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부터 1908년까지 청나라에서 했던 일종의 개혁
ㄴ 넓게 보면 보통 청말신정(淸末新政) 또는 신정(新政)이라 하여 1901년부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1911년까지 이어진 개혁을 말한다. 1908년은 광서제와 서태후가 연달아 사망한 해이지만 개혁 자체는 선통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변법자강운동이 무술정변으로 씹망하고 서태후는 다시 나라를 옛날로 원상복구시키려고 의화단을 지원했으나 의화단 운동이 개같이 망하면서 신축조약을 체결하고 서양세력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청 조정은 열강에 선전포고까지 했다가 8개국 연합군에게 베이징을 털렸고 서태후와 광서제가 시안까지 빤스런해야 했다. 이후 신축조약으로 막대한 배상금과 외국군 주둔 등을 인정하면서 기존 방식으로는 왕조 자체가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그래서 이대로는 서태후 세력도 안 되겠다 싶어서 1901년부터 '독판정무처'를 세워 광서 신정을 시작했다.
정식으로는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으며, 재미있는 점은 불과 몇 년 전 변법자강운동 때 때려잡았던 개혁안 상당수를 결국 서태후 자신이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변법자강운동처럼 황제권을 중심으로 단숨에 제도를 뜯어고치는 방식보다는 군제, 교육, 행정, 경제, 법률 등을 단계적으로 개편하는 형태였다.
정치 개혁
여러 나라의 헌법 체계와 내용을 배워서 1907년 자정원이라는 유사 의회를 설치하고 1908년에는 흠정헌법대강이라는 청나라판 헌법을 만들었다. 삼권 분립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내용도 있었다.
ㄴ 정확히는 1907년에 자정원(資政院) 설치를 준비하기 위한 기구가 만들어졌고, 자정원 자체가 정식으로 개원한 것은 1910년이다. 자정원은 현대적인 국회라기보다는 황제에게 의견을 올리는 중앙 자문기관에 가까웠으며 의원 절반가량을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등 황실의 통제가 강했다.
1905년에는 대신들을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 보내 각국의 헌정제도를 조사하게 했고, 이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1906년 예비입헌 방침을 공식화했다. 특히 일본의 메이지 헌법 체제가 중요한 참고 대상이었다.
1908년 발표된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은 청나라 최초의 헌법적 문서로 평가되지만 현대적인 민주헌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국민의 권리와 의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군 통수권, 외교권, 관리 임명권 등 핵심 권한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실제 목적도 황제권을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청 조정은 원래 약 9년에 걸쳐 헌법과 의회를 준비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1909년에는 각 성에 자의국(諮議局)이라는 지방 의회 비슷한 기관도 설치했다. 그런데 개혁파와 지방 엘리트들은 "나라 망하게 생겼는데 9년이나 기다리라고?" 하며 의회 개설을 더 앞당기라고 압박했다. 결국 1910년에는 정식 의회를 1913년에 열겠다고 계획을 단축했지만 이미 혁명 분위기를 막기에는 늦었다.
교육 개혁
식산흥업 정책을 펼쳐 상공업을 부흥시키려 했으며 1905년에는 무려 1300년 동안이나 이어져오던 과거제를 폐지하고 서양식 교육 체계를 도입했다. 3성 6부제의 잔재인 병부를 철폐하고 육군과 해군을 설치했으며 형부를 법부로 변경했다.
과거제 폐지는 광서신정 가운데서도 가장 파급력이 큰 개혁 중 하나였다. 수나라·당나라 시대부터 중국의 관료 선발을 떠받쳐온 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기존 유학 교육과 사대부의 출세 코스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대신 각지에 소학교, 중학교, 고등교육기관 등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정책을 확대했다. 특히 가까우면서 이미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이 크게 늘었다.
교육을 담당하는 중앙기관으로 학부(學部)도 설치했다. 이후 중국의 근대 학교제도와 교육 행정의 기초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군사 개혁
3성 6부제의 잔재인 병부를 철폐하고 육군과 해군을 설치했으며 형부를 법부로 변경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기존의 팔기군과 녹영 같은 구식 군대를 개편하고 서양식 훈련과 장비를 도입한 신군(新軍)을 확대했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던 북양신군으로, 이후 중국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906년에는 기존 병부를 육군부로 개편하고 군사교육기관과 장교 양성제도를 정비했다. 해군 역시 재건을 추진했지만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박살난 뒤라 육군 개혁에 비해서는 진행이 더딘 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가 왕조를 지키겠다고 키운 신군은 나중에 신해혁명 때 혁명군으로 돌아서거나 혁명세력과 결합하게 된다.
