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 |
| 생년월일 | 1868년 7월 9일 |
|---|---|
| 사망일 | 1946년 11월 30일 |
| 국적 | 독일 |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
| 직업 | 정치인, 언론인 |
| 활동기간 | 1890년대~1933년 |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1868년 7월 9일 ~ 1946년 11월 30일)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으로, 독일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정치·군사적 혼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으로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18년 말 인민대표평의회의 군사담당자가 된 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국방장관(Reichswehrminister)에 취임했다.[1]
노스케가 독일 현대사에서 특히 유명한 이유는 1919년 베를린의 1월 봉기와 3월 무력충돌을 진압하면서 자유군단을 비롯한 구제국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노스케의 지휘체계 아래 활동하던 근위기병소총사단에 체포된 뒤 살해됐다. 노스케가 두 사람의 살해를 직접 명령했다는 사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살해를 지시한 발데마르 파프스트는 훗날 노스케의 동의가 있었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독일 연방기록원 역시 이러한 파프스트의 기록을 보존하고 있으나, 당시 노스케가 구체적인 살해계획을 어느 정도까지 사전에 알고 승인했는지는 역사적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2]
노스케는 1919년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자신의 회고록에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 이 때문에 당시 급진좌파는 그를 '블루트훈트'(Bluthund, 사냥개) 또는 '블루트노스케'(Blutnoske)라고 비난했고, 반대로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의회공화국을 지켜냈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를 질서 회복의 책임자로 평가했다. 어느 쪽 표현도 당시 정치적 진영에서 사용한 평가라는 점을 구분해야 한다.[3]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군부와 자유군단을 이용해 좌파 봉기를 진압했던 노스케가 불과 1년 뒤 그 군부 일부가 일으킨 카프 폭동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좌파 혁명 막겠다고 제국 시절 군인들을 끌어다 썼더니 이번에는 그 군인들이 자기 정부를 뒤집으러 들어온 셈이다.
생애
노동자 출신 사회민주당 정치인
노스케는 1868년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서 직물노동자였던 아버지 카를 노스케와 노동자였던 어머니 에마 헤르비히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등·시민학교를 마친 뒤 1882년부터 유모차 공장에서 4년간 바구니 제작공으로 견습생활을 했고, 이후 할레·프랑크푸르트·암스테르담 등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로 일했다.[4]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892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지역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대표가 됐고, 1890년대 후반부터 사회민주주의 계열 신문의 기자와 편집자로 일했다. 1902년부터는 켐니츠의 사회민주당 신문 《폴크스슈티메》(Volksstimme)의 편집장을 맡았다.
1906년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독일 제국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군사·해군·식민지 문제를 주로 다루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노스케는 혁명적 좌파보다는 의회활동과 제도개혁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우파적 성향에 가까웠다. 1914년에는 《식민정책과 사회민주주의》를 출판하며 식민정책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관리·개혁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하기도 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회민주당은 정부의 전쟁공채를 승인하는 이른바 성내평화정책(Burgfriedenspolitik)을 채택했다. 노스케 역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필리프 샤이데만 등 SPD 지도부와 함께 독일의 전쟁수행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당내 반전파와 정반대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리프크네히트가 1914년 12월부터 전쟁공채에 반대표를 던지며 당 지도부와 충돌한 반면, 노스케는 전쟁 중에도 SPD 주류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노스케가 군부의 모든 정책을 그대로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1916~1918년에는 군수품 조달과 전쟁이익 문제를 조사하는 제국의회 위원회의 주요 의원으로 활동하며 군수기업과 군 행정에 대한 의회의 감시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군사적 국가방위에는 우호적이었지만 군부가 의회의 통제 밖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는 것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6]
독일혁명
킬 수병반란
1918년 11월 독일의 패전이 임박한 가운데 킬에서 해군 수병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해군 지휘부가 사실상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영국 함대와 마지막 대규모 해전을 벌이려 하자 수병들이 출항명령을 거부했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노동자·병사평의회가 만들어졌다.
독일 제국 정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노스케를 킬로 파견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한 노스케는 단순히 정부의 진압책임자로 행동하지 않고 병사들과 협상했으며, 결국 킬 최고병사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후에는 킬의 행정·군사업무를 담당하는 총독 역할도 맡았다.[7]
노스케는 수병들의 요구 가운데 일부를 수용하는 한편 기존 군 지휘체계와 행정질서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도록 통제하려 했다. 혁명세력 입장에서는 구체제를 지나치게 보존하려는 인물이었고, 반대로 군부와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혁명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킬에서 시작된 혁명은 이미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독일 제국은 붕괴했다. 노스케는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가 새 정부의 군사문제를 담당하게 된다.
