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 |
| 생년월일 | 1871년 8월 13일 |
|---|---|
| 사망일 | 1919년 1월 15일 |
| 국적 | 독일 |
| 출생지 | 독일 제국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 |
| 학력 |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 활동기간 | 1900년~1919년 |
카를 파울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리프크네히트(Karl Paul August Friedrich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는 독일의 사회주의 정치인·변호사이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의 창립을 이끈 인물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회 의원 가운데 전쟁 수행을 위한 추가 전쟁공채에 최초로 홀로 반대표를 던진 정치인으로 유명하며, 전쟁 말기에는 독일의 군주제와 기존 정치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아버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창립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였으며, 카를 역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당 지도부보다 훨씬 급진적인 반군국주의·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SPD 지도부와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었으며 1918년 말 독일공산당(KPD) 창당에 참여했다.[2]
1918년 독일혁명 당시에는 필리프 샤이데만이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독일 공화국을 선포한 지 약 두 시간 뒤 베를린 궁전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을 선포했다. 두 사람이 같은 날 서로 다른 형태의 공화국을 선언한 장면은 독일 제국 붕괴 이후 혁명의 방향을 놓고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얼마나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3]
그러나 불과 두 달 뒤인 1919년 1월 베를린의 혁명적 봉기에 참여한 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체포됐으며, 정부군 측에 속해 있던 근위기병소총사단(Garde-Kavallerie-Schützen-Division)의 군인들에게 살해됐다. 향년 47세. 두 사람의 죽음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사이의 적대관계를 더욱 깊게 만든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됐다.[4]
쉽게 말하면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자의 아들로 태어나 사회민주당 의원이 됐는데, 전쟁 문제로 자기 당 지도부와 싸우다가 결국 공산당을 만들어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공산당을 만든 지 보름 정도 만에 살해됐기 때문에 정작 이후의 독일공산당이 소련식 공산당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훗날 동독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실제 리프크네히트가 살아 있었던 시기의 정치적 입장과 후대의 KPD·SED 체제를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생애
사회민주당 지도자의 아들
리프크네히트는 1871년 8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며, 훗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발전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창립에 참여했다. 카를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주의 정치운동이 일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셈이다.
1890년부터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의 대학에서 법학과 국민경제학을 공부했고, 1897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정치경제학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군 복무와 법조 수습과정을 거친 뒤 1899년 형 테오도어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베를린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5]
1900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이듬해 베를린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미 유럽 최대 규모의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하나였지만 독일 제국의 군주제와 보수적 국가기구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 내부에는 의회와 선거를 통한 개혁을 중시하는 세력부터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좌파까지 다양한 정치적 노선이 존재했다.
리프크네히트는 그중에서도 당내 좌파에 속했다. 특히 독일 제국의 군대와 군국주의가 노동자들의 정치적 저항을 억압하고 국제적인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보면서 청년 사회주의자들에게 반군국주의 교육을 강조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사회주의청년인터내셔널의 회장을 맡았으며, 국제적인 청년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각국 노동자들이 민족주의와 국가 간 경쟁보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전쟁이 일어날 경우 노동자들이 서로 적군이 되어 싸워서는 안 된다는 국제주의적 입장을 강조했다.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와 투옥
1907년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Militarismus und Antimilitarismus)를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군대가 단순히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내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통제하는 정치적 기능도 수행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사회주의 청년운동이 군국주의에 맞서 조직적인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제국 정부는 이 책을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했다. 같은 해 10월 독일 제국법원은 리프크네히트에게 반역적 행위를 준비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했다.[6]
그런데 감옥에 있는 동안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큰 자리에 올라갔다. 1908년 그는 수감 상태에서 프로이센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1912년에는 사회민주당 후보로 독일 제국의회에 진출했다. 정부는 반군국주의 선동한다고 감옥에 넣었는데 유권자들은 감옥에 있는 사람을 의원으로 뽑아버린 셈이다.
