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니뮤ㅠㅠㅠ
만약 게임에서 이걸 골랐다면 다른 놈들까지 다 이걸 고르거나 너프를 먹거나 할 것입니다.
영웅을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ㄴ 그 옛날에 무려 178cm 정도의 장신이었다. 키도 컸지만 싸움까지 잘해서 인종차별하는 미국인과 맞다이를 까서 이겼다.
서재필 徐載弼 Philip Jaisohn | |
| 생년월일 | 1864년 1월 7일 (출생) 1951년 1월 5일 (사망) |
|---|---|
| 국적 | 조선 → 미국 |
| 출생지 | 전라도 보성군 |
| 본관 | 대구 서씨 |
| 학력 | 컬럼비안 의과대학 의학사(M.D.) |
개요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조선 말기의 개화파 정치인이자 언론인, 의사, 독립운동가이다. 미국 이름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189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이후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언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최고고문으로 귀국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치적 질서에서 벗어나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조선인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활동은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
한국 최초의 친미파 거물로써 훗날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가 갓조국 응딩이 뒤에 숨을 수 있게 햐주신 분이다. 뭐 빤쓰런? 지랄하지 마라 친중 빨갱이 새끼들아 ㅋㅋㅋㅋ 이사람 없었으면 우리나라 적화통일됐어 ㅋㅋㅋ
다만 서재필이 한국의 친미적 정치·외교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그가 없었다면 한국이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한미관계의 형성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냉전, 국내 정치세력 및 여러 독립운동가의 활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아니 시발 고종 씹새끼가 지 가족을 풍비박산냈으니 국까가 되지 그러면 국뽕이 되리? 오히려 헬조선의 현실을 깨닫고 미국이 답임을 미리 알고 한국이 가야할 길을 가장 정확하게 제시한 사람이다. 거품은 무슨 ㅋ
미국가서 개명한 이름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제이슨(Jason) 아니다. 아마 서재필의 서씨랑 제이슨이랑 합쳐서 만든듯.
필립 제이슨(탈조선의 선구자, 천조국 의느님)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이며, 갑신정변에서 거드럭거리다가 도망간후에 고종이 나라말아먹으려고 할때 돌아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은 자기를 철저히 미국 사람이라고 여겼다. 조선 왕 군밤왕(고종)을 만났을 때 절도 안하고 오히려 악수하려고 손을 건내는 패기를 보여줬다. 특히 왕이나 높은 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벗는게 당시 예의였는데, 안경도 안벗고 담배도 빽빽 피우면서 "뭐 씨발아 나 미국인인데? 외국인한테 예절따지는 미개한 조선인들 으휴ㅉㅉ" 이라는 태도로 나와서 덍복이가 존나 싫어했다. 덍복이는 이거때문에 개빡쳐서 애꿎은 통역사를 유배보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 그리고 연설할 때 영어로 연설했고 헬조선에 와서 영어를 주로 많이 썼다. 누가 자기한테 서재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필립 제이슨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일화는 서재필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질서와 왕권 중심의 예법에 거리감을 느꼈다는 설명에 자주 사용된다.
다만 고종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거나 통역사가 유배되었다는 구체적인 일화는 당시의 공식 기록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서재필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미국인이라는 신분을 강조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개별 접견에서 벌어졌다고 전해지는 행동의 진위는 구분해야 한다.
미국 한인들한테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먹고 근대시민이 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똥송한 헬조선의 식습관을 버리고 천조국식대로 먹고 천조국의 정신을 받아들이자는 것. 그런데 헬조선 기후 특정상 밀이 잘 자라지도 않아서 일부러 쌀을 먹는건데 그걸 가지고 식습관 바꾸자고 한 건 좀 심각한 미뽕이다.
다만 해당 발언의 정확한 시기와 원문은 확인이 필요하다. 실제 발언이라 하더라도 이를 조선의 농업환경이나 식량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정책 주장으로 볼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참고로 미쿡이 얘 한국대통령시킬라고 데려왔었는데, 난 필립제이슨이다 미쿡시민권자다 핸쿡줜나시뤄요하면서 안했다. 헬조선을 내다본 선구자 오오...
