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 강림한 원인이기도 하며, 아직까지도 금수저의 대부분을 대대손손 차지하고 이쓰무니다.
다행히 이들도 죽창과 발터에는 한방이무니다. 죽창...죽창을 가져와라데스...
프로필
개요
조선 25머왕 철종의 사위. 근데 결혼하자마자 아내가 죽어서 평생 재혼을 못 했다.
조선의 개화 지식인이자 친일파이다.
갑신정변으로 헬조선 건설을 위해 노오력하던 민씨를 촉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갑오개혁 때 주축 인물이 되어 여러 개혁을 주도했으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반일정서가 일어나자 다시 숙청당해 일본으로 ㅌㅌ했다.
두차례에 걸친 개혁의 실패로 빡친 박영효는 조선을 리셋시키지 않는 한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어줌으로써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3.1운동 전에도 그씨발 매국오브매국만 먹을 수 있는 중추원고문, 식산은행 한자리 꿰차고
3.1운동 터져서 잠시 노선 갈아타려고 설레발 치는 게 아닌 충실히 주인님 딸랑이 노릇하려고 어용단체 조오오온나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새끼 뒈짓한다음 일본이 야 이 노예는 진짜 쓸만한 노예였다고 훈장까지 처주니 그야말로 악질 부역자다.
사회진화론뽕처먹은 개화파 지식인의 전형적인 말로다.
쓸데없는 말이지만 대학교 설립자들도 나중에 저분하고 비슷한 길을 걷다가 해방되고 졸지에 교육자니 지식인이니해서 추앙하고 나중에 동상까지 세워줬다.
간단히 말하자면 개화파 시절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동지들 모아다 구세력 타파하고 근대화 해보자 했는데
어째 하고자 하는건 죄다 아작나고 시간은 흐르는데 변한건 거의 없고 나라 꼴은 더 씹좆같아지니
'애미 씨발 이 좆같은 나라, 그냥 일본한테 따먹히게 하고 나만이라도 잘 살아보자!" 이렇게 자포자기하며 노선변경한 새끼다.
개화파에서 식민지 귀족으로
박영효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나라를 고치겠다고 칼을 들었다가 실패하자 나중에는 나라를 팔아먹고 작위까지 받은 새끼.
초기에는 분명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파였다.
문제는 이 새끼가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이 언제나 외국 군대 불러다가 정권부터 뒤집기였다는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에도 일본군의 힘을 믿고 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군이 들어오자 사흘 만에 정권이 박살났다.
백성의 지지, 군사력, 행정 기반, 외교적 대책은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고 일본이 뒤를 봐줄 거라는 행복회로만 돌린 결과였다.
ㄴ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면서 정작 국가 운영 계획보다 쿠데타 일정이 먼저였음.
ㄴ 혁명가가 아니라 일본군 유료 체험판 관리자.
정변이 실패하자 동지와 남은 사람들은 알아서 죽든 말든 일본으로 튀었다.
자기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개화파 전체가 역적 취급을 받고, 조선의 개혁 가능성도 수십 년 뒤로 밀렸는데 본인은 바다 건너가서 살아남았다.
김옥균도 문제 많은 인물이지만 적어도 마지막까지 망명객 신세로 살다가 암살당했다.
박영효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아서 일본 제국이 주는 벼슬과 작위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ㄴ 생존력만큼은 조선 정치인 원탑.
갑오개혁 때도 분탕
갑오개혁 시기에는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지만, 안정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기보다는 자기 세력을 키우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고종 폐위 음모 혐의까지 받으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갔다.
개혁하겠다고 들어와서는 권력 싸움 벌이고, 상황 불리해지면 일본으로 튀는 패턴을 또 반복한 것이다.
ㄴ 1회차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행.
ㄴ 2회차 갑오개혁 권력투쟁 후 일본행.
ㄴ 리스폰 지역이 일본으로 고정되어 있었나 보다.
반면 김홍집은 일본군의 보호와 망명 권유를 거절하고 조선의 대신으로 죽었다.
