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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체트킨
생년월일 1857년 7월 5일
사망일 1933년 6월 20일
국적 독일
출생지 작센 왕국 비더라우
직업 정치인, 언론인, 교사,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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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6월 20일(1933-06-20)부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사회주의 정치인·언론인·여성운동가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여성운동을 이끌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에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독일공산당(KPD)에 합류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KPD 소속 독일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1]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은 세계 여성의 날의 창설을 국제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체트킨은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케테 둥커와 함께 매년 국제적인 여성의 날을 개최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됐으며, 이듬해인 1911년 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스위스 등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 여성의 날 행사가 열렸다.[2]

다만 체트킨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모든 형태의 여성운동과 같은 입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계급사회와 자본주의의 문제와 연결해 이해했고, 노동자 여성의 해방은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적 사회변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대의 이른바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협력문제를 놓고 지속적으로 대립했다.[3]

그렇다고 여성의 권리를 부차적인 문제로 무시한 것은 아니다. 여성의 직업·교육 기회 확대와 법적 평등, 동일한 정치적 권리, 특히 여성의 보통·평등선거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체트킨에게 여성해방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조직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문제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정부의 전쟁수행을 지지한 SPD 지도부에 반대하면서 국제주의적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스파르타쿠스 운동에 가담했고, 전후에는 독일공산당의 지도적인 정치인이 됐다. 그러나 KPD에 들어간 뒤에도 당 지도부와 항상 같은 입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당내 극좌노선을 비판했고, 후기에는 코민테른과 KPD의 스탈린화 과정도 내부적으로 비판했다.[4]

1923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이후의 이탈리아를 분석하며 파시즘을 단순한 군사쿠데타나 소수 폭력집단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불안으로 몰락한 중간계층까지 끌어들이는 대중운동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에 맞서 서로 다른 노동자 조직들이 공동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1932년 8월, 75세의 나이로 독일 국회의 최고령 의원 자격으로 국회를 개회하면서 다시 나타났다.[5]

세계 여성의 날 만든 사람 → 사회민주당 좌파 → 반전운동 → 공산당 의원 → 75살 먹고 나치 의원들 앞에서 반파시즘 연설. 인생을 꽤 빡세게 살았다.

생애

어린 시절과 사회주의 운동

체트킨은 1857년 7월 5일 작센 왕국의 비더라우(Wiederau)에서 클라라 요제피네 아이스너(Clara Josephine Eißn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트프리트 아이스너는 마을의 교사이자 교회 음악가였고, 어머니 요제피네 비탈레는 당시 독일의 시민계급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인물이었다.[6]

1872년 가족이 라이프치히로 이주한 뒤 체트킨은 여성운동가 아우구스테 슈미트가 운영하던 여성교사 양성기관에서 1874년부터 1878년까지 공부했다. 당시 독일에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전문직 교육의 범위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교사교육은 비교적 중요한 여성의 직업 진출 경로였다.

이곳에서 체트킨은 초기 독일 여성운동의 사상과 접촉하는 동시에 라이프치히의 노동자교육단체와 사회주의 정치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트 베벨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의 강연을 접했고, 러시아 출신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는 토론모임에도 참여했다.[7]

1878년 체트킨은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SAP)에 가입했다. 이 당은 훗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발전한다.

문제는 하필 그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정부가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단체와 출판물·집회가 광범위하게 제한됐고, 체트킨 역시 정규 교사로 취업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작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오시프 체트킨과 파리 망명

라이프치히에서 체트킨은 러시아 제국 출신 사회주의자 오시프 체트킨(Ossip Zetkin)을 만났다. 오시프는 1880년 독일에서 추방됐고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클라라는 1882년 취리히를 거쳐 파리로 이동해 오시프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법적인 혼인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클라라는 오시프의 성인 체트킨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평생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8]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 막심 체트킨(Maxim Zetkin, 1883~1965)
  • 콘스탄틴 체트킨(Konstantin Zetkin, 1885~1980)

둘째 아들은 일반적으로 코스티야 체트킨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훗날 로자 룩셈부르크와 연인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체트킨은 정치적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는데 친구 아들이랑 친구가 연애하는 상당히 묘한 관계까지 겹쳤다.

