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국협회 皇國協會 | |
|---|---|
| 설립 | 1898년 6월 30일 |
| 발회식 | 1898년 7월 7일 |
| 해산 | 1898년 12월 |
| 국가 | 대한제국 |
| 소재지 | 한성부 |
| 초대 회장 | 정낙용 |
| 주요 지도자 | 이기동, 고영근, 홍종우, 길영수 |
| 주요 후원 세력 | 대한제국 황실, 황제 측근 관료, 보수파 대신 |
| 주요 구성원 | 보부상, 정부 관료, 일부 의병 출신 인물 |
| 성격 | 친황실 정치·경제단체, 보부상 이권단체, 어용단체 |
| 주요 이념 | 충군애국, 황제권 강화, 부국강병, 상공업 진흥 |
| 주요 활동 | 황실 경축행사, 보부상 권익 보호, 민선 하원 설립 제안, 독립협회 견제, 만민공동회 공격 |
| 대립 단체 | 독립협회 |
| 관련 사건 |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해산 사건 |
| 후신 | 상무회사 등 보부상 관련 조직 |
개요
황국협회(皇國協會)는 1898년 대한제국에서 고종의 황제권을 지지하던 관료들과 보부상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치·경제단체이다. 표면적으로는 황실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부강, 상공업의 진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을 견제하고 황제 중심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898년 6월 30일 결성되었으며, 7월 7일 한성부의 옛 훈련원에서 발회식을 거행했다. 초대 회장은 정낙용이었으며, 이기동, 고영근, 홍종우, 길영수 등 황제 측근 인물들이 조직의 설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주요 구성원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상업활동을 하던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갑오개혁 과정에서 폐지된 기존의 상인조직과 상업적 특권을 회복하려 했으며, 황제권 강화를 추진하던 대한제국 정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황국협회는 처음에는 상공업 진흥과 보부상의 권익 보호를 표방했으며, 1898년 10월에는 민선 하원 설립을 제안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적 요구도 제기했다. 그러나 같은 해 독립협회가 헌의 6조와 중추원 개편 등을 통해 황제권에 대한 제도적 견제를 추진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 약 2,000명이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을 몽둥이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독립협회 지지 시민들과 보부상 사이에서 대규모 충돌이 이어졌고,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정치집회 탄압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결국 1898년 12월 고종이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면서 황국협회 역시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다.
그러나 황국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보부상 세력과 황실의 관계는 계속되었으며, 1899년에는 상무회사가 설립되어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설립 배경
대한제국과 황제권 강화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조선이 외국의 종속국이 아닌 자주독립국가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고 해서 국가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군사·재정·행정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려 했다. 특히 황실 직속 기관의 권한을 확대하고 황제의 명령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반면 독립협회는 1898년부터 일반 국민의 정치 참여와 정부의 책임 있는 운영, 재정의 투명성, 외국에 대한 이권 양여 제한 등을 요구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독립협회는 처음에는 고종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단체였으나, 활동이 확대되면서 황제와 정부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는 황제권 강화를 추진하던 고종과 황실 측근 관료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황실과 보수적인 관료들은 독립협회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황국협회였다.
보부상과 국가권력의 관계
황국협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보부상은 조선 후기 전국의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매하던 상인집단이다.
보부상은 봇짐을 지고 다니던 보상(褓商)과 등짐을 지고 다니던 부상(負商)을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이들은 단순히 개별적으로 장사하는 상인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조직을 만들고 내부 규율과 상호부조 제도를 운영했다.
특히 19세기 이후 보부상 조직은 상업활동에 필요한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보부상들이 국가의 군사적 동원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 임오군란 때에도 왕실을 보호하는 데 협력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보부상 출신 인물들이 도피 중이던 명성황후를 도왔으며, 이 과정에서 황실과 보부상 조직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특히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된 이용익 역시 보부상 출신으로, 왕실과 상인조직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보부상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상업적 특권을 보장해 주기를 원했다.
반면 왕실과 정부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보부상들을 군사적·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즉, 보부상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조직적인 행동에 참여하는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혜상공국과 상리국
1883년 조선 정부는 보부상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혜상공국을 설치했다.
혜상공국은 보부상들의 상업활동을 보호하고 조직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했으며, 국가가 보부상 조직을 공식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1885년에는 상리국으로 개편되었다.
보부상들은 이러한 관청을 통해 자신들의 상업적 권리를 보호받았으며, 일정한 상업세를 징수하는 권한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은 다른 상인과 농민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가져왔다.
