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 | |
|---|---|
| 최초 개최 | 1898년 3월 10일 |
| 최종 해산 | 1898년 12월 23일 |
| 공식 불법화 | 1898년 12월 25일 |
| 국가 | 대한제국 |
| 주요 장소 | 한성부 종로, 경무청 앞, 경운궁 인근 |
| 최초 주최 | 독립협회 |
| 최초 대회장 | 현덕호 |
| 주요 참여 세력 | 독립협회 회원, 학생, 상인, 시민, 개혁파 지식인 등 |
| 주요 인물 |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이승만, 박성춘 등 |
| 최초 집회 규모 | 약 1만 명 |
| 주요 목표 | 자주독립,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 자유민권 신장, 정치개혁, 의회 설립 |
| 주요 성과 | 러시아 군사교관·재정고문 철수, 한러은행 폐쇄, 독립협회 지도부 석방, 중추원 개편 추진 |
| 관련 단체 | 독립협회, 황국협회, 황국중앙총상회 |
| 관련 사건 | 관민공동회, 헌의 6조, 독립협회 해산 사건 |
개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부에서 여러 차례 개최된 근대적인 민중 정치집회이다. 처음에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에 반대하기 위해 조직했으나, 이후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확대되면서 정치개혁과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집회에는 약 1만 명의 시민이 참가했으며,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근대적인 대규모 민중 정치집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후 만민공동회는 외국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뿐 아니라 지방관의 부정부패와 정부의 인사 문제,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 언론과 집회의 자유, 의회 설립 등 여러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1898년 10월에는 정부 관료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여한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어 헌의 6조를 채택했다. 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중추원을 의회적 성격의 기구로 개편하려 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실제 시행에는 실패했다.
1898년 11월 5일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부를 체포하자 시민들은 경무청 앞에 모여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장기 철야시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만민공동회는 기존의 일시적인 집회를 넘어 지속적인 정치적 조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정부는 친황실 성향의 황국협회와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공격했으며, 양측의 충돌로 서울 시내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발생했다.
결국 1898년 12월 23일 고종이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12월 25일에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만민공동회는 정치개혁이라는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시민들이 공개적인 집회를 통해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정치적 요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정치운동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명칭
만민공동회는 한자로 萬民共同會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만민(萬民)은 모든 백성을 의미하며, 공동회(共同會)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는 집회를 가리킨다.
즉, 만민공동회라는 명칭은 특정한 신분이나 관직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논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만민공동회라는 정식 명칭 외에도 민회(民會)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제국의 모든 국민이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참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서울의 성인 남성들이 주요 참가자였으며, 신분과 성별, 경제적 조건에 따라 정치적 참여의 기회에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처음부터 고정된 임원과 사무국을 가진 하나의 상설단체가 아니었다.
초기에는 집회가 열릴 때마다 임시 회장과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1898년 11월 독립협회 해산 사건 이후에야 지속적인 정치조직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배경
대한제국과 열강의 이권 침탈
19세기 말 조선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특히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전통적인 영향력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강화했고,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자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군사와 재정, 외교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특히 러시아는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고, 부산 절영도에 석탄 저장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토지 조차를 요구했다.
또한 한러은행을 설립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금융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광산과 철도, 삼림 및 항만 등에 관한 이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독립협회의 정치운동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은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독립협회는 처음에는 독립문 건립과 국민 계몽사업을 추진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1897년부터 정기적인 토론회가 개최되면서 정부 정책과 국가의 자주권, 국민의 정치적 권리에 관한 논의가 확대되었다.
특히 1898년에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독립협회는 정부에 항의문을 보내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했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자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만민공동회였다.
러시아의 군사·재정 간섭
1898년 초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여러 요구를 제기했다.
특히 러시아의 군사교관들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훈련하고 재정고문이 국가 재정에 관여하는 상황은 자주권 침해 문제로 인식되었다.
러시아는 절영도 석탄 저장시설 설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는 상소와 항의문을 제출했으며, 외국이 대한제국의 군사와 재정에 간섭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들의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고, 대한제국 정부 역시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못했다.