파리에서 체트킨 가족의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클라라는 번역과 글쓰기 등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했으며, 오시프가 오랜 병을 앓다가 1889년 사망한 뒤에는 두 아들을 혼자 부양해야 했다.[9]

제2인터내셔널

1889년 파리에서는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대표들이 모여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체트킨은 이 창립대회의 준비에 참여했고, 대회에서 노동자 여성의 문제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여성도 직업과 사회생활에서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여성들이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

체트킨의 핵심적인 주장은 “모든 여성에게 동일한 하나의 여성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자본가 계층 여성과 노동자 여성은 성별에 따른 법적·사회적 차별을 공유할 수 있지만 경제적 이해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성해방운동 역시 계급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체트킨의 여성운동 전체를 관통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평등》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된 뒤 체트킨은 1891년 독일로 돌아와 슈투트가르트에 정착했다.

1892년부터 그는 사회민주주의 여성신문 《평등》(Die Gleichheit)의 편집을 맡았다. 이 잡지는 노동자 여성들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가장 중요한 언론매체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11]

《평등》은 단순히 당의 정치선전만 싣는 신문은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환경, 육아와 교육, 가정생활,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내용을 다뤘다.

1914년에는 발행부수가 약 12만 4천 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으며, 독일뿐 아니라 국제 사회주의 여성운동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2]

체트킨은 이 잡지의 편집을 약 25년 동안 담당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여성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됐다.

여성참정권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여성에게 선거권이 없었으며, 지역에 따라 여성의 정치단체 가입과 정치집회 참여조차 법적으로 제한됐다. 프로이센 등의 규제는 1908년 독일의 통일된 결사법이 시행될 때까지 이어졌다.

체트킨은 노동자 여성의 조직화와 함께 보통·직접·평등선거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SPD는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에 여성의 완전한 시민적 평등을 포함했고, 체트킨 역시 당내에서 여성참정권 요구를 강하게 추진했다.[13]

그러나 체트킨은 여성참정권만 획득하면 여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선거권은 반드시 필요한 정치적 권리이지만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유지되는 한 노동자 여성의 경제적 종속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시민계급 여성운동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시민계급 여성운동에서는 여성이라는 공통된 위치를 바탕으로 계급을 넘어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했지만, 체트킨은 노동자 여성과 자본가 계층 여성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자니까 일단 다 같은 편이라는 논리를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체트킨은 시민계급 여성운동과의 조직적 협력에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독립적인 조직과 정치노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제1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가 열렸다.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여성운동 대표들이 참가했으며, 체트킨은 새로 만들어진 국제여성사무국의 책임자로 선출됐다. 그의 《평등》은 국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기관지 역할도 맡았다.[15]

이 회의에서는 여성참정권과 노동자 여성의 정치조직화 등이 주요 문제로 논의됐다.

체트킨은 여성들이 별도의 비정치적 여성단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여성의 날

1910년 코펜하겐

1910년 8월 26~27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제2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가 열렸다. 17개국에서 100명이 넘는 대표가 참가했다.

체트킨과 독일의 사회주의자 케테 둥커는 각국에서 매년 여성의 날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 사회주의 여성들이 이미 실시하고 있던 여성의 날 행사가 중요한 선례가 됐으며, 결의안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16]

당시 결의안의 핵심 요구 가운데 하나는 여성참정권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때 체트킨이 3월 8일이라는 날짜를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10년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각국에서 국제적인 여성의 날을 개최한다는 원칙이었고, 구체적인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첫 번째 국제 여성의 날

첫 국제 여성의 날 행사는 1911년 3월 19일 독일과 오스트리아·덴마크·스위스 등에서 열렸다.

당시 주요 구호 가운데 하나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이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 약 100만 명 이상의 여성이 관련 시위와 행사에 참가한 것으로 설명한다.[17]

현재의 3월 8일은 이후 러시아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결합하면서 정착됐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국제 여성의 날에 전쟁과 식량난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이는 러시아 2월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됐다.

따라서 “클라라 체트킨이 1910년에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라고 쓰면 틀린 설명이다.