보부상 조직이 상업세를 거두거나 지방에서 횡포를 부리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요구한 개혁 사항에는 보부상 조직과 지방 임방(任房)의 폐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보부상 조직이 단순한 상인단체를 넘어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다른 계층에 부담을 지우는 특권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갑오개혁과 보부상의 위기
1894년부터 추진된 갑오개혁은 기존의 신분질서와 행정제도, 경제제도를 개편하려는 개혁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부상 조직 역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1895년 정부는 상리국과 그 산하 조직인 지방 임방을 폐지했으며, 보부상들이 행사하던 상업세 징수권도 금지했다.
이는 보부상들이 오랫동안 국가의 보호를 통해 유지해 온 조직적 기반과 경제적 특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이 조선의 국내 시장에 진출하면서 보부상들의 상업적 활동에도 새로운 경쟁이 발생했다.
일본 상인과 청나라 상인들이 개항장뿐 아니라 내륙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면서 기존의 상업질서가 변화한 것이다.
보부상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보호와 특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직적인 활동을 재개하려 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권 강화를 추진하자 보부상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황실은 자신을 지지할 대중적 조직이 필요했고, 보부상들은 황실의 보호 아래 상업적 특권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황실에는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고, 보부상에게는 자기들을 보호해 줄 권력이 필요했던 셈이다.
창립
황실파 관료들의 주도
1898년 6월 30일 황국협회가 결성되었다.
설립에는 이기동, 고영근, 홍종우, 길영수 등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과 행정, 정치에 관여하던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이용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조병식, 심상훈, 민영기(친일파), 신기선, 한규설 등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조직을 후원했다.
한편 허위를 비롯한 일부 의병 출신 인물들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황국협회는 단순히 보부상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상인조합이 아니라, 황실 측근 관료와 여러 정치·사회 세력이 결합한 조직이었다.
주요 지도부는 황제권 강화를 지지하던 인물들로 구성되었지만, 일반 회원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상업적 권익을 회복하려는 보부상들이었다.
이처럼 지도부와 일반 회원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황제 중심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 기존의 상업적 특권을 회복한다는 목표에서 협력할 수 있었다.
발회식
1898년 7월 7일 황국협회는 한성부의 옛 훈련원 자리에서 발회식을 개최했다.
이날 발회식에서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황실을 존중하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 발표되었다.
또한 농업과 상업, 공업의 발전을 통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황태자는 황국협회의 운영 경비로 1,000원을 하사했다.
발회식에서는 태극기를 설치하고 만세를 부르는 등 황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행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회원들에게는 보호황실(保護皇室)과 대한황국협회충군애국(大韓皇國協會忠君愛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표식이 배포되었다.
황국협회는 국가와 황실을 동일한 정치적 충성의 대상으로 연결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했다.
조직과 임원
초대 회장은 전 농상공부대신 정낙용이 맡았으며, 부회장은 이기동이 담당했다.
황국협회는 매월 두 차례 통상회를 개최하고 매년 두 차례 총회를 개최하는 조직 운영 방침을 마련했다.
조직의 임원은 총 10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칙임 간부였다.
이는 일반적인 민간 상인조합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황제가 직접 임원을 임명한다는 것은 황실이 조직의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898년 9월 정낙용이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이기동이 회장, 고영근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기동은 같은 해 10월 법부협판으로 임명되는 등 정부의 주요 관직에도 진출했다.
이러한 인사 관계는 황국협회가 황실 및 정부의 권력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요 인물
정낙용
정낙용은 황국협회의 초대 회장이다.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 관료로, 황국협회의 창립과 초기 조직 운영을 담당했다.
1898년 9월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이기동이 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기동
이기동은 황국협회 설립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고종의 측근이자 이용익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관료로, 황국협회 초대 부회장을 맡았다가 이후 회장으로 활동했다.
1898년 법부협판에 임명되는 등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에 대항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영근
고영근은 황국협회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 1898년 9월 이후 부회장을 맡았다.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으며, 보부상 조직과 황국협회의 정치적 활동을 지원했다.
이후 대한제국 말기의 정치적 사건에도 관여했다.
홍종우
홍종우는 황국협회 활동에 참여한 황실파 관료 가운데 한 명이다.
1894년 일본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인물로 유명하며,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정부의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황국협회와 만민공동회 사이의 갈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했다.
길영수
길영수는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보부상 조직을 동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898년 11월에는 전국 보부상 조직의 지도자인 13도 부상 도반수(負商都班首)가 되어 보부상들을 조직하고 훈련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조직 동원에 관여했으며, 황국협회 해산 이후에도 정부의 주요 관직에 진출했다.