결국 독립협회는 기존의 상소와 토론회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
1898년 3월 10일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의 백목전(白木廛) 앞에서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백목전은 흰 무명을 판매하던 시전으로, 종로의 주요 상업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집회에는 약 1만 명의 시민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약 17만~20만 명으로 추산되므로, 1만 명이라는 참가 규모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조직했지만, 집회를 일반 시민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운영하기 위해 정부 관리나 독립협회의 고위 지도자가 아닌 상인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초대 대회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쌀장수였던 현덕호(玄德鎬)였다.
또한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의 학생들이 연설에 나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비판했다.
이는 기존의 정치활동이 주로 국왕과 관료, 양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현덕호의 연설
현덕호는 집회에서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군사와 재정에 간섭하는 문제를 비판했다.
그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외국의 요구에 무조건 굴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반 백성들이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집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차례로 연설했으며, 참가자들은 연설자의 주장에 동의할 때 손뼉을 치거나 환호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반적인 정치 참여 방법으로 자리 잡지 못했던 공개적인 대중 연설과 집단적 의사표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철수 요구
최초의 만민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라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철수를 요구하고, 국가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국에 석탄 저장시설이나 항만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결의안은 정부에 전달되었다.
당시 집회에는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외국 외교관들과 외국인들도 참석하거나 상황을 관찰했다.
일반 백성들이 대규모로 모여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국가의 자주권을 주장한다는 사실은 당시 외국인들에게도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3월 12일의 자발적인 집회
3월 10일 만민공동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자 이틀 뒤인 3월 12일에는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번 집회는 독립협회가 직접 조직했다기보다 서울 남촌 지역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자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고,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일반 시민들에게도 직접 정치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독립협회의 지도부가 집회를 조직하지 않더라도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 정치적인 요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였다.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만민공동회가 열린 직후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했다.
1898년 3월 11일 고종은 정부에 러시아 측으로 철수 요구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3월 19일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정식으로 해임되었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러시아는 절영도 조차 요구에서도 물러났고, 대한제국에 대한 군사·재정 간섭을 일부 축소했다.
이러한 결과는 만민공동회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다만 러시아가 정책을 변경한 이유를 만민공동회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을 비롯한 여러 열강과 경쟁하고 있었으며, 극동지역에서의 군사적·외교적 전략도 조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의 압력은 대한제국 정부의 대응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러시아의 철수를 결정한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치적 활동의 확대
서재필의 출국 반대 운동
최초의 만민공동회 이후 시민들은 여러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98년 4월 30일 열린 서재필의 출국 반대 집회였다.
당시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국민 계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정부와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서재필은 대한제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시민들은 서울 숭례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열고 서재필이 계속 국내에 머물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기존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서재필은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만민공동회가 외국의 내정 간섭을 반대하는 운동에서 국내의 정치적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육과 관료 인사 문제
1898년 6월 20일에는 무관학교 학생 선발 과정의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시민들은 군사교육기관에 들어갈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인사와 특혜가 이루어졌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비판은 국가의 군사적 근대화를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와 교육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연결되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이 정부의 교육 및 인사정책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만민공동회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외국의 이권 침탈 반대
1898년 7월 1일과 2일에도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는 독일을 비롯한 외국 세력이 대한제국에서 각종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철도와 광산, 삼림 등 여러 분야에서 외국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외국 기업이나 정부가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으로 이권을 확보할 경우 국가의 경제적 자주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외국과의 계약을 신중하게 체결하고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일본의 배상금 요구와 경부철도 부설권 문제 등을 비판하는 집회도 개최되었다.
이처럼 만민공동회는 특정한 하나의 외국만을 반대하는 조직이라기보다, 대한제국의 자주권과 경제적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는 외국의 요구에 대응하려 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1898년 후반 만민공동회에서는 외교와 경제 문제뿐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요구도 확대되었다.
특히 정부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를 부활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국가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 관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공정한 재판과 합리적인 행정제도를 요구했다.
이는 만민공동회가 단순히 외국의 간섭에 반대하는 애국집회에서, 국가권력과 국민의 관계 자체를 논의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관민공동회
정부 관료와 시민의 공동 집회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종로에서는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관민공동회는 기존의 만민공동회에 정부 관료들이 참여하여 정치개혁안을 공동으로 논의한 집회였다.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부정부패를 바로잡고 국가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민간의 요구뿐 아니라 정부 내부의 협력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박정양과 민영환 등 개혁적인 관료들이 집회에 참여했다.