리프크네히트는 제국의회에서도 군비확장과 무기산업, 독일 제국의 대외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독일은 영국과의 해군 군비경쟁을 벌이는 한편 유럽 각국이 대규모 상비군과 동맹체제를 구축하던 시기였고, 리프크네히트는 이러한 군비경쟁이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쟁공채에 찬성했던 첫 번째 표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중대한 선택을 맞았다. 전쟁 전까지 SPD는 국제주의와 반전운동을 강조해왔지만, 실제 전쟁이 시작되자 당 지도부는 독일이 러시아 제국 등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가 요구한 전쟁공채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첫 번째 전쟁공채 표결이 이루어졌을 때 SPD 의원들은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리프크네히트는 당내 회의에서는 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의원단의 결정을 따르는 당론에 따라 본회의에서는 찬성표를 던졌다.[7]
그래서 리프크네히트를 단순히 “제1차 세계 대전에 처음부터 혼자 반대한 의원”이라고 쓰면 약간 틀린다. 전쟁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첫 번째 전쟁공채 표결에서는 당론을 따랐다. 혼자 반대표를 던진 것은 그다음 표결부터다.
리프크네히트는 당의 결정에 따랐던 이 선택을 이후 사실상 철회했고, 전쟁 반대활동을 공개적으로 강화했다. 그는 전쟁이 독일 노동자의 이해를 위한 방어전쟁이 아니라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해 벌어진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제국의회에서 혼자 반대표를 던지다
1914년 12월 2일 추가 전쟁공채 승인을 위한 두 번째 표결이 열렸다. 이번에는 리프크네히트가 당론을 거부하고 제국의회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 SPD 의원단도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독일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8]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SPD 내부에서도 반전파가 늘어났다. 1915년 3월의 다음 전쟁공채 표결에서는 오토 뤼레가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반대표를 던졌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민주당 의원과 활동가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리프크네히트는 이 시기에 “주적은 국내에 있다!”(Der Hauptfeind steht im eigenen Land!)라는 구호로 알려진 반전 입장을 제시했다. 외국의 노동자와 군인을 민족적 적으로 규정하기보다 전쟁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자국의 정치·경제적 권력구조에 먼저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입장은 독일 제국이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 행동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들 역시 전쟁 발발 후 각자의 정부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쟁 이전 국제사회주의 운동에서 주장했던 노동자 국제주의는 현실의 전쟁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
1915년 리프크네히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프란츠 메링, 클라라 체트킨 등을 비롯한 SPD 내 반전 좌파들과 함께 그루페 인터나치오날레(Gruppe Internationale)를 조직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도 국제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배포한 스파르타쿠스 편지에서 이름을 따 스파르타쿠스단 또는 스파르타쿠스 그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9]
이 이름은 고대 로마에서 노예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에서 가져왔다. 당시 독일 정부 입장에서 보면 전쟁 중에 “외국군이 아니라 우리 정부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이 지하 반전조직까지 만들고 있었으니 당연히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1915년 2월 리프크네히트는 군에 다시 소집됐다. 이미 40대였기 때문에 전투병으로 배치되지는 않았고 군사시설 건설 등을 담당하는 노동부대에서 복무했다. 군 복무 중에도 제국의회와 프로이센 의회 참석은 허용됐지만 다른 정치활동에는 제한이 가해졌다.
SPD 지도부와의 관계 역시 악화됐다. 결국 1916년 리프크네히트는 SPD 제국의회 의원단에서 제명됐다. 전쟁에 대한 당 지도부의 입장을 둘러싼 갈등은 이후 SPD 자체의 분열로 이어졌고, 1917년 전쟁에 반대한 당원들이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자 스파르타쿠스 그룹도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한 채 여기에 참여했다.
1916년 반전시위와 다시 감옥으로
1916년 5월 1일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서 열린 반전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것을 주장했으며 현장에서 체포됐다.
같은 해 6월 그는 반역죄로 2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는 오히려 형량이 4년 1개월로 늘어났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리프크네히트는 교도소에 수감됐으며 여러 정치·사회 관련 글을 작성했다.[10]
그러나 전쟁의 상황은 점점 독일에 불리해졌다. 식량난과 전쟁피로가 심해지고 1918년 독일의 군사적 패배가 사실상 확정되면서 정치범에 대한 사면 요구도 커졌다. 1918년 10월 23일 리프크네히트는 일반사면으로 석방됐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쟁 반대한다고 잡아넣었는데 감옥에서 나오고 몇 주 뒤 제국 자체가 무너졌다.
