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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문관이자 개화파 관료, 항일 우국지사이다. 본관은 여흥 민씨이며 명성황후와 같은 척족 가문 출신이다.

대한제국의 문관.

젊은 시절에는 여흥 민씨 척족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초고속 승진한 권력 핵심부 인사였지만, 해외 사행을 통해 서구의 제도와 군사·산업을 직접 본 뒤 개혁론자로 성향이 크게 변했다. 말년에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지원하고 교육·군제 개혁을 주장했으며,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이에 항의해 자결했다.[1]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2]

탐관오리란 주장에 대한 반박

애비새끼가 조선의 상병신성 증명한 임오군란 원인을 만든 탐관오리 민겸호다.

참고로 민영환의 생부는 민겸호이고,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즉 혈통상으로는 민겸호의 아들이 맞지만 족보상으로는 민태호의 아들이 되었다.

연좌제의 나라 개조선 아니랄까 봐 단순히 탐관오리의 아들이란 이유로 백성들에게 미움받았다.

심지어 전봉준이 봉기할때 공표한 부패관료 블랙리스트 중 하나다.

이건 실제 기록이 있다. 전봉준은 1894년 봉기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민영준·민영환·고영근 등을 탐학한 관리로 지목했다. 따라서 당시 민영환이 백성들에게 단순히 "애비 때문에"만 미움받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3]

다만 이것만으로 민영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수탈이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까지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민영환이 당시 대표적인 여흥 민씨 척족이자 빠른 승진으로 권력 핵심에 들어간 인물이었기 때문에 척족정치 전체에 대한 반감이 투영됐을 가능성도 같이 봐야 한다. 실제로 후대 연구에서도 그가 진짜 오리였을 가능성과 척신의 상징이어서 지목됐을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는다.

이 탓에 지 친척인 민자영처럼 타이밍좋게 죽어서 미화된 놈이란 말도 있다...는 ㅅㅂ 개지랄

세도가문인 여흥민씨란 이유만으로 탐관오리일 거란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조선 왕가가 병신이라고 세종대왕까지 병신일 거란 개소리랑 동급이다

민영환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진정한 충신이었다.

백성들한테 미움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탐관오리였을 거란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최고 반례로는 바로 김홍집이 있다.

이분은 심지어 백성들한테 맞아죽었다.

아니, 그럼 김홍집은 한명회, 김자점, 이완용 뺨치는 조선의 최고 간신이란 말인가?

아무튼 민영환은 이괄 뺨칠 정도로 진급이 엄청나게 빨랐는데, 20대에 호조판서, 병조판서 모두 꿰차고 30대 초에는 형조판서까지 꿰차게 된다.

실제로 1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20세에 동부승지, 22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1887년 호조판서, 1888년 병조판서, 1893년 형조판서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출세속도가 존나 빠른 편이었다.[4]

이분은 지금으로 치면 20대~30대 초 나이대인 기재부장관, 국방부장관, 법무부장관이나 다름없다.

사실 이런 요직을 다 차지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친척이자 온건개화파의 영수였던 민영익이 정쟁에서 밀려난 이후 그 포지션을 대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여흥 민씨 척족이라는 배경이 출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민영환을 무슨 흙수저 능력주의 관료처럼 볼 인물은 절대 아니다. 문제는 척족 낙하산으로 출세했다실제로 지방 백성을 수탈한 탐관오리였다는 서로 다른 주장이라는 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 때부터 정부의 요직 다 해드시며 중앙에서 뺑뺑이 돌았는데, 과연 백성들을 괴롭힐 뭔 껀덕지가 나올진 의문이다.

당장 동학농민운동의 트리거였던 조병갑만 하더라도 지방의 수령인 고부군수였다.

그래도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고을 수령이어야 뭔가 백성들 괴롭혀서 해먹을 껀덕지가 나온다.

근데 상술했듯 민영환은 쪽쪽이 떼고 걸음마할 때부터 이미 중앙 관료가 되어 노예로 구르고 있었다.

물론 지 애비도 중앙의 관료이면서 해먹은 케이스긴 하지만... 애초에 그 새낀 뭘 해먹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잖아?

근데 민영환은 딱히 뭘 해먹었단 기록이 없다.

근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민영환이 탐관오리란 건지;

차라리 애새끼 때부터 요직 다 해드셨다고 세도정치 낙하산인사라고 까는 거면 모를까

정리하면 민영환의 초기 정치경력에 대한 비판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척족의 핵심 인물로 엄청난 특혜를 누렸고 동학농민군에게 실제로 규탄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 놓고 보면 조병갑처럼 특정 지방에서 무슨 세금을 뜯고 무슨 재산을 착복했다는 식의 구체적인 부패 행적은 상대적으로 뚜렷하지 않다. 후대에 평가가 크게 달라진 가장 큰 이유도 이후 민영환이 기존 척족들과 상당히 다른 개혁 노선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화 운동

여흥 민씨가 대부분 그랬듯이 친러파, 온건개화파였다.