하지만 1948년 헬조센 초대대선은 실시됐고 200표중에 1표만 쳐먹어서(국회 간선제로 실시되었다.) 최하위득표로 광광우럭따리우럭따
정확히 말하면 어찌저찌해서 초대 대선에 출마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까보니 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고 국회의원들도 그걸 알고 있어서 얘한테 표를 안 준 것이다. 당선돼도 무효가 될 테니
실제로 1948년 7월 20일 실시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서재필에게 투표한 국회의원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총투표수는 200표가 아니라 196표였으며, 서재필이 받은 1표는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무효표 처리되었다.
당시 선거에서는 오늘날처럼 후보자 등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헌국회의원들이 대통령으로 선출할 인물의 이름을 직접 기재하였다. 따라서 서재필이 정식으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벌인 뒤 1표를 얻고 낙선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1]
이런 행보 때문에 몇몇 친중친북 역사학자들은 서재필을 신나게 디스한다. 독립운동도 별로 안한데다 아니라 미국인일 뿐이고 뼛속까지 친미파였다고 국까였다고 까댄다.
다만 서재필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모두 특정한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미국 국적과 미국 중심의 세계관, 갑신정변 당시의 활동,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정부 사이의 갈등, 해방 이후의 정치적 역할 등은 각각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서재필이 미국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그가 독립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1919년 이후 미국에서 전개한 실제 독립운동 경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근데 헬조선에 만정이 떨어질만도 한게 갑신정변 실패로 역적으로 지목되어 일가족과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당했다. 말그대로 조선에 와봤자 자기 일가붙이는 한명도 없었다.
즉, 자기딴에는 나라의 개화를 위한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결국 실패해버리고 자기의 가족과 친척들은 모조리 학살당하고 연고 자체가 박살이 나버린것. 그러니 만정이 다 떨어질만 했다.
ㅅㅂ 솔직히 생각해봐라. 서재필이 고종한테 절 안했다고 매국노라고 까는데 서재필 입장에서 보면 자기 가족과 친척들을 학살한 고종한테 절하고 싶겠냐? 개씹새끼라고 욕 안한 것만 해도 어디냐? 게다가 고종하고 민비 하는 짓 보면 절이 아니라 쳐죽여도 모자란데.
갑신정변 이후 서재필의 가족이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에 따르면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은 처형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사망하였다.
다만 일가친척 모두가 살해되어 생존자가 전혀 없었다는 설명은 과장된 것이다. 동생 서재우 등 살아남은 가족도 있었다.[2]
지금 짱깨새끼들 지랄하는거 보면 더 늦게 태어났어야 하는 분이다. 헬트릭스에서 탈출하고 친미반중의 선구자쯤 되는 인물은 재평가가 시급하다.
개인적인 면모로 보자면 꽤 자수성가한 인물인데 처음 미국에 왔을때는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고된 생활에 시달렸다. 노오오오력으로 의사 면허와 시민권을 딴 인물이란 말이다. 재미교포들의 선조 겸 성공사례인 인물로서 미국사에 적합하게 등장할 인물인듯한데 정작 미국사 수업엔 언급이 없다시피 하다. 다시 한국와서 활동하느라 그런듯? 필립 제이슨 재단과 기념관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긴 한다.
즉, 꼰대들이 좋아할만한 상이다. 특히 망명 초기에는 황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했고 일자리도 구해봤자 정신병자라면서 쫓겨나는게 일상이었다. 이렇게 몇년을 시달리다가 마침내 주변인의 도움으로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모범생이 되고 대학에서 세균학 박사 학위까지 땄다.
그러나 서재필이 취득한 학위는 세균학 박사 학위가 아니라 1892년 컬럼비안 의과대학의 의학 학위(M.D.)였다. 이후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병리학 및 의학 연구에 종사한 경력이 존재한다.
영어의 Doctor는 의사를 뜻하기도 하므로, 의사 서재필을 박사 서재필로 부르는 과정에서 학위에 관한 혼동이 발생하기 쉽다.[3]
윤치호의 불알친구다.
생애
출생과 성장
서재필은 1864년 전라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대구 서씨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아버지는 서광효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 출신이었다.
서재필은 보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는 충청도 논산 지역 등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친척인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한성에서 한학과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였다.
그는 188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당시 급진개화파는 기존의 양반 중심 정치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근대적인 군사제도와 정치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유학
서재필은 188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게이오기주쿠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적인 군대의 양성과 군사제도의 개혁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서재필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제도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조련국의 사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개화파의 군사조직을 구축하는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갑신정변에서 무장세력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배경이 되었다.