박영효는 죽을 자리에서는 늘 빠져나갔고, 받을 자리에서는 항상 나타났다.
둘을 같은 개화파라는 말 하나로 묶기에는 인간의 품격 차이가 너무 크다.
합병 이후
1910년 나라가 실제로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이 새끼는 저항하기는커녕 일본 정부가 하사한 후작 작위를 받았다.
작위만 받은 것도 아니다.
은사금까지 받아먹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등 식민통치 체제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왕실의 부마이자 유명 개화파였던 인물을 자기편으로 세워놓으면 선전효과가 컸다.
박영효는 그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다.
ㄴ 나라 팔린 뒤에도 전직 왕족 프리미엄으로 식민지 VIP석 확보.
ㄴ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더니 본인 신분만 일본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1909년부터 친일단체 활동에 나섰고, 병합 이후에는 식민통치 기관과 각종 친일단체의 높은 자리를 계속 맡았다.
1932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됐다.
일본 천황이 직접 골라 귀족원에 앉힌 조선인이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단순히 시대에 타협한 수준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층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이다.
정부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박영효의 행적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공식 결정했다.
ㄴ 일본과 친하게 지냈다는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국가기관 인증 친일파다.
3·1 운동 이후의 행적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는커녕 일본 통치 아래에서 조선인의 불만을 적당히 달래는 자치론과 친일단체 활동에 매달렸다.
독립은 싫고, 그렇다고 조선인들의 분노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일본 제국은 그대로 두고 조선인 귀족인 내가 중간에서 한자리 더 먹겠다
는 식의 노선을 탄 것이다.
조선경제회 같은 단체의 회장을 맡으며 겉으로는 조선인의 생활 개선과 경제 발전을 내세웠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은 체제 자체는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자기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행동이었다.
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감방 인테리어를 개선해주겠다는 수준.
ㄴ 독립은 못 시켜주지만 식민지 생활 꿀팁은 알려드리겠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유
박영효를 두고 젊은 시절에는 개혁가였다는 변명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갑신정변과 초기 개화운동 당시 박영효가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젊을 때 좋은 뜻을 품었다고 노년에 저지른 매국 행위가 세탁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에 실패한 사람 모두가 친일귀족이 된 것도 아니다.
망명했다고 모두 일본의 후작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나라가 망했다고 모두 총독부 중추원과 일본 귀족원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박영효는 단순히 시대에 휩쓸린 피해자가 아니라 매 순간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권력을 선택했다.
조선이 살아 있을 때는 개화파 지도자.
일본이 강할 때는 일본 망명객.
조선이 망한 뒤에는 일본 후작.
ㄴ 신념이 바뀐 게 아니라 주인만 바뀌었다.
ㄴ 근대화를 원한 게 아니라 근대화된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김홍집과 비교하면 더 추해진다
김홍집은 일본의 힘을 이용해 개혁을 추진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최소한 나라와 운명을 함께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정권이 무너지자 일본은 김홍집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결국 조선 백성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반면 박영효는 위험할 때마다 일본으로 달아났고, 조선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본이 준 후작 작위와 고위직을 받아먹으며 1939년까지 편하게 살았다.
한 사람은 일본을 이용하려다가 조선의 대신으로 죽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게 이용당하면서 일본 귀족으로 죽었다.
ㄴ 둘 다 개화파라고 묶으면 김홍집이 관짝에서 일어날 일이다.
결론
젊은 시절의 이상만 보면 개혁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최종 행적은 개혁가의 실패가 아니라 매국노의 성공이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정변을 일으키고,
실패하면 일본으로 튀고,
다시 돌아와 권력을 노리고,
또 실패하면 일본으로 튀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 귀족이 되어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이 정도면 조선을 근대화하려던 사람이 아니라
조선이든 일본이든 자기가 높은 자리에만 있으면 됐던 정치 기생충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일본은 이 충성스러운 노예에게 후작 작위와 귀족원 자리, 훈장을 줬다.
그리고 박영효는 그것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개화파라는 과거는 그의 공적일 수 있지만, 친일귀족이라는 결말은 본인이 직접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