독일혁명과 공산당 창당
1918년 11월 9일
1918년 가을 독일 해군 수병들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에서 노동자·병사평의회가 만들어졌고, 독일 제국의 정치체제는 빠르게 붕괴했다. 11월 9일에는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가 발표됐으며, 베를린에서는 수많은 노동자와 군인이 거리로 나왔다.
같은 날 오후 2시 무렵 SPD 정치인 필리프 샤이데만은 제국의회 건물에서 독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SPD 지도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해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방향을 지향했다.
약 두 시간 뒤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궁전에서 별도의 연설을 통해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을 선언했다. 그는 노동자·병사평의회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야 하며 독일혁명이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같은 날 같은 도시에서 두 시간 차이로 공화국을 두 개 선포한 셈이지만 실제로 국가가 두 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두 선언은 독일혁명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를 두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SPD는 보통선거를 통한 국민의회와 의회공화국을 추진했고, 리프크네히트와 스파르타쿠스단은 노동자·병사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다. 이후 독일혁명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갈등 가운데 하나가 이 두 방향 사이에서 벌어졌다.
독일공산당 창당
11월 혁명 이후 스파르타쿠스단은 기관지 《붉은 깃발》(Die Rote Fahne)을 발행했으며,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국제공산주의자 등이 모여 독일공산당(KPD)을 창당했다. 리프크네히트는 창당대회에서 독립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별도의 혁명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다만 초창기 KPD의 내부도 하나의 의견으로 완전히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인지를 두고 당내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선거에 참여해 의회를 정치적 선전과 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창당대회에서는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는 당내 다수가 승리했다.[13]
즉 리프크네히트가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최종 목표로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니까 선거 같은 건 무조건 싫어했겠지”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틀린다. 그는 당시 선거와 의회를 혁명운동에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19년 1월과 죽음
1월 봉기
1919년 1월 4일 프로이센 정부가 독립사회민주당 소속 베를린 경찰총장 에밀 아이히호른을 해임하면서 베를린의 혁명세력이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독립사회민주당과 혁명적 노동자 대표, 독일공산당 등이 참여했으며 일부 시위대는 신문사 건물과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이 사건은 흔히 스파르타쿠스 봉기라고 불리지만, 실제 봉기에 참여한 세력은 스파르타쿠스단 출신 공산주의자만이 아니었다. 독일 연방정치교육원은 스파르타쿠스 세력이 봉기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때문에 단순히 스파르타쿠스 봉기로 부르는 것이 사건의 복잡한 구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 설명한다.[14]
리프크네히트는 독립사회민주당의 게오르크 레데부어 등과 함께 혁명위원회에 참여했고, 위원회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정부가 퇴진했다고 선언하며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세력은 구체적인 군사계획과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중요한 점은 독일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도 이 행동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는 것이다. 리프크네히트가 혁명위원회에 참여한 것과 달리 당 중앙부의 일부 지도자는 즉각적인 정권 장악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도 봉기의 준비와 지도방식에 비판적이었으며, 1월 8일 KPD 지도부는 리프크네히트와 빌헬름 피크가 혁명위원회에서 물러날 것을 결정했다.[15]
정부 측에서는 SPD의 구스타프 노스케가 군사력을 동원해 봉기를 진압했다. 정부군과 자유군단이 베를린의 점거지역을 공격했고, 1월 중순까지 봉기는 사실상 진압됐다. 전투 과정에서는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16]
체포와 살해
봉기가 진압된 뒤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포를 피해 베를린의 여러 장소를 옮겨 다녔다. 두 사람은 베를린을 떠나라는 주변의 권유를 거절하고 시내에 남았다.
1919년 1월 15일 두 사람은 빌머스도르프의 한 아파트에서 시민자경단에 의해 발견되어 체포됐고, 근위기병소총사단의 본부가 있던 에덴 호텔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심문을 받은 뒤 사단 참모장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지시에 따라 살해됐다.[17]
리프크네히트는 호텔 밖으로 끌려나온 뒤 군인에게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했고, 차량으로 티어가르텐으로 이동한 뒤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군인들은 이후 그가 도주를 시도하다 사살됐다고 발표했지만, 오늘날 독일 역사학계와 연방기록원 자료에서는 계획된 살인으로 다룬다.[18]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같은 날 별도로 살해됐으며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에 버려졌다. 리프크네히트의 시신은 비교적 빨리 발견됐지만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수개월 뒤 발견됐다.