갑신정변
1884년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당시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변 당시의 경호와 군사적 행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군의 개입과 조선 내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약 3일 만에 실패하였다.
서재필은 다른 개화파 지도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그는 신정부의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지만 정변이 실패하면서 관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갑신정변은 근대적인 정치개혁을 추구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외국 군대의 지원에 의존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교체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후 서재필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정변의 실패 자체보다 그 실패에 따른 가족들의 희생이었다.
가족의 몰락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서재필과 정변 참가자들은 반역자로 지목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반역죄에 연루된 인물의 가족과 친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가 존재하였다.
서재필의 가족 역시 이러한 정치적 보복과 탄압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와 형, 아내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동생 서재창은 처형되었다.
어린 아들 역시 돌보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건은 서재필의 개인적인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뿐 아니라 가족과 기존의 사회적 기반까지 상실한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했는데 그 결과 가족들까지 처벌받았으니, 기존 왕조의 정당성을 신뢰하기 어려워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이러한 경험이 이후 서재필의 모든 정치적 선택을 결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교육을 받고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시민권의 개념을 배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가치관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미국 망명
1885년 서재필은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조선에서 망명한 개화파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서재필은 일본에서도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는 생계를 위해 육체노동을 하였으며, 교회와 YMCA 등을 통해 영어를 공부하였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심각했던 사회였다.
따라서 서재필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들과 미국인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탄광업자 존 홀렌백은 서재필이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한 인물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주의 해리 힐먼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를 이어갔다.
미국 시민권 취득
1890년 6월 19일,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에 귀화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이름 변경이나 거주지 이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서재필은 조선의 정치적·법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 왕조에 의해 반역자로 지목되어 있었으며, 가족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 시민권의 취득은 새로운 사회에서 법적인 지위와 생활의 안정을 확보하는 방법이었을 수 있다.
동시에 미국의 시민권과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그의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미국 이름인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을 사용하였다.
의사 서재필
만약 게임에서 이걸 골랐다면 다른 놈들까지 다 이걸 고르거나 너프를 먹거나 할 것입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미국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이후 컬럼비안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1892년에는 이 학교를 졸업하여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이 학교의 계보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진다.
서재필은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근대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한 대표적인 초기 사례다.
1893년에는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다.
또한 병리학과 세균학 등 의학 관련 분야에서 연구 및 실무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그의 의학 학위와 별도의 학술 박사학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당한 성취였다.
미국에서의 결혼
1894년 서재필은 미국인 여성 뮤리얼 암스트롱과 결혼하였다.
뮤리얼 암스트롱은 미국의 초대 철도우편사업 책임자였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이었다.
또한 미국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뷰캐넌의 친척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백인과 아시아계 사이의 결혼에 강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서재필과 뮤리얼 암스트롱의 결혼은 미국 사회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서재필은 이후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생활하면서도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유지하였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조선으로의 귀국
서재필은 1895년 말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정치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갑신정변 참가자들에 대한 처벌도 해제된 상태였다.
서재필은 귀국 당시 이미 미국 시민권자였다.
따라서 그는 조선의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미국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분은 조선의 왕권과 전통적인 정치적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 조선의 정치인들과 정부 관료들에게는 미국 시민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상황이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서재필은 귀국 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신문 발행과 민중 계몽활동을 추진하였다.
독립신문 창간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평가되며, 한글을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하여 일반 대중도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의 정치와 사회에 관한 정보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일부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서재필은 한글 신문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국제정세, 사회문제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하였다.
독립신문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적인 정치제도, 교육, 위생, 시민의 권리 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언론매체를 만들었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정치적 문제를 일부 관료와 양반만의 영역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읽고 판단해야 하는 문제로 제시했다는 것이다.[4]
독립협회 창립
1896년 7월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정치적 개혁,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으며, 토론회와 정치적 집회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높이려 하였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언론의 자유와 정치참여, 법치주의 등을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조선의 정치체제를 근대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정부와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서재필 역시 조선에서의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워졌으며,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만 독립협회가 1898년 말 강제로 해산되는 과정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시점은 구분해야 한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최종 해산 이전에 이미 미국으로 귀환한 상태였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지사니뮤ㅠㅠㅠ
서재필이 단순히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조선을 떠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활동.
그는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회의
1919년 4월 서재필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미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참가자들은 한국의 독립과 민주적인 국가 건설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미국 사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식민통치 실상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추진하였다.
