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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터내셔널(第二인터내셔널, Second International)은 1889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국제 사회주의·노동운동 조직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조직이 참여했으며,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자 보호, 보통선거권, 여성참정권, 반전운동 등 국제적인 공동행동을 추진했다. 노동절인 5월 1일을 국제적인 노동자 행동의 날로 정하고, 훗날 세계 여성의 날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국제적 조직기반을 제공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1][2]

19세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각국에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마다 정치제도와 노동환경이 달랐고,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 가운데에는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한 것도 많았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정당과 노동운동 조직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의 정치적 요구를 발표하기 위해 결성됐다.

이름만 보면 전 세계의 사회주의 정당을 직접 지휘하는 거대한 중앙정부 같은 조직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각국 정당이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국제대회와 상설 사무국을 통해 협력하는 연합체에 가까웠다. 독일 사회민주당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당, 영국의 노동운동 조직처럼 정치적 입장과 활동방식이 서로 다른 단체들이 함께 참여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 정당의 의회 진출과 노동자 조직의 성장을 배경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과 선거·의회·사회개혁을 중시하는 입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됐고, 제국주의와 식민지배, 전쟁에 대응하는 방식에서도 회원 조직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러한 차이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국제적인 결의를 여러 차례 채택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과 프랑스 등 주요 회원 정당의 지도부는 각자 자국의 전쟁수행을 지원했다. 전쟁 이전의 국제적 공동행동 체계는 사실상 붕괴했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의회개혁과 공산주의 혁명 등을 둘러싸고 여러 국제조직으로 갈라졌다.[3]

“전 세계 노동자는 단결하자!”고 모였는데, 세계대전이 터지자 각국 정당이 자기 나라의 전쟁을 지원하면서 서로 적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모든 사회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 갈등 속에서 반전파와 혁명파가 별도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게 됐다.

역사

제1인터내셔널의 해체

제2인터내셔널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제1인터내셔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인터내셔널의 정식 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로, 186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됐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 활동가, 여러 급진적 정치운동의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당시 국제노동자협회에는 마르크스주의자뿐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와 상호주의자 등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조직방식과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됐고, 특히 마르크스와 미하일 바쿠닌 사이의 대립이 조직의 분열에 영향을 미쳤다.

1872년 헤이그 대회 이후 총평의회가 미국 뉴욕으로 이전했고, 마르크스 계열의 국제노동자협회는 1876년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바쿠닌 계열을 비롯한 반권위주의적 국제노동운동은 별도의 조직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은 단일한 국제조직보다 각국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고 노동자 조직을 확대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4]

제1인터내셔널이 다양한 노동운동 세력을 하나의 조직에 묶으려 했다면, 제2인터내셔널은 이미 각국에서 성장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조직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889년 파리 창립대회

1889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사회주의 노동자대회가 개최됐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에 맞춰 열린 대회로,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대표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모든 세력이 하나의 회의장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쥘 게드·폴 라파르그 계열과 점진적인 개혁을 중시한 이른바 가능주의자(Possibilists) 계열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이 때문에 1889년 파리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개의 국제노동자대회가 개최됐다.

마르크스주의 계열 대회에는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엥겔스가 정치적으로 관여했고, 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체트킨,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 여러 나라의 인물이 참가했다.[5]

이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국제사회주의 노동자대회가 일반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로 다뤄진다. 두 흐름의 대표들은 1891년 브뤼셀 국제대회에서 다시 하나의 국제적 회의체로 결합했다.[6]

즉 제2인터내셔널은 창립대회부터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놓고 서로 다른 회의가 따로 열렸던 조직이다. 이후의 개혁파와 혁명파 사이의 논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노동절을 국제적인 행동의 날로 정하다

1889년 파리 대회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결정 가운데 하나는 1890년 5월 1일 국제적인 노동자 시위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중요한 요구는 하루 8시간 노동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에는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이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과 집회를 개최했다.

미국에서는 1886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노동운동이 전개됐다. 시카고의 헤이마켓 사건 역시 이 과정에서 발생했다.

1889년 파리 대회는 이러한 국제 노동운동의 흐름을 바탕으로 각국 노동자들이 1890년 5월 1일 동시에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열도록 결의했다.[7]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 유럽과 미국 등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집회와 행사가 개최됐다. 이후 5월 1일은 국제 노동운동의 정례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노동절 또는 근로자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다만 제2인터내셔널이 1889년에 세계 최초로 노동절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미국 등에서 5월 1일을 중심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운동을 국제적인 공동행동으로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0년대의 조직 확대

1891년 브뤼셀에서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조직들의 국제대회가 열렸다. 1889년 파리에서 분리되어 개최됐던 두 국제대회의 흐름이 이 대회를 계기로 다시 결합했다.

