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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출생지졸본 지역으로 전함
관련 사건고구려 건국, 백제 건국
관련 인물유리명왕, 예씨 부인
국가고구려 → 백제 건국세력
두 번째 남편주몽
추가 정보
비고우태와의 혼인 및 주몽과의 재혼, 두 아들의 출생 관계는 《삼국사기》의 비류 중심 건국 전승에 따름
사망미상 (기원전 6년으로 추정하기도 함)
신분고구려 왕비로 전함, 백제 건국세력의 일원
아버지연타발
자녀비류, 온조
주요 사료《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요 활동고구려 건국 지원, 비류·온조와 남하
첫 번째 남편우태
출생미상 (기원전 66년으로 추정하기도 함)
한자召西奴

개요

소서노(召西奴)는 고구려의 건국을 도운 인물이자 백제의 건국세력에 속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한국의 여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건국 전승에 따르면, 졸본 지역의 유력자 연타발의 딸이며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사망한 뒤에는 주몽과 재혼하여 고구려의 건국을 도왔고, 이후 두 아들과 함께 남하했다고 전해진다.

소서노는 한국 고대의 건국 전승에서 드물게 국가의 건설에 자신의 재산과 정치적인 기반을 제공한 여성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에 도착했을 때 소서노가 그와 혼인하여 고구려의 창업을 도왔다고 기록했다. 또한 소서노의 아들 비류는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주몽의 건국을 도왔으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고구려에 나타나 태자로 책봉되면서 비류와 온조의 정치적인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에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도읍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후 형제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남하했으며, 소서노 역시 이들과 동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 때문에 소서노는 흔히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건국에 관여한 여성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소서노의 실제 생애를 이해하려면 중요한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건국에 관하여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서노라는 이름은 그 가운데 비류를 시조로 내세우는 전승에만 직접 등장한다.

온조를 시조로 설명하는 전승에서는 비류와 온조를 주몽과 졸본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기록한다. 반면 비류 중심 전승에서는 두 형제의 친아버지가 우태이며, 주몽은 어머니 소서노의 재혼 상대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두 전승을 하나로 합쳐 소서노가 주몽과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또한 소서노가 고구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내용은 사료에 명시되어 있지만, 백제의 건국 이후 어떠한 관직이나 정치적인 지위를 가지고 활동했는지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소서노의 출생연도는 기원전 66년, 사망연도는 기원전 6년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이는 《삼국사기》의 온조왕 13년 기록에서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사망했다고 전한 것을 소서노의 생애에 적용하여 역산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기록에 소서노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생몰년을 확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소서노를 백제의 건국설화 가운데 비류를 시조로 전하는 전승에 등장하는 왕족으로 설명하며, 생몰년 역시 확정하지 않고 있다.[1]

소서노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주몽의 왕비이자 온조의 어머니였다는 데 있지 않다. 건국 전승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재산과 인적 기반을 이용해 국가의 성립에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름

소서노는 한자로 召西奴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소서노라는 이름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구려와 백제 초기의 인명은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당시의 지명과 부족명, 관직명 등이 사람의 이름처럼 기록된 사례도 존재한다.

이름의 유래에 관한 견해

소서노라는 표현이 원래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특정한 지역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병도는 고구려의 지명과 집단명에서 나타나는 '나'(那) 또는 '노'(奴)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소서노의 이름을 지역집단의 명칭과 연결하여 해석했다.

또한 일부 연구에서는 소서노의 이름이 무속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 또는 신성한 존재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실제로 정확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소서노라는 이름을 현대 한국어의 특정한 단어와 연결하여 그 뜻이 완전히 밝혀진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에서도 이러한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2]

출생과 가문

졸본 출신

《삼국사기》의 비류 건국 전승에서는 소서노를 졸본 사람인 연타발의 딸이라고 기록했다.

졸본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된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환런 일대와 연결하여 이해된다.