서재필은 이 회의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을 미국의 정치와 여론에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미 미국 시민이었음에도 한국의 독립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서재필은 1919년 한국통신부(Korean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하였다.
한국통신부는 일본의 식민통치와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미국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려고 하였다.
한국친우회는 미국의 여러 지역으로 활동을 확대하였으며, 해외에서 한국 독립 문제에 관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서재필은 영문 간행물인 『Korea Review』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은 군사적인 저항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언론 활동도 중요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활동에서 미국 사회와 한국 독립운동 사이의 연결 역할을 담당하였다.[5]
워싱턴회의와 외교활동
1921년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회의를 계기로 한국 독립 문제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와 관련된 외교활동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인 외교문제로 다루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은 일본과의 외교관계 및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고려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직접적인 군사·정치적 개입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서재필이 미국 시민이자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음에도 한국의 독립을 쉽게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독립운동에 재산을 사용하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한편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사업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위한 언론·조직 활동에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결국 서재필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사업이 파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다시 의사로 활동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서재필을 미국으로 도망가서 개인적인 성공만 추구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의 실제 생애 전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도 상당한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사용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과 귀국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 점령 및 여러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적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7월 그는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서재필의 나이는 이미 80대였다.
그는 해방 이후 한국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갖춘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정치인들과 시민들에게 조언하였다.
또한 남북의 분단과 국내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을 우려하였다.
미군정 최고고문
서재필은 존 하지가 지휘하던 미군정에서 최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독립국가의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정치세력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제도에 익숙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과 미군정에 고문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세력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재필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도 제한적이었다.
그는 한국의 정당과 정치세력 전체를 통제하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대통령 추대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서재필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당시 정치세력 가운데 일부는 서재필이 미국의 정치제도에 익숙하고 오랜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국내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대통령직을 맡을 뜻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 시민권자인 서재필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법적인 논란이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서재필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
어? 왜 豆 번 써져요? 어? 왜 豆 번 써져요?
야 쓰레기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폭풍저그 홍진호가 간다!
야 쓰레기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폭풍저그 홍진호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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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선거는 국민의 직접투표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루어졌다.
투표 결과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서재필의 이름을 적은 표가 1표 나왔다.
그러나 서재필에게 투표한 1표는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무효 처리되었다.
| 인물 | 득표 | 비고 |
|---|---|---|
| 이승만 | 180표 | 당선 |
| 김구 | 13표 | 유효 |
| 안재홍 | 2표 | 유효 |
| 서재필 | 1표 | 무효 |
이 선거의 총투표수는 196표였다.
당시에는 후보자 등록 없이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싶은 인물의 이름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였다.
따라서 서재필이 선거에 정식으로 출마했다가 1표만 얻어 낙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대통령직을 맡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상태였다.
결국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으로 추천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실제 국회의원 한 명이 그에게 투표까지 했지만 국적 문제로 무효 처리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다
서재필은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지켜본 뒤 자신의 미국 생활을 이어갔다.
이미 고령이었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는 다시 대규모 전쟁을 겪게 되었다.
서재필은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으며, 1994년에는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서재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는 단순히 미국에서 잠시 생활한 조선인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에 귀화하여 법적으로 미국 시민이 된 인물이었다.
또한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이러한 생활은 그가 미국 사회에 깊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재필의 미국 시민권 취득과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서로 배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미국의 법적인 시민권과 생활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민족적 정체성,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반드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탈조선인가, 새로운 국가관인가?
서재필은 조선 왕조에 의해 반역자로 지목되었으며 가족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새로운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기존 국가와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정통성을 거부했다고 해서 조선인들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자유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 시민으로서 확보한 자유와 생활 기반을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면서 조선인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서재필의 생애는 실제로 그러한 선택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시민권과 한국 독립운동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적 독립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특히 1919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고, 언론과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법적인 국적과 민족적 정체성 및 정치적 관심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재필은 미국의 시민으로 생활하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조선의 정치적 미래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미국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한국 독립운동과 무관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미국은 서재필에게 무엇이었는가?
서재필에게 미국은 단순히 조선의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있는 망명지가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권, 언론의 자유, 법치주의 및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경험하였다.