이후 제2인터내셔널은 1893년 취리히와 1896년 런던 등에서 대회를 개최하면서 정치적 입장과 가입조건, 노동자 조직의 국제적인 협력방식을 논의했다.

특히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어 선거와 의회에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세력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국가권력에 대한 참여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국가권력 자체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 세력과는 점차 분리됐으며, 1896년 런던 대회에서는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조직을 중심으로 참가조건이 정리됐다.[8]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보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조직적인 참여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됐다.

조직과 운영

각국 정당의 연합체

제2인터내셔널에는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조직이 참여했지만, 하나의 중앙당이 각국 정당을 직접 지휘하는 구조는 아니었다.

회원 정당들은 각자 자국의 선거와 의회활동, 노동조합 조직화와 정치투쟁을 진행했다. 국제대회에서는 공동의 선언과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를 실제로 집행하는 과정에서는 개별 정당의 판단과 국가별 정치적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제국의회 선거에 참가했고,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의회정치와 노동운동을 병행했다. 영국에서도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들이 의회 진출을 추진했지만, 각국의 정치제도와 당 조직은 서로 달랐다.

이러한 분권적인 구조는 서로 다른 정치적 환경에 있는 정당들이 하나의 국제조직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전쟁처럼 각국의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는 문제에서는 통일된 행동을 강제하기 어려웠다.[9]

국제대회에서는 같이 결의안을 통과시키지만, 실제 행동은 각 나라 정당이 알아서 결정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초기의 제2인터내셔널은 정기적으로 국제대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활동했으며, 상설적인 중앙조직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1900년 파리 대회에서는 국제적인 연락과 회의 준비를 담당할 국제사회주의사무국(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이 설치됐다. 사무국은 벨기에 브뤼셀에 자리했으며, 에밀 판데르벨더카미유 위스망스 등이 주요 운영인물로 활동했다.[10]

사무국은 회원 정당 사이의 연락과 회의 준비, 자료의 수집·배포 등을 맡았다. 그러나 각국의 정당에 군사적·법률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초국가적 정부기관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제2인터내셔널이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조직구조의 한계가 거론된다. 다만 분권적인 구조만이 전쟁 당시의 분열을 설명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며, 각국 정당의 정치적 선택과 국가별 상황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요 참가 정당과 인물

제2인터내셔널은 하나의 이념적 입장만을 공유한 인물들의 조직이 아니었다. 독일·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 등 여러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조직이 참가했으며, 같은 정당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지역 관련 정당·조직 및 인물
독일 독일 사회민주당(SPD), 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프랑스 장 조레스, 쥘 게드, 폴 라파르그,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들 및 1905년 결성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영국 독립노동당, 노동대표위원회 및 이후의 노동당과 관련된 사회주의·노동운동 조직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빅토어 아들러
러시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여러 세력,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벨기에 벨기에 노동당, 에밀 판데르벨더, 카미유 위스망스

이 표는 대표적인 참가세력과 관련 인물을 정리한 것이며, 이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동일한 자격으로 활동했거나 모든 문제에서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11]

또한 명칭에 인터내셔널이 들어간다고 해서 당시 전 세계 노동자와 식민지 주민들이 동등하게 대표되었던 것은 아니다. 활동의 중심은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며, 식민지배와 인종·이주 문제에 관해서는 참가자들 사이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주요 정치적 논쟁

혁명인가, 개혁인가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내부 논쟁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 사회를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19세기 말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 참가해 의석을 얻고 노동조합의 규모를 확대했다. 사회개혁과 노동자 보호법, 선거권 확대 등을 통해 실제로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커졌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일부 예측과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적 체제전환보다 민주주의와 의회활동,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중시하는 입장을 발전시켰다. 이른바 수정주의(Revisionism) 논쟁이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개혁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이 필요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반대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궁극적인 사회변혁의 목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혁명적 목표와 합법적 대중정당의 활동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논의했다. 다만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도 대중파업과 혁명전략 등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수정주의와 사회주의자의 비사회주의 정부 참여 문제가 주요 의제로 논의됐다. 대회는 사회민주주의의 독립적인 정치노선을 강조했지만, 이러한 결의가 참가 정당들 내부의 이견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12]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을 처음부터 개혁주의 정당들만의 모임 또는 무장혁명만을 추구한 조직으로 설명하면 정확하지 않다. 두 방향의 정치적 입장이 같은 국제조직 안에 존재했으며, 그 관계는 시기와 국가에 따라 달라졌다.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를 확대하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도 사회주의자가 식민지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중요한 논쟁이 됐다.

