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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은 1993년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맺은 일련의 평화 협정이다. 정식으로는 1993년의 잠정 자치에 관한 원칙 선언이 핵심이며, 보통 오슬로 I 협정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오슬로 협정인데 실제 서명식은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렸다. 협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보면 북유럽 감성 평화 프로젝트 같은데, 현실은 중동 현대사의 오래된 지뢰밭 위에 얇은 카펫 한 장 깐 수준이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스라엘과 PLO가 처음으로 서로를 협상 상대로 인정했지만, 진짜 어려운 문제는 미래의 자신들에게 던져버린 협정.

개요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즉 PLO가 서로를 협상 상대로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 체제를 만들기로 한 협정이다.

이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만들어졌고, 가자 지구요르단강 서안 지구 일부에서 제한적 자치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드디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도 끝나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협정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바로 만든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 난민 귀환권, 유대인 정착촌, 최종 국경, 안보 통제 문제를 확정한 것도 아니었다. 제일 어려운 문제는 전부 나중으로 미룬 것이다.

즉 오슬로 협정은 평화의 완성이라기보다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이 프로세스가 나중에 거의 무한 로딩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배경

제1차 인티파다

1987년부터 제1차 인티파다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서 대규모 봉기와 시위를 벌였고, 이스라엘은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양쪽 모두에게 피곤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계속 군사적으로만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팔레스타인 쪽도 무장투쟁과 봉기만으로 독립국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둘 다 지쳐 있었다. 그리고 국제정치에서 지침은 가끔 협상의 어머니가 된다.

PLO의 위기

PLO는 한때 요르단레바논을 거점으로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검은 9월 이후 요르단에서 쫓겨났고,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 레바논에서도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걸프 전쟁 당시 PLO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우호적으로 보이면서 걸프 산유국들의 지원도 줄어들었다. 돈도 줄고, 거점도 흔들리고, 외교적 입지도 약해졌다.

PLO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언젠가 무장투쟁으로 다 해결한다”는 그림이 잘 안 나왔다. 그래서 협상 테이블로 나올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계산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PLO와의 협상은 위험하지만 필요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계속 방치하면 점령지 통치 비용과 국제적 비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PLO를 협상 파트너로 끌어들이면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세속 민족주의 조직인 PLO를 상대하는 편이, 이슬람주의 무장조직과 끝없이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본 것이다.

결국 양쪽 모두 사랑과 평화의 감동 드라마를 찍으려고 만난 게 아니다. 서로 답이 없어서 만난 것이다. 국제정치의 로맨스는 대체로 계산기에서 시작된다.

비밀 협상

오슬로 협상은 공식 외교 채널이 아니라 노르웨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스라엘과 PLO 관계자들이 물밑에서 접촉했고, 노르웨이 측이 중재와 장소 제공 역할을 했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의 핵심 인물은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였다.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의 지도자로 협정을 승인했다.

협정문에 직접 서명한 인물은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PLO 협상가 마흐무드 압바스였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라빈과 아라파트가 악수하는 장면이 워낙 유명해서, 마치 두 사람이 서명한 것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역사도 결국 썸네일 싸움이다.

상호 인정

오슬로 협정의 핵심은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인정이었다.

PLO는 이스라엘의 평화적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대표로 인정했다.

이건 엄청난 변화였다. 그전까지 이스라엘은 PLO를 테러조직으로 보았고,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다. 서로를 지도에서 지우려던 관계에서, 최소한 “너랑 말은 해보겠다” 수준으로 온 것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함정이 있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대표로 인정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를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차이가 나중에 큰 문제가 된다.

주요 내용

오슬로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기에는 그럴듯하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전부 “나중에 최종 지위 협상에서 해결”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집 계약하면서 가격, 소유권, 대출, 입주일, 하자보수는 나중에 정하자고 한 것과 비슷하다. 분위기는 좋았겠지만, 실무자는 뒷목 잡았을 것이다.

오슬로 I 협정

1993년 체결된 오슬로 I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의 큰 틀을 정했다. 공식 명칭은 잠정 자치에 관한 원칙 선언이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가 임시 단계이며, 이후 최종 지위 협상을 통해 영구적 해결로 나아간다는 구조였다. 임시 기간은 대략 5년을 상정했다.

하지만 중동에서 “임시”라는 말은 자주 영구화된다. 오슬로 체제도 그랬다. 임시 자치기구였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계속 남았고, 최종 평화협정은 나오지 않았다.

오슬로 II 협정

1995년에는 오슬로 II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A, B, C 구역으로 나누었다.

  • A구역: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민정과 치안을 담당
  • B구역: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민정을 담당하고, 이스라엘이 안보 권한을 보유
  • C구역: 이스라엘이 민정과 안보를 통제

이 구조는 지금까지도 서안 지구 문제의 핵심 중 하나다. 특히 C구역은 면적이 넓고 정착촌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오슬로 II는 행정적으로는 체계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 영토를 조각조각 나눈 구조를 굳히는 결과도 낳았다. 자치라고는 하는데 지도를 보면 치즈에 구멍 난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탄생

오슬로 협정의 직접적 결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만들어졌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망명지에서 돌아와 가자와 서안 일부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큰 사건이었다.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인이 자기 이름을 건 행정기구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치정부는 완전한 국가가 아니었다. 국경, 영공, 군사, 외교, 안보, 세관 등 핵심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이름은 정부인데, 현실은 반쯤 묶인 행정사무소에 가까웠다.