인민대표평의회
독일혁명 직후 SPD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은 임시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혁명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됐고, 1918년 12월 베를린에서 정부군과 혁명적 수병들이 충돌한 크리스마스 전투 이후 독립사회민주당 소속 위원들이 정부에서 탈퇴했다.
1918년 12월 28일 노스케는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와 해군문제를 담당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혁명기의 독일 정부에서 사실상 군사력 운용을 책임지는 인물이 됐다.[8]
하지만 문제는 당시 정부가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정규군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제국군은 빠르게 해산되고 있었고 병사들 상당수는 더 이상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반면 베를린과 여러 도시에서는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들이 혁명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노스케와 에베르트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제국 장교들이 조직한 자원군인 자유군단을 활용했다. 자유군단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장교와 병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상당수는 민족주의·반공주의 성향이 강했다. 이후 자유군단 출신 가운데 일부는 극우 민병대와 나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즉 새 민주공화국 정부가 자기 체제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에 별 애정 없던 구제국 군인들에게 총을 쥐여준 것이다. 당장은 무장봉기를 진압할 병력이 필요했지만, 이 선택은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사·정치적 불안과도 연결됐다.
1919년 무력진압
1월 봉기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독립사회민주당과 혁명적 노동자대표, 새로 창당된 독일공산당(KPD)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베를린 경찰총장 에밀 아이히호른의 해임에 반발해 시작된 시위는 일부 참가자들이 신문사와 주요 건물을 점거하면서 무장봉기로 확대됐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게오르크 레데부어 등이 참여한 혁명위원회는 에베르트 정부의 퇴진을 선언했지만, 봉기세력은 통일된 지휘체계와 구체적인 권력장악 계획을 갖추지 못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독일공산당 지도부 일부도 즉각적인 봉기의 성공 가능성에는 회의적이었다.
정부는 노스케에게 군사적 진압권한을 부여했다. 노스케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 《킬에서 카프까지》에서 당시의 결정을 설명하면서
| “ |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 |
” |
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기록했다.[9]
노스케의 지휘 아래 정부군과 자유군단은 1월 8일부터 베를린의 점거지역을 공격했고, 11일에는 《포어베르츠》 신문사 건물을 탈환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1월 봉기 전체의 사망자를 약 165명으로 집계한다.[10]
이 과정에서 즉결처형과 가혹행위도 발생했다. 정부는 무장봉기를 끝내는 데 성공했지만, 사회민주당 정부가 우익 성향의 군부와 자유군단을 동원해 좌파 노동자들을 진압했다는 사실은 이후 독일 좌파정치의 가장 깊은 갈등 가운데 하나가 됐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암살
1919년 1월 15일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를린에서 체포됐다. 두 사람은 노스케가 정부군으로 활용하던 근위기병소총사단의 본부인 에덴 호텔로 끌려갔으며, 참모장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지시로 살해됐다.
리프크네히트는 티어가르텐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룩셈부르크는 머리를 가격당한 뒤 총상을 입고 살해되어 시신이 란트베어 운하에 버려졌다. 당시 군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다 사살됐고 룩셈부르크는 군중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허위 발표했다.[11]
노스케가 직접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동시대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파프스트는 1960년대에 남긴 여러 문서와 증언에서 자신이 살해를 지시했으며 노스케의 동의 없이는 이를 실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노스케가 사후에 자신과 관련 장교들을 보호했다고 주장했다.[12]
문제는 이 주장이 사건 발생 약 50년 뒤 파프스트 자신이 남긴 증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파프스트가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점과 노스케가 구체적인 살해계획을 사전에 승인했다는 주장은 증거의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 독일 연방기록원 역시 파프스트가 노스케와 SPD 지도부의 사전동의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관련 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살해 이후 진행된 군사재판도 논란이 됐다. 사건을 저지른 부대 자체의 군사법원이 수사를 담당했고 주요 책임자들은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노스케는 최종 판결을 승인했으며, 파프스트 자신은 기소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노스케가 두 사람의 암살을 직접 지시했는지와 별개로 사건의 책임자들을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하지 않은 정치적 책임은 그의 역사적 평가에서 중요한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3월 전투
1919년 3월 베를린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파업을 선언하면서 다시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평의회의 권한 확대와 군 개혁 등을 요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무장세력과 정부군 사이의 전투로 번졌다.
