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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나헴 베긴이스라엘의 정치인, 제6대 총리이다. 리쿠드 계열 우파 정치의 상징적 인물이며,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사람 인생이 좀 괴상하다. 젊을 때는 이르군이라는 시온주의 무장조직 지도자였고, 훗날에는 이스라엘 총리가 되어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무장투쟁 출신 우파 정치인이 평화상까지 받은 것이다. 중동 현대사답게 설정이 아주 심플하지 않다.

개요

메나헴 베긴은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이르군을 이끌었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우파 정당 헤루트를 창당했다.

오랫동안 야당 지도자로 버티다가 1977년 총선에서 승리해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정치사에서 노동당 계열 장기집권을 끝낸 대전환이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 정치판에서 “드디어 우파가 정권 잡았다” 사건이다.

생애

출생과 젊은 시절

메나헴 베긴은 1913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러시아 제국권에 있었고, 훗날 폴란드와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벨라루스에 속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유대 민족주의와 시온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는 베긴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련 수감과 팔레스타인 이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베긴은 소련에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군 관련 경로를 통해 중동으로 이동했고, 결국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그는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라,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믿는 강경 시온주의자가 되었다.

이르군 지도자

베긴은 팔레스타인에서 이르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르군은 영국 위임통치 당국과 아랍 세력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인 시온주의 조직이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독립운동 조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고, 영국과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테러조직으로 본다. 여기서부터 평가가 찢어진다. 누군가에게는 독립투사, 누군가에게는 테러리스트. 역사라는 게 원래 승자독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이르군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1946년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베긴은 이르군 지도자로서 이 사건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젊은 시절은 영웅담으로만 쓰기 어렵다. 이스라엘 건국사의 어두운 면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헤루트 창당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 베긴은 무장조직 지도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우파 정당 헤루트를 창당했고, 이후 이 계열은 리쿠드로 이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나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스라엘 정치는 다비드 벤구리온과 노동당 계열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베긴은 오랫동안 야당 지도자로 남았다.

쉽게 말하면 초창기 이스라엘 정치판에서 베긴은 주류가 아니라 “시끄럽고 위험해 보이는 우파 아저씨” 취급을 받았다.

장기 야당 생활

베긴은 수십 년 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버텼다. 이것도 보통 멘탈로는 힘들다. 계속 선거에서 지고도 정치판에 남아 자기 진영을 유지했다.

결국 이 장기 생존이 훗날 리쿠드 집권의 기반이 되었다. 정치에서 오래 버티는 것도 능력이다. 물론 오래 버틴다고 다 되는 건 아닌데, 베긴은 결국 됐다.

총리 집권

1977년 정권교체

1977년 총선에서 베긴이 이끄는 리쿠드가 승리했다. 이는 이스라엘 정치사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다. 건국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노동당 계열의 지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특히 중동·북아프리카계 유대인, 종교 보수층, 기존 노동당 엘리트에게 소외감을 느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스라엘판 정치 지형 대폭발이었다.

우파 총리의 등장

베긴은 안보 문제에서 강경한 우파 정치인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와 이스라엘 안보를 강하게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는 양보에 소극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역설적이지만, 강경파가 오히려 큰 협상을 할 때가 있다. 자기 진영을 설득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베긴의 최대 업적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1978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중재로 베긴은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협상을 벌였다.

이 협정을 바탕으로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아랍 국가였던 이집트와 전쟁 상태를 끝낸 엄청난 성과였다. 이집트가 전쟁판에서 빠지면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부담이 크게 줄었다.

노벨평화상

베긴은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장면이 참 묘하다. 이르군 지도자였던 베긴과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킨 사다트가 나란히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평화상이라는 게 원래 평생 평화롭게 산 사람에게만 주는 상은 아니다. 가끔은 열심히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 그만 싸우자”고 할 때 주어진다.

국내 정책

베긴 정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우파와 보수층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키웠다. 특히 기존 노동당 엘리트 중심 정치에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이 리쿠드를 통해 정치적 대표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유대 정착촌 문제에서 비교적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점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레바논 전쟁

베긴의 말년 총리 경력에서 가장 큰 오점은 1982년 레바논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PLO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했다.

처음에는 제한적 작전처럼 시작되었지만, 전쟁은 커졌고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까지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와 정치적 후폭풍이 커졌다.

특히 사브라 샤틸라 학살은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큰 논란을 불러왔다. 직접 학살을 저지른 것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였지만, 이스라엘군이 해당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베긴은 캠프 데이비드로 평화의 문을 연 총리였지만, 레바논 전쟁으로 그 평판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인생사 진짜 균형패치가 잔인하다.

사임과 말년

1983년 베긴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레바논 전쟁의 부담, 건강 문제, 아내의 사망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말년을 보냈고, 1992년 사망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베긴은 이스라엘 우파 정치를 주류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오랫동안 비주류였던 세력을 집권세력으로 만든 정치적 승부사였다.

또한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해 이스라엘 안보 환경을 크게 바꿨다. 이집트와의 평화는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외교안보의 핵심 축이다.

부정적 평가

베긴의 젊은 시절 이르군 활동은 테러 논란과 연결된다. 특히 영국 위임통치기 폭력투쟁과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 문제는 그의 평가를 어둡게 만든다.

또한 레바논 전쟁은 베긴 정부의 대표적 실패로 꼽힌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몇 년 뒤 큰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인생은 모순 그 자체다.

종합

메나헴 베긴은 단순히 평화주의자도 아니고, 단순히 극우 강경파도 아니다. 그는 무장투쟁가, 야당 지도자, 우파 총리, 평화협정 체결자, 레바논 전쟁의 책임자라는 여러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총 들던 우파 정치인이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결국 또 전쟁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

여담

  • 베긴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정치의 비주류였지만, 결국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기 진영의 강경파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 사다트는 암살당했고, 베긴은 레바논 전쟁 이후 정치적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 베긴이 이끈 리쿠드는 이후 이스라엘 우파 정치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