그렇다고 고좆이나 민비마냥 러시아한테 이거 퍼주고 저거 퍼주고 다 퍼주는 호구새끼였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민영환이 친러스탠스였던 건 오직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누가봐도 일본은 강한 나라고 대놓고 조선을 삼키려는 게 눈에 보이는데 나름 일본 견제할 강대국을 끌어들인답시고 찾아낸 게 러시아란 얘기다.

민영환의 생각이 크게 바뀐 계기는 해외 사행이었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되어 러시아와 유럽을 돌아봤고, 이후에도 서구 여러 나라를 직접 경험하면서 근대식 군사제도와 교육, 산업시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이 해외 경험 이후 민영환이 국가 중흥을 위한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5]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민영환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건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 맞긴 하다.

결국 외세만 더 늘어난 셈이니까.

그런데도 민영환은 당시의 썩어빠진 친러파들이랑 분명히 달랐다.

당시의 친러파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전제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의사도 무시하고 무리하게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지만,

민영환은 순수하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에 손 벌리며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민영환은 대깨러가 아니었다.

미국이라도 끌어들여 독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친미로 갈아탔을 사람이었다.

민영환의 외교노선을 친러 하나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시 대한제국이 단독으로 일본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 미국 등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쪽에 가깝다.

애초에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막기 위해 이승만을 밀사로 파견한 사람이다.

이 부분은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다. 1905년 이승만이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민영환 개인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막기 위해 밀사로 파견했다'고 단순화하면 당시 여러 인물의 외교활동이 섞일 수 있다. 다만 민영환이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계열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민영환과 다른 친러파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친러파 온건개화파들은 애초에 정치 체제를 바꾸는 데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외래 문물의 본질적 가치에 주목한 것이 아닌, 외래 문물들을 단순히 강력한 신무기, 신기한 사치품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민영환은 달랐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성향 조직이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최대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1898년 새로운 개혁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무기명 투표로 뽑은 11명의 대신 후보에도 민영환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추진한 방향 가운데 하나가 중추원을 의회 비슷하게 개편해 전제군주제를 사실상의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것이었다.[6]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론 입헌군주제를 생각하고 있었고, 필요하기만 하다면 공화정까지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공화정까지 생각했다는 부분은 직접적인 근거가 확인되는 주장은 아니다. 민영환이 민권 신장과 독립협회를 지지한 개혁파였던 것은 확인되지만, 황제를 없애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고까지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류 역시 기본적으로는 황제권을 인정하면서 의회와 법률로 제한하는 입헌군주제적 개혁을 추구했다.

즉 청나라 말기에 비유하자면, 다른 친러파들이 양무운동을 하고 있었다면 민영환은 변법자강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독립협회의 이승만이 조선 정부에 의해 모가지가 따일 위기에 처하자, 한규설과 함께 적극적으로 구명해서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이승만의 목숨을 구했다.

런승만이라 까이긴 해도, 이승만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자.

이순신 구해낸 거 원툴로 지금까지 영웅으로 추앙받는 정탁처럼 민영환도 이승만을 구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후대에 두고두고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위인이다.

이게 바로 민영환이 단순히 자기 권력 보전하려고 온갖 똥꼬쑈를 하던 당시의 조선의 썩어빠진 친러파들이랑 분명히 다르다는 씹증거다.

나라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뭐든 했을 사람이고 자기 목숨까지 던질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켜내지 못하자 진짜로 목숨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고좆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후원하던 민영환이 무사할 리는 없단 게 불 보듯 뻔한 일...

사실 민영환 본인도 문제였는데, 겁도 없이 고좆에게 서구를 본받자며 민권 신장과 입헌군주제를 건의하기까지 한다.

결국 고좆 후빨 매국조직이던 황국협회에 의해 탄핵당해 실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후 완전히 정치판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영환은 다시 여러 관직에 기용되었고 군제개혁에도 참여했다. 또한 사립학교인 흥화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고 1905년 국민교육회에도 재정지원을 하는 등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도 관여했다.[7]

실패한 독립 운동, 그리고 자결

위에서 말했듯이 민영환과 한규설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방해하기 위해 이승만을 밀사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우린 알고 있겠지만 결과는...

그리고 진짜 안타까운 점이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 민영환이 공화주의자로 몰려 정치적 파워를 잃는 바람에 을사조약 체결 당시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규설 혼자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고 5:1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진 RG?

결국 을사조약을 막지 못, 아니 아예 막아볼 기회조차 없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잃는 장면을 자기 집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자리에 민영환만 있었더라도...

결국 개빡친 민영환은 여러 뜻있는 관료들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를 수차례 올리지만...