주요 활동
황실 경축행사
황국협회는 황제에 대한 충성과 대한제국의 권위를 강조하는 각종 경축행사를 개최했다.
대표적으로 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국기원절, 고종의 생일인 만수성절, 고종의 즉위일을 기념하는 계천기원절 등에 회원들을 동원했다.
이러한 행사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거나 애국가를 부르는 등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제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결합하려는 정치적 활동이었다.
다만 황국협회가 태극기를 사용하거나 국가의 독립과 부강을 강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협회와 동일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단체는 모두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을 내세웠지만, 국가권력을 어떻게 운영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를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보부상의 상업적 권익 보호
황국협회는 보부상의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는 조직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갑오개혁 과정에서 폐지된 상리국과 지방 임방의 부활을 요구했으며, 보부상 조직이 다시 국가의 공식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 했다.
또한 상업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고 회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보부상들이 외국 상인과 국내의 다른 상인집단 사이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보부상 조직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 곧 모든 상인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의 상업세 징수권이나 독점적 지위를 회복할 경우 다른 상인과 농민들에게 다시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황국협회의 경제적 요구는 상업 발전이라는 명분과 특정 상인집단의 이익 보호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민선 하원 설립 제안
황국협회의 활동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의회 설립에 관한 독자적인 제안을 했다는 점이다.
1898년 10월 12일 황국협회는 민선의원 설립의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 건백서는 일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의원을 직접 선출하는 하원(下院)을 설치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독립협회는 기존의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적 기능을 부여하려 했지만, 모든 백성들이 직접 참여하는 하원 설립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독립협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의 교육 수준과 정치적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하원 설립을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반면 황국협회는 보부상과 다양한 사회계층의 참여를 기반으로 민선 하원 설립을 제안했다.
의외로 황제권 강화를 주장하던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보다 폭넓은 민선 대표제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보다 민주적인 조직이었다는 증거로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당시 독립협회가 추진하던 중추원 개편은 개화파 지식인과 협회 회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반면 황국협회는 보부상 조직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더 넓은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의원을 선출하는 제도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있었다.
또한 황국협회의 제안은 황제권 강화를 지지한다는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 황국협회의 민선 하원 설립안은 황실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정치적 대립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독립협회와 의회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황국협회의 구도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독립협회와의 대립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
황국협회와 독립협회는 모두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고 정부의 재정과 외교, 인사 등에 대한 제도적 견제를 강화하려 했다.
특히 정부 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민중집회, 중추원 개편 등을 통해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에 민간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 했다.
반면 황국협회는 황제의 권위를 국가질서의 중심에 두고, 황실과 정부의 지원 아래 상업적 특권을 보호받는 체제를 지향했다.
특히 독립협회가 황제와 정부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의 지도부는 이를 황제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차이는 1898년 후반 독립협회가 본격적인 정치개혁 운동을 전개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관민공동회와 헌의 6조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정치개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 집회에는 독립협회 회원과 일반 시민뿐 아니라 일부 정부 관료들도 참여했다.
관민공동회에서는 국가의 자주독립과 재정의 투명성, 공개재판, 고위 관료 임명 절차의 개선 등을 요구하는 헌의 6조가 채택되었다.
또한 중추원을 의회적 성격의 기구로 개편해 정부의 정책 결정에 민간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다.
이러한 요구는 황제의 절대적인 권한을 유지하려던 보수파 관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독립협회가 정부의 인사권과 재정 운영, 외교정책에 대한 견제를 강화할 경우 황실 측근 관료들이 행사하던 권력 역시 제한될 수 있었다.
황국협회의 지도부는 이러한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화했다.
공화정 수립 음모설
1898년 11월 초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보수파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내용의 익명 문서를 유포했다.
이러한 주장은 독립협회 전체의 공식적인 정치적 목표와는 달랐으며, 독립협회를 공격하려는 무고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종은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소문에 강하게 반응했다.
결국 1898년 11월 4일 독립협회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17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11월 5일 독립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정부는 모든 협회를 해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므로 황국협회 역시 형식적으로는 해산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부상 조직은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보수파 관료들은 이들을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다시 활용했다.