이 지역은 압록강 유역의 여러 정치세력이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고구려 초기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졸본의 정치적인 성격이 정확히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전승에서는 졸본에 독자적인 왕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며, 다른 전승에서는 주몽이 해당 지역에 도착하여 직접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소서노가 태어난 집안이 어느 정도의 영토와 인구를 직접 지배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아버지 연타발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延陀勃)은 졸본 출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이름과 소서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전하지만, 구체적인 관직과 활동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소서노가 주몽의 건국을 돕기 위해 상당한 재산을 제공했다는 전승을 고려하면 연타발은 졸본 지역에서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자로 추정된다.

일부 연구에서는 연타발을 졸본 지역의 수장이나 기존 정치세력의 지도자로 해석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다른 건국 전승에서 주몽에게 딸을 혼인시키고 자신의 지위를 넘겨준 졸본 왕과 연타발이 동일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두 인물이 실제로 동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3]

경제적인 기반

소서노의 건국 전승에서 중요한 특징은 그녀가 상당한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는 어머니가 주몽의 건국을 돕기 위해 가산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는 소서노가 단순히 유력한 가문의 딸이거나 국왕의 배우자였을 뿐 아니라, 건국세력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당시 소서노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토지와 재물을 소유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대중매체에서는 그녀를 거대한 상단을 지휘하는 상인이나 경제적인 지도자로 묘사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활동은 역사적인 기록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우태와의 혼인

《삼국사기》의 비류 중심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優台)와 혼인했다.

우태는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으로 설명된다.

서손(庶孫)은 적통과 구분되는 계통의 후손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전승에서는 소서노가 졸본의 유력한 집안 출신이면서 부여 왕실과도 혼인관계로 연결된 인물로 등장한다.

두 아들의 출생

소서노는 우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장남은 비류이며 차남은 온조였다.

이들은 훗날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백제의 건국에 관여하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출생 관계는 《삼국사기》의 비류 중심 전승에 따른 것이다.

온조 중심 전승에서는 두 형제가 우태의 아들이 아니라 주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 친아버지가 누구였는지 확정하기 어렵다.

우태의 죽음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태는 소서노와 두 아들을 남겨 놓고 일찍 사망했다.

이후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태가 정확히 언제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소서노가 우태에게서 어떤 재산이나 정치적 지위를 상속받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도 확인되지 않는다.

우태는 사람 이름인가?

우태라는 표현은 고구려 초기의 관직명이나 작위와도 연결된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관등 가운데 우태(優台)가 등장한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우태와 유사한 표현이 관직이나 작위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비류 전승에 등장하는 우태가 실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본래 어떤 지위나 관직을 가리켰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태가 실제 인명과 관직명 가운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관한 학술적 논쟁을 소개한다.[4]

주몽과의 재혼

《삼국사기》의 비류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우태가 사망한 뒤 주몽과 재혼했다.

주몽은 부여에서 정치적인 위협을 받자 남쪽으로 이동하여 졸본에 정착한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몽은 소서노와 혼인했고, 그녀는 고구려의 왕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주몽의 졸본 도착

주몽은 부여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기하거나 경계하는 정치세력과 갈등을 겪은 뒤 탈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여러 동료와 함께 졸본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주몽이 졸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떤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는지는 전승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비류 전승에서는 소서노가 주몽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건국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된다.

고구려의 왕비

소서노는 주몽과 혼인한 뒤 왕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당시의 왕비 제도가 후대의 고구려 왕실에서 운영된 제도와 완전히 동일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소서노가 국정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으며 공식적인 정치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녀를 왕비로 기록했다는 사실과 독립적인 공동 통치자로 활동했다는 주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건국에 대한 기여

소서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 가운데 하나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지원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 비류 전승에서는 주몽이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소서노의 아들 비류는 어머니의 재산과 노력이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재산을 기울이다

관련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사업을 이루도록 도왔으며 그 노력과 수고가 많았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경가재(傾家財)로, 집안의 재산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이 내용은 소서노가 단순히 주몽의 배우자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건국에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한 인물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

건국세력의 형성

고대 국가의 건국에는 군사력뿐 아니라 식량과 물자, 인적 기반과 지역세력의 협력 등이 필요했다.

