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만약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 같이 떠들 사람? 노바위키 디스코드

대한민국 형법 제308조에 의거, 죽은 사람에 대한 디스를 할 때 허위사실이 아닌 진실만 사용하여 공격할 경우 명예훼손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디시위키에서는 고인의 생전 업적이나 평가에 상관없이 무고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인드립을 제외하고는 디스를 허용합니다.
다만 너무 막 치다가 고인의 유가족 혹은 위키 이용자들과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너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역사 속의 네임드 급 인물들입니다. 이 틀은 고인이 된 대상에게 사용하십시오.
이 문서는 친일파 또는 친일파 의혹을 받는 새끼들을 다루는 문서이무니다.
이 새끼는 옛날 또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놈이무니다.
헬조선이 강림한 원인이기도 하며, 아직까지도 금수저의 대부분을 대대손손 차지하고 이쓰무니다.
다행히 이들도 죽창과 발터에는 한방이무니다. 죽창...죽창을 가져와라데스...

틀:심플/정의봉

이 문서는 강제개
햏 되었습니다.
으악! 내 눈! 으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ㅏㅏ아ㅏ아햏햏햏 아햏햏

프로필

  • 이름: 박영효(朴泳孝)
  • 이명: 아명 박무량(朴無量), 일본 망명 당시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작위 금릉위(錦陵尉), 자 자순(子純), 호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 본관: 반남 박씨
  • 출생: 1861년 6월 12일 수원
  • 사망: 1939년 9월 21일 서울에서 병사
  • 가족: 박원양(애비), 전주 이씨(애미), 박영교(형), 박영호(형), 영혜옹주(본부인)

개요

조선 25머왕 철종의 사위.

1872년 겨우 11~12살 무렵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면서 금릉위에 봉해진 부마였다. 그런데 결혼하고 겨우 3~4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죽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부마는 법적으로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즉 12살짜리가 결혼했다가 몇 달 만에 아내가 죽었는데 그 순간 평생 재혼금지 확정. 존나 불쌍하긴 하다.

다만 고종이 이를 딱하게 여겨 궁녀들을 후실로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박영효에게 실제 자녀도 있었다. 정식 재혼은 못 했지만 진짜 평생 여자 없이 혼자 산 것은 아니다.

조선의 개화 지식인이자 정치가였고 말년에는 국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간이다.

젊은 시절에는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급진개화파를 이루어 신분제 철폐, 법치국가, 근대 군대, 경찰제도, 신문 발간, 도로정비 같은 당시 조선 기준으로는 존나게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한때는 조선을 근대적인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문제는 이 새끼의 인생이

조선 개혁 → 실패 → 일본

다시 조선 개혁 → 실패 → 일본

다시 조선 귀국 → 실패 → 일본

을 반복하다가 결국

그냥 일본 편

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헬조선 건설을 위해 노오력하던 민씨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1894~1895년 갑오개혁 시기에는 다시 조선에 돌아와 내무대신과 내각총리대신 서리까지 올라 여러 개혁을 주도했다.

다만 원문처럼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때문에 숙청당해 일본으로 튄 것은 아니다.

박영효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895년 7월 이미 고종 폐위 음모 등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다시 도망갔다. 을미사변은 그해 10월, 아관파천은 1896년 2월이다.

그리고 한일합방에 직접 도장을 찍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실제 서명한 사람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박영효가 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망한 직후 일본이 준 후작 작위를 냉큼 받아먹고 은사공채 28만원을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부의장,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올라가며 식민지 체제에 아주 깊숙이 들어갔다.

그래서 이 인간의 친일은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가 아니라

병합 뒤 만들어진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최상위 조선인 귀족으로 30년 가까이 잘 먹고 잘 살았다라고 까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이쪽이 훨씬 추하다.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개화파 지식인의 극단적인 말로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개화파 시절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동지들 모아다 구세력 타파하고 근대화 해보자 했는데 어째 하고자 하는 건 죄다 아작나고 시간은 흐르는데 변한 건 거의 없고 나라 꼴은 더 씹좆같아지니 결국

애미 씨발 이 좆같은 나라, 일본 밑에서라도 내가 개화 지도층 해먹겠다

쪽으로 노선이 변해버린 인간이다.