두 사람을 살해한 군인들에 대한 재판은 당시 근위기병소총사단의 군사법원에서 이루어졌고, 주요 관계자 대부분은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 판결은 당시에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건을 지시한 파프스트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19]
파프스트는 훗날 자신이 살해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노스케 및 정부 지도부가 이를 알고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도 남겼다. 독일 연방기록원은 그의 문서들을 공개하고 있지만, 당시 정부 지도부가 구체적인 살해계획을 어느 수준까지 사전에 알고 승인했는지를 둘러싼 해석은 별도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20]
리프크네히트의 장례식은 1919년 1월 25일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에서 열렸으며 대규모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죽음과 룩셈부르크의 암살은 독일 급진좌파가 SPD 정부를 적대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됐다.
정치적 입장
반군국주의
리프크네히트의 정치활동에서 가장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반군국주의였다. 그는 군대를 단순히 국가방위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기존 정치·경제질서를 유지하는 권력기관으로 이해했다. 특히 청년 노동자들이 군 복무를 통해 국가의 군사적 가치관에 편입되는 것을 경계했고, 사회주의 운동이 이에 맞서는 별도의 정치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포함해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자국 정부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자, 리프크네히트는 이를 국제주의 원칙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그가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사건이 유명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당시 독일 내부에서는 전쟁 초기의 애국주의 분위기가 강했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조차 정부와 일시적인 정치적 휴전을 유지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같은 당의 국회의원이 공개적으로 전쟁예산을 거부하는 행동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동반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리프크네히트는 자본주의 경제와 군주제·군국주의 체제를 부분적인 개혁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과 혁명을 통해 정치·경제체제를 사회주의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노선을 후대의 소련이나 동독의 국가체제와 단순히 동일시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리프크네히트가 사망한 것은 1919년 1월로,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의 정치체제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이었다. 독일공산당 역시 그가 죽은 뒤 수년에 걸쳐 여러 지도부와 노선투쟁을 거친 다음 1920년대 중후반부터 코민테른과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또한 초기 KPD 내부에서도 선거 참여와 혁명전술, 조직방식 등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컸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항상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도 아니며, 1919년 1월 봉기 당시 리프크네히트의 행동을 룩셈부르크와 당 지도부 일부가 비판하기도 했다.
따라서 “독일공산당 창립자니까 나중의 동독 체제를 그대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30년 뒤의 역사를 1919년 사람에게 억지로 붙이는 셈이다. 반대로 그가 의회민주주의를 최종 정치목표로 삼았던 인물도 아니다. 그의 기본적인 정치적 목표가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중심의 정치체제였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사후 영향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은 독일 좌파정치의 역사에서 강한 상징성을 갖게 됐다. 독일공산당은 두 사람을 혁명운동의 순교자로 기념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매년 1월 이들의 묘소를 찾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동독에서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혁명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로 국가 차원에서 기념됐다. 베를린과 동독 각지에서 거리와 학교·공공시설 등에 두 사람의 이름이 사용됐으며, 매년 1월에는 집권당인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공식적인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추모행진을 개최했다.
흥미롭게도 이 공식행사는 동독 말기에 오히려 반정부 시위와 충돌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동독의 인권·평화운동가들은 공식 추모행진에 참가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적 자유에 관한 문구를 적은 현수막을 들려고 했고, 동독 당국은 참가자 약 120명을 체포했다.[21]
즉 정부가 혁명가들을 기념하는 공식행사를 열었는데, 반체제 인사들이 “그 혁명가들이 말한 자유부터 지켜라”라고 나왔다가 체포된 셈이다. 동독 말기의 정치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됐다.
독일 통일 이후에도 매년 1월 베를린에서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오늘날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크게 다르다. 반전운동과 군국주의 비판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1918~1919년 의회공화국 대신 혁명적 사회주의 체제를 추진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특히 1919년 1월 봉기에서 리프크네히트가 혁명위원회에 참여해 정부의 퇴진을 선언한 행동은 그의 정치활동에서 중요한 논쟁점이다. 한편 그의 살해는 봉기의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근위기병소총사단 장교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불법적인 살인으로 오늘날 독일의 주요 역사기관에서 다뤄진다.[22]
여담
- 본명은 카를 파울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리프크네히트다.