집회에는 정부 관료와 독립협회 회원, 학생, 상인, 일반 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관민공동회는 기존의 만민공동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부 관료와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백정 박성춘의 연설
관민공동회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박성춘의 연설이다.
박성춘은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 출신의 인물이었다.
1898년 10월 28일 그는 종로의 집회에서 연설하며 자신이 천한 신분의 사람이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하나의 기둥으로 천막을 세울 수 없듯이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백성들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연설은 전통적인 신분질서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이 공개적인 정치집회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논의가 양반과 관료뿐 아니라 다른 사회계층에게도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박성춘이 연설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서 신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법률상 신분제도의 폐지와 실제 사회생활에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헌의 6조
1898년 10월 29일 관민공동회에서는 국가의 정치개혁을 위한 기본 원칙으로 헌의 6조를 채택했다.
헌의 6조는 대한제국의 자주권과 황제권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외교와 재정, 인사, 형사재판 등에 대한 제도적인 규칙을 마련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조항 | 주요 내용 |
|---|---|
| 제1조 |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관민이 협력하여 황제권과 국가의 자주권을 공고히 할 것 |
| 제2조 | 외국과의 차관·차병·조약 및 각종 이권 계약에 외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의 공동 서명을 요구할 것 |
| 제3조 | 국가 재정을 탁지부로 일원화하고 예산과 결산을 공개할 것 |
| 제4조 | 중죄인은 공개재판과 충분한 심문을 거쳐 처벌할 것 |
| 제5조 | 고위 관료를 임명할 때 정부의 의견을 반영할 것 |
| 제6조 | 기존에 제정된 법률과 각종 장정을 실천할 것 |
헌의 6조는 관민공동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후 고종의 승인을 받았다.
이는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정부의 공식적인 개혁안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헌의 6조가 실제로 충분히 시행되지는 못했다.
특히 중추원을 의회적 기구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은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과 독립협회 탄압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사건
공화정 수립 음모설
1898년 11월 초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개편해 민간 대표가 국가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파 관료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황제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조병식과 이기동 등 보수파 인사들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익명 문서를 유포했다.
그 내용은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독립협회 전체의 공식적인 목표와는 다른 무고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종은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소문에 강하게 반응했다.
결국 1898년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 사이에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었으며, 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도 내려졌다.
경무청 앞 철야시위
1898년 11월 5일, 독립협회 지도부 17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시민들이 경무청 앞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은 지도부의 석방과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당초 정부는 지도부만 체포하면 독립협회의 정치적 활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일반 시민들의 저항이 확대되었다.
특히 이번 만민공동회는 이전처럼 하루나 이틀 동안 집회를 열고 해산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지도부가 석방될 때까지 경무청 앞에서 계속 집회를 개최하며 밤에도 현장을 지켰다.
초기 집회에서는 임병길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여러 대표자가 집회를 운영했다.
또한 시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렇게 만민공동회는 장기간 집회를 계속하기 위한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지도부 17명 석방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11월 5일부터 여러 날 동안 철야시위를 계속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쉽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특히 참가자들이 증가하고 서울 시민들의 지지가 확대되면서 정치적 부담이 커졌다.
결국 고종은 11월 10일 체포했던 독립협회 지도부 17명을 석방했다.
이는 만민공동회의 집단행동이 실제로 정부의 결정을 바꾸게 만든 중요한 사례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도부의 석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상태였으며, 정부가 약속했던 정치개혁 역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만민공동회는 집회를 종로로 옮기고 독립협회의 복설과 헌의 6조의 시행, 무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장기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
11월 중순 이후 만민공동회는 서울 시내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부가 개혁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철야시위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1월 15일에는 집회 장소를 경운궁 인근으로 옮겨 황제와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또한 집회 운영을 담당하는 여러 부서를 설치하고 대표자를 선출하면서 조직을 확대했다.
이러한 변화는 만민공동회가 단순한 일시적인 민중집회에서 지속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898년 11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진행된 시위는 중간의 휴회기간을 제외하면 약 42일 동안 이어진 장기 철야시위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기간 전체에 걸쳐 참가 인원이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규모의 집회가 진행된 것은 아니다.
