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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갓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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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의 장수.

1554년 충청도 목천현, 오늘날 천안시 일대에서 태어났다. 1578년 무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진주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계획은 1차 병력으로 육지전에서 조선을 밀어버리고 2차 병력이 바다를 통해 이동하여 1차 병력에게 보급을 하여 곧바로 조선을 지워버린 후 중국으로 넘어가는 거였는데, 갓순신이라는 개씹사기캐가 남해의 일본 수군과 해상 보급로를 계속 박살내면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일본군 입장에서는 육로를 통해 전라도로 진입해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조선 수군의 근거지까지 압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원문처럼

“

땅과 바다에서 한번에 덮쳐 이순신을 완벽하게 죽여버리려고 한다.

”

라고까지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실제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좀 더 복잡했지만, 진주를 돌파해 전라도로 진출하고 조선군의 보급과 수군 활동을 압박하려 했다는 큰 흐름은 맞다.

솔까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바다에 강한 해군을 이끌고 일본 해군과 동시에 일본 육군을 맞아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선군이 일본 육군을 맞아 진주성에서 싸운 것이 바로 진주대첩.

그리고 김시민은 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낸 지휘관이다.

1592년 10월 일본군 약 2만~3만 명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김시민이 지휘한 성내 병력은 약 3,800명 정도였다.

조선군의 열배에 가까운 왜군에게 포위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강철같은 의지와 탁월한 지략으로 끝끝내 진주성을 지켜내고 전투 막바지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은 용장.

원문에는 "오기로 했던 지원군마저 일본군에게 걸려 전멸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건 틀렸다.

진주성 밖에서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관군이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횃불과 함성으로 대규모 지원군이 온 것처럼 압박하는 등 실제로 외부 지원이 있었다. 다만 일본 대군의 포위를 뚫고 대규모 구원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함께 싸운 형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요즘 똥별처럼 정신력으로 버티라는 개소리보단 준비에 힘쓰던 참군인이셨다.

진주대첩에서의 승리를 위해 김시민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군 요격을 위해 많은 수의 총통과 화약을 준비하고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잘 유지시켰으며, 전투에서는 행여나 혼란이나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냉철하게 잘 지휘했다.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 성 위에 세워 병력이 더 많아 보이게 만들었고, 화살과 화약을 함부로 낭비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왜군이 사다리와 나무단을 쌓아 성벽을 넘으려 하자 화포와 활, 돌, 끓는 물 등을 이용해 막아냈고 일본군이 3층짜리 누각까지 만들어 성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자 이것도 끝까지 버텼다.

보통 숫자에서 열세인 병력이 다수의 병력을 상대로 승리했다면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냥

“

정신력으로 이겼다

”

가 아니라 준비, 지휘, 방어시설, 병기, 성 안의 군민과 성 밖 의병의 협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 김시민은 일본군의 조총탄을 이마 또는 왼쪽 얼굴 부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즉석에서 바로 죽은 것은 아니다.

김시민은 부상을 숨긴 채 지휘를 계속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뒤 병상에 누웠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며칠 뒤 사망했다.

향년 39세.

죽은 뒤에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을 우려해 그의 죽음을 한동안 숨겼다고 한다.

심지어 김시민이 살아 있을 때 조정에서는 진주대첩 이전의 여러 전공을 인정해 그를 진주목사로 승진시켰고, 진주대첩 직후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하는 명령까지 내려왔는데 그 명령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은 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 패배로 얼마나 크게 빡쳤는지는 다음 해를 보면 알 수 있다.

1593년 일본군은 약 9만~1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여기에는 우키타 히데이에,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다테 마사무네 등 일본의 유명 장수들이 줄줄이 참가했다.

그러니까

“

저 성 이번엔 무조건 조져라

”

수준으로 일본군이 작정하고 들어온 것은 맞다.

다만 원문에 있던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테 마사무네까지 붙여줘가면서 김시민의 목만은 무조건 베어오라고 특명을 내렸다.

”

라는 구체적인 명령은 확인되는 확실한 사료를 찾기 어렵다.

히데요시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2차 진주성 공격을 강하게 명령한 것은 맞지만, 다테 마사무네를 특별히 김시민 목 따는 담당으로 붙였다고까지 쓰기는 어렵다.

문제는 일본군이 그때까지 김시민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군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당시 진주목사였던 서예원의 목을 베어 김시민의 목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죽은 지 반년 넘은 사람 목을 또 베었다고 좋아한 셈이다.

당대 일본인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인물로 오죽하면 가부키에서조차 모쿠소 판관이라는 존나짱쎈 캐릭터로 김시민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군은 김시민의 관직인 목사(牧使)를 이름처럼 알아들어 '모쿠소'라고 불렀고, 여기에 판관이라는 관직명을 붙여 모쿠소 판관(木曽判官)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본다.

일본의 《태합기》 계열 기록에서도 김시민을 '모쿠소 판관' 비슷하게 기록했고, 이후 에도 시대의 조루리와 가부키 같은 대중문화에서 이 이름을 가진 조선 장수가 등장한다.

실제 김시민本人과 똑같은 역사인물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각색이 존나 붙은 캐릭터인데, 그래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김시민이 남긴 인상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보여준다.

기요마사 비망록에도 김시민의 이름이 언급된다고 알려져 있다. 함경도까지 진군한 가토 기요마사 측 기록에서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을 조선 북쪽의 최고 사령관처럼, '모쿠소' 김시민을 조선 남부의 총지휘관 비슷하게 과장해서 기록한 사례도 전해진다.

물론 둘 다 틀린 기록이다.

지들이 이렇게나 대단한 적을 물리쳤다며 떠벌리고 싶었던듯.

그리고 원균한테 공신순위가 밀렸다.

선조 개객끼.

1604년 선무공신을 책봉할 때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세 명이었고, 김시민은 이억기, 권응수, 이정암, 신점과 함께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됐다.

그러니까

“

원균 - 선무공신 1등
김시민 - 선무공신 2등

”

이건 실제다.

ㄴ 사실 원균이한테 간 공신은 원래 김시민의 것이다. 선조가 지 왕권만 강화하면 장땡이라 생각한 나머지 김시민의 공신을 원균에게 줘버린 것이다.

ㄴ 이건 개드립으로는 이해되지만 역사적으로 김시민 몫의 공신 자리를 빼앗아 원균에게 줬다는 기록은 없다.

공신 책봉 자체를 좆같이 했다고 까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선무공신 1등에 원균을 넣고 김시민과 이억기를 2등으로 둔 것은 후대에도 두고두고 욕먹는 부분이다.

하지만 공신 등급이 정해진 과정에서 김시민의 자리를 원균에게 옮겼다는 식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시민은 선무공신 2등으로 책록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원문의

“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임진왜란때 받은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이분 만이 유일하다.

”

는 틀렸다.

김시민이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임진왜란 당시가 아니라 무려 1711년 숙종 때다.

즉 죽은 뒤 119년 정도 지나서 받았다.

이순신 역시 충무라는 시호를 사후에 받은 것이므로 전쟁 중에 둘만 이 시호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국사에서 '충무공' 하면 이순신이 압도적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김시민 역시 정식 시호가 충무공 김시민이다.

진주에는 김시민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와 동상 등이 있으며,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이 바다를 막고 진주에서 김시민이 육로를 막으면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과 보급계획에 큰 타격을 줬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도 존나 중요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걸 3,800명으로 했다.

“

왜군 2만~3만명: 문 열어
김시민: 싫어
왜군: 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