노스케는 정부군과 자유군단을 다시 투입했으며, 무장한 상태로 정부군에 저항하는 사람을 현장에서 사살할 수 있도록 하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독일 역사박물관에 따르면 3월 전투와 진압과정에서 약 1,200명이 사망했다.[13]
노스케는 당시 국민의회 연설에서 무장봉기 참가자들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비판했다. 반대로 급진좌파에서는 노스케를 노동자를 군대로 진압한 인물로 규정하면서 블루트노스케라는 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9년의 진압정책은 노스케의 정치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가장 큰 이유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관점에서는 선거와 제헌국민의회의 활동을 보호하고 무장세력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반대편에서는 사회민주당 정부가 구제국 군부와 극우 자유군단에 의존해 노동자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초대 국방장관
1919년 2월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구성되면서 노스케는 초대 국방장관(Reichswehrminister)이 됐다. 그의 중요한 임무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붕괴된 독일군을 새로운 공화국의 군대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됐으며 대규모 징병제와 공군·잠수함 등 여러 군사력 보유가 금지됐다. 노스케는 기존 제국군 장교들과 협력해 새로운 국가방위군(Reichswehr)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는 새 군대를 만들면서 구제국 군 장교단을 대규모로 그대로 활용했다. 군사적 전문성과 조직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장교단 상당수는 공화국과 민주주의 체제에 충성심이 약했고 정치적으로 보수·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노스케는 공산주의 혁명을 국가의 주요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이런 군부를 활용했지만, 우익 군부가 공화국 자체를 공격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4]
그리고 1920년 그 문제가 제대로 터졌다.
카프 폭동과 사임
제1차 세계 대전 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 병력을 줄여야 했으며, 노스케는 1920년 2월 자유군단인 에르하르트 해병여단과 뢰벤펠트 해병여단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반발한 장군 발터 폰 뤼트비츠와 자유군단 세력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1920년 3월 13일 에르하르트 여단이 베를린으로 진입했고, 우익 정치인 볼프강 카프가 자신을 총리로 선언하면서 카프 폭동이 시작됐다.[15]
정부는 국가방위군에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요구했지만 군 지도부 일부는 같은 군인끼리 싸울 수 없다며 사실상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에베르트 대통령과 정부는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1년 전에는 노스케가 군대를 불러 좌파 봉기를 진압했는데, 이번에는 정작 그 군대가 “저쪽도 군인인데 못 쏩니다” 하고 정부를 버린 셈이다.
카프 정부는 노동조합과 정당들이 조직한 대규모 총파업 때문에 행정·교통·통신이 마비되면서 불과 며칠 만에 붕괴했다. 3월 17일 카프가 사임했고 반란은 실패했다.
그러나 노조와 SPD 내부에서는 군부와 자유군단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노스케의 책임을 물었다. 총파업 종료 조건 가운데 하나로 그의 사임이 요구됐고, 노스케는 1920년 3월 22일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16]
노스케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다.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 구제국 군인들을 새 공화국의 군사력으로 사용했지만, 바로 그 군인들 일부가 1년 만에 공화국을 전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노버와 나치 시기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뒤 노스케는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하노버주의 상급주지사(Oberpräsident der Provinz Hannover)로 임명됐다. 그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이 직책을 맡아 지역행정을 담당했다.
이 시기의 노스케는 SPD 내부에서도 비교적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며, 1925년과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군 출신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특히 1932년의 힌덴부르크 지지는 당시 SPD도 아돌프 히틀러의 당선을 막기 위해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던 정치적 상황과 함께 볼 필요가 있다.[17]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노스케는 하노버 상급주지사에서 해임됐다. 이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생활했다.
흥미롭게도 노스케는 과거 공산주의 혁명을 진압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치 체제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나치 정권 아래에서는 전직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서 정치적으로 배제됐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히틀러를 제거하려 했던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들이 정권교체 이후 노스케를 정치담당자 가운데 한 명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1944년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게슈타포는 노스케를 체포했다. 그는 퓌르스텐베르크 수용시설과 베를린 게슈타포 감옥 등에 수감됐으며,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석방됐다.[18]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하노버로 돌아갔으며, 1946년 11월 3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
평가와 논쟁
노스케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회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하나다. 그의 지지자들은 1918~1919년 독일의 중앙정부와 정규군이 사실상 붕괴한 상황에서 무장봉기를 진압하고 제헌국민의회 선거와 공화국 수립을 가능하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왔다. 실제로 당시 독일에서는 좌우 양쪽의 무장세력이 활동했고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군사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반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노스케와 에베르트 정부가 기존 제국군 장교단과 자유군단을 이용해 혁명적 노동운동을 과도하게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공화국에 적대적인 우익 군사세력이 성장할 공간을 제공했다고 지적한다. 노스케 본인도 새로운 국가방위군을 구성하면서 기존 군부의 전문성을 중시했고, 결과적으로 군을 민주적인 공화국 체제에 충분히 통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9]
특히 1919년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살해사건은 노스케의 평가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파프스트가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노스케가 구체적인 계획을 사전에 승인했다는 증거는 파프스트가 수십 년 뒤 남긴 진술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노스케를 두 사람의 직접적인 살해명령자라고 확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노스케가 파프스트의 부대를 포함한 자유군단을 정부군으로 사용했고, 살해사건 뒤 군사재판과 사건처리에 정치적·군사적 책임을 가진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독일 연방기록원은 파프스트가 노스케의 동의를 주장한 기록과 함께 노스케가 사건 관련 판결을 최종 승인했던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20]
또한 노스케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해서 1919년 정부군과 자유군단의 과잉진압까지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자유군단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정부가 직면했던 실제 무장봉기와 국가붕괴 위험을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없다. 결국 노스케의 역사적 위치는 신생 의회공화국을 방어한다는 목표와 그 과정에서 사용한 권위주의적·군사적 수단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여담
- 1868년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서 태어났다.