정부의 대응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집회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거나 다시 확대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황국협회와의 충돌
정부의 보부상 동원
만민공동회가 장기화하면서 고종과 보수파 관료들은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특히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시민들이 집회를 계속하자, 정부는 기존의 경찰력과 행정적인 명령만으로 집회를 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친황실 성향의 황국협회와 보부상 조직이 동원되었다.
황국협회는 1898년 6월에 설립된 정치·경제단체로, 주요 회원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들은 황실의 보호 아래 상업적 권익을 유지하려 했으며, 황국협회의 지도부 역시 황제권 강화를 지지했다.
반면 만민공동회는 정부의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독단적인 정책 결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 정부는 황국협회와 보부상들을 이용해 만민공동회를 견제하려 했다.
1898년 11월 21일 습격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 약 2,000명이 만민공동회 집회장을 습격했다.
당시 보부상들은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며, 길영수와 홍종우 등 황국협회 관련 인물들이 이들의 동원과 지휘에 관여했다.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이미 여러 날 동안 철야시위를 계속해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부상들이 갑자기 집회장을 공격하면서 상당한 혼란이 발생했다.
공격을 받은 시민들이 부상당했으며, 집회는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다.
당시 집회장 주변에는 군대와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보부상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관련 서술에서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군경이 보부상들의 진입을 허용했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이는 단순히 시민단체 사이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부와 보수파 관료들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보부상 조직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시민들의 반격
황국협회의 습격 소식이 퍼지자 서울 시민들의 분노가 커졌다.
11월 22일에는 시민들이 다시 집결해 보부상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보부상들은 서울 도성 밖으로 밀려났으며, 일부는 마포 방면까지 쫓겨났다.
만민공동회는 다시 종로에서 개최되었으며, 황국협회와 보수파 관료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황국협회는 폭력을 이용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격 역시 폭력적인 충돌로 이어지면서 서울의 치안은 불안정해졌다.
일부 참가자들은 정부 관리의 집을 습격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만민공동회의 정치운동이 점차 격화되면서 발생한 문제였다.
김덕구의 죽음
황국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충돌 과정에서는 신기료장수였던 김덕구(金德九)가 사망했다.
신기료장수는 낡은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던 사람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덕구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정치적 요구를 지지했으며, 황국협회와의 충돌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 1일 김덕구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를 만민장(萬民葬)이라고 한다.
당시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김덕구를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국가의 개혁을 위해 행동하다가 죽은 인물로 기렸다.
이러한 사건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이 단순히 독립협회 지도부의 지시만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갈등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종과의 협상
11월 23일의 약속
황국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충돌이 격화되자 정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만민공동회는 황국협회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과 보부상 조직의 혁파, 개혁적인 관료의 등용 등을 요구했다.
고종과 정부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만민공동회는 11월 23일 집회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조치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다시 커졌다.
특히 황국협회와 보부상 조직에 대한 처벌이 충분하지 않았고, 정치개혁 역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11월 26일 고종의 친유
1898년 11월 26일 만민공동회가 다시 개최되자 고종은 경운궁의 돈례문으로 나와 시민 대표들과 만났다.
이때 고종은 독립협회의 복설과 헌의 6조의 실시, 황국협회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등을 약속했다.
또한 정부 관료의 인사 문제와 정치개혁에 대해서도 민중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황제가 직접 시민 대표들과 만나 공개적으로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인 사건이었다.
특히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집단행동이 황제의 공식적인 약속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종과 정부가 이러한 약속을 실제로 충분히 이행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중추원 구성의 문제
정부는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중추원 의관 50명을 새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계열 인사는 17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33명은 황제와 가까운 세력이나 보수파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당초 독립협회가 추진했던 관선과 민선의 균형 있는 의회적 기구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중추원이 실제로 정부 정책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형식적으로 개혁을 수용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정부와 만민공동회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최후의 만민공동회
12월 6일 집회 재개
1898년 12월 6일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정치개혁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헌의 6조의 시행과 황국협회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보부상 조직의 혁파 등을 요구했다.
또한 정부의 인사와 재정 운영에 대한 개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만민공동회의 활동은 단순한 시위에서 정부의 구성과 정책 방향을 직접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려던 고종과 보수파 관료들에게 더욱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추원의 대신 추천
1898년 12월 중순 중추원이 개원하자 개혁파 인사들은 이를 통해 정부의 주요 인사를 추천하려 했다.