- 아버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로 활동했다.
- 형 테오도어 리프크네히트 역시 변호사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 1899년 형과 함께 베를린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 1900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07년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때문에 1년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 감옥에 있는 동안인 1908년 프로이센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12년 독일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제1차 세계 대전 첫 번째 전쟁공채 표결에서는 당론에 따라 찬성했다.
- 1914년 12월 2일 두 번째 전쟁공채 표결에서 제국의회 의원 중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 이후 반전 의원들이 늘어나면서 다음 표결부터는 혼자만의 반대표가 아니게 됐다.
- 1915년 전쟁 중 군에 징집됐지만 전투부대가 아닌 노동부대에서 복무했다.
- 1916년 SPD 의원단에서 제명됐다.
- 같은 해 5월 1일 베를린에서 반전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 항소심에서 징역형이 오히려 늘어나 4년 1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 1918년 10월 독일의 패전이 임박하면서 사면으로 석방됐다.
- 1918년 11월 9일 필리프 샤이데만이 독일 공화국을 선포한 약 두 시간 뒤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을 선포했다.
- 스파르타쿠스단의 이름은 고대 로마의 노예반란 지도자 스파르타쿠스에서 유래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독일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 KPD 창당대회에서는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제헌의회 선거 참여를 주장했지만 당내 다수에게 패했다.
- 1919년 1월 봉기에서는 혁명위원회에 참여해 에베르트 정부의 퇴진을 선언했다.
- 이 행동은 KPD 지도부 내부에서도 논란이 됐고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 등이 비판했다.
-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날 체포되어 살해됐다.
- 리프크네히트는 티어가르텐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에 버려졌다.
- 암살을 지시한 발데마르 파프스트는 생전에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훗날 자신의 역할을 인정했다.
- 동독에서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를 사회주의 혁명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기념했다.
- 베를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카를리프크네히트슈트라세(Karl-Liebknecht-Straße)가 현재도 존재한다.
- 초대 부인 율리아 파라디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율리아가 1911년 사망한 뒤 1912년 러시아 출신 미술사학자 조피 리스와 재혼했다.[23]
- 제1차 세계 대전 반전운동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실제 정치활동의 최종 목표는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 리프크네히트가 만든 KPD와 1920년대 후반 이후 에른스트 텔만 체제의 KPD 사이에는 상당한 정치적·조직적 변화가 있었다. 창당 2주 만에 죽은 사람에게 이후 30년치 독일 공산주의 역사를 전부 책임지게 하면 좀 억울하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독일 역사박물관 - 카를 리프크네히트
- Deutsche Biographie - Karl Liebknecht
- 독일 역사박물관 - 스파르타쿠스단
- 독일 역사박물관 -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암살
- 독일 연방기록원 - 암살 관련 기록
- ↑ 독일 역사박물관 - Karl Liebknecht
- ↑ Deutsche Biographie - Karl Liebknecht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8년 11월 9일
- ↑ 독일 역사박물관 -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암살
- ↑ Deutsche Biographie - Karl Liebknecht의 학업과 법조경력
- ↑ 독일 역사박물관 - 1907년 10월 12일 리프크네히트 판결
- ↑ 독일 연방의회 - 1914년 전쟁공채 표결에 관한 역사적 기록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4년 12월 전쟁공채 반대
- ↑ 독일 역사박물관 - 스파르타쿠스단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6년 체포와 투옥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1918년 11월 9일 두 개의 공화국 선언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KPD 창당대회
- ↑ 독일 역사박물관 - KPD 창당과 제헌의회 선거 보이콧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1919년 1월 봉기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1919년 1월 리프크네히트와 KPD 지도부의 갈등
- ↑ 독일 역사박물관 - 1919년 1월 봉기
- ↑ 독일 연방기록원 -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 암살
- ↑ 독일 역사박물관 - 암살 과정
- ↑ 독일 역사박물관 - 암살 이후 재판
- ↑ 독일 연방기록원 -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기록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1988년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추모행진과 동독 반체제운동
- ↑ 독일 연방기록원 - 암살 사건
- ↑ Deutsche Biographie - Karl Liebknecht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