다만 이걸 단순히 "개혁 실패해서 삐져서 나라 팔았다" 정도로 설명하면 실제 정치행적을 너무 단순화하는 면도 있다. 1907년 귀국 직후만 해도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했다가 체포되고 유배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박영효의 친일화는 어느 날 갑자기 스위치가 켜진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일본 망명과 일본 정치권 인맥, 대한제국 정치에서의 반복적인 실패, 일본의 한국 지배가 굳어지는 과정 속에서 점차 식민지 지배층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개화파 시절

박영효는 원래 집안 형편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반남 박씨 명문가이기는 했지만 그의 아버지 박원양은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생이 바뀐 것은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부마가 되면서 박영효 본인은 금릉위에 봉해졌고 아버지도 높은 벼슬을 받았다.

말 그대로 12살짜리 인생에 왕실 사위 치트키가 켜졌다.

이후 박영효는 집안 어른인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북학파의 영향을 이어받은 인물이었으며 청나라와 서양의 정세에도 상당히 밝았다.

이 집에

같은 젊은 놈들이 모였다.

훗날 조선을 한번 뒤집어엎으려는 급진개화파 핵심 멤버들이 여기서 대충 결성된 셈이다.

박영효는 오경석, 유홍기, 이동인 등의 개화사상에도 영향을 받았고 1870년대 후반부터 관직을 맡기 시작했다.

1878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됐고 1881년에는 판의금부사까지 갔다.

나이 스무 살 전후에 군사 최고기관과 사법기관의 고위직을 찍었다.

당연히 순수한 능력만으로 올라간 것은 아니고 철종 사위라는 신분 치트가 존나게 컸다.

태극기와 일본 수신사

이 새끼가 친일파가 된 것과 별개로 한국사에 남긴 엄청 중요한 업적도 하나 있다.

태극기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보냈다.

당시 박영효의 나이는 고작 21살 정도였다.

21살짜리가 나라 대표로 일본 정부랑 외교협상하러 감.

조선 후기 인재풀 상태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이 수신사 일행에는 서광범 등이 포함됐으며 김옥균, 민영익도 일본에 함께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박영효는 태극기를 사용했다.

흔히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는 조금 복잡하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이미 역관 이응준이 제작한 태극기 형태가 있었고, 박영효는 그 문양을 바탕으로 태극과 사괘의 배치를 조정한 국기를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제작해 실제 외교 현장에서 사용했다.

1882년 8월 22일에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듬해인 1883년 고종이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공포했다.

그러니까 태극기의 유일한 발명자 박영효라고 하는 것도 과장이고, 박영효는 태극기랑 아무 상관없음이라고 하는 것도 틀리다.

오늘날 태극기가 국기로 정착하는 초기 과정에서 존나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은 맞다.

나중에 친일후작 될 사람이 태극기 역사에 이름을 박아놓은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

일본에 체류하면서 박영효는 일본의 근대화된 도시·군대·교육·정치제도를 직접 봤고 일본 정치인 및 서양 외교관들과도 접촉했다.

이 경험 이후 조선 이대로 가다간 좆된다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귀국 뒤 한성판윤이 된 그는

  • 신문국 설치 추진
  • 순경부 설치
  • 신식 경찰제도 도입
  • 도로 정비
  • 신문 발간 추진

등을 시도했다.

신문 발간 계획은 이후 한성순보 창간으로 이어졌다.

즉 젊은 시절의 박영효는 실제 행정개혁도 해보려고 했다.

문제는 조선 정치판에서 너무 급진적이었다.

민태호·김병시 등 보수세력의 반발을 받아 광주유수로 밀려났고 여기서는 또 신식 군대를 만들어보겠다고 연병대를 설치했다.

그러다가 또 잘림.

박영효 인생의 기본 패턴이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뭐 좀 해보려고 함 → 기존 정치세력과 충돌함 → 잘림 → 더 과격한 방법 찾음.

갑신정변

1884년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에서 식민지 귀족으로 이어지는 박영효 인생의 첫 번째 거대한 분기점.

이들은 민씨 척족을 비롯한 친청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급진적인 근대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주장한 내용 자체만 보면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신분제 철폐, 재정 일원화, 문벌 폐지, 행정제도 개편, 국가의 자주독립 강화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문제는 이 새끼가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이 언제나 외국 군대 불러다가 정권부터 뒤집기였다는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에도 일본군의 힘을 믿고 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군이 들어오자 사흘 만에 정권이 박살났다.