12월 16일 중추원에서는 정부 대신으로 등용할 만한 인물 11명을 무기명 투표로 선정했다.
여기에는 박정양과 민영환, 윤치호, 서재필, 최익현, 박영효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박영효의 이름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인물로,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었다.
일부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박영효를 개혁적인 정치인으로 보았지만, 다른 시민들은 그를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영효의 귀국과 등용 문제는 만민공동회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시민들의 지지 약화
만민공동회는 처음에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출발했으며, 이후 부패한 관리의 처벌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활동이 장기화되면서 참가자들의 목적과 정치적 입장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지도자들이 정부 대신의 임명과 정치권력의 구성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 하면서 일반 시민들의 우려도 커졌다.
또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거나 정부 관료를 위협하는 등 과격한 행동이 발생하면서 정치적 부담이 증가했다.
외국 공사들 역시 만민공동회가 정치적 불안정을 확대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박영효의 정치적 복귀를 추진하는 움직임은 일부 시민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과 보수파 정부가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12월 23일 무력 해산
1898년 12월 23일 고종은 시위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시위대는 황제를 호위하는 군사조직으로, 당시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무력이었다.
정부는 군대를 집회장으로 진격시켰으며, 보부상들도 군대를 따라 시민들을 공격했다.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군대와 몽둥이를 든 보부상들의 공격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결국 집회는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주요 참가자들과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 시내에는 군사적인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는 그동안 시민들의 집단행동과 협상을 통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려 했던 상황이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무력 진압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12월 25일 공식 불법화
1898년 12월 25일 고종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정부는 집회 참가자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관료들을 모욕했으며, 정부의 행정을 방해했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했다.
또한 외국 공사관에 정부의 잘못을 알리고, 관료들을 강제로 집회에 참가하도록 했다는 사실도 문제 삼았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부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후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졌으며, 관련 기록에서는 수백 명에 이르는 참가자와 지도자가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이로써 1898년 3월부터 이어진 만민공동회 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다만 12월 23일은 군대를 동원한 실제 무력 해산일이고, 12월 25일은 공식적인 불법화 조칙이 발표된 날이라는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참여 계층
상인
만민공동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 중 하나는 서울의 상인들이었다.
특히 최초의 만민공동회에서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상인들이 정치적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국내 시장 진출과 정부의 경제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므로, 국가의 경제적 자주권을 보호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었을 때 일부 시전상인들은 상점을 닫는 철시운동을 통해 만민공동회를 지원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뿐 아니라 경제활동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한 사례였다.
학생과 청년층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을 비롯한 근대적인 교육기관의 학생들도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이들은 집회에서 연설하거나 정치적 주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서양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공개적인 토론과 연설, 정치적 결의안의 채택 등 새로운 방식의 정치활동에 비교적 익숙했다.
이승만 역시 젊은 시절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참여는 근대적인 교육과 정치적 의식의 확대가 연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반 시민과 하층민
만민공동회에는 정부 관료나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과 노동자,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도 참여했다.
특히 백정 출신 박성춘의 연설과 신기료장수 김덕구의 죽음은 이러한 참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법률상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기존의 신분 차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개적인 정치집회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정치적 발언권에 변화가 나타났다.
다만 참가자들이 모두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으며, 정치적 지도력은 여전히 독립협회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상당 부분 집중되어 있었다.
정부 관료
만민공동회는 일반 시민들의 집회였지만, 일부 개혁파 정부 관료들과도 협력했다.
특히 박정양과 민영환 등은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요구에 일정 부분 동의했으며, 관민공동회에 직접 참여했다.
이는 당시 정치적 대립이 단순히 정부 전체와 일반 시민 전체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부 내부에서도 정치개혁에 협력하려는 세력이 있었으며, 만민공동회 역시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려 했다.