일부 참가자는 식민지배가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을 수반하므로 사회주의 운동이 이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참가자들은 특정한 조건에서 식민지 정책이 교육과 사회개발 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식민지에서의 개혁적인 통치를 제안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제국주의적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식민지 정책 자체를 어떤 조건에서도 부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참가자들이 대립했다.

이 문제는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라는 원칙과 당시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식민주의적 인식이 어떻게 충돌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국가 간 노동자 이동과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둘러싸고도 논쟁이 일어났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임금 저하 등을 이유로 이주를 제한하려 했고, 다른 세력은 출신국가와 인종을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이주 문제 논의는 이러한 의견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13]

“전 세계 노동자는 단결하자”라는 구호가 있었다고 해서 실제로 모든 참가자가 식민지 주민과 이주노동자에게 같은 권리를 인정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군비경쟁과 식민지 분쟁, 강대국 사이의 갈등이 심화됐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공동행동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전쟁에 반대한다는 선언실제로 전쟁이 시작됐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서로 달랐다.

일부 사회주의자는 전쟁이 임박하면 각국 노동자가 총파업이나 대규모 정치행동을 통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총파업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노동자들이 병역동원과 국가의 탄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전쟁이 시작됐을 때 자국의 군사적 방어까지 거부해야 하는지, 침략과 방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도 논쟁거리였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와 1910년 코펜하겐 대회, 1912년 바젤 특별대회에서는 반전 결의가 거듭 채택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동방식과 각국 정당의 의무를 두고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14]

주요 국제대회

1900년 파리 대회

1900년 파리 대회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인 협력체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됐다.

이 대회를 계기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 설치됐으며, 회원 정당 간의 연락과 국제회의 준비 등을 담당하는 상설기구가 만들어졌다.

또한 사회주의자의 정부 참여 문제가 논의됐다.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랑이 비사회주의 내각에 참여한 일을 놓고 사회주의 정당의 독립성과 정부 참여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00년 대회의 관련 결의는 사회주의자의 비사회주의 정부 참여를 일반적인 정치노선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예외적인 상황의 문제로 다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아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다시 다뤄졌다.[15]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1907년 8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제2인터내셔널 국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군국주의와 전쟁, 식민지정책과 이주, 노동자 조직의 활동방식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특히 전쟁에 관한 결의에서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들이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고, 전쟁이 실제로 시작됐을 경우에는 조속한 종전과 사회·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됐다.

아우구스트 베벨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등 여러 인물이 전쟁에 관한 결의 논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채택된 결의는 모든 국가의 정당이 전쟁 발발 시 자동으로 총파업이나 특정한 행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구속력 있는 실행계획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제1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도 열렸다. 이 회의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사회주의여성사무국의 책임자로 선출됐고, 여성의 정치적 권리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인 조직화가 논의됐다.[16]

따라서 1907년 슈투트가르트는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운동뿐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인 협력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점이다.

1910년 코펜하겐 대회

1910년 8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사회주의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반전운동과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행동방식 등 기존의 주요 의제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에 앞서 8월 26~27일 열린 제2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는 클라라 체트킨과 케테 둥커 등이 각국에서 매년 국제적인 여성의 날을 개최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됐고, 이듬해인 1911년 3월 19일 여러 유럽 국가에서 첫 대규모 국제 여성의 날 행사가 열렸다.[17]

다만 1910년 회의에서 날짜를 3월 8일로 정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3월 8일은 1917년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와 관련된 역사를 거쳐 1921년 국제공산주의 여성회의에서 통일된 날짜로 채택됐다.

관련 내용은 세계 여성의 날 문서를 참고할 것.

1912년 바젤 특별대회

1912년 11월 24~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특별대회가 열렸다.

당시 발칸반도에서는 제1차 발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전쟁이 유럽 강대국들의 직접적인 충돌로 확대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바젤에서 대규모 반전집회를 개최하고 각국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들에게 전쟁을 막기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일반적으로 바젤 선언(Basel Manifesto)이라고 불린다.

바젤 선언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반전 결의를 재확인하면서 유럽의 전쟁 위기가 국제 노동자들의 공동행동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18]

그러나 2년도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회원 정당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자국의 전쟁정책을 지원하거나 이에 반대했다.

