과 관리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도난당한 유물이 국내외에서 불법적으로 거래되지 않도록 하는 관리체계도 필요하다.

다만 이 사건 이후 특정한 보안장치나 제도가 직접 도입됐는지 여부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문화유산 밀반출 문제

문화유산 절도는 단순히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역사적인 원본 기록물이 해외로 불법 반출되면 해당 유산의 소유권과 관리, 보존 및 반환 문제 등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이미 해외로 유출된 문화유산의 경우 여러 국가의 법률과 거래 기록 등을 확인해야 하며, 반환 절차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난중일기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회수됐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사례다.

하지만 유근필의 다른 범행에서 일부 유물이 회수되지 못했다는 점은 문화유산 범죄의 피해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68년 대한뉴스 보도

1968년 1월 19일 제작된 《대한뉴스》 제658호는 되찾은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해결 과정을 소개했다.

정부의 공식 기록영상에는 범인 일당의 검거와 현충사 현장검증, 대통령 특별 담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방송에서는 유근필 등 문화유산 절도범들이 난중일기를 훔쳐 판매하려 했으며, 시민들의 협조와 경찰 수사를 통해 유물을 회수했다고 설명했다.

이 영상은 사건 당시 정부가 공개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다만 정부가 제작한 뉴스 영상이므로 당시 수사와 사건 해결을 어떻게 홍보했는지에 관한 자료라는 성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2026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영

246회: 도둑들 - 난중일기 도난 사건

2026년 1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46회에서는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소개됐다.

방송 제목은 도둑들 -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다.

방송은 현충사 유물전시관에서 국보가 사라진 사건을 시작으로 경찰 수사와 대통령 특별 담화, 부산 시민의 제보 및 범인들의 검거 과정을 다뤘다.

또한 범행을 계획한 유근필과 공범들의 역할 분담, 일본 밀반출 계획, 도난 유물 회수 과정을 소개했다.

해당 방송의 주요 출연자는 다음과 같다.

구분 출연자
진행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이야기 친구 김슬기, 신성, 정순원
방송 회차 246회
방송일 2026년 11월 5일
제목 도둑들 - 난중일기 도난 사건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배우 김슬기와 정순원, 가수 신성은 사건을 설명받으면서 범인들의 행동과 유물 회수 과정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난중일기와 관련 유물이 불에 타거나 해외로 넘어갈 뻔한 상황이 소개되면서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됐다.[7]

방송 이후 관심 증가

2026년 11월 5일 방송 이후 난중일기 도난 사건과 유근필, 현충사 등 관련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특히 사건 발생 당시에는 일반 대중에게 크게 알려졌지만 수십 년이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기억에서 멀어졌던 사건이 방송을 통해 다시 소개됐다.

난중일기는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적 기록물이지만, 과거에 실제로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방송은 단순한 역사 소개를 넘어 문화유산을 노린 범죄와 보존 문제를 되짚는 계기가 됐다.

방송과 실제 기록의 차이

《꼬꼬무》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방송의 진행 방식상 일부 인물의 이름을 별칭으로 소개하거나, 여러 단계에 걸친 수사 과정을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사건의 날짜와 범행 경위, 유물 회수 등 주요 사실을 확인할 때에는 당시 기록과 수사 관계자의 회고, 공식 역사자료 등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

특히 2026년 방송에서 소개된 인물의 별명과 2008년 수사 회고에 사용된 가명을 직접 대응시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주요 쟁점

난중일기 전체가 사라졌던 것인가?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도난 대상은 난중일기만이 아니었다.

당시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순신의 친필 기록물들이 함께 도난당했다.

대표적으로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 등이 포함됐다.

현재 국가유산청은 이 유물들을 하나의 국보로 묶어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사건을 단순히 난중일기 한 권을 훔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일본에 실제로 팔렸는가?

아니다.

범인들은 난중일기를 일본으로 밀반출해 판매하려 했지만, 경찰이 이를 실행하기 전에 도난 유물을 회수했다.

따라서 난중일기가 실제로 일본에 판매됐거나 일본의 특정 소장자에게 넘어갔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범인들이 기대했던 판매금액을 실제 거래가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계획만 있었을 뿐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범인이 검거됐는가?

경찰은 사건 발생 약 열흘 만에 핵심 관련자들을 검거하고 도난 유물을 회수했다.

다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검거 시점은 모두 같지 않았다.