따라서 주몽이 졸본에 정착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유력자들과 협력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소서노와의 혼인은 주몽이 졸본 지역의 유력한 집단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소서노의 재산과 인적 기반은 주몽이 세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군사를 직접 지휘했는지, 고구려의 구체적인 행정조직을 설계했는지, 어떤 지역을 통치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건국을 지원했다는 사료상의 기록과 국가 전체를 실질적으로 혼자 설계하고 운영했다는 현대의 해석은 구분해야 한다.

주몽의 대우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소서노를 총애하고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비류와 온조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서술은 비류 전승에서 주몽이 두 형제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부로 등장한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그러나 주몽이 실제로 비류와 온조에게 어떠한 정치적인 지위나 군사적인 권한을 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씨 부인과 유리의 등장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기 이전 주몽에게는 부여에서 혼인했던 여성이 있었다.

그 여인은 일반적으로 예씨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주몽은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했지만, 부여에 남았던 예씨는 아들 유리를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유리는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왔다.

유리의 태자 책봉

주몽은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태자로 책봉했다.

이는 고구려의 왕위 계승 문제에서 중요한 변화였다.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주몽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특히 비류 전승에서는 소서노가 주몽의 건국을 도왔다는 사실이 강조되므로, 유리의 등장으로 소서노 일가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는 구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소서노의 아들 가운데 누가 실제로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될 예정이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비류나 온조가 공식적인 태자였다가 폐위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주몽의 사망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기원전 19년에 사망했다.

이후 유리가 고구려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소서노의 아들들은 새로운 국왕이 된 유리 아래에서 계속 생활하는 대신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백제의 건국 전승과 연결된다.

비류와 온조의 남하

《삼국사기》의 비류 중심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비류의 제안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가 주몽의 건국을 지원하기 위해 재산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주몽이 사망한 뒤에는 유리가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자신들이 더 이상 고구려에서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살 만한 곳을 선택하여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선택하고 별도의 나라와 도읍을 세우는 편이 낫다는 의미다.

이 구절은 소서노가 두 아들의 남하 과정에 동행했다는 중요한 근거다.

남하의 정치적 배경

비류와 온조의 남하는 단순한 가족의 이주로만 이해하기 어렵다.

전승에서는 두 형제가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동은 특정한 정치집단이 기존의 권력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남하에 참여한 인구와 군사의 규모, 실제 이동 경로 등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해당 전승이 건국 당시의 사건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 후대의 백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한 이야기인지도 검토가 필요하다.

미추홀과 위례성

백제 건국 전승에는 미추홀과 위례성이라는 두 지역이 등장한다.

미추홀은 일반적으로 오늘날 인천광역시 일대와 연결하여 해석한다.

반면 위례성은 한강 유역에 존재했던 백제 초기의 도읍으로 이해되지만, 구체적인 위치와 초기의 천도 과정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비류 중심 전승

소서노의 이름이 등장하는 비류 중심 전승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기록한다.

이들은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도착하여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승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시조로 등장하며, 소서노와 우태를 중심으로 한 계보가 강조된다.

그러나 비류 전승에서는 온조가 별도의 위례성을 건설하고 비류와 경쟁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즉 비류 중심 전승과 온조 중심 전승은 단순히 동일한 사건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나누어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온조 중심 전승

온조 중심 전승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로 등장한다.

두 형제는 고구려의 왕위 계승 문제로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하고 온조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정착했다.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생활하기 어려웠다고 설명된다.

반면 온조의 위례성은 농업과 거주에 유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비류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여 사망하고, 그의 백성들이 온조에게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전개는 온조 중심 전승의 내용이다.

따라서 소서노가 온조를 도와 비류의 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을 직접 지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두 전승을 합쳐도 되는가?