정확히는 체트킨 등이 국제 여성의 날의 정례 개최를 제안했고, 3월 8일이라는 날짜는 이후 정착했다.

오늘날에는 국제연합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와 단체에서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회의 하나에서 낸 결의안이 100년 넘게 살아남아서 전 세계 기념일이 된 셈이다.

제1차 세계 대전

SPD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정부의 전쟁공채에 찬성하고 전쟁 기간 동안 국내 정치적 갈등을 자제하는 이른바 성내평화정책(Burgfriedenspolitik)을 채택했다.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과 함께 이러한 노선에 반대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이 각국 정부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를 통해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1915년에는 스위스 베른에서 국제사회주의여성 반전회의를 조직했다. 전쟁 중 서로 적대국이 된 국가들의 사회주의 여성들을 다시 모아 국제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하려는 시도였다.

독일로 돌아온 체트킨은 이 활동과 관련해 체포됐으며 몇 달 동안 구금됐다.[19]

스파르타쿠스 운동

전쟁에 대한 갈등으로 SPD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면서 체트킨은 당내 반전좌파와 함께 활동했다.

1916년에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형성에 참여했으며, 1917년 반전파와 당내 좌파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자 여기에 가입했다.[20]

이 과정에서 체트킨은 오랫동안 편집해온 《평등》의 편집권을 잃었다.

SPD 지도부는 체트킨의 정치적 노선과 결별했고, 그가 약 25년에 걸쳐 키워온 여성운동 기관지에서 물러나게 했다. 체트킨에게는 상당한 정치적·개인적 타격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관계는 이 시기에도 계속됐다.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이면서 오랜 친구였고 편지를 통해 정치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가족생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21]

독일공산당

KPD에 합류하다

1918년 말 독일혁명이 일어나고 스파르타쿠스단을 중심으로 독일공산당이 창당됐다.

하지만 체트킨은 KPD의 창당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창립 당시 즉시 입당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를 로자 룩셈부르크나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같은 의미에서 KPD 창립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고, 같은 해 3월 레오 요기헤스까지 살해된 뒤 체트킨은 1919년 3월 KPD에 가입했다.[22]

그는 당 지도부에 참여하고 여성신문 《공산주의 여성》(Die Kommunistin)을 편집했다.

1920년 총선에서는 KPD 소속으로 독일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1933년까지 국회의원직을 유지했다.

같은 해 7월 2일 처음으로 독일 국회에서 연설했으며, 소련과의 연대를 주장했다.[23]

레닌과 소련

체트킨은 1920년 처음 소련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교류했다. 특히 레닌과는 여성문제와 혁명운동에 관해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으며, 훗날 체트킨은 이 대화를 회고록 형태로 기록했다.

1921년에는 콜론타이 등과 함께 코민테른 내부의 국제적인 공산주의 여성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참여했고, 국제여성사무국과 잡지 《공산주의 여성 인터내셔널》(Die Kommunistische Fraueninternationale)을 이끌었다.[24]

1922년부터 1933년까지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체트킨은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이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높은 상징적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체트킨이 이후 소련과 코민테른 지도부의 모든 정책에 동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KPD 지도부와의 갈등

1920년대 KPD에서는 혁명전략과 당 운영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됐다.

체트킨은 처음에는 파울 레비와 가까운 상대적으로 신중한 노선을 지지했고, 이후에는 하인리히 브란들러아우구스트 탈하이머 등을 지지했다. 그는 즉각적인 혁명행동을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당내 극좌파와 충돌했다.[25]

1920년대 후반 에른스트 텔만 지도부 아래 KPD가 코민테른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자 체트킨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최신 Deutsche Biographie는 체트킨이 당내에서 KPD의 극좌적 전환과 코민테른의 스탈린화 과정을 비판했다고 설명한다. 다만 그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KPD와 코민테른을 떠나지는 않았다.[26]

이 부분 때문에 체트킨을 단순히 “스탈린 충성파 공산주의자”라고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고, 반대로 소련 공산주의와 결별한 반스탈린주의 정치인으로 묘사하는 것도 과장이다.