만민공동회의 저항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자 서울 시민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구속자 석방과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집회에는 학생과 상인, 일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일부 시전상인들은 상점을 닫는 철시운동으로 만민공동회를 지원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부가 독립협회 지도부를 부당하게 체포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개혁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자가 증가하면서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결국 고종은 11월 10일 체포된 독립협회 지도부를 석방하고 일부 보수파 대신들을 해임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지도부의 석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복설과 헌의 6조의 실질적인 시행을 요구하면서 집회를 계속했다.
이에 보수파 관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황국협회의 보부상 조직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 습격 사건
보부상들의 동원
1898년 11월 중순부터 황국협회는 전국 각지의 보부상들을 서울로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11월 13일에는 보부상 일부가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충돌을 일으켰다.
이후 길영수가 13도 부상 도반수에 임명되어 보부상 조직을 지휘했으며, 이기동 등과 함께 집단적인 행동을 준비했다.
11월 16일부터는 보부상들이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만민공동회를 압박했다.
또한 황국협회의 홍종우 등은 만민공동회를 비난하는 서한을 전달하며 양측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1월 18일부터 19일 무렵에는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들이 수천 명 규모로 증가했다.
이들은 황실에 대한 충성과 독립협회에 대한 반대를 내세웠으며, 일부는 몽둥이 등으로 무장했다.
황국협회의 활동은 이 시점부터 일반적인 정치적 반대운동을 넘어 상대방 집회를 물리적으로 해산시키려는 행동으로 발전했다.
1898년 11월 21일
1898년 11월 21일 오전 10시경,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약 2,000명이 경운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을 공격했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정부로부터 집회의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군인과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부상들의 진격을 막아야 할 군경은 제대로 저지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관련 서술에 따르면, 당시 만민공동회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군인과 경찰은 황제의 지시를 받고 보부상들이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제대로 방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받았다.
보부상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집회 참가자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만민공동회는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다.
황국협회 측은 물리적인 공격을 통해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시민들의 반격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서울 시내에 퍼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커졌다.
이에 독립협회를 지지하던 시민들과 상인, 학생 등이 다시 모여 보부상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결국 보부상들은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서울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다시 개최되었다.
즉,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집회의 규모가 확대된 것이다.
보부상과 시민들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자 서울 시내의 치안 역시 크게 불안해졌다.
일부 시민들은 보수파 관료들을 직접 공격하거나 그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가 정치집회를 통제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고종의 약속
1898년 11월 23일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다시 발표했다.
그는 독립협회를 탄압한 일부 정부 고관과 황국협회의 주요 지도자들을 처벌하고, 보부상 조직을 혁파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정부의 인사와 행정 운영을 개선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일시적으로 집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부상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으며, 보수파 관료들 역시 황국협회를 활용한 정치적 압박을 계속했다.
특히 이용익을 비롯한 황실 측근 세력은 보부상 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며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따라서 정부의 약속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중추원 개편을 둘러싼 갈등
독립협회는 기존의 중추원을 의회적 성격을 가진 기구로 개편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에 민간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다.
당시 중추원 의관은 총 50명으로 구성하도록 계획되었으며, 이 가운데 절반을 정부가 임명하고 나머지 절반을 민간에서 선출하는 방식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실제로 새로운 중추원 의관 50명을 선임했을 때 독립협회 계열 인사는 17명에 불과했다.
반면 황국협회 계열 27명을 포함해 황제와 가까운 인사들이 전체 33명을 차지했다.
이는 독립협회가 기대했던 정치개혁의 취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립협회는 자신들이 추진했던 중추원 개편이 오히려 황제 측근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민공동회는 다시 정치개혁의 이행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 사건은 황국협회가 단순히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공격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식적인 정치기구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산
1898년 12월의 정치적 위기
1898년 12월 6일 만민공동회는 정부가 정치개혁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집회를 개최했다.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은 중추원을 통해 개혁적인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며, 정부의 주요 관직에 임명할 인물들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의 귀국과 정치적 복귀 문제가 등장했다.
박영효는 과거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파 정치인으로, 당시 고종에게는 정치적으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일부 세력이 박영효의 귀국을 추진하자 고종은 정치개혁 운동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정부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한 강경한 대응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군대를 동원한 강제 해산
1898년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서울에서는 집회와 정치활동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거나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12월 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는 조칙도 발표되었다.
결국 독립협회는 사실상 완전히 해산되었으며, 약 2년 6개월 동안 이어졌던 정치개혁 운동 역시 중단되었다.
그런데 독립협회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황국협회 역시 함께 해산되었다.
독립협회를 없애기 위해 황국협회를 동원했지만, 결국 황국협회도 같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동일한 이유로 탄압받은 것은 아니었다.