대중적인 역사 이야기에서는 비류 중심 전승과 온조 중심 전승을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는 두 전승이 서로 다른 계보와 시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단순히 결합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온조 전승은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건국 이야기인 반면 비류 전승은 미추홀을 중심으로 한 계보와 남하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5]

백제 건국에 대한 기여

소서노는 흔히 백제의 건국에 관여한 여성으로 소개된다.

그녀가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남하했다는 전승은 백제의 건국세력 형성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을 지원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백제 건국 이후의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부족하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웠다는 표현은 비류 전승에 기록된 그녀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주몽의 건국을 도왔다는 내용이 직접 기록되어 있다.

반면 백제의 경우에는 그녀가 아들들과 함께 남하했다는 사실이 전해질 뿐, 새로운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어떤 정책을 시행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소서노가 백제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논의할 수 있지만, 실제 건국 과정의 세부적인 활동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다.

건국세력의 중심인물

비류 전승에서 소서노는 졸본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자 상당한 재산을 제공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또한 주몽과 혼인하여 고구려의 왕실에 속했고, 이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소서노가 단순히 국왕의 가족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정치집단을 연결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과 실제 독립적인 군주로 재위했다는 주장은 별개의 문제다.

백제의 실제 건국 연대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을 백제의 건국 연대로 기록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연구에서는 한강 유역의 여러 집단이 결합하여 점진적으로 정치체를 형성한 과정에 주목한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을 구성한 여러 소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고려하면 백제가 기원전 18년 어느 하루에 완성된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출현했다고 보기보다는 여러 단계에 걸쳐 성장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소서노의 활동 역시 백제 건국의 기원에 관한 전승 속에서 해석해야 하며, 그녀가 실제로 오늘날의 국가와 같은 체제를 어느 해에 완성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온조와 비류의 친아버지 문제

소서노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역사적 논쟁 가운데 하나는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다.

《삼국사기》에는 서로 다른 전승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구분 온조 중심 전승 비류 중심 전승
주요 시조 온조 비류
두 형제의 아버지 주몽 우태
두 형제의 어머니 졸본 왕의 둘째 딸 (이름 미상) 소서노
어머니의 아버지 졸본 왕 (이름 미상) 연타발
주몽과 어머니의 관계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음 우태 사망 뒤 재혼
주몽과 두 형제의 관계 친아버지 계부
건국 중심지 위례성 미추홀
소서노의 건국 지원 구체적인 기록 없음 고구려 건국을 경제적으로 지원
건국 이후 이야기 온조와 비류의 분리, 온조 세력의 성장 소서노와 아들들의 남하에 중점

온조 전승에서의 어머니

온조 전승에서는 주몽이 졸본 왕의 딸 세 명 가운데 둘째 딸과 혼인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여성과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여성의 이름이 소서노라고 직접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일부 학설에서는 두 전승의 어머니가 실제로 동일한 인물을 가리켰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를 확정할 수는 없다.

비류 전승에서의 어머니

비류 전승에서는 소서노의 이름과 연타발, 우태 등 가족관계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우태가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이며, 주몽은 소서노의 재혼한 남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다는 사실과 비류·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라는 주장을 동시에 확정된 사실로 제시하면 서로 다른 전승을 혼동하게 된다.

서로 다른 계보의 의미

국사편찬위원회는 온조 중심 전승과 비류 중심 전승이 백제 초기의 서로 다른 집단과 계보 의식을 반영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즉 두 전승에서 시조와 아버지의 계보가 다르게 나타나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전승을 선택하여 다른 전승을 단순한 오류로 처리하는 것보다 각각의 전승이 어떤 정치집단의 기억과 정통성을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망

소서노의 정확한 사망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3년인 기원전 6년에 왕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때 왕의 어머니는 61세였다고 한다.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王母薨, 年六十一.

이는 왕의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나이가 61세였다는 뜻이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면 그녀는 기원전 6년에 사망한 것이 된다.