소련과 볼셰비키 혁명 자체는 끝까지 지지했지만, 1920년대 후반 공산주의 운동의 운영방식과 노선에는 상당한 비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에 가깝다.

파시즘에 대한 분석

1923년 《파시즘에 맞선 투쟁》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집권하자 유럽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파시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체트킨은 1923년 6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파시즘에 맞선 투쟁》이라는 보고를 발표했다.[27]

그는 파시즘을 단순히 기존 보수정부의 폭력이나 군부 쿠데타와 동일하게 보지 않았다.

체트킨의 분석에서 파시즘의 특징은 경제·사회적 위기로 몰락하거나 불안을 느끼던 중산층·소상공인·농민·지식인 등의 일부를 대중적으로 동원한다는 점이었다. 파시즘 지도부가 대기업·기존 엘리트와 협력하면서도 반체제적인 언어와 대중운동의 형태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따라서 파시즘의 지지자들을 모두 단순히 고정된 적으로 취급하기보다 파시즘에 끌려간 사회집단의 불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분석하고 이들을 정치적으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로 다른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이 파시즘에 맞서 공동전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8]

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KPD가 SPD를 주요 적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며 취한 극좌노선과 상당한 긴장을 가진다.

파시스트를 욕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고 왜 사람들이 거기에 몰리는지도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당시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비교적 구체적인 파시즘 분석이었다.

1932년 마지막 국회 연설

1932년 독일 정치에서는 나치당의 세력이 급격히 확대됐다.

그해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원내 최대정당이 됐고, 독일공산당 역시 의석을 크게 늘렸다. 체트킨은 75세의 고령과 심각한 건강문제에도 불구하고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독일 국회의 규정에 따라 새 국회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이 임시 의장을 맡았다.

따라서 1932년 8월 30일 공산주의자 클라라 체트킨이 나치당이 제1당인 독일 국회를 개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9]

체트킨은 개회연설에서 파시즘의 위험을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공동전선을 주장했다.

그가 임시의장석에 앉아 있던 회의에서 이후 정식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인물은 다름 아닌 나치당의 헤르만 괴링이었다.

국회 문을 연 사람은 75세 공산주의 여성운동가인데, 그 뒤 의장 자리를 넘겨받은 사람이 괴링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정치상황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놓은 수준이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이 연설에서 체트킨이 다가오는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 조직들의 단결을 촉구했다고 설명한다.[30]

불과 약 5개월 뒤인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됐다.

여성해방에 대한 사상

사회주의와 여성해방

체트킨의 여성운동은 오늘날의 여성운동과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 사상적 출발점은 명확하게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는 여성 억압의 중요한 원인을 경제적 종속과 계급사회에서 찾았다. 노동자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면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적으로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요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 여성의 노동권
  • 동일한 시민적·정치적 권리
  • 보통·평등선거권
  • 여성 노동자의 조직화
  • 여성의 교육과 직업 기회 확대
  • 모성 및 노동자 보호
  • 여성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참여

하지만 체트킨은 이러한 개혁만으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의 법적 평등을 이루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여성은 임금노동자로 착취받을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여성해방은 사회주의적 사회변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31]

시민계급 여성운동과의 갈등

체트킨은 당시 독일의 시민계급 여성운동과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시민계급 여성운동에서도 교육권·재산권·직업권과 여성참정권 등을 요구했지만, 체트킨은 계급을 초월한 여성연대가 노동자 여성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대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릴리 브라운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 내부에서 시민계급 여성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의견에도 반대했다.[32]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체트킨이 여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보다 계급적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며, 반대로 노동계급 여성의 경제적 조건을 여성운동의 중심적인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따라서 체트킨을 단순히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그가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대표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그의 정치적 입장에 가장 가깝다.

말년

체트킨은 1920년대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당뇨와 여러 만성질환을 앓았고 치료를 위해 소련의 요양시설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독일과 소련을 오가며 국회의원과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활동을 계속했다.

1933년 1월 나치가 집권한 뒤 독일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KPD의 정치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체트킨은 당시 이미 소련에 머물고 있었으며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3년 6월 20일 모스크바 근교 아르한겔스코예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5세.[33]

그의 유골은 화장된 뒤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됐다.

