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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해방기구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들의 연합체이다. 영어 약칭은 PLO이다. 아랍어로는 문자맛 알타흐리르 알필라스티니야 정도로 부른다.

1964년에 창설되었으며,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대표 조직 역할을 했다. 좋게 말하면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외교 창구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때 항공기 납치와 무장투쟁 이미지가 진하게 묻은 조직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총 들고 시작해서, 외교관 명찰 달고, 아직도 애매하게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대표 브랜드.

개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여러 팔레스타인 정치·무장 조직을 묶은 우산조직이다. 대표 세력은 파타이며, 그 외에도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 등 여러 계파가 참여했다.

PLO는 팔레스타인인의 민족자결권과 독립국가 수립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무장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서방권에서는 오랫동안 테러조직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PLO는 무장투쟁만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외교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동 정치판에서 총만 믿고 가면 끝까지 총알받이만 된다는 걸 몸으로 배운 셈이다.

창설

PLO는 1964년에 창설되었다. 당시 아랍연맹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관리하고 대표할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초기 PLO는 완전히 독자적인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이라기보다는 아랍 국가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직에 가까웠다. 쉽게 말해 “팔레스타인 대표 조직”이긴 한데, 주변 아랍 국가들이 리모컨을 좀 쥐고 있던 상태였다.

초대 의장은 아흐마드 슈케이리였다. 하지만 PLO가 진짜 팔레스타인 대중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였다.

1967년 이후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장악했다.

아랍 국가들이 “우리가 팔레스타인 해방해줄게”라고 하다가 대차게 털린 것이다. 이 패배 이후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는 “남들이 우리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길 기다리면 답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때부터 PLO 안에서 파타야세르 아라파트의 영향력이 커졌다.

야세르 아라파트 시대

야세르 아라파트는 1969년 PLO 의장이 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아라파트는 늘 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체크무늬 케피예를 두른 모습으로 유명했다. 이미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모르는 사람도 아라파트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라파트의 평가는 매우 갈린다. 지지자들에게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상징이고, 반대자들에게는 테러와 부패, 실패한 지도력의 상징이다. 중동에서 한 사람 평가가 깔끔하게 갈릴 리가 없다.

무장투쟁

PLO는 초기부터 무장투쟁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공격, 국경 침투, 해외 작전 등이 벌어졌다.

특히 1960~1970년대에는 항공기 납치, 인질극, 해외 테러 사건 등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들과 연결되면서 PLO 전체 이미지가 크게 악화되었다.

물론 PLO 안에는 여러 조직이 있었고, 모든 작전이 PLO 본부의 일사불란한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냥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 PLO”로 묶여 보였다. 브랜드 관리가 완전히 망한 케이스다.

요르단과 검은 9월

PLO는 한때 요르단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문제는 PLO가 요르단 안에서 너무 커졌다는 점이다.

요르단 왕실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자기 나라 안에서 국가 안의 국가처럼 구는 것이 매우 위험했다. 결국 1970년 검은 9월 사건이 벌어졌고, 요르단군은 PLO를 강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 이후 PLO는 요르단에서 쫓겨나 레바논으로 이동했다. 중동 현대사에서 “쫓겨난 조직이 다른 나라 가서 또 문제를 키우는” 패턴이 여기서도 나온다.

레바논 시기

PLO는 1970년대 이후 레바논, 특히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레바논은 이미 종파 갈등과 정치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PLO까지 들어오면서 레바논 정치는 더 복잡해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무슬림 세력, 시리아, 이스라엘이 다 얽히며 나라가 중동식 믹서기에 갈렸다.

PLO는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공격을 계속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안보 위협으로 보았다.

레바논 전쟁

1982년 이스라엘은 PLO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 전쟁을 벌였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메나헴 베긴, 국방장관은 아리엘 샤론이었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를 넘어 베이루트까지 진격했고, 결국 PLO 지도부는 레바논을 떠나 튀니지로 이동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 훗날 헤즈볼라가 성장했다. PLO 잡으러 갔다가 더 질긴 상대를 만들어낸 셈이다. 국제정치의 업보 시스템은 꽤 성실하다.