바젤 특별대회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제2인터내셔널이 국제적인 반전의사를 공동으로 표명한 마지막 대규모 대회였다. 1914년에 예정되어 있던 다음 정기대회는 전쟁 발발로 개최되지 못했다.[19]

제1차 세계 대전과 붕괴

1914년 8월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한 뒤 유럽의 외교적 갈등은 급격히 악화됐다.

7월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 독일과 러시아·프랑스·영국 등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충돌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제2인터내셔널은 여러 차례 전쟁반대 결의를 채택했지만, 실제로 전쟁이 시작되자 국제조직 차원에서 회원 정당들의 통일된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독일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했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상당수 역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를 지원했다. 영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노동운동에서도 전쟁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20]

그해 7월 31일 프랑스의 반전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가 암살됐으며, 이는 전쟁을 앞둔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적인 반전 공동행동을 추진한다는 목표와 각국 정당의 실제 선택이 충돌하면서 전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됐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쟁공채 승인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전쟁수행을 위한 공채 발행이 표결에 부쳐졌다.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전쟁공채에 찬성했다. 당내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었지만, 의회 표결에서는 의원단의 공동결정을 따랐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역시 8월 4일 첫 표결에서는 당내 반대의견을 제시한 뒤 의원단의 공동결정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일 두 번째 전쟁공채 표결에서는 독일 제국의회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21]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전쟁 기간 동안 국내 정치적 갈등을 자제하고 정부의 전쟁수행에 협조하는 성내평화정책(Burgfriedenspolitik)을 채택했다.

반면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등은 전쟁을 지원하는 당 지도부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별도의 반전운동을 추진했다.

이러한 갈등은 이후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분열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독일공산당(KPD)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모든 사회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설명할 때에는 주요 회원 정당 지도부의 전쟁지원과 사회주의 운동 전체의 입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이후에도 각국에서는 사회주의 반전파가 활동했다. 독일의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 체트킨뿐 아니라 러시아와 이탈리아·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적인 반전운동을 추진했다.

1915년 9월에는 스위스의 치머발트(Zimmerwald)에서 여러 나라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모인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가한 인물들 역시 모두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일부는 전쟁의 조속한 종결과 평화협상을 강조했고,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좌파는 전쟁을 각국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16년에는 키엔탈에서 후속회의가 열렸다. 이러한 활동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존 국제조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반전파가 새로운 국제적 협력망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22]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정당들이 전쟁을 지원했다”는 사실과 “모든 사회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전쟁 이후의 분열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분리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구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이후, 사회주의 정당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다른 나라에서도 혁명적 권력장악을 추진해야 하는지를 놓고 갈등이 심화됐다.

1919년 3월 레닌과 볼셰비키의 주도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이 결성됐다.

코민테른은 일반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리며,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지도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자국 정부를 지원한 일을 비판하면서 혁명적인 공산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을 지향했다.[23]

그 결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코민테른에 참여한 공산주의 정당들 사이의 분리가 점차 뚜렷해졌다.

다만 이 과정이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일부 정당에서는 당 전체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가입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한 정당이 사회민주주의계와 공산주의계로 분열했으며,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으려는 조직도 등장했다.

베른 인터내셔널

1919년 2월 스위스 베른에서는 전쟁 이후 사회주의 정당들의 국제적 협력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조직은 일반적으로 베른 인터내셔널 또는 재건된 제2인터내셔널이라고 불렸다.

참가세력은 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새로 만들어진 코민테른과는 정치적 노선 및 조직방식에서 차이를 보였다.[24]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이 1914년에 완전히 법적으로 해산되어 모든 후속활동이 사라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단순화된 것이다.

전쟁 이전의 통일된 국제조직은 1914년 사실상 붕괴했지만, 이후에도 기존 조직의 계승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계 국제회의와 조직활동이 계속됐다.

제2와 3½인터내셔널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기존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회주의 정당들도 존재했다.

1921년 오스트리아 에서는 이러한 정당들이 모여 국제사회주의정당노동동맹(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일반적으로 빈 인터내셔널이라고 불렸으며,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정치적 위치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제2와 3½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25]

빈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정당들은 기존 사회민주주의의 전쟁지원 및 개혁주의 노선에 비판적이면서도 코민테른의 중앙집권적인 조직방식과 볼셰비키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제2인터내셔널이랑 제3인터내셔널이 싸우니까 중간에서 2½인터내셔널이 나와버린 것이다.