2008년 수사 관계자의 회고에 따르면 일부 범인은 1968년 1월 9일 이후에도 추적 대상이었으며, 한 현장 절도 가담자는 1월 13일 사망한 상태로 발견됐다.

따라서 '열흘 만에 일당이 잡혔다'라는 표현은 사건 해결의 주요 시점을 요약한 것이며, 모든 관련자가 정확히 같은 날 체포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범인들이 반성했는가?

유근필은 검거 이후에도 국보를 만져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출소 이후에도 다른 문화유산 절도 사건에 연루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문화유산 절도의 상습성과 재범 문제를 보여주는 인물로 언급된다.

다만 당시 범인 일당 전체가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국보가 회수됐으니 피해가 없었던 것인가?

도난당한 주요 유물들이 회수됐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록물이 장기간 관리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해외 밀반출이나 훼손의 위험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중대한 사건이었다.

특히 친필 편지가 불에 탈 뻔했던 과정은 원본 문화유산의 보존에 얼마나 큰 위험이 발생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유물이 회수됐다고 해서 범행의 중대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가 및 의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도난 사건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 조직적인 절도 범행의 대상이 된 사례다.

당시 국보 제76호가 사라지면서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또한 문화유산 전문 절도범들이 범행을 계획하고 여러 공범을 통해 유물을 운반하고 보관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절도 사건과 차이가 있었다.

사건의 해결에도 시민 제보와 관련자 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 제보의 중요성

사건이 해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산에서 들어온 제보였다.

범인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유물을 이동시키고 보관했기 때문에 경찰은 초기 수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시민이 수상한 이야기를 듣고 경찰에 제보하면서 수사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후 다른 관련자의 제보까지 이어지면서 범인들의 연결관계와 유물의 위치가 드러났다.

이러한 과정은 문화유산 범죄를 해결하는 데 수사기관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협조도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역사적 기록물의 대체 불가능성

문화유산 가운데 특히 친필 기록물은 원본 자체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난중일기 역시 단순한 문자 기록을 넘어 이순신이 실제로 작성한 종이와 필적이 남아 있는 자료다.

원본이 사라지면 필사본이나 번역본을 통해 내용을 읽을 수는 있지만 원본이 지니는 모든 가치를 회복할 수는 없다.

1967년의 도난 사건은 이러한 원본 자료의 보존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담

  • 사건 발생일이 1967년 12월 31일이다. 1967년의 마지막 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보가 도난당한 셈이다.
  •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따라서 1967년 도난 사건 당시에는 아직 유네스코에 등재되기 전이었다.
  • 당시 국보 제76호였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됐다. 일부 과거 보도에서 다른 지정 연도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국가유산청의 공식 지정일은 1962년 12월 20일이다.
  • 범인들이 훔친 것은 난중일기뿐 아니라 임진장초와 서간첩 등 이순신의 친필 기록물이었다.
  • 주범 유근필은 '유 선생'이라고 불렸으며, 단독 범행이 아니라 여러 공범을 동원한 조직적인 범행을 계획했다.
  • 유근필은 난중일기 도난 사건 이전에도 다른 문화유산 절도에 연루된 전력이 있었다.
  • 범인들은 난중일기를 일본에 팔아넘기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당시 회고에서는 약 1,0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언급된다.
  • 1968년 1월 8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이 국보 절도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는 점에서 사건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보는 부산에서 나왔다. 표구사 주변의 수상한 움직임을 들은 청년이 직원에게 관련 내용을 확인하고 경찰에 알린 과정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 도난당한 난중일기는 결국 부산의 한 인쇄업자 주택 연탄창고에서 발견됐다. 국보가 연탄창고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당한 장면이다.
  • 2026년 《꼬꼬무》에서는 이순신의 친필 편지 3장이 아궁이에 던져졌다가 형사들에 의해 구출된 일화도 소개됐다.
  • 유근필은 출소 이후에도 다른 문화유산 절도 사건에 연루됐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현판을 훔친 사건에서는 해당 유물이 장기간 회수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 사건의 해결 과정은 1968년 1월 19일 《대한뉴스》 제658호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됐다. 현재도 e영상역사관에서 관련 영상과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 난중일기는 일본군과 전쟁하던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기록이다. 그런 유물을 훔쳐 일본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상당히 강한 사건이었다.
  • 2026년 1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사건이 다시 소개되면서 유근필과 난중일기 도난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같이 보기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