백성의 지지, 군사력, 행정 기반, 외교적 대책은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고 일본이 뒤를 봐줄 거라는 행복회로만 돌린 결과였다.

ㄴ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면서 정작 국가 운영 계획보다 쿠데타 일정이 먼저였음.

ㄴ 혁명가가 아니라 일본군 유료 체험판 관리자.

다만 일본이 처음부터 갑신정변 성공에 국가 역량을 풀로 박은 것도 아니었다.

일본은 청나라와 정면충돌까지 감수하면서 조선 급진개화파를 살려줄 의지가 없었고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군은 결국 철수했다.

개화파 입장에서는 일본 형님만 믿겠습니다했는데 일본 형님은 상황 좆같아지니까 바로 손절한 것이다.

결과는 그 유명한 삼일천하.

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갔다.

형 박영교는 갑신정변 과정에서 사망했다.

자기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개화파 전체가 역적 취급을 받고 가족과 동지들에게까지 엄청난 후폭풍이 닥쳤는데 본인은 살아남았다.

김옥균도 문제 많은 인물이지만 적어도 마지막까지 망명객 신세로 살다가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박영효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아서 일본 제국이 주는 벼슬과 작위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ㄴ 생존력만큼은 조선 정치인 원탑.

망명과 건백서

갑신정변 뒤 박영효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역적으로 규정했고 송환하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거부했다.

1885년에는 미국에도 가봤다.

그런데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는 이름까지 사용했고 명치학원에서 영어도 공부했다.

완전히 일본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 사회 안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일본 정치인·지식인들과 인맥을 쌓았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친일 노선으로 넘어가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박영효가 이미 조선병합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1888년에는 고종에게 무려 13만 자가 넘는 개혁 상소를 보냈다.

이른바 건백서 또는 개화상소다.

거기서는 신분제 철폐, 근대 법치국가 건설, 자주독립, 부국강병 같은 것을 주장했다.

13만 자.

고종한테 개혁 좀 하라고 거의 책 한 권을 보냄.

이 시기의 박영효는 여전히 조선을 없애자가 아니라 조선을 뜯어고쳐서 근대국가로 만들자 쪽이었다.

1893년에는 일본 도쿄에 친린의숙이라는 학교도 만들어 조선 유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이 사람을 존나 싫어했다.

1894년에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이 친린의숙에 침입해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쯤 되면 본국에서는 사형선고급 역적이고 일본에서는 유명한 조선 개화파 망명객인 애매한 인생이었다.

갑오개혁 때도 분탕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정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일본이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밀어내면서 갑신정변으로 쫓겨났던 개화파들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박영효는 10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제2차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을 맡았고 이후 내각총리대신 서리까지 올라갔다.

이때는 실제로 상당한 근대개혁을 추진했다.

  • 근대적 내각제도 정비
  • 지방행정제도 개편
  • 경찰제도 개편
  • 군사제도 정비
  • 행정의 근대화

등을 추진했다.

그래서 박영효를 단순한 무능한 개새끼라고만 하면 이 부분은 설명이 안 된다.

행정가로서 실제 개혁안과 근대국가 구상은 있었고, 당시 조선 정치인 가운데 서구식 국가제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축에 속했다.

문제는 개혁과 권력욕이 항상 같이 갔다는 것이다.

갑오개혁 시기에도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지만 안정적으로 제도를 정비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 세력을 키우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박영효는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강화하려 했고 고종 및 왕실과 충돌했다.

결국 고종 폐위 음모 혐의를 받았다.

1895년 7월 다시 일본으로 튀었다.

ㄴ 1회차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행.

ㄴ 2회차 갑오개혁 권력투쟁 후 일본행.

ㄴ 리스폰 지역이 일본으로 고정되어 있었나 보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 일부 세력과 연결해 다시 정계 복귀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고종이 독립협회를 더 의심하게 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1900년에는 한술 더 떠서 측근들을 통해 의친왕 이강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들켰다.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

진짜 정치 인생이 쿠데타 버튼에서 손을 못 뗀다.

1907년 귀국

그래도 안 죽는다.

190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 측 인사들과 접촉해 특별사면을 받고 금릉위 직첩까지 돌려받았다.

궁내부대신, 궁내부 특진관에도 임명됐다.