독립협회는 황제권을 견제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강제로 해산되었다.
반면 황국협회는 황실을 지지하던 조직이었지만, 정부가 정치집회와 민간단체 전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또한 황국협회의 지도부 가운데 일부는 이후에도 정부의 관직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직책에 임명되었다.
해산 이후
보부상 조직의 존속
황국협회가 해산되었다고 해서 보부상 조직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실과 보부상 사이의 관계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황국협회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길영수 등은 정부의 관직에 진출했으며, 보부상들의 상업적 권익을 보호하려는 활동 역시 계속되었다.
특히 대한제국 정부는 황국협회 해산 이후에도 보부상 조직을 국가의 관리 아래 두고 활용하려 했다.
이는 황국협회의 해산이 황실과 보부상 사이의 정치적·경제적 협력관계가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상무회사의 설립
1899년 3월 대한제국 정부는 상무회사를 설립했다.
상무회사는 황국협회 해산 이후 보부상들의 조직적인 활동을 이어받는 역할을 했다.
이후 보부상들은 정부의 지원 아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조직을 유지하려 했으며, 상무사와 관련된 조직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따라서 황국협회 자체는 1898년 말에 해산되었지만, 그 조직적 기반을 이루었던 보부상 세력은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독립협회와의 비교
| 구분 | 독립협회 | 황국협회 |
|---|---|---|
| 설립 | 1896년 7월 | 1898년 6월 |
| 주요 구성원 | 개화파 관료, 지식인, 학생, 상인 등 | 보부상, 황실파 관료, 일부 의병 출신 인물 등 |
| 주요 정치적 기반 | 민권 신장과 정치개혁 | 황제권 강화와 황실 옹호 |
| 경제적 관심 | 외국의 이권 침탈 방지, 국가 경제의 발전 | 보부상 조직의 권익 보호, 상업적 특권 회복 |
| 의회 설립 |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적 기구 도입 | 민선 하원 설립안 제안 |
| 주요 활동 | 독립문 건립, 토론회, 만민공동회, 헌의 6조 | 황실 경축행사, 보부상 조직 활동, 만민공동회 공격 |
| 정부와의 관계 | 초기 협력 후 대립 | 황실과 밀접한 협력관계 |
| 해산 | 1898년 12월 | 1898년 12월 |
두 단체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권력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었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정책 결정에 민간의 의견을 반영하고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려 했다.
반면 황국협회는 황제를 국가질서의 중심에 두고 황실과 보부상 조직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모든 면에서 현대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황국협회가 어떠한 정치개혁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황국협회는 1898년 10월 민선 하원 설립안을 제안했으며, 독립협회는 일반 백성의 직접적인 하원 선거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두 단체의 차이는 단순히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의 대립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적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이 황제권과 국민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조정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황국중앙총상회와의 차이
황국협회는 이름이 비슷한 황국중앙총상회와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단체는 구성원과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달랐다.
황국협회는 주로 전국적인 보부상 조직을 기반으로 한 친황실 정치·경제단체였다.
반면 황국중앙총상회는 1898년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상업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였다.
황국중앙총상회는 외국 상인들의 국내 시장 진출에 대응하고 상권을 보호하려 했으며, 독립협회와 협력해 연좌제 부활 반대와 정치개혁 운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1898년 독립협회 지도부가 체포되었을 때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충돌했을 때에는 독립협회 측을 지원했다.
| 구분 | 황국협회 | 황국중앙총상회 |
|---|---|---|
| 주요 구성원 | 보부상 | 시전상인 |
| 주요 목적 | 황실 옹호, 보부상 권익 보호 | 국내 상권 보호, 외국 상인의 침투 대응 |
| 정치적 입장 | 친황실, 독립협회 견제 | 독립협회와 협력 |
| 1898년 만민공동회 | 충돌과 공격 | 독립협회 측 지원 |
이름은 둘 다 황국으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대립하는 편에 섰던 것이다.
따라서 황국협회와 황국중앙총상회를 같은 조직으로 취급하거나, 당시 상인들이 모두 독립협회에 반대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역사적 평가
어용단체로서의 성격
황국협회는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황실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어용단체로 분류된다.
특히 황국협회의 지도부는 고종의 측근 관료들로 구성되었으며, 황제가 직접 간부 일부를 임명하고 운영 경비를 지원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1898년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을 견제하고 만민공동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을 조직했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에 동원된 단체라는 평가가 제기된다.