- 원래 직업은 바구니 제작공이었다.
- 정규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정치인이 아니라 노동자 출신으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들어왔다.
- 젊은 시절 사회민주주의 계열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 1906년 독일 제국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됐다.
- SPD 내부에서는 군사·해군 문제에 밝은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SPD 지도부의 전쟁공채 승인노선을 지지했다.
- 이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는 같은 SPD 의원이면서도 정치적 위치가 정반대에 가까웠다.
- 1918년 킬 수병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됐다.
- 정작 킬에 도착한 뒤 병사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 1918년 12월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업무를 담당했다.
- 1919년 1월 봉기 진압을 맡으면서 자유군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 자신이 남긴 회고록에서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직접 기록했다.
- 그래서 좌파 정치세력에게 블루트훈트·블루트노스케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국방장관이 됐다.
-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한 발데마르 파프스트는 훗날 노스케의 동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 다만 그 주장은 사건 약 50년 뒤 파프스트가 남긴 증언이므로 노스케가 구체적인 살해계획을 사전 승인했다는 사실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살해사건을 담당한 군사재판의 처리 과정에는 노스케도 관여했다.
- 1919년 3월 베를린 무력충돌 진압과정에서는 약 1,200명이 사망했다.
- 1920년 자유군단 해산을 명령했다가 군부와 자유군단 일부가 카프 폭동을 일으켰다.
- 좌파 봉기 진압에 그렇게 잘 써먹었던 군대가 정작 우파 쿠데타 때는 정부 명령을 거부했다.
- 카프 폭동 자체는 군사적으로 진압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총파업 때문에 무너졌다.
- 폭동 이후 노조와 SPD 내부의 압력으로 국방장관에서 사임했다.
- 이후 13년 동안 하노버주의 상급주지사를 지냈다.
- 1933년 나치 집권 후 공직에서 해임됐다.
-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 인물로 지목되어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 노스케 본인이 암살 실행조에 참여한 것은 아니며, 성공 이후 구성될 정치체제에서 역할을 맡길 대상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 1945년 베를린 함락 과정에서 석방됐다.
- 1946년 하노버에서 사망했다.
- 정치인생 전체를 요약하면 공산혁명 막으려고 군부를 붙잡았는데, 그 군부가 1년 뒤 자기 정부를 뒤집으러 온 사람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딜레마를 거의 혼자서 압축해 보여준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독일 역사박물관 - 구스타프 노스케
- Deutsche Biographie - Gustav Noske
- 독일 연방기록원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암살
- 독일 연방기록원 -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관련 기록
- ↑ 독일 역사박물관 - Gustav Noske
- ↑ 독일 연방기록원 -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암살
- ↑ Gustav Noske, 《Von Kiel bis Kapp》, 1920
- ↑ Deutsche Biographie - Gustav Noske
- ↑ 독일 역사박물관 - 제국 시기 노스케의 정치활동
- ↑ Deutsche Biographie -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노스케
- ↑ Deutsche Biographie - 킬에서의 노스케
- ↑ 독일 역사박물관 - 인민대표평의회와 노스케
- ↑ Gustav Noske, 《Von Kiel bis Kapp》, 1920, p.68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9년 1월 봉기
- ↑ 독일 연방기록원 - 두 사람의 암살
- ↑ 독일 연방기록원 - 파프스트의 기록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9년 3월 전투
- ↑ Deutsche Biographie - 노스케와 국가방위군
- ↑ 독일 역사박물관 - 카프-뤼트비츠 폭동
- ↑ 독일 역사박물관 - 노스케의 사임
- ↑ Deutsche Biographie - 하노버 시기의 노스케
- ↑ 독일 역사박물관 - 나치 시기의 노스케
- ↑ Deutsche Biographie - 노스케에 대한 역사적 평가
- ↑ 독일 연방기록원 - 암살 이후 수사와 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