주요 활동과 성과
| 시기 | 주요 사건 |
|---|---|
| 1898년 3월 10일 | 최초의 만민공동회 개최. 러시아 군사교관·재정고문 철수 요구 |
| 1898년 3월 12일 |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 개최 |
| 1898년 3월 19일 |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해임 |
| 1898년 4월 30일 | 서재필의 출국 반대 집회 |
| 1898년 6월 20일 |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 비판 |
| 1898년 7월 1~2일 | 외국의 이권 침탈 반대 집회 |
| 1898년 7월 16일 | 일본의 배상금 요구와 경부철도 관련 이권 문제 비판 |
| 1898년 10월 28일 | 관민공동회 개최 |
| 1898년 10월 29일 | 헌의 6조 채택 |
| 1898년 11월 5일 | 독립협회 지도부 체포에 항의하는 철야시위 시작 |
| 1898년 11월 10일 | 독립협회 지도부 17명 석방 |
| 1898년 11월 21일 |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 |
| 1898년 11월 26일 | 고종의 친유와 정치개혁 약속 |
| 1898년 12월 1일 | 김덕구를 추모하는 만민장 거행 |
| 1898년 12월 6일 | 정치개혁 이행을 요구하는 집회 재개 |
| 1898년 12월 23일 | 시위대를 동원한 무력 해산 |
| 1898년 12월 25일 |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공식 불법화 |
역사적 평가
근대적인 대중정치의 등장
만민공동회는 일반 시민들이 공개적인 장소에 모여 국가의 정치와 외교, 경제 및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조선 정치에서는 국왕과 관료들이 주요 정책을 결정했으며, 일반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통로는 제한적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상소와 민원, 집단적인 저항이나 농민 봉기 등을 통해 국가에 요구를 전달하는 사례는 존재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공개적인 연설과 토론, 결의안 채택, 대표자 선출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적 집단행동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대적인 정치 참여와 여론 형성의 발전과 연결된다.
자주독립 운동의 성과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의 군사적·재정적 간섭에 반대하면서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898년 3월 집회 이후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철수하고 한러은행이 폐쇄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러한 결과는 대중적인 정치적 압력이 국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과 여러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성과만으로 국가의 자주권이 완전히 확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민권의 확대
만민공동회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공정한 재판과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연좌제의 부활에 반대하고 국가 재정의 투명성을 요구한 활동은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또한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듣고 정치적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근대적인 민권의 발전과 연결된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참가자들이 현대적인 의미의 국민주권이나 보통선거제를 완전하게 실현하려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시 지도부의 상당수는 군주제를 인정하면서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며, 실제로 헌의 6조에도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는 현대적인 민주공화국 수립 운동이라기보다 대한제국의 군주제 아래에서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고 입헌적인 요소를 도입하려 했던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만민공동회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립협회가 최초로 집회를 조직한 이후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새로운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1898년 3월 12일의 집회와 11월 5일 이후의 철야시위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1월에는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었음에도 시민들이 집회를 계속했고, 결국 지도부 17명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는 만민공동회가 단순히 독립협회의 부속 행사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황제권과의 충돌
만민공동회의 최종적인 실패는 대한제국에서 황제권과 국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고종은 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동시에 황제의 정치적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반면 만민공동회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민간의 감시와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려 했다.
처음에는 양측이 협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정치개혁이 실제 권력의 배분 문제로 이어지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고종은 집회를 수용하거나 협상하기보다 군대를 동원해 해산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와 황제권의 강화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계와 비판
정치적 지도력의 한계
만민공동회는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발전했지만, 정치적인 지도력은 독립협회의 지식인과 개혁파 관료들에게 상당 부분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집회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참가자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목표가 다양해졌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충분하지 않았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현대적인 정당이나 의회처럼 지속적인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조직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조직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다.
일부 참가자의 과격한 행동
만민공동회는 대체로 공개적인 연설과 토론, 결의안 채택 등의 방식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전달했다.