이 시점이면 이미 일본과 상당히 가까운 정치인이었지만 재미있게도 고종 강제퇴위에는 반대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명분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내각이 고종을 물러나게 하려 하자 박영효는 이에 반발했다.

이 때문에 체포되고 태형 80대를 선고받았다.

뒤이어 고종 양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받아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됐다.

그러니까 박영효를 갑신정변 때부터 일본의 충실한 앞잡이라고 설명하면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일본의 힘을 이용하려 했지만 동시에 자기 나름의 조선 정치 구상도 있었고, 1907년까지만 해도 일본의 모든 정책에 순종한 인간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친일행적이 본격적으로 가속된다.

1909년에는 신궁봉경회 총재에 선출됐다.

이 단체가 뭐 하는 데냐면 단군, 조선 태조 이성계,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같이 모셔놓고 조선과 일본의 결합을 강조하던 단체다.

태극기 들고 자주독립 주장하던 놈이 나이 먹고 아마테라스까지 모시고 앉았다.

인생의 방향이 참 멀리 왔다.

식민지 귀족

1910년 나라가 실제로 일본에 강제병합됐다.

앞서 말했듯 박영효가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은 이완용이 했다.

그러나 일본은 병합 직후 조선 왕족·고관들에게 작위를 뿌렸고 박영효에게 후작을 줬다.

당시 조선귀족의 작위는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순인데 공작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후작이 최고급이었다.

심지어 병합조약 서명자인 이완용은 처음에는 백작이었다.

박영효는 처음부터 후작.

일본 입장에서는 철종의 사위이자 조선 개화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일본 식민통치를 인정하고 귀족이 됐다는 것이 선전 가치가 존나게 컸다.

1911년에는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다.

이완용이 받은 은사공채는 15만원이었다.

박영효가 더 많이 받았다.

당시 보통 노동자나 하급관리 월급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던 개화파 청년이 30년 뒤 나라가 없어지자 일본이 주는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후작이 되었다.

ㄴ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더니 본인 신분만 일본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후 조선귀족회 회장까지 맡았다.

조선귀족회는 이름 그대로 일제가 만든 조선귀족들의 친목·협력단체였다.

박영효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작위만 받고 집에 처박혀 조용히 산 것도 아니다.

  • 조선귀족회 회장
  • 조선식산은행 이사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 여러 친일·경제단체 고문 및 회장

등을 줄줄이 맡았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된 핵심 금융기관이었다.

박영효는 1918년부터 이사를 맡았고 훗날 20년 근속표창까지 받았다.

이 새끼 식민지 은행에서 근속 20년 찍음.

직장 충성도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3·1 운동 이후의 행적

원문에는 3·1운동 전부터 중추원 고문을 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정확히는 다르다.

박영효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된 것은 1921년 4월이다.

즉 3.1 운동 이후.

그런데 더 웃긴 것은 3·1운동 이후 독립으로 노선을 바꾼 게 아니라 식민지 체제 안에서 조선인의 자치권을 확대하자는 자치론 쪽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1921년에는 유민회 회장이 됐다.

이후 각종 조선인 단체와 경제·사회단체의 회장·고문을 존나게 맡았다.

겉으로는 조선인의 경제력 향상 /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 확대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기본적인 전제는 일본 제국 통치는 유지였다.

독립은 싫고 그렇다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일본 제국 안에서 조선 자치 좀 주고 조선 엘리트가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자는 노선이다.

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감방 인테리어를 개선해주겠다는 수준.

ㄴ 독립은 못 시켜주지만 식민지 생활 꿀팁은 알려드리겠습니다.

1921년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5년간 활동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6년에는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 부의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39년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연간 수당은 3,500원.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실질적인 입법권도 없는 총독의 어용 자문기구였기 때문에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함을 현대 민주국가 국회 부의장처럼 보면 안 된다.

쉽게 말하면 총독님 정책에 조선인 유지 의견 좀 붙여주는 최고급 자문위원에 가깝다.

그리고 박영효는 그 최고급 자문위원 가운데 정점에 있었다.

일본 귀족원까지 입성

1932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됐다.

귀족원은 당시 일본 제국의회의 상원 역할을 하던 기관이다.

귀족, 황족, 고액납세자, 천황이 직접 임명한 인사 등이 들어갔다.