이 별칭은 정식 명칭이 아니라 두 국제조직 사이에 위치하려 했던 정치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1923년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923년 5월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베른 인터내셔널 계열과 빈 인터내셔널 계열이 통합해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Labour and Socialist International, LSI)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전쟁 이전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국제조직으로, 코민테른과는 별도의 노선을 유지했다.[26]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의 존속기간을 설명할 때에는 구분이 필요하다.

1889~1914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국제적으로 결합되어 활동하던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를 가리키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된다.

반면 1919년 이후에는 재건된 제2인터내셔널 계열 조직들이 활동했고, 1923년에는 이들 일부가 빈 인터내셔널과 통합해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951년 새롭게 결성된 국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조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지만 1889년 창립 당시의 조직과 제도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단체는 아니다.[27]

제1·제2·제3인터내셔널의 차이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은 모두 국제적인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조직이지만 결성된 시기와 참가세력, 운영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구분 제1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
결성 1864년 런던 1889년 파리 1919년 모스크바
주요 조직형태 노동자단체와 여러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경향의 국제적 연합 각국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조직의 국제적 연합 공산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
주요 관련 인물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아우구스트 베벨, 장 조레스, 카를 카우츠키, 클라라 체트킨 블라디미르 레닌,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주요 특징 노동운동의 국제적 조직화와 내부의 정치노선 갈등 사회주의 정당의 성장과 의회활동·노동운동의 국제적 협력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 정당들의 국제적 조직화
주요 변화 마르크스 계열 조직이 1876년 해체 1914년 전쟁 발발로 전쟁 이전의 통일된 활동체계 붕괴 1943년 공식 해산

이는 각 조직의 전반적인 차이를 정리한 것으로, 실제 참가 정당과 정치적 노선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특히 제2인터내셔널 안에는 개혁주의자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함께 존재했으며, 이후의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도 원래는 제2인터내셔널의 회원 정당에서 활동했다.[28]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민주주의자, 제3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자”라는 구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제2인터내셔널이 활동하던 1889~1914년의 정치적 구성을 그대로 설명하는 표현은 아니다.

영향

노동운동의 국제적 조직화

제2인터내셔널은 서로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이 공동의 요구를 발표하고 같은 날 집회와 시위를 개최할 수 있는 국제적인 조직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하루 8시간 노동과 노동자 보호, 정치적 권리 확대 등은 국가마다 구체적인 조건이 달랐지만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노동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요구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대회는 이러한 의제를 서로 교환하고 각국의 운동에 반영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각국 사회주의 정당들의 선거활동과 노동조합의 성장 역시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다.

다만 개별 국가에서 노동권과 선거권이 확대된 원인을 모두 제2인터내셔널의 직접적인 성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변화에는 각국 노동조합과 정당의 활동, 정치체제의 변화와 정부정책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노동절과 세계 여성의 날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영향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노동절이다.

1889년 파리 창립대회는 1890년 5월 1일을 국제적인 8시간 노동제 요구의 공동행동일로 정했고, 이후 5월 1일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운동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제2인터내셔널과 연결된 국제사회주의 여성운동에서는 1907년과 1910년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가 열렸다.

1910년 클라라 체트킨케테 둥커 등이 국제적인 여성의 날을 매년 개최하자고 제안했고, 이듬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29]

다만 제2인터내셔널이 1910년에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3월 8일이 통일된 날짜로 정착한 것은 이후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세한 내용은 세계 여성의 날 문서를 참고할 것.

국제주의와 국가정치의 갈등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국제적인 연대를 추구하면서도 각국의 정치제도와 국가적 이해관계 속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쟁 이전의 국제대회에서는 반전과 국제적 노동자 연대가 반복적으로 강조됐다. 그러나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각국 정당들은 자국의 정치상황과 전쟁에 대한 판단에 따라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반전 사회주의자들과 이후의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주요 사회민주주의 지도부가 국제주의적 원칙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전쟁을 지원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는 자국의 방어와 노동운동의 존속 등 당시의 정치적 조건을 근거로 자신들의 선택을 설명했다.

