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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 默念부터 爲시다... 族와 國를 爲해 命을 納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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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若 國父를 侮辱하는 言을 行爲면 汝는 四肢가 切斷되고 屍體는 廢棄物 燒却場에서 廢棄 處分될 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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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東明聖王)
본명주몽(朱蒙), 추모(鄒牟)
건국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고구려 건국
국가고구려
능묘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북한 평양에 동명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다른 이름추모왕(鄒牟王), 동명왕(東明王), 중모왕(中牟王), 상해(象解), 도모(都牟)
추가 정보
모후유화부인(柳花夫人)
묘호태조(太祖)라는 호칭이 사료에 등장하나 묘호로서의 성격은 논의가 있다.
배우자예씨(禮氏), 소서노(召西奴, 전승에 따른 기록)
부왕해모수(건국 신화상)
사망기원전 19년 9월(《삼국사기》의 기록)
사진설명북한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 고구려 시조의 무덤으로 전해지지만 실제 피장자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다.
성씨고씨(高氏)
시호동명성왕(東明聖王)
양육자금와왕(金蛙王, 동부여의 왕)
왕조고구려 왕조
자녀유리명왕, 비류, 온조왕(비류·온조의 친부 관계는 전승마다 차이가 있다.)
재위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지위고구려 초대 국왕·건국 시조
출생기원전 58년(전승에 따른 연대)
특징활쏘기의 명수로 전해지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
후임유리명왕
고구려의 역대 국왕
1대 2대 3대 4대 5대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개요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이자 초대 국왕이다. 재위 기간은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다. 흔히 주몽(朱蒙)이라고 부르며,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한 고구려 당대의 기록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빠는 해모수, 엄마는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고구려 왕실의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계보이며, 현대의 가족관계증명서마냥 생물학적 혈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치를 잘했으며 화살을 존나 잘 쐈다. 삼국사기에는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도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전한다.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 유리, 즉 유리명왕이다. 한편 온조왕과 비류는 백제 건국 신화에서 주몽의 아들로 등장하지만, 이들의 친아버지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전승이 남아 있다.

주몽은 고구려 건국 시조라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고구려 왕실은 그를 신성한 혈통을 지닌 존재로 받들었으며, 건국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왕실의 정통성을 설명하는 데 주몽의 신화를 활용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행적은 실제 역사와 신화적 요소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알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부터 활을 존나 잘 쏘며,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도망치는 것을 도와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나라를 세운 왕이 아니라 판타지 게임의 주인공 같은 이력이다.

이름과 칭호

주몽과 추모

흔히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구려 당대의 기록에서는 추모라는 표기가 두드러진다.

표기 설명
주몽(朱蒙) 《삼국사기》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널리 확인되는 이름
추모(鄒牟) 광개토대왕릉비와 모두루묘지 등 고구려 금석문에 기록된 이름
추몽(鄒蒙) 주몽과 관련된 이표기
중모(中牟·仲牟) 《삼국사기》 및 다른 문헌에서 확인되는 표기
상해(象解) 《삼국사기》에 전하는 다른 이름
도모(都牟·都慕) 일본 측 문헌 등에서 확인되는 표기

"주몽"이라는 이름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국 사서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이러한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이름은 "추모"라고 한다. 정확히는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대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서 '추모왕'이라는 표기가 확인되므로, 추모가 고구려 왕실에서 사용하던 이름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1]

그렇다고 주몽과 추모가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적 환경에서 이름의 소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표기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에는 현대처럼 고유명사의 한글 표기를 전국적으로 통일해 놓지도 않았으니 같은 사람의 이름이 여러 방식으로 기록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주몽이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에서는 고구려 당대의 금석문에 근거해 추모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동명성왕과 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사용한 왕호다. 동명왕(東明王)이라는 표기도 널리 쓰인다.

흥미롭게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670년 신라가 고구려 부흥 세력의 안승을 책봉하면서 고구려 시조를 태조 중모왕(太祖中牟王)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따라서 원문의 '묘호 태조'라는 설명에도 사료상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의 태조가 후대 왕조에서 사용하는 정식 묘호와 완전히 동일한 성격이었는지는 논의가 있다. 고구려에는 제6대 국왕인 태조대왕도 존재하므로 두 인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2]

즉 고구려 초대 국왕은 동명성왕·추모왕·주몽·중모왕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지만, 이것들이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웅의 탄생

해모수와 유화부인

틀:주몽신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주몽의 아버지는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해모수이고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이다.

해모수와 유화가 관계를 맺은 뒤 유화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그녀를 발견해 자신의 궁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유화를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비추었고, 결국 유화는 커다란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게 뭔 개소리냐는 식으로 알을 내다 버렸지만, 개와 돼지는 알을 먹지 않았고 소와 말은 알을 피했으며 새들은 날개로 알을 덮어 보호했다. 결국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자 그 안에서 주몽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주몽은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생물학으로 따지면 인간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은 설명할 수 없다. 건국 시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천손(天孫)이자 신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신화적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

활쏘기의 천재

주몽은 일곱 살 무렵부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는 설명이 전한다.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에 이미 활쏘기 만렙을 찍었다는 이야기다. 그게 사실이라면 활 하나만 들고 다녀도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뛰어난 실력 때문에 왕실의 견제를 받게 된다.

