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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의 군인, 정치인, 제3대 대통령이다. 본명은 무함마드 안와르 엘사다트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사후 이집트 대통령이 되었고,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한 방 먹인 뒤, 다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인물이다. 한마디로 중동 현대사에서 “전쟁으로 체면 세우고, 평화로 판을 바꾼 사람”이다.
문제는 그 대가가 컸다. 아랍권에서는 배신자 소리를 들었고, 국내에서는 이슬람주의자와 세속 반대파 양쪽에게 욕을 먹다가 결국 암살당했다. 정치판에서 모두에게 욕먹는다는 건 보통 뭔가 큰 결정을 했다는 뜻이긴 한데, 그게 늘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개요
안와르 사다트는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전임자는 가말 압델 나세르, 후임자는 호스니 무바라크이다.
그는 처음에는 나세르의 후계자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집권 후에는 나세르주의 세력을 숙청하고, 소련과 거리를 두고, 미국과 가까워지고, 이스라엘과 평화를 맺었다. 전임자 노선에 충성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방향키를 반대로 꺾은 셈이다.
좋게 보면 현실주의자, 나쁘게 보면 배신자, 더 냉정하게 보면 망해가던 이집트의 국력으로는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 코스프레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사람이다.
생애
출생과 군인 시절
안와르 사다트는 1918년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군 장교가 되었고,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집트 왕정에 반감을 가졌다.
당시 이집트는 명목상 독립국이었지만 영국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래서 이집트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왕도 싫고 영국도 싫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사다트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반영국, 반왕정 성향을 갖게 되었다.
자유장교단
사다트는 가말 압델 나세르 등과 함께 자유장교단에 참여했다. 이들은 1952년 이집트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렸다.
이 사건으로 이집트는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아랍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군부정치가 본격적으로 결합한 순간이었다. 이집트 현대사의 시작 버튼 같은 사건이다.
나세르 시대의 사다트
나세르 집권기 동안 사다트는 여러 요직을 거쳤지만, 나세르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교적 온건하고 무난한 인물로 보였다.
그래서 나세르 사후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과도기용 얼굴마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틀렸다. 사다트는 생각보다 훨씬 독한 사람이었다.
대통령 집권
권력 장악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초반에는 나세르주의 핵심 인사들이 사다트를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다트는 1971년 이른바 ‘교정혁명’을 통해 나세르주의 강경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름은 교정혁명인데, 실제로는 “이제 내가 왕이다” 선언에 가까웠다.
노선 전환
사다트는 나세르식 사회주의와 소련 의존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경제 개방 정책인 인피타흐를 추진했고, 외교적으로는 소련보다 미국에 접근했다.
이건 당시 이집트 입장에서 큰 노선 전환이었다. 나세르가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 소련과의 협력을 상징했다면, 사다트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올라타려 한 셈이다.
욤 키푸르 전쟁
1973년 사다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 전쟁이 바로 욤 키푸르 전쟁이다. 아랍권에서는 10월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집트군은 초반에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 일부를 탈환하며 이스라엘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개박살났던 이집트 입장에서는 엄청난 체면 회복이었다.
물론 전쟁 전체를 완전한 군사적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은 곧 반격했고, 전황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사다트에게 중요한 건 “이스라엘은 무적이고 아랍군은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깨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사다트는 전쟁을 통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명분을 만들었다. 즉 전쟁을 평화협상의 입장권으로 쓴 것이다.
이스라엘과의 평화
예루살렘 방문
1977년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루살렘에서 연설했다. 이건 당시 기준으로 거의 외교판 핵폭탄이었다.
아랍 국가 지도자가 이스라엘에 직접 가서 연설한다? 당시 아랍권 강경파들 입장에서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끝없이 싸워봐야 이집트만 더 가난해진다고 보았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8년 사다트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함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평화조약의 기반이 되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고, 이스라엘은 가장 큰 아랍 국가였던 이집트와 평화관계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사다트와 베긴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전쟁을 했던 둘이 같이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중동정치가 원래 이렇게 사람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랍권의 반발
사다트의 평화노선은 이집트 입장에서는 실용적 선택이었지만, 아랍권 전체에서는 엄청난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많은 아랍 국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없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을 배신으로 보았다. 결국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한동안 고립되었다.
쉽게 말해 사다트는 “우리나라부터 살자”를 선택했고, 다른 아랍 국가들은 “단체전 중인데 혼자 탈주하냐?”고 본 것이다.
국내 정치
경제 개방의 부작용
사다트는 경제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일부 계층은 부를 얻었지만, 서민층은 물가 상승과 불평등을 체감했다.
1977년에는 식료품 보조금 축소에 반발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른바 빵 폭동이다. 먹고사는 문제 건드리면 정권 지지율이 박살나는 건 고대 이집트 때나 현대 이집트 때나 똑같다.
이슬람주의 세력 활용
사다트는 나세르주의 좌파와 세속 반대파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문제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정권이 원하는 만큼만 얌전히 움직여주는 장식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 사다트는 좌파 견제용으로 풀어준 이슬람주의 세력에게도 공격받게 되었다. 정치에서 “적의 적은 친구” 전략은 자주 쓰이지만, 그 친구가 나중에 칼 들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암살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는 카이로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 도중 이슬람주의 성향의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이날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개전일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사다트 입장에서는 자신의 최대 업적을 기리는 자리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다. 역사가 가끔 너무 잔인하게 각본을 쓴다.
사다트 암살 이후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무바라크는 2011년 이집트 혁명 때까지 장기집권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사다트는 이집트가 더 이상 이스라엘과 끝없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다.
또한 그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해 이집트가 서방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제정치적으로 보면 매우 현실주의적인 지도자였다.
부정적 평가
반대로 사다트는 권위주의 통치를 유지했고, 경제 개방의 부작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정치적 자유를 충분히 확대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역시 이집트에는 이익이 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아랍권에서는 여전히 그를 배신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
종합
사다트는 영웅과 배신자 사이에 걸쳐 있는 인물이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시나이 반도를 되찾은 지도자이고, 중동 외교사에서는 이스라엘과 평화의 문을 연 인물이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대오를 이탈한 지도자였고, 국내적으로는 권위주의와 경제불안을 남긴 대통령이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전쟁으로 체면을 회복하고, 평화로 역사를 바꿨지만, 그 평화 때문에 죽은 사람.
여담
- 사다트는 나세르보다 카리스마가 약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실제 집권 후에는 훨씬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 호스니 무바라크는 사다트 암살 당시 같은 행사장에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은 중동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외교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 군사 퍼레이드에서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 자체가 중동 현대사의 모순을 압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