그러나 1898년 11월 황국협회와의 충돌 이후에는 일부 참가자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정부 관료들을 직접 위협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또한 집회가 장기화하면서 일부 지도자들이 정부의 정치적 인사에 지나치게 개입하려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만민공동회의 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으며, 정부가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진압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제한적인 정치 참여
만민공동회라는 명칭은 모든 백성의 공동 참여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회계층이 동일한 조건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교육 수준과 경제적 조건, 성별 및 지역에 따라 정치적 활동의 기회에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운동의 중심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동일한 수준으로 지속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평양에서도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는 등 지방으로 운동이 확산되는 움직임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전국적인 정치조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전에 운동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의회 설립 운동의 미완성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의회적 성격의 기구로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민간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보통선거와 달랐으며, 실제로 모든 국민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새로 개편된 중추원이 정부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도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결국 의회 설립 운동은 제도적인 시행을 눈앞에 두고 좌절되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를 한국에서 민주주의 의회가 처음으로 설립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오히려 근대적인 의회제도와 정치적 대표성을 도입하려 했던 초기의 정치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독립협회 및 관민공동회와의 차이
| 구분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관민공동회 |
|---|---|---|---|
| 성격 | 회원제 정치·사회단체 | 공개적인 민중 정치집회 | 정부 관료와 시민의 공동 집회 |
| 시작 | 1896년 7월 2일 | 1898년 3월 10일 | 1898년 10월 28일 |
| 주요 참여자 | 개화파 관료, 지식인, 학생, 상인 등 | 일반 시민, 상인, 학생, 독립협회 회원 등 | 시민과 정부 관료 |
| 주요 활동 | 계몽운동, 독립문 건립, 정치개혁 |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 민권운동, 정치적 집회 | 헌의 6조 채택, 국정개혁안 협의 |
| 운영 방식 | 회장과 임원을 가진 조직 | 초기에는 집회별로 대표를 선출 | 관민 합동의 공개집회 |
| 결과 | 강제 해산 | 강제 해산 | 개혁안 채택 후 실현 좌절 |
독립협회는 지속적인 회원과 임원, 조직 규칙을 가진 정치·사회단체였다.
반면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조직한 민중집회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개최된 정치적 운동이었다.
관민공동회는 이러한 만민공동회에 정부 관료들이 참여해 정치개혁안을 공동으로 논의한 집회였다.
따라서 세 조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특히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만민공동회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두 조직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담
-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관련이 깊지만, 독립협회 자체의 공식 명칭은 아니다. 처음에는 독립협회가 조직한 공개집회였으나 이후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했다.
-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의 백목전 앞에서 개최되었다.
- 첫 집회에는 약 1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서울의 인구를 고려하면 상당히 큰 규모의 정치집회였다.
- 최초의 만민공동회 대회장은 정부 관료나 양반 지식인이 아니라 쌀장수 현덕호였다. 독립협회는 이를 통해 일반 시민들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
- 3월 10일 집회가 성공한 뒤 3월 12일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집회를 개최했다.
- 1898년 3월의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를 요구했으며,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실제로 이들을 해임했다.
- 독립신문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했으며, 당시 집회의 분위기와 정치적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 최초의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서재필은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같은 해 11~12월의 장기 철야시위는 서재필이 직접 현장에서 지도한 운동이 아니었다.
- 관민공동회에서 연설한 박성춘은 백정 출신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람이 공개적인 정치집회에서 국가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자 시민들은 1898년 11월 5일부터 경무청 앞에 모여 철야시위를 시작했다. 이러한 집단행동으로 11월 10일 지도부 17명이 석방되었다.
-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는 이전의 일시적인 집회와 달리 지속적인 조직을 갖추고 장기간 활동했다.
-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 약 2,000명은 11월 21일 만민공동회를 몽둥이로 공격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다시 집결해 보부상들을 서울 도성 밖으로 몰아내면서 집회는 계속되었다.
- 보부상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신기료장수 김덕구를 기리기 위해 12월 1일 만민장이 열렸다. 신분이 높은 관리가 아니라 일반 시민을 위해 대규모 추모행사가 개최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 고종은 11월 26일 집회 대표들과 만나 독립협회의 복설과 정치개혁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이 충분히 이행되지 않으면서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 만민공동회는 황제의 권한을 무조건 부정하는 공화주의 운동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황제권을 인정하면서도 정부 운영에 민간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요한 흐름이었다.
- 1898년 12월 중추원이 정부 대신 후보 11명을 추천했을 때 박영효가 포함되었다. 당시 박영효를 역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만민공동회 내부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1898년 12월 23일에는 군대를 동원한 실제 무력 해산이 이루어졌고, 12월 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는 공식 조칙이 발표되었다.
- 만민공동회가 강제로 해산되었다고 해서 당시 시민들이 주장했던 자주독립과 민권, 정치개혁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만민공동회는 공개적인 연설과 결의안 채택, 대표자 선출과 장기적인 정치집회 등을 통해 한국 근대 정치운동의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