또한 의사라는 전문직업을 갖추고 개인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에서 경험한 시민적 권리와 개인의 자유는 그가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질서와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서재필이 미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이 미국의 모든 정치적 선택을 지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은 조선의 국권 침탈을 막지 않았으며,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는 과정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따라서 서재필의 친미적 성향을 미국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윤치호와의 관계
윤치호와 서재필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 서로 오랫동안 교류한 관계였다.
두 사람은 모두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서구의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사회질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조선의 전근대적인 정치와 부패한 관료제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에서는 두 사람 모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정치적 선택은 상당히 달랐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이 된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반면 윤치호는 조선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강한 비관 속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윤치호는 후기의 일본 침략전쟁과 전쟁동원에도 협력하였다.
동일한 현실, 서로 다른 선택
두 사람은 조선의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관습을 비판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재필은 미국의 시민권과 민주주의 제도에 주목했으며,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지원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윤치호는 조선인의 정치적 역량을 비관적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근대적인 제도와 국가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같은 시대의 지식인들이 동일한 사회문제를 경험하더라도 반드시 같은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 항목 | 서재필 | 윤치호 |
|---|---|---|
| 해외 경험 | 일본 및 미국 | 일본·중국·미국 |
| 조선의 기존 정치체제 | 전제정치와 신분질서 비판 | 전제정치와 관료제, 민족성에 대한 비판 |
| 주요 활동 | 독립신문·독립협회·해외 독립운동 | 독립협회·교육·YMCA·사회사업 |
| 미국에 대한 평가 |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긍정적으로 평가 | 민주주의를 긍정하면서 인종차별을 강하게 비판 |
| 식민지배에 대한 태도 | 해외에서 한국 독립운동 지원 | 시기에 따라 변화, 말기에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력 |
| 해방 이후 |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귀국 | 해방 직후 사망 |
이러한 비교는 서재필과 윤치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개략적인 구분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정치적 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모든 문제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중양·이규완과의 비교
세 사람 모두 조선의 전근대적인 정치체제와 사회질서를 비판했으며, 근대적인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선택한 정치적 노선은 서로 달랐다.
박중양과의 차이
박중양은 조선의 기존 사회질서에 강한 환멸을 느끼고 일본의 근대적인 행정체계와 정치질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지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로 활동하였다.
반면 서재필은 조선 왕조의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계속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조선 왕조에 대한 불신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박중양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보다 일본의 근대적인 통치질서를 높이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민족적 독립에 대한 태도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규완과의 차이
이규완은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파 출신으로, 이후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조선인의 참정권과 경제적 자립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규완은 일본 제국 내부에서 조선인의 지위를 개선하려 했던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서재필은 일본 제국의 정치질서에 참여하기보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해외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언론 활동을 추진하였다.
두 인물 모두 조선의 근대화와 정치적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이규완은 식민지 체제 내부에서 조선인의 권익을 확보하는 방향의 활동을 하였다.
서재필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가의 건설을 지지하였다.
다만 서재필 역시 미국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외국의 영향력과 무관한 순수한 민족주의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역사적 평가와 논쟁
서재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화운동과 언론, 독립운동, 근대적인 시민의식의 형성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미국으로의 귀화와 조선 왕조에 대한 불신, 미국 중심의 세계관, 해방 이후 미군정 참여 등 다양한 정치적 선택이 존재한다.
따라서 서재필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어떠한 국가에 법적으로 소속되어 있었는지와 어떠한 정치적 가치를 추구했는지, 실제로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서재필은 조선을 버린 사람인가?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가정을 꾸리는 등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그가 조선이라는 국가를 떠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1896년 귀국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창립했고, 1919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정치적 질서에서 벗어난 행동과 조선인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출생국가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면서도 그 국가에 속한 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가?
서재필의 생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제공한다.
갑신정변은 정당한 혁명이었는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요 참가자 가운데 하나였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전근대적인 정치체제를 개혁하고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변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했으며, 무력으로 기존 정부를 교체하려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정변 과정에서 인명 피해와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갑신정변을 근대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운동으로 평가하는 관점과, 외국의 영향력 아래 진행된 무력정변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서재필 역시 이러한 정변의 군사적 실행에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에 관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정변 이후 그의 가족들이 연좌제에 따른 정치적 보복으로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별도의 문제다.
갑신정변의 정당성에 관한 평가와 가족들에 대한 집단적인 처벌의 정당성은 구분해야 한다.