또한 당시의 나이 계산법을 적용하면 출생연도는 기원전 6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문장에는 소서노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원전 66년 출생, 기원전 6년 사망이라는 연대는 하나의 해석이지 확정된 생몰년이 아니다.[6]

주몽과의 나이 차이

주몽은 전승상 기원전 58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서노가 기원전 66년에 태어났다는 추정을 받아들이면 주몽보다 약 8세 연상이 된다.

이 때문에 대중적인 역사 이야기에서는 소서노를 주몽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서노의 출생연도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두 사람의 정확한 나이 차이도 확정할 수 없다.

61세라는 나이

《삼국사기》의 61세라는 기록은 오늘날 사용하는 만 나이와는 구분해야 한다.

전근대의 역사기록에서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은 현대의 만 나이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61세라는 기록을 현대적인 날짜 계산에 그대로 적용하여 정확한 출생일을 계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국모 제사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7년인 기원전 2년에 국모를 위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이는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다.

여기서 국모(國母)는 국가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국모와 소서노

온조왕의 어머니가 소서노였다는 전승을 받아들이면 이 제사 역시 소서노를 대상으로 한 의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해당 기록에서는 국모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인물이 반드시 역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소서노였는지, 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별도의 신성한 모성적 존재였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국가의 어머니라는 상징

고대 국가의 건국설화에서는 국왕의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주몽 건국 전승에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등장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주몽의 어머니와 관련된 제사가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따라서 소서노 역시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신성한 어머니 또는 왕실의 시조모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에서도 소서노를 호국신 또는 신모적인 존재와 연결하여 해석한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7]

그러나 실제 국모 제사의 절차와 사당의 위치, 제사의 지속기간 등에 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역사적 실존과 전승

소서노는 《삼국사기》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생애 전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그녀를 연구할 때에는 역사적인 개인의 활동과 후대에 전승된 건국설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 시기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의 문신 김부식 등이 편찬한 역사서다.

소서노가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는 기원전 1세기와는 1,000년 이상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삼국사기》는 이전부터 전해지던 여러 역사문헌과 기록을 참고하여 편찬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역사에 관한 자료는 상당 부분 소실되었으며, 건국설화에는 후대의 정치적인 관념과 왕실의 정통성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소서노와 주몽, 비류와 온조의 생애를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모두 확정할 수는 없다.

소서노의 독립적인 기록

현재 소서노의 실제 활동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동시대의 비문이나 독립적인 문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주몽의 계보와 고구려의 건국 전승이 등장하지만 소서노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또한 《삼국유사》와 중국의 역사서에는 백제의 건국에 관한 다양한 전승이 남아 있지만 소서노의 구체적인 생애를 독립적으로 재구성할 만큼 충분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실제 역사적인 인물이었는지, 여러 건국세력의 기억이 하나의 인물로 결합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건국설화의 정치적 성격

고대 국가의 건국설화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목적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왕조가 어떤 혈통과 정치집단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왕실이 어떤 이유로 나라를 다스릴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역할도 했다.

온조 중심 전승에서는 주몽의 혈통과 온조의 건국을 강조한다.

반면 비류 중심 전승에서는 우태와 연타발, 소서노를 중심으로 한 계보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따라서 소서노의 존재는 백제 초기의 여러 정치집단이 서로 다른 정통성과 계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백제의 여성 건국자라는 평가

소서노는 한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여성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는 그녀가 고구려의 건국을 지원하고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남하했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여성의 경제적인 역할

《삼국사기》에서 소서노가 재산을 기울여 고구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대 국가의 건국설화에서는 남성 군주의 혈통과 군사적 능력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소서노의 전승에서는 여성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정치적인 영향력이 건국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활동이 왕실의 혼인이나 출산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당시의 모든 여성이 소서노와 동일한 수준의 경제적·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국가의 창업에 대한 지원

고구려 건국을 지원했다는 소서노의 활동은 명시적인 사료에 근거한다.