다만 황국협회의 일반 회원이었던 보부상들 모두가 처음부터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직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보부상들에게는 상업적 특권과 조직의 회복이라는 현실적인 경제적 목적이 있었으며, 황실과의 협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황국협회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황실파 관료들의 정치적 목적과 보부상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부상의 정치적 동원
황국협회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보부상 조직이 국가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된 사례를 보여준다.
보부상들은 전국 각지의 장시를 연결하는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부 규율과 지휘체계를 통해 상당한 인원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적 능력은 상업활동뿐 아니라 군사적·정치적인 집단행동에도 활용될 수 있었다.
특히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공격은 기존의 상인조직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인 행동에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이다.
그러나 보부상들의 정치적 활동을 황국협회의 행동만으로 일반화하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한다.
보부상들은 서로 다른 지역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든 상인이 언제나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정치적 모순
황국협회의 활동은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황제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가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강조했으며, 군사와 산업,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의 정치적 권한을 제한하거나 정부의 의사결정에 민간이 참여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독립협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황실과 보수파 관료들은 황국협회를 통해 이를 견제했으며, 결국 만민공동회에 대한 무력 공격과 강제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건은 근대적인 국가제도의 도입과 정치적인 자유의 확대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의회 설립안의 의미
황국협회의 민선 하원 설립안은 이 단체를 단순한 반개혁 조직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더 넓은 계층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기득권에 속한 개화파 지식인들이 독점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를 비판하는 논리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으며, 황실과 정부 역시 민선 하원 설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황국협회는 이후 만민공동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에 참여했으므로, 하원 설립안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 전체 활동을 민주적인 운동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당시 정치세력들이 국민의 정치 참여라는 개념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활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해산 이후의 영향
황국협회는 1898년 말 해산되었지만, 그 지도부와 보부상 조직은 이후에도 국가권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1899년 상무회사의 설립은 보부상 조직이 황국협회의 해산 이후에도 국가의 보호 아래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독립협회는 해산 이후 조직적인 정치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워졌으며, 중추원 개편과 의회 설립 운동도 중단되었다.
따라서 두 단체가 모두 해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맞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황국협회의 해산은 보부상들의 조직적인 활동을 완전히 금지한 조치가 아니었지만, 독립협회의 해산은 당시 진행되던 정치개혁 운동의 중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담
- 이름 때문에 독립협회와 비슷한 단체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을 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황국협회의 초대 회장은 정낙용이며, 이기동은 초대 부회장이었다. 이후 정낙용이 사임하면서 이기동이 회장으로 활동했다.
- 황태자가 운영 경비로 1,000원을 하사했으며, 임원 107명 가운데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간부였다. 민간단체였지만 황실과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던 것이다.
- 황국협회의 창립과 운영을 주도한 홍종우, 길영수, 이기동 세 사람은 당시 세간에서 이름의 일부를 따 홍길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명한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지만, 이들이 활동한 방식은 소설 속 홍길동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 황국협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홍종우는 1894년 일본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 황국협회의 일반 회원은 주로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상업적 권익을 유지하려 했고, 정부는 이들의 조직력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 황국협회는 국가의 부강과 문명개화를 주장했으며, 황제의 생일과 즉위일 등 경축일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행사를 개최했다.
- 황국협회는 1898년 10월 민선 하원 설립안을 제안했다. 의외로 독립협회가 추진한 중추원 개편보다 폭넓은 민선 대표제를 주장한 셈이지만, 이 제안은 황실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898년 11월 21일 보부상 약 2,000명이 몽둥이로 무장하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대규모로 반격하면서 보부상들은 오히려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
- 만민공동회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집회 참가자가 더욱 증가했다. 상대방의 집회를 해산시키려던 행동이 오히려 정치적 저항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고종은 1898년 11월 황국협회 지도부를 처벌하고 보부상 조직을 혁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에도 보부상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 정부가 중추원 의관 50명을 새로 선임했을 때 독립협회 계열은 17명에 불과했고, 황국협회 계열을 포함한 황제 측근 세력은 33명을 차지했다.
-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에 반대했지만, 이름이 비슷한 황국중앙총상회는 독립협회와 협력했다. 당시 상인조직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될 때 황국협회 역시 함께 해산되었다. 다만 주요 지도자들은 정부의 관직을 유지하거나 새롭게 임명되었고, 보부상 조직도 1899년 상무회사 설립을 통해 활동을 이어갔다.
- 황국협회의 사례는 정치권력이 기존의 경제적 이익집단을 동원해 반대 세력의 활동을 견제하는 방식이 대한제국 시기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