금와왕에게는 여러 왕자가 있었는데, 그중 맏아들인 대소는 주몽이 훗날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왕자들과 신하들 역시 주몽을 경계했다.

결국 주몽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구려 건국

동부여 탈출

주몽을 위협하는 움직임이 심해지자 어머니 유화부인은 멀리 떠나 큰일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과 함께 동부여를 떠났다. 이들은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주몽을 따라간 초기 세력으로 등장한다.

도망치던 일행은 큰 강에 도착했지만 뒤에서는 추격병이 쫓아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지 못하면 그대로 붙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주몽은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임을 밝히며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주몽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 이후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지자 추격병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가 하늘과 물의 신이라는 설정을 여기서 제대로 써먹는다. 인간 병사들은 물에 막혀 추격도 못 하는데 이 양반은 강물에다 명령을 내려 다리를 만들어 버렸다. 고대 건국 신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신성한 왕권의 표현이다.

이 장면은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관련 내용이 새겨졌다.[3]

졸본에서 나라를 세우다

주몽은 동부여를 떠나 남쪽의 졸본 지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력을 모아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졸본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환런 일대와 관련된 지역으로 비정되며, 고구려 초기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이후 제2대 유리명왕 시기에 국내성 지역으로 중심지가 옮겨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고 정하고 고(高)를 자신의 성씨로 삼았다.

따라서 원문에 적힌 횡성 고씨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당시의 고씨를 현대 한국의 특정 본관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고구려 왕실의 성씨인 고씨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주몽의 고구려 건국이 단순히 빈 땅에 혼자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 졸본 일대에는 이미 여러 정치 세력과 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며, 주몽을 중심으로 한 이주 세력과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면서 고구려 초기 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는 내용도 존재한다. 이처럼 자료마다 건국 과정에 차이가 있으므로 고구려 성립을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재위 기간

초기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기원전 37년 왕위에 오른 뒤 주변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면서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기원전 36년에는 비류국의 송양왕을 복속시켰다고 하며, 기원전 33년에는 행인국을 정복했고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시기 《삼국사기》에 전하는 주요 사건
기원전 58년 주몽 출생
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고구려 건국
기원전 36년 비류국 송양왕 복속
기원전 33년 행인국 정복
기원전 28년 북옥저 정복
기원전 24년 유화부인 사망
기원전 19년 유리가 찾아오자 태자로 책봉
기원전 19년 9월 동명성왕 사망, 유리명왕 즉위

이러한 기록이 모두 정확한 연도와 사건을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역사는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정리된 문헌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주몽이 고구려의 시조로 추앙되었고, 고구려가 부여 계통의 이주 세력과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여러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국가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유리의 등장과 후계 문제

기원전 19년에는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첫 번째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왔다고 전한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고, 같은 해 사망하면서 유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제2대 유리명왕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백제 건국 신화와 연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주몽의 또 다른 배우자로 알려진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전승이 있다.

즉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유리로 결정되었고,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권력 중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선 것이다.

다만 이 내용 역시 모든 기록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백제의 건국 신화에는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를 다르게 설명하는 전승이 존재한다.

백제와의 관계

후계자는 자신의 장남 유리, 즉 유리명왕이다.

차남 온조는 이에 불만을 품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나라를 하나 세우니 그 나라가 백제이며, 이 차남은 온조왕이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위의 설명은 백제의 건국 신화 가운데 온조 중심의 전승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다른 전승에서는 두 사람의 아버지가 북부여 계통의 인물인 우태(優台)라고 한다.

우태의 아내였던 소서노가 남편과 사별한 뒤 주몽과 재혼했으며, 주몽이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주몽의 생물학적 친아들이 아니라 의붓아들이 된다.

따라서 온조를 주몽의 차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에 전하는 여러 설화 중 하나만을 채택하는 셈이다.

또한 온조와 비류 중 누가 백제 건국의 중심인물이었는지를 두고도 전승이 갈린다. 일반적으로는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이해하지만, 비류가 중심이 되는 설화도 전해진다.[4]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별개의 나라로 성장했지만, 초기 왕실의 기원과 건국 신화에서는 부여 계통의 공통적인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부여의 동명왕과의 관계

同名
이 문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을 구분하기 위한 문서입니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니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동명성왕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대 중국의 역사 기록에는 주몽보다 앞서 부여를 세운 동명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특이한 점은 두 사람의 건국 신화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주몽 자체가 부여 출신인 데다가 밑의 부하들까지 싹 다 부여 출신이다 보니, 아무래도 왕을 신성시할 때 부여의 신화를 그대로 갖다 쓴 듯하다.

실제로 두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보인다.

  • 시조의 어머니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임신한다.
  • 시조가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 시조가 성장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드러낸다.
  • 기존 지배 세력의 위협을 피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한다.
  • 물과 관련된 신비로운 도움을 받는다.
  • 새로운 곳에서 나라를 세운다.