국제적 승인

1974년 PLO는 아랍권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 대표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 유엔에서도 팔레스타인 대표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다.

이 시점부터 PLO는 단순한 무장조직이 아니라 국제 외교무대의 플레이어가 되었다. 총 들고 산에서만 뛰어다니던 조직이 양복 입고 유엔 회의장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유엔 연설에서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왔다는 식의 상징적 표현을 남겼다. 물론 실제로 회의장에 총 들고 들어간 건 아니고, 메시지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대충 “평화도 할 수 있는데, 싸울 수도 있다”는 협박 반 청원 반 세트 메뉴였다.

오슬로 협정

1993년 PLO는 이스라엘과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대표로 인정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큰 전환점이었다. PLO가 “이스라엘을 없애겠다”는 노선에서 “이스라엘과 협상해 팔레스타인 자치와 국가 수립으로 가겠다”는 노선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만들어졌고, 아라파트는 가자와 서안 일부 지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슬로 협정은 최종 해결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문제, 정착촌 문제, 난민 귀환권, 국경, 안보 통제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화 프로세스는 이름은 평화인데 실제로는 지뢰밭 산책에 가까웠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관계

오슬로 협정 이후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행정기구이고, PLO는 국제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이 둘이 현실에서는 인물과 권력구조가 겹친다는 점이다. 특히 아라파트 시기에는 PLO, 파타, 자치정부가 사실상 한 덩어리처럼 굴러갔다.

이 구조는 팔레스타인 정치의 대표성 문제를 낳았다. 선거, 계파, 부패, 무장조직, 외교대표권이 뒤엉키면서 “누가 진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냐”는 질문이 계속 남았다.

하마스와의 관계

하마스는 PLO와 다르다. 하마스는 이슬람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조직이고, PLO는 기본적으로 세속적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계열이다.

PLO의 중심 세력인 파타와 하마스는 오랫동안 경쟁했다. 특히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 이후 양측 갈등이 폭발했고, 결국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장악했다. 반면 파타 중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중심으로 남았다.

그래서 현재 팔레스타인 정치는 크게 보면 서안의 파타/PLO 계열과 가자의 하마스 계열로 갈라져 있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싸우기도 바쁜데 내부 정치도 터져 있는 셈이다.

평가

긍정적 평가

PLO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48년 이후 난민이 되고 흩어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공했다.

또한 PLO는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을 단순한 난민 문제에서 독립국가 수립 문제로 끌어올렸다. 외교적으로는 유엔, 아랍연맹, 여러 국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었다.

부정적 평가

PLO는 무장투쟁과 테러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과 해외 테러 사건들은 팔레스타인 대의의 정당성을 오히려 깎아먹었다.

또한 내부 부패와 권위주의, 계파 갈등도 큰 문제였다. 아라파트 시기 PLO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투명한 민주정치보다는 혁명조직식 보스 정치에 가까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종합

PLO는 팔레스타인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직이다. 팔레스타인인의 대표 조직으로 국제적 지위를 얻었고, 이스라엘과 협상하는 당사자가 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폭력투쟁, 테러 논란, 부패, 지도력 실패, 하마스와의 분열이라는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팔레스타인을 세계정치 무대 위에 올려놓았지만, 팔레스타인을 구원하지는 못한 조직.

여담

  • PLO와 하마스는 같은 조직이 아니다. 이거 헷갈리면 중동 뉴스 읽을 때 계속 꼬인다.
  • PLO의 중심 세력은 파타이고, 하마스는 별도의 이슬람주의 조직이다.
  • 야세르 아라파트는 PLO 그 자체처럼 보일 정도로 오랫동안 상징적 지도자였다.
  • PLO는 한때 무장투쟁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외교대표 기구의 성격이 더 강하다.
  • PLO가 레바논에서 쫓겨난 뒤 생긴 공백은 헤즈볼라 성장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