행정·사법 개혁
기존의 육부 중심 행정조직 역시 근대적인 부처 형태로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에는 전통적인 육부 체제가 사실상 폐지되고 학부, 농공상부, 민정부, 육군부 등 근대식 중앙부처들이 만들어졌다.
형부는 법부로 바뀌었으며 전통적인 중국 법률체계를 근대식 민법·형법·상법 체계로 개편하려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일본과 유럽의 법제를 참고하면서 고문이나 잔혹한 형벌을 줄이고 근대적인 재판제도를 만들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경찰제도와 지방행정도 정비되기 시작해 근대 중국 국가기관 상당수의 원형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경제 개혁
식산흥업 정책을 펼쳐 상공업을 부흥시키려 했으며
철도와 광산, 공장 설립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담당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근대적인 회사법과 상업법을 도입하려 했다. 외국 자본에 넘어간 철도와 광산 이권을 중국인이 되찾자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정부 재정 역시 중앙과 지방의 수입·지출을 정리하고 세금 및 화폐제도를 근대화하려 했지만 청 조정의 만성적인 재정난과 신축조약 배상금 때문에 개혁에 필요한 돈이 부족했다.
특히 철도 국유화 정책은 오히려 신해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지방 상인과 지주들이 자기 돈으로 투자한 철도회사를 중앙정부가 국유화한 뒤 외국 차관으로 넘기려 하자 쓰촨성에서 보로운동이 터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후베이의 신군을 쓰촨으로 이동시키면서 우창 지역의 군사력이 약해졌다. 이 틈에 우창봉기가 일어난다.
한계
개혁 내용만 놓고 보면 상당히 과감했다. 과거제를 없애고 근대 학교를 만들고, 군대를 개편하고, 헌법과 의회를 준비하고, 행정과 사법체계까지 뜯어고쳤으니 몇 년 전 변법자강운동 때보다 오히려 범위가 넓었다.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청나라에 대한 민심과 신뢰가 이미 박살난 뒤였고 개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과 각종 정책이 오히려 지방의 불만을 키웠다. 또한 입헌군주제를 약속해놓고 실제 권력은 황실이 계속 움켜쥐려고 하자 입헌파마저 청 조정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1년 청 조정이 만든 내각은 황족과 만주족이 지나치게 많은 자리를 차지해 황족내각이라고 욕을 먹었다. 입헌군주제를 한다면서 결국 황족들끼리 해먹는 모습으로 비쳐 개혁에 기대를 걸던 세력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광서제의 죽음과 이후
하지만 1908년 광서제가 위안스카이인지 서태후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암살당하면서 끝났다.
ㄴ 광서제가 1908년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했고, 바로 다음 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사망했다. 광서제의 유해를 현대에 조사한 결과 치사량을 크게 넘는 비소가 검출되어 독살되었다는 점 자체는 상당히 유력해졌다. 다만 누가 독살을 지시했는지는 현재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서태후, 위안스카이, 환관 등이 후보로 거론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리고 광서제가 죽었다고 광서신정 자체가 바로 끝난 것은 아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연달아 죽은 뒤에도 순친왕 짜이펑이 섭정으로 개혁을 이어갔으며 자정원 개원과 지방 자의국 운영 등은 오히려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청말신정의 끝은 1911년 신해혁명과 청 왕조의 붕괴로 본다.
다음 황제는 선통제 푸이가 되었다.
푸이는 당시 만 2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버지 짜이펑이 섭정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뒤인 1911년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전국으로 번졌고, 1912년 2월 푸이가 퇴위하면서 268년간 이어진 청 왕조와 2천 년 넘게 이어진 중국 황제제도가 끝났다.
평가
광서신정은 청나라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대규모 개혁이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자체를 구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근대식 교육제도, 신군, 경찰, 법원, 행정부처, 지방의회 등 이후 중화민국에서도 이어지는 제도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 개혁 과정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학생, 신군 장교, 지방 의회에 참여한 신흥 엘리트들이 성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청 왕조의 지지자가 아니라 혁명파나 입헌파가 되었다. 청나라가 살아남으려고 근대화를 추진했더니 그 근대화가 청나라를 무너뜨릴 세력을 키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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