독일 연방의회는 체트킨이 스탈린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음에도 사망 당시 스탈린이 직접 장례행렬에서 그의 유골함을 운반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소개한다.[34]

사후 영향

체트킨은 이후 국제 사회주의·공산주의 여성운동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기념됐다.

특히 동독에서는 국가적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교와 거리·공원·공공기관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었고 여성에게 수여하는 국가훈장인 클라라 체트킨 메달도 만들어졌다.

동독의 10마르크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된 적도 있다.

그러나 동독에서의 국가적 기념은 체트킨의 실제 정치사상 전체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생전에 공산주의 운동의 중앙집권화와 스탈린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나타냈으며, 후기 KPD 지도부와도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독일 통일 이후에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반전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있다.

그의 가장 광범위한 유산은 무엇보다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10년 체트킨과 케테 둥커 등이 제안한 국제 여성의 날은 처음에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여성참정권 투쟁일이었지만, 이후 정치적 성격과 참가범위가 크게 확대됐다.

오늘날 3월 8일은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운동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논의하는 날로 자리 잡았다.

본인은 자본주의 타도를 전제로 만든 정치투쟁의 날인데 100여 년 뒤에는 기업들이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할인쿠폰”을 뿌리고 있다는 점은 역사의 묘한 부분이다.

평가와 논쟁

체트킨은 독일 여성운동에서 여성참정권과 노동자 여성의 조직화를 국제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킨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평등》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자의 정치교육과 조직화를 장기간 추진했고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와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는 단순한 여성운동가만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사회주의 국제주의를 바탕으로 반전운동을 벌였고, 전후에는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KPD와 코민테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보다 사회주의 혁명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적 여성운동과 체트킨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또한 체트킨은 볼셰비키 체제와 코민테른을 지지했고 1922년 소련에서 열린 사회혁명당원 재판에서는 코민테른을 대표해 검사 역할의 정치적 연설을 하기도 했다.[35]

반면 1920년대 후반에는 KPD의 극좌노선과 코민테른의 스탈린화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으며, 1932년에는 나치의 확대에 맞서 노동자 조직의 공동전선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결국 체트킨의 정치적 생애는

사회주의 여성운동 → 반전 좌파 → 공산주의 운동 → 코민테른 내부의 비판적 원로

라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하나의 문장으로 “여성의 날 만든 페미니스트”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이 사람 정치경력이 너무 길다.