반면 백제의 실제 건국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군사적·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두 나라의 건국에 관여한 여성이라는 평가와 두 나라를 직접 통치한 여왕이라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소서노가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의 독립적인 여왕으로 즉위했다는 동시대의 확실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평가의 한계

일부 대중매체에서는 소서노를 최초의 여성 정치가나 경제적인 지도자, 거대한 상단을 운영한 사업가로 소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고대의 건국 전승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당시의 경제와 사회제도가 현대의 기업경영이나 정치제도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서노의 영향력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오늘날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유화부인과의 비교

소서노와 비교할 수 있는 고대 한국의 여성 인물로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있다.

유화부인은 고구려의 건국설화에서 주몽을 낳고 보호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반면 소서노는 주몽과 혼인하여 건국을 지원한 여성으로 전해진다.

구분 소서노 유화부인
주요 관련 국가 고구려·백제 고구려·부여
주요 가족관계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주몽의 어머니
건국설화에서의 역할 주몽의 건국 지원, 두 아들과 남하 주몽의 출생과 성장, 보호
대표적인 사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 전승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등
공통적인 특징 고대 국가의 건국과 왕실의 정통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여성 인물

일부 연구에서는 소서노와 유화부인을 고대의 신모(神母) 또는 지모신(地母神)적인 존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두 여성이 각각 건국세력의 정통성과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동일한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거나 동일한 신앙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중문화

드라마 《주몽》

소서노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주몽》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배우 한혜진이 소서노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에서는 소서노가 연타발의 딸이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며, 주몽과 함께 여러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한 그녀가 상단의 운영과 경제활동, 군사적·정치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설정은 역사적인 전승에 등장하는 소서노의 건국 지원이라는 요소를 확대하여 구성한 것이다.

역사와 창작의 차이

《주몽》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한 사극이지만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과 활동, 대화와 사건이 실제 기록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소서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업활동을 했는지, 어떤 전투에 참여했으며 주몽과 어떠한 연애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역사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또한 드라마에서는 주몽과 소서노, 우태와 예씨 부인의 관계가 극적인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묘사된 사건을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드라마는 소서노를 단순히 국왕의 배우자로만 다루지 않고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부각했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관심을 높였다.

당시 한혜진이 소서노를 연기했다는 사실은 2006년의 관련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8]

소서노에 관한 오해

소서노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인가?

비류 중심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우태와 먼저 혼인했다가 우태가 사망한 뒤 주몽과 재혼했다.

또한 주몽에게는 부여에 있을 때 혼인했던 예씨 부인이 있었으며, 그녀에게서 유리가 태어났다.

따라서 비류 전승을 기준으로 소서노를 주몽의 유일한 배우자 또는 첫 번째 배우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인가?

《삼국사기》의 온조 중심 전승에서는 주몽의 친아들로 기록한다.

반면 소서노가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비류 중심 전승에서는 우태의 아들로 기록한다.

따라서 두 형제의 친아버지를 하나의 확정적인 계보로 설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연타발은 졸본의 국왕이었는가?

《삼국사기》의 비류 전승에서는 연타발을 졸본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왕이었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전승에 등장하는 졸본의 왕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직접 통치했는가?

비류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고구려의 왕비였으며 건국에 경제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남하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에서 독립적인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나라의 건국에 관여했다는 표현과 두 나라의 국왕으로 재위했다는 표현은 구분해야 한다.

소서노는 실제로 기원전 66년에 태어났는가?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6년에 온조왕의 어머니가 61세로 사망했다고 기록한다.

이를 소서노의 사망으로 해석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6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록에서 왕의 어머니를 소서노라고 직접 명시하지 않으므로 확정적인 생년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

고구려 건국 전승에서의 중요성

소서노는 주몽의 건국을 돕기 위해 상당한 재산을 제공한 인물로 전해진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히 주몽 개인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건국되었다는 설명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새로운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존 지역세력과의 협력과 경제적인 기반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서노의 건국 지원은 고구려 초기의 정치세력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백제 건국 전승에서의 중요성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로 전해지며, 이들이 남쪽으로 이동할 때 함께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는 백제 건국세력의 계보와 정치적 정통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만 비류 전승과 온조 전승이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연구해야 한다.