미국 시민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모순인가?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법적인 국적과 민족적 정체성,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반드시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가의 시민권은 법적으로 특정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반면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적 경험, 정치적 연대는 국적과 다른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서 생활하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이해할 때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과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각각 인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지원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는가?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미국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항상 한국의 독립을 최우선적인 외교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확대되던 시기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또한 1945년 이후에는 냉전과 한반도 분할 점령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서재필이 미국의 정치제도와 시민권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과 실제 미국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이 한국인의 정치적 요구와 항상 일치했는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친미와 독립운동은 양립할 수 있는가?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한국의 독립 문제가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언론과 민간단체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존한 독립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외국의 정치적 지원을 확보하려는 활동 자체가 반드시 그 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적인 독립운동에서는 여러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여론을 활용하는 외교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필의 경우에도 미국 시민권과 미국 사회의 인맥을 한국 독립운동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민족주의자인가, 자유주의자인가?
서재필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민권,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평가하였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왕권과 신분질서를 비판하였으며, 일반 국민의 정치적 참여와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사상을 단순히 민족주의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는 국가의 독립뿐 아니라 독립한 국가가 어떠한 정치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서재필은 민족적 독립과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를 함께 추구했던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당시 그의 정치적 구상과 오늘날의 자유주의·민주주의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는가?
서재필은 미국에 도착한 초기에는 영어와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육체노동과 영어 공부를 병행했으며, 이후 학교에 진학하여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적인 노력과 학업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성공에는 미국인 후원자와 기독교 공동체, 교육기관에서 제공한 기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홀렌백의 지원이 없었다면 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재필의 미국 정착을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성공신화로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계와 지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반대로 후원자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학업 성취와 개인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성취는 노력과 능력, 환경, 다른 사람의 도움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여담
필립 제이손이라는 이름
서재필이 미국에서 사용한 이름은 Philip Jaisohn이다.
일반적인 영어 이름인 Jason과는 철자가 다르다.
이 이름의 정확한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존재한다.
서재필의 한국 이름과 발음을 조합하여 미국식 이름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 본인의 구체적인 작명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이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의학 관련 경력과 정치적 활동에서도 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키와 외모
서재필은 약 178cm의 장신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 조선인의 평균적인 신장을 고려하면 상당히 큰 체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젊은 시절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무술에도 능숙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하던 사람과 싸워 이겼다는 일화도 알려져 있다.
다만 실제로 신장을 측정한 기록이나 싸움이 발생한 날짜와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자료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178cm라는 신장과 싸움 일화는 널리 알려진 전승으로 소개하되, 확인된 사실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필립 제이손 기념재단
미국에는 서재필의 이름을 기리는 필립 제이손 기념재단(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이 존재한다.
이 재단은 197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설립되었다.
재단은 서재필의 의료 및 사회봉사 정신을 계승한다는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현재도 의료서비스와 사회복지, 교육, 문화 관련 활동 등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어에는 서재필의 생전 거주지를 보존한 기념관이 존재한다.
이는 서재필이 한국의 근대사뿐 아니라 미국의 한인 이민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6]
미국 의학계의 활동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병리학 연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수행했으며, 전문적인 의학 연구를 위한 교육과 실무 경험도 쌓았다.
이후 고령에도 의학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등 장기간 의료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서재필의 의학 경력은 한국 근대의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전문직업인으로 활동한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평가
서재필은 조선 말기의 근대화와 민권운동, 언론 발전 및 해외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가족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은 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의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지만, 한국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1896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의 최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생애는 서재필을 단순히 미국으로 망명한 개화파 인물이나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에게는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관심이 동시에 존재하였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와 근대적인 정치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국이 독립적인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의 행적에는 갑신정변 당시의 무력정치와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의존, 조선 왕조와의 갈등 및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의 활동 등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따라서 서재필을 평가할 때에는 초기의 개화운동과 미국에서의 개인적 성취, 해외 독립운동, 해방 이후의 정치적 선택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재필이 흥미로운 이유는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미국 시민이 되었으면서도, 조선인의 정치적 독립과 근대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문제에는 평생 관여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생애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민족적 정체성, 개인의 자유 및 정치적 신념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줄요약
갑신정변으로 가족을 잃고 미국에 망명하여 시민권과 의사면허를 취득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개화파 출신 미국 시민이자 독립운동가.
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도 있다.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은 버렸지만 조선인의 독립은 버리지 않았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