이 때문에 부여의 동명 신화가 고구려 주몽 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고구려가 부여의 후계 국가라는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신성한 시조 전승을 수용하거나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몽이 실제로 부여의 동명왕 설화를 그대로 베껴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가 서로 비슷한 구조를 공유하는 것과 각 시조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과 고구려의 주몽이 본래 서로 다른 시조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반대로 두 인물의 이름과 신화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점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주몽과 부여 동명왕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인물의 실존 문제뿐 아니라 고구려 왕실이 부여의 역사와 권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5]

사료와 역사적 실체

광개토대왕릉비

주몽의 존재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광개토대왕릉비다.

414년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첫머리에서 고구려 건국 시조인 추모왕의 신성한 출생과 건국 과정을 설명한다.

비문에서는 추모왕이 북부여의 천제 계통에서 나왔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며,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의 기초를 세웠다고 기록한다.

이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보다 훨씬 이른 고구려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구려인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건국 시조를 추모왕으로 인식했고, 그가 하늘과 물의 신으로부터 이어지는 신성한 혈통을 가졌다고 믿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물론 비석이 세워진 414년은 전통적인 고구려 건국 연도인 기원전 37년보다 약 450년 뒤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가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신화의 모든 장면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한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된 역사서로, 고구려본기에서 동명성왕의 출생부터 건국, 주변 세력 복속, 유리의 태자 책봉과 사망까지의 내용을 전한다.

《삼국유사》 역시 주몽과 관련된 여러 전승을 수록하고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동명왕편》도 주몽의 신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이들 문헌을 함께 비교하면 주몽의 일생과 고구려 건국 신화가 시대에 따라 어떤 형태로 전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고대 국가의 초기 역사는 실제 사건과 후대의 정치적 해석, 신화적 요소가 섞여 있으므로 사료를 기록 그대로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동명왕릉

파일:Tomb of King Tongmyong, Pyongyang, North Korea.jpg
북한 평양의 동명왕릉으로 알려진 무덤.

현재 북한 평양의 역포구역 용산리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이라는 이름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고구려 시조 주몽의 능으로 보고 있으며, 주변의 정릉사지와 함께 중요한 고구려 유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주몽은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9년에 사망했으며 당시 고구려의 중심지는 졸본이었다. 반면 오늘날 평양의 동명왕릉은 고분의 구조와 양식상 4~5세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427년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무렵 건국 시조의 능을 함께 이전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장설이 모든 학계에서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무덤의 실제 피장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도 부족하다. 따라서 평양의 동명왕릉을 고구려에서 시조를 모시던 유적과 관련된 장소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주몽의 유골이 실제로 묻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6]

한편 이 일대의 정릉사 터에서는 고구려의 불교 사찰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는 후대 고구려에서 시조의 능과 관련된 의례와 시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원문에서는 평양에 있는 석상이라고 설명했지만, 해당 사진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은 동명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이다.

평가와 역사적 의의

동명성왕은 고구려를 세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왕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된다.

기원전 37년의 건국을 전하는 문헌의 연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고구려가 부여 계통의 집단과 압록강 중상류의 여러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초기 국가의 형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그가 신성한 출생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판타지 소설을 좋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왕실의 기원을 하늘과 연결하여 국왕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왕실은 국가의 기원이 추모왕에게 있다는 인식을 유지했다.

또한 고구려 시조와 관련된 전승은 백제의 건국 설화에도 영향을 주어, 두 나라가 공유한 부여 계통의 역사적 배경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이유로 주몽은 단순히 활 잘 쏘던 옛날 왕을 넘어 한국 고대사의 국가 형성과 건국 신화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중문화

드라마 《주몽》

MBC에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한 사극 《주몽》은 동명성왕의 일생을 소재로 제작되었다.

배우 송일국이 주몽을 연기했으며, 해모수와 유화부인, 금와왕, 대소, 소서노 등 건국 신화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드라마는 높은 인기를 얻으면서 주몽이라는 인물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다만 극적인 재미를 위해 허구적인 인물과 사건, 각색된 관계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 역사 기록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드라마 덕분에 주몽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구려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실제 사료에 전하는 주몽의 행적과 드라마의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담

  • 고구려의 건국 시조이지만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 주몽의 성씨인 고씨(高氏)는 고구려 왕실의 성씨로 전해진다. 원문에 나온 횡성 고씨와 직접 연결할 근거는 부족하다.
  •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어릴 때부터 활쏘기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자체가 뛰어난 궁수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설명이 전한다.
  •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주몽이 아니라 추모왕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 부여의 시조 동명왕과는 건국 신화가 매우 비슷하지만, 두 인물을 역사적으로 무조건 동일시할 수는 없다.
  •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주몽의 친아들인지 의붓아들인지는 건국 전승에 따라 달라진다.
  • 북한 평양에는 동명왕릉이라는 고분이 있지만 실제로 주몽이 묻힌 무덤인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과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시조를 태조로 부르는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혼동하면 안 된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