여담

  • 본명은 클라라 요제피네 아이스너다.
  • 1857년 작센의 비더라우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마을 교사였고 어머니는 초기 독일 여성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 여성교사 교육을 받았다.
  • 1878년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에 가입했다.
  • 1882년 오시프 체트킨을 따라 파리로 이주했다.
  • 오시프와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인 체트킨을 사용했다.
  •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막심과 콘스탄틴이 있었다.
  • 둘째 아들 콘스탄틴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연인관계를 맺었다.
  • 로자 룩셈부르크와 클라라 체트킨은 평생 가까운 친구였다.
  •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노동자 여성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 1892년부터 약 25년 동안 사회주의 여성잡지 《평등》을 이끌었다.
  • 1914년 《평등》의 발행부수는 약 12만 4천 부에 달했다.
  • 1890년대 후반 화가 프리드리히 준델과 결혼했다. 결혼연도는 자료에 따라 1897년과 1899년으로 다르게 기록되며, 최신 Neue Deutsche Biographie는 1899년으로 적고 있다.
  • 준델은 체트킨보다 상당히 연하였다.
  • 두 사람은 1928년 이혼했다.
  • 1907년 국제사회주의여성사무국의 책임자가 됐다.
  • 1910년 케테 둥커와 함께 국제 여성의 날 개최를 제안했다.
  • 체트킨이 처음부터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 첫 국제 여성의 날은 1911년 3월 19일 독일 등에서 열렸다.
  • 여성참정권은 초기 국제 여성의 날의 핵심 요구였다.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뒤 SPD의 전쟁정책에 반대했다.
  • 1915년 국제사회주의여성 반전회의를 조직한 뒤 독일에서 체포됐다.
  • 스파르타쿠스단의 활동에 참여했다.
  • 1917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 이 과정에서 《평등》 편집권을 잃었다.
  • 독일공산당의 창립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된 이후인 1919년 3월 KPD에 가입했다.
  • 따라서 KPD 창립자라고 부르면 정확하지 않다.
  •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국회의원을 지냈다.
  • 블라디미르 레닌과 개인적으로 교류했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공산주의 여성운동을 조직했다.
  • 1923년 파시즘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 파시즘을 단순히 군부나 테러집단이 아니라 사회적 불만을 가진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운동으로 분석했다.
  • 1920년대 후반 KPD와 코민테른의 극좌화·스탈린화를 내부적으로 비판했다.
  • 그러나 KPD나 코민테른을 탈퇴하지는 않았다.
  • 1932년 75세의 나이로 독일 국회의 최고령 의원이 됐다.
  • 그해 8월 30일 최고령 의원 자격으로 국회를 개회했다.
  • 당시 원내 제1당은 나치당이었다.
  • 체트킨은 개회연설에서 파시즘에 맞선 노동자 공동전선을 요구했다.
  • 그리고 바로 그 국회의 정식 의장으로 헤르만 괴링이 선출됐다.
  • 공산주의 여성운동가가 나치 제1당 국회의 임시의장으로 개회하고 괴링에게 의장석을 넘겨준 것이다. 바이마르 말기 정치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장면.
  • 나치 집권 뒤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소련에서 생활했다.
  • 히틀러가 총리가 된 지 약 5개월 뒤인 1933년 6월 사망했다.
  • 유골은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 동독에서는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국가적인 기념 대상이 됐다.
  • 동독의 지폐에도 얼굴이 들어갔다.
  • 오늘날에는 세계 여성의 날의 창설과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 하지만 “3월 8일 만든 사람”이라고만 설명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국제 여성의 날 자체를 제안한 핵심 인물이지만 날짜가 3월 8일로 고정된 것은 이후의 역사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1. 독일 역사박물관 - Clara Zetkin
  2.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클라라 체트킨
  3. 독일 역사박물관 - 여성참정권 운동
  4. Deutsche Biographie - Clara Zetkin
  5. 독일 역사박물관 - 1932년 체트킨의 국회 연설
  6. Deutsche Biographie - 클라라 체트킨의 가족과 성장
  7.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체트킨의 초기 정치활동
  8. 독일 역사박물관 - 오시프 체트킨과 파리 생활
  9.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파리 망명생활
  10. 독일 역사박물관 - 1889년 제2인터내셔널
  11. Deutsche Biographie - 《Die Gleichheit》
  12. Deutsche Biographie -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Die Gleichheit》
  13.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정당과 여성참정권
  14. 독일 역사박물관 - 노동자 여성운동과 체트킨
  15. Deutsche Biographie -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
  16.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
  17. 독일 역사박물관 - 1911년 세계 여성의 날
  18.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제1차 세계대전과 여성 반전운동
  19. 독일 역사박물관 - 1915년 체트킨의 체포
  20. 독일 역사박물관 - 스파르타쿠스단과 USPD
  21. Deutsche Biographie - 체트킨과 로자 룩셈부르크
  22. Deutsche Biographie - KPD 가입
  23. 독일 역사박물관 - 1920년 국회 진출
  24. Deutsche Biographie - 코민테른과 여성운동
  25. Deutsche Biographie - KPD 내부 노선갈등
  26. Deutsche Biographie - 체트킨과 스탈린화
  27. Deutsche Biographie - 체트킨의 1923년 파시즘 분석
  28. Clara Zetkin, Report on Fascism, 1923
  29. 독일 연방의회 - 클라라 체트킨과 1932년 국회
  30. 독일 역사박물관 - 1932년 8월 30일
  31.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체트킨의 여성해방론
  32. 독일 역사박물관 - 체트킨과 릴리 브라운
  33. 독일 역사박물관 - 체트킨의 죽음
  34. 독일 연방의회 - 클라라 체트킨
  35. Deutsche Biographie - 체트킨과 코민테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