여성의 역할

소서노는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여성으로 전승되었다.

이는 고대국가의 건국과 정치적인 변화에서 여성의 역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실제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인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른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한 사람의 전승만으로 고대사회 전체가 여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거나 남녀가 완전히 평등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기록의 한계

소서노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인 기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에는 그녀의 이름과 가족관계, 주몽의 건국 지원과 남하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지만 실제 생애 전체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서노의 정확한 생몰년과 활동지역, 재산의 규모와 정치적 권한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소서노가 반드시 허구의 인물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녀에 관한 현대적인 서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역사적 해석과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주요 연혁

시기 사건
기원전 66년 소서노의 추정 출생연도. 온조왕의 어머니가 61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적용한 계산
시기 미상 졸본 지역의 유력자 연타발의 딸로 태어났다고 전함
시기 미상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전함
시기 미상 우태가 사망하여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고 전함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고구려 건국. 소서노가 혼인하고 건국을 지원했다고 전함
시기 미상 부여에서 온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됨
기원전 19년 주몽 사망, 유리 즉위
기원전 18년경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했다고 전함
기원전 18년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건국 연도
기원전 6년 온조왕의 어머니가 61세로 사망했다는 기록. 소서노의 사망으로 해석하기도 함
기원전 2년 온조왕이 국모를 위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됨
1145년 《삼국사기》 편찬 완료. 소서노의 이름이 비류 중심 건국 전승에 수록됨
2006~2007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 배우 한혜진이 소서노를 연기

※ 위 연혁의 기원전 1세기 사건들은 주로 《삼국사기》의 건국 전승에 근거하며, 모두 동시대의 독립적인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여담

  • 소서노의 이름은 한자로 召西奴라고 쓴다.
  •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전승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흔히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 모두 관여한 여성으로 소개된다.
  • 아버지는 졸본 출신의 연타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연타발이 실제 졸본의 왕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 《삼국사기》의 비류 전승에서는 우태와 처음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한다.
  • 우태가 죽은 뒤에는 주몽과 재혼했다고 전해진다.
  • 이 전승에서 주몽은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부다.
  • 반면 온조 중심 전승에서는 비류와 온조를 주몽의 친아들로 기록한다.
  • 따라서 두 전승을 하나로 합쳐 정확한 가족관계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 소서노가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지원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
  • 특히 비류가 어머니의 경제적인 지원을 강조하는 대목이 중요하다.
  • 그러나 소서노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재산을 보유했는지는 알 수 없다.
  •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되면서 소서노의 아들들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고 전해진다.
  •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하하자고 제안했다.
  • 소서노 역시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비류 전승에서는 미추홀을 중심으로 한 건국세력이 강조된다.
  • 온조 전승에서는 위례성과 온조의 건국, 비류와 온조 사이의 관계가 강조된다.
  • 미추홀은 일반적으로 오늘날 인천 일대와 연결하여 해석한다.
  • 소서노의 정확한 출생과 사망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 기원전 66년에서 기원전 6년이라는 생몰년은 온조왕의 어머니가 61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에 근거한 추정이다.
  • 실제로 소서노가 주몽보다 약 8세 연상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다.
  •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국모를 위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 일부 연구에서는 소서노를 고대의 신모 또는 지모신적인 존재와 연결하여 해석한다.
  • 2006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배우 한혜진이 소서노를 연기했다.
  • 드라마에서는 소서노가 뛰어난 사업가이자 정치적인 지도자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기록에서 그녀의 구체적인 상업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소서노는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여성 가운데 비교적 뚜렷한 경제적·정치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실제로 두 나라의 국왕으로 재위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 소서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그녀의 이름이 단순한 왕실의 혼인관계를 넘어 국가의 창업을 지원한 인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관련 문서

참고 자료

각주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