일본 헌병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고 개같이 실패하고 만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의 폐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본의 압박으로 저항 자체가 봉쇄되었다.[8]

뭘 해볼 만한 팔다리 다 잘리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나라의 멸망마저 막지 못한 민영환은 결국 저승에서 응원할테니 모두 독립을 위해 힘내라고 하고 자살했다.

정확한 날짜는 1905년 11월 30일이다. 의관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스스로 목을 찔러 순국했다. 당시 나이 44세였다.[9]

민영환은 죽기 전 황제와 국민, 그리고 각국 공사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했다. 국민에게 남긴 글에서는 자신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지하에서 국민을 도울 것이니 동포들이 뜻을 합쳐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의 자결은 당시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여러 관료와 지식인들의 순국 및 항일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나라를 망친 것를 사죄한답시고 자살하거나 용서를 구한 고위층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완전히 유일했던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직후 조병세도 자결했고, 이후에도 홍만식 등 여러 인물이 자결로 항거했다. 다만 민영환이 대한제국 최고위급 관료 가운데 대표적인 자결 순국자로 기억되는 것은 맞다.

독립운동이라도 해보지 왜 그냥 죽었냐는 이상한 말이 떠도는데,

민영환 정도의 위치의 사람은 자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 역시 민영환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당시 조선의 고위층은 나라가 뺏기니 전부 일본의 귀족으로 갈아탔다.

애초에 나라를 지킬 마음이 없고 일신의 부귀영화 지키기에만 급급했다는 뜻이다.

즉 일본 입장에선 조선 정부가 스스로 원해서 나라를 갖다바쳤다!고 홍보가 가능하단 뜻이다. 솔직히 이건 팩트 아닌가?

하지만 민영환과 한규설은 달랐다.

민영환은 아예 자결했고, 한규설은 일본의 작위를 끝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가 스스로 나라를 갖다바쳤다는 주장의 반례인 셈이다.

민영환은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별짓을 다해봤고, 결국 무슨 수를 써도 먹히지 않고 결국에 남게 된 건 몸뚱아리 하나뿐인데,

최후엔 그 몸뚱아리의 목숨까지 끊어서 민영환급 고위 인사가 한일병합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자결했다!라는 한 줄의 기사로 남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시점을 구분해야 한다. 민영환은 1910년 한일병합에 항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것에 항의해 자결했다. 한일병합은 그로부터 약 5년 뒤의 일이다.

아무튼 나름대로 마지막 수단까지 동원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얘기이다.

근데 ㅅㅂ 이런 거랑 별개로 그냥 나라 멸망 못 막은 거 책임 지고 백성들에게 사죄한답시고 자결한 것만으로 충분히 대단한 거 아니냐?

개센징 중에 지 잘못인 것조차 책임 안 지는 새끼가 수두룩한데 말이지

자결 이후

자택에서 자결한 직후 그 시신이 누워있던 마룻바닥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정확히는 자결 직후 바로 자란 것은 아니다. 1906년 7월, 민영환이 자결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보관해 두었던 마루방에서 네 줄기의 대나무가 발견되었다. 자결 약 7개월 뒤의 일이다.[10]

그냥 정몽주와 비슷한 케이스의 우국충정을 상징하는 썰 비스무리하다 느껴지겠지만 진짜 당시의 사진이랑 당시의 대나무가 전해지고 있단 게 문제

이른바 혈죽(血竹)이라고 부른다. 1906년 7월 15일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쿠다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도 남아 있기 때문에 적어도 당시 실제로 대나무 비슷한 식물이 그 방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된다.[11]

한옥의 마룻바닥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나무가 도저히 자랄 수 없는 환경이다

대나무는 지상의 나무보다 땅 속의 뿌리가 훨씬 큰데, 마룻바닥의 틈새는 흙이 쌓여봤자 잔디풀이 조금 자랄까 말까 한 정도이다

말 그대로 당대의 미스터리였다는 얘기

일본에선 당연히 이 대나무 사건이 백성들의 반일정신을 고취시킬 거라며 뽑아버렸지만,

골 때리게도 그 대나무엔 뿌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는 실제로 고대박물관에 전시되고 있고 실제로 뿌리가 없다.

현재 혈죽 자료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민영환의 피에서 실제로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초자연적인 설명까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당시부터 민영환의 충절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사진과 실물이 남으면서 일종의 우국충정 상징물이 된 것이다.

평가

민영환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한 줄로 정리하기 어렵다. 젊은 시절만 보면 대표적인 여흥 민씨 척족으로 엄청난 출세 특혜를 누렸고 실제로 동학농민군에게 탐관오리로 지목되기도 했다. 반면 18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군제·교육·정치개혁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존 척족 정치인들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원하고 민권 신장에 호의적이었던 점, 교육사업을 후원한 점,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뒤 목숨까지 던진 점 때문에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단순한 척족 관료보다는 후기에 스스로 변화한 개혁관료이자 우국지사라는 평가가 강하다.[12]

서울 충정로의 이름도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공(忠正公)에서 따온 것이다.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