박영효는 그중에서도 천황이 임명하는 칙선의원이었다.

조선 독립국가의 부마였던 사람이

70살 넘어서 일본 천황이 임명한 일본 국회의원이 됐다.

그냥 일제강점기에 조용히 일본 체제에 순응한 정도와는 레벨이 다르다.

조선인이 식민지 체제에서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최상위급 정치적 자리에 들어간 셈이다.

일본 입장에서도 박영효의 상징성이 컸다.

이완용은 병합조약에 서명한 인간이라 조선인들에게 너무 노골적인 매국노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 / 갑신정변의 개화파 / 태극기를 초기 사용한 인물이라는 경력이 있었다.

그런 인간이 일본 제국 후작으로서 총독부와 일본 귀족원에 앉아 있으면 조선의 원로 개화정치인도 우리 제국을 인정함ㅎㅎ

이라고 선전하기 딱 좋았다.

그리고 박영효는 그 역할을 존나 열심히 해줬다.

말년

말년이라고 갑자기 정신차리지도 않았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전쟁체제를 강화했는데 박영효는 계속 식민지 지배기구와 전쟁지원 조직에 이름을 올렸다.

1937년에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다시 선출됐다.

같은 해 일본 육해군 국방비 헌납에 참여했다.

1938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설립 관련 활동에도 참여했다.

1939년에는

  •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
  • 조선군사후원연맹 관련 활동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일본이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갈 준비를 하던 바로 그 시기다.

1939년 4월에는 군사후원 조직에 금비녀 등 약 1,200원 상당의 금품을 헌납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1일 사망했다.

일본은 죽은 뒤에도 정2위와 욱일대수장을 추서했다.

일본 제국 입장에서 이 노예는 진짜 쓸만한 노예였다라고 마지막 인사까지 제대로 해준 셈이다.

정부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박영효의 식민지 시기 행적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쟤 친일파였냐 아니었냐 갖고 감정싸움할 필요도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유

박영효를 두고 젊은 시절에는 개혁가였다는 변명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갑신정변과 초기 개화운동 당시 박영효가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한성판윤 시절 경찰제도, 도로정비, 신문 발간을 추진했고 건백서에서는 신분제 철폐와 법치국가,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이런 부분까지 싹 지우고 태어날 때부터 친일매국노라고 하면 역사 왜곡이다.

1907년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젊을 때 좋은 뜻을 품었다고 노년에 저지른 행적이 세탁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에 실패한 사람 모두가 친일귀족이 된 것도 아니다.

망명했다고 모두 일본의 후작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나라가 망했다고 모두 총독부 중추원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후작 작위를 거부한 조선 고관도 있었다.

일본이 준 작위를 받은 뒤 나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김가진 같은 경우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박영효는 반대였다.

후작 받고, 은사금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하고, 식산은행 이사 하고, 중추원 고문 하고, 중추원 부의장 하고, 일본 귀족원 의원 하고, 전쟁지원단체 고문까지 했다.

한두 번이면 시대적 타협이라고 변명이라도 하지.

30년짜리 커리어다.

일본과 친하게 지낸 수준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배 엘리트의 최상층이었다.

김홍집과 비교하면 더 추해진다

김홍집은 일본의 힘을 이용해 개혁을 추진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최소한 나라와 운명을 함께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정권이 무너지자 일본 측에서는 김홍집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다.

김홍집은 거절했다.

그리고 광화문으로 나갔다가 분노한 군중에게 살해됐다.

그가 추진한 친일적 개혁이나 을미개혁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다는 선택은 했다.

반면 박영효는 위험할 때마다 일본으로 달아났다.

갑신정변 실패 → 일본.

갑오개혁 권력투쟁 실패 → 일본.

고종 암살·쿠데타 혐의 → 일본 체류.

그리고 조선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본이 준 후작 작위와 고위직을 받아먹으며 1939년까지 살았다.

한 사람은 일본의 힘을 이용해 조선을 개혁하려다가 조선의 대신으로 죽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의 힘을 이용해 조선을 개혁하려다가 마지막에는 일본 귀족으로 죽었다.

ㄴ 둘 다 개화파라고 묶으면 김홍집이 관짝에서 일어날 일이다.