이러한 갈등은 전쟁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다른 국제조직을 형성하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30]

여담

  • 영어로는 Second International이라고 한다.
  • 독일어로는 Zweite Internationale이라고 한다.
  • 1889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됐다.
  • 창립대회는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에 맞춰 개최됐다.
  • 창립 당시 파리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개의 국제노동자대회가 따로 열렸다.
  • 1891년 브뤼셀 대회를 계기로 두 흐름이 다시 결합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제2인터내셔널의 결성과 초기 활동에 관여했다.
  • 카를 마르크스는 1883년 사망했으므로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 1889년 창립대회에서 1890년 5월 1일 국제적인 8시간 노동제 요구 시위를 열기로 결정했다.
  • 이 결정은 오늘날 노동절의 역사와 연결된다.
  • 그러나 5월 1일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자체는 제2인터내셔널 창립 이전부터 존재했다.
  • 1900년 파리 대회를 계기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 설치됐다.
  • 상설 사무국은 벨기에 브뤼셀에 자리했다.
  • 각국 정당이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국제적인 연합체에 가까웠다.
  •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참가 정당 가운데 하나였다.
  • 장 조레스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여러 사회주의 지도자가 활동했다.
  • 클라라 체트킨 역시 1889년 창립대회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는 국제사회주의대회와 제1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가 열렸다.
  • 1910년 코펜하겐의 제2차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국제 여성의 날의 정례 개최가 결정됐다.
  • 그러나 당시에는 3월 8일이라는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
  •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는 혁명과 의회개혁, 식민지정책과 이주문제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 1912년 바젤 특별대회에서는 유럽의 전쟁위기에 반대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 다음 정기대회는 1914년 빈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됐다.
  • 1914년 전쟁 발발 이후 주요 회원 정당들이 자국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면서 전쟁 이전의 통일된 활동체계가 사실상 붕괴했다.
  • 그렇다고 당시 모든 사회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 독일의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1914년 12월 전쟁공채에 단독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 로자 룩셈부르크클라라 체트킨 등도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 1915년에는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스위스 치머발트에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 1919년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코민테른, 즉 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 같은 해 베른에서는 기존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하려는 사회민주주의계 국제회의도 개최됐다.
  • 1921년에는 이른바 제2½인터내셔널 또는 빈 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 1923년 베른 인터내셔널 계열과 빈 인터내셔널 계열이 통합해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 오늘날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951년 결성된 별개의 국제조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다.
  • “제2인터내셔널은 왜 망했나?”라는 질문에는 1914년 세계대전과 각국 정당의 분열이 핵심적인 설명이 되지만, 혁명과 개혁·전쟁·식민지정책 등을 둘러싼 내부 갈등은 창립 초기부터 존재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1. 독일 역사박물관 - 1889년 제2인터내셔널 결성
  2. 《케임브리지 사회주의사》 - The Second International, 1889–1914
  3.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유럽 노동운동과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
  4. 《케임브리지 사회주의사》 - 제1인터내셔널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
  5. 제2인터내셔널 사료집 - 1889년 파리의 두 창립대회
  6. 《케임브리지 사회주의사》 - 1889년 두 대회와 1891년 재결합
  7. 독일 역사박물관 - 1886년 노동운동과 1889년 노동절 결의
  8. 제2인터내셔널 사료집 - 국제대회와 참가조직의 역사
  9. 《케임브리지 사회주의사》 - 제2인터내셔널의 조직과 정치적 분열
  10. Social History Portal - 제2인터내셔널과 국제사회주의사무국 기록
  11. 제2인터내셔널 사료집 - 참가 정당과 국제대회
  12. 《192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제2인터내셔널과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13. 《국제사회사평론》 - 제2인터내셔널의 이주와 국제주의 논쟁
  14.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운동과 한계
  15. 《192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1900년 파리 대회와 사회주의자의 정부 참여
  16. 독일 역사박물관 - 1907년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와 클라라 체트킨
  17. 유엔 -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
  18. 제2인터내셔널 - 1912년 바젤 선언
  19. 《192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바젤 대회와 1914년 예정 대회
  20.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
  21. 독일 역사박물관 - 1914년 전쟁공채 표결과 리프크네히트
  22. 제2인터내셔널 사료집 - 전쟁과 치머발트 운동
  23. Oxford Academic - 제2인터내셔널 이후의 국제 사회주의 조직들
  24. 러시아 국가기록원 - 1919년 이후 국제 사회주의 조직
  25. Oxford Academic - 빈 인터내셔널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
  26. 러시아 국가기록원 - 1923년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결성
  27. Oxford Academic - 국제 사회주의 조직들의 역사적 계승관계
  28. 《케임브리지 사회주의사》 - 제2인터내셔널의 형성과 분열
  29. 유엔 -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
  30. 독일 연방정치교육원 - 전쟁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