노벨평화상

1994년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라빈과 아라파트의 악수 장면은 당시 평화의 상징처럼 소비되었다. 하지만 훗날 전개를 보면 그 장면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시즌 중반 예고편에 가까웠다.

평화상까지 받았는데 평화가 안 왔다. 이상한 일 같지만, 사실 국제정치에서는 꽤 흔하다. 상은 희망에 주고, 현실은 청구서를 따로 보낸다.

반대와 갈등

오슬로 협정은 양쪽 모두에서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스라엘 우파와 정착민 세력은 PLO와의 협상을 위험한 양보로 보았다. 그들에게 PLO는 테러조직이었고,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는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위협이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 강경파와 하마스는 PLO가 이스라엘을 인정한 것을 배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오슬로 협정이 진짜 독립국가를 보장하지 않고, 점령을 다른 이름으로 관리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보면 오슬로 협정은 양쪽 온건파가 만든 합의였지만, 양쪽 강경파에게는 모두 욕먹는 합의였다. 평화 프로세스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거다. 평화는 박수보다 암살 위협을 먼저 부르는 경우가 있다.

라빈 암살

1995년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은 이스라엘 극우 성향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라빈의 오슬로 협정 추진에 반대했다.

라빈 암살은 오슬로 프로세스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평화협정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 권위가 크게 약해졌다.

이 사건은 오슬로 협정의 비극성을 상징한다. 전쟁 상대와 악수한 지도자가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죽은 것이다. 중동 평화의 적은 국경 밖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실패 원인

오슬로 협정이 실패하거나 최소한 기대만큼 작동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최종 문제를 미룸

가장 큰 문제는 핵심 쟁점을 뒤로 미룬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 정착촌, 최종 국경, 안보 통제 같은 문제는 전부 나중에 협상하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제들이 분쟁의 핵심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미뤘더니, 미룬 문제가 나중에 더 커져서 돌아왔다. 빚을 카드 리볼빙으로 넘긴 꼴이다.

정착촌 확대

오슬로 이후에도 서안 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는 계속 커졌다. 팔레스타인 측은 이것을 협정 정신 위반으로 보았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안보와 역사적 권리를 주장했지만,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독립국가가 될 땅이 계속 조각나는 것처럼 보였다. 평화협정을 하면서 동시에 땅 위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셈이다.

테러와 보복

오슬로 이후에도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 등의 테러 공격이 이어졌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팔레스타인과 협상해도 테러는 계속된다”는 불신이 커졌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과 통제, 봉쇄, 검문, 정착촌 확대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분노를 키웠다. 서로가 서로의 강경파를 키워주는 악순환이었다.

자치정부의 부패와 무능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문제였다. 부패, 권위주의, 계파정치, 낮은 행정능력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망을 키웠다.

PLO와 파타 중심의 자치정부가 제대로 된 국가 건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하마스 같은 세력이 “저놈들 협상해서 얻은 게 뭐냐”고 치고 올라올 공간이 생겼다.

제2차 인티파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실패하고, 곧 제2차 인티파다가 벌어졌다. 이는 오슬로 프로세스가 사실상 붕괴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제2차 인티파다는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불신을 남겼다. 이스라엘 사회는 팔레스타인 자치가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테러와 폭력을 키웠다고 보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사회는 오슬로가 독립이 아니라 점령의 관리였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후 평화 프로세스라는 말은 계속 나왔지만, 오슬로 시절의 낙관론은 거의 사라졌다.

평가

긍정적 평가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PLO가 서로를 공식 협상 상대로 인정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는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관계였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또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만들어지면서 팔레스타인인이 제한적이나마 자기 행정기구를 갖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단순한 난민 문제나 테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수립 문제로 국제정치의 중심에 올라왔다.

부정적 평가

하지만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보장하지 않았다. 핵심 쟁점은 뒤로 미뤘고, 그 사이 정착촌은 커졌으며, 자치정부는 완전한 주권을 갖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비판자들은 오슬로 협정이 점령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점령을 외주화했다고 본다. 즉 이스라엘이 직접 통치하던 일부 부담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넘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스라엘 비판자들은 반대로 오슬로가 테러를 줄이지 못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본다.

양쪽 모두 “우리가 속았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협정이 성공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종합

오슬로 협정은 실패한 평화협정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큰 변화를 만들었고, 성공한 평화협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를 남겼다.

가장 정확히 말하면,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끝낸 협정이 아니라, 분쟁을 관리하는 새로운 틀을 만든 협정이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평화의 문을 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복잡한 복도 입구였던 협정.

의의

오슬로 협정의 가장 큰 의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상호 인정의 틀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PLO를 테러조직으로 취급했고, PLO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슬로 이후 양쪽은 최소한 협상 테이블에서 서로를 상대해야 하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슬로는 최종 해결이 아니라 임시 구조였다. 그리고 임시 구조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서, 이제는 그 임시성이 오히려 분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여담

  • 이름은 오슬로 협정이지만, 1993년 공식 서명식은 미국 백악관에서 열렸다.
  • 백악관 잔디밭에서 이츠하크 라빈야세르 아라파트가 악수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하다.
  • 협정에 직접 서명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와 PLO의 마흐무드 압바스였다.
  •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명확히 보장하지 않았다.
  • 하마스는 오슬로 협정에 반대했다.
  • 이츠하크 라빈은 오슬로 협정 추진 이후 이스라엘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 오슬로 체제의 산물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지금도 팔레스타인 정치의 핵심 행위자이지만, 대표성과 실효성 논란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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