다만 김홍집 역시 일본군의 영향 아래 갑오·을미개혁을 진행했고 친일 내각의 책임자였다는 비판이 있으므로 무슨 완벽한 애국성인으로 만들어놓고 비교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최종 선택의 방향이 너무 달랐다 정도로 보면 된다.

태극기의 아이러니

박영효의 인생에서 제일 기묘한 부분.

이 인간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 초기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882년 외교사절로 일본에 가면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이것이 이듬해 조선 국기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수십 년 뒤에는 일본 제국 후작이 됐다.

태극기 초기 사용자가 일장기 아래에서 귀족이 됨.

한국 근현대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씹창났는지 인간 하나에 압축해놓은 수준이다.

그래서 박영효를 평가할 때 태극기를 만든 독립정신의 선구자로만 빨아도 이상하고, 처음부터 일본 앞잡이였던 매국노라고만 해도 이상하다.

20대의 박영효와 70대의 박영효를 같은 정치적 인간으로 보면 설명이 안 된다.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했던 청년이 수십 년간 실패와 망명을 반복한 끝에 자신이 배우려 했던 일본 제국의 식민지 귀족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이 변화 자체가 박영효라는 인물을 역사적으로 볼 가치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

젊은 시절의 이상만 보면 개혁가였다.

태극기 사용, 신문 발간 추진, 경찰·행정 개혁, 신분제 철폐 주장 등 실제 공적도 존재한다.

갑신정변도 방식은 병신같았지만 조선을 근대적 자주국가로 개조하려 했다는 목적 자체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인생 후반부가 모든 것을 씹어먹는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정변을 일으키고, 실패하면 일본으로 튀고, 다시 돌아와 권력을 노리고, 또 실패하면 일본으로 튀고, 나라가 망하자 일본 후작이 되고, 식민지 은행 이사가 되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고,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고, 일본 전쟁지원까지 하다가 죽었다.

이 정도면 단순히 개혁에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로 끝낼 수가 없다.

반대로 평생 일본의 지령만 수행한 매국노라고 해도 그의 젊은 시절을 설명할 수 없다.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꿈꾸었던 급진개화파가 반복된 정치적 실패와 일본 의존 끝에 자기가 타도하려던 구체제보다 더 거대한 제국주의 체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사례정도다.

개화파라는 과거는 그의 공적일 수 있다.

태극기 역사에 남은 것도 공적이다.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후작이 된 것도, 은사금을 받은 것도, 조선귀족회 회장을 한 것도, 중추원 부의장을 한 것도, 일본 귀족원 의원을 한 것도, 전쟁지원단체에 참여한 것도

전부 본인 인생이다.

개화파라는 과거는 그의 공적일 수 있지만, 친일귀족이라는 결말은 본인이 직접 선택한 것이다.

씹새끼가

여담

  • 본관은 반남 박씨다.
  • 아명은 박무량이었다.
  • 일본 망명 시기에는 야마자키 에이하루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 12살 무렵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됐다.
  • 영혜옹주는 혼인 몇 달 만에 사망했다.
  • 조선의 부마는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영효는 정식으로 다시 결혼하지 못했다.
  • 다만 후실과의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
  • 1882년 일본 수신사로 가면서 태극기를 제작·사용한 인물이다. 오늘날 태극기의 원형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갑신정변 실패 뒤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 일본 망명 중 고종에게 13만 자가 넘는 개혁 건백서를 올렸다. 인터넷 시대였으면 스크롤 내리다 고종 손가락 나갔을 분량이다.
  • 1893년 일본에 친린의숙을 세워 조선 유학생을 교육했다.
  • 1894년 암살당할 뻔했지만 살아남았다.
  • 1900년에는 의친왕을 왕으로 세우는 쿠데타 모의에 연루돼 궐석재판에서 교수형까지 선고받았다.
  • 1907년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했다가 체포·유배됐다.
  • 1909년부터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았다.
  •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직접 서명자는 아니다.
  • 대신 병합 직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
  • 1911년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다.
  • 조선귀족회 회장을 지냈다.
  • 1918년부터 조선식산은행 이사를 맡아 20년 근속표창까지 받았다.
  •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 1926년 이완용의 후임으로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 1932년 조선인 최초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이 됐다.
  • 1939년까지 일본의 전쟁지원단체에서 활동했다.
  • 사망 뒤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대수장을 추서받았다.
  •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식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 저서로 일본 수신사 경험을 기록한 《사화기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