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분의 명예를 더럽힌 디키의 유저는 사용자:마광수로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한국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는 거 자체가 갓소설가 인정해줘야 한다.
이민으로 노력의 가성비가 조금이나마 올라갈 수 있도록 노오오오력합시다.
다소 강경하지만 다크 히어로를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이분의 말씀은 진리이자 불변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디시위키 이용자들은 이분의 말씀에 반박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마광수가 평생 주장한 것은 성적 취향 자체보다 성에 대해 솔직할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가까웠다.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나 액정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 파일:400px-마광수.png | |
마광수 馬光洙 | |
| 생년월일 | 1951년 4월 14일 |
|---|---|
| 사망일 | 2017년 9월 5일, 서울특별시 |
| 국적 | |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 별명 | 광마(狂馬) |
한국의 니체.
대한민국의 시인, 소설가, 국문학자이자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중에게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즐거운 사라로 대표되는 야한 글 쓰는 교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원래는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국문학자였고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된 엘리트 문학 연구자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유교 탈레반인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진정한 문화적 자유주의자였다. 정확히는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가라기보다 개인의 욕망, 성, 외모, 문학적 표현을 도덕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극도로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광수가 평생 주장한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욕망을 겉으로만 점잖은 척하면서 억압하면 오히려 사회가 더 위선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고, 그것 때문에 유명해졌으며, 그것 때문에 인생이 박살나기도 했다.
연세대 별명이 워낙 섹스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라서 연섹대라고 불리는데 여기 딱 어울리는 교수님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음담패설과 성적인 농담을 거리낌 없이 하는 교수로 유명했다. 다만 마광수가 강조했던 것은 성적 자유와 강압적 성행위의 구분이었다. 교수의 권위를 내세워 학생을 복종시키는 식의 권위주의 역시 본인이 혐오하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한국 문화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야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야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현직 대학교수가 실제로 구속됐다.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썼다가 진짜로 깜방에 갔었다.
20세기판 헬조선 문체반정 당한 꼴.
생애
1951년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77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젊은 시절부터 문학 연구자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홍익대학교를 거쳐 1980년대 초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30대 초반이었다.
사람들이 보통 마광수를 무슨 섹스에 미친 늙은 할배로 아는데 이 양반은 애초부터 학계에서 능력이 없어서 기행으로 먹고살던 사람이 아니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중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화제가 되면서 성과 욕망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교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리고 1991년 문제의 《즐거운 사라》를 출간한다.
저술 및 연구활동
사람들이 보통 마광수를 무슨 섹스에 미친 늙은 할배로 아는데 연세대학교에서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사람이다.
연대 학부, 석사, 박사를 했고 홍익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30대 초반에 연대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석박사 시절 주요 연구 대상은 시인 윤동주였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상징과 자아의식, 부끄러움 등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했고 《윤동주 연구》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늘날 대중에게는 성 담론 때문에 훨씬 유명하지만 그의 학문적 경력에서 윤동주 연구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망 당시 언론에서도 마광수를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은 학자로 소개했다.
느그들이 흔히 생각하는 섹스에 발정난 할배 마광수는 시, 소설, 에세이 가리지 않고 다 활동했다.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고 소설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화가로도 활동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광마일기》 등이 있다.
근데 야한게 목적이면 이 사람 소설을 읽느니 야동이나 망가 한 편 보는게 훨 낫다. 이 사람이 쓴 글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의 성적 보수주의와 위선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즉 마광수에게 야함은 목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도구였다.
"인간은 원래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왜 없는 척하냐"는 문제의식을 문학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현대의 포르노그래피와 비교하면 별로 자극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고, 오히려 끊임없이 욕망·자유·죽음·고독 같은 주제가 반복된다.
그리고 에세이들은 공감을 유도하다기보단 그냥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써재낀 게 많다.
헬조선에서 이 사람 말대로 살다가는 앰창인생 된다 진짜.
시를 보면 걍 섹스 못해서 안달난 사람 같기도 하고 실제로 자신의 욕망을 문학을 통해 대리배설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의외로 야함보다 더 강하게 남는 게 있다.
존나 우울하다.
마광수의 글에는 염세주의와 고독감이 짙게 배어 있다. 인간은 결국 혼자이며 사회의 도덕과 체면 때문에 자신의 욕망조차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식의 사고가 반복된다.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ㄴ ㅇㅈ. 이 사람 에세이로는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를 추천한다.
《즐거운 사라》 사건
마광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건.
1991년 출간한 소설 《즐거운 사라》는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호불호와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이것을 단순히 야한 책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마광수는 음란물 제작·반포 혐의로 구속됐다.
현직 연세대학교 교수가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강의 도중 수사기관에 연행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문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는 작품의 수준과 별개로 국가가 소설가를 작품 내용 때문에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맞느냐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당시 여러 문화예술인이 구명운동에 참여했으며 사건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 국가의 검열, 표현의 자유 문제를 둘러싼 상징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재판은 계속됐고 1995년 대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마광수는 이 사건으로 연세대학교에서 해직됐다가 이후 복직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야한 소설 한 권 썼다가 구속 → 유죄 → 교수직 박탈 코스를 탄 것이다.
마광수 자신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즐거운 사라》 사건을 자신에 대한 부당한 탄압으로 받아들였고, 한국 사회의 성적 위선과 표현의 자유 문제를 계속 비판했다.
《즐거운 사라》는 음란물 판정을 받은 뒤 정상적인 판매가 불가능해졌으며 마광수가 사망한 뒤에도 정식 유통이 제한되어 중고책 가격이 크게 뛰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야해서 싫어하는 것과 야하다는 이유로 국가가 잡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마광수의 주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사상
마광수를 단순히 좌파 또는 우파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일관된 정당정치적 포지션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를 싫어한 사람에 가까웠다.
젊었을 때는 진보진영에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사상적으로 신좌파와 통하는 면도 상당히 있었다. 68혁명과 히피 문화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서구 사회가 68혁명을 거치며 성적 자유와 개인주의를 확대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생전에 68혁명을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구가 성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된 게 68혁명 덕분이라고 평가했고 죽을 때까지 이런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건을 겪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과 진보진영에도 강한 반감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보를 주장하면서 왜 생활방식과 성 문제에서는 그렇게 권위주의적이냐는 것.
보수주의자들이 대놓고 성적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것보다 자유와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이 뒤에서는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더 위선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말년에는 좌우 양쪽을 모두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반대로 우파와 보수주의 역시 당연히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유교적 도덕주의, 보수적 기독교, 국가주의, 성적 금욕주의 등은 평생 마광수가 공격했던 대상이었다.
결국 정치적 좌우보다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축으로 보는 편이 마광수를 이해하기 쉽다.
재평가
마광수에 대한 평가는 생전부터 극단적으로 갈렸다.
한쪽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표현의 자유 투사라고 평가했고, 다른 쪽에서는 작품성이 떨어지는 선정적인 작가라고 비판했다.
사실 두 평가는 동시에 성립할 수도 있다.
《즐거운 사라》가 세계문학사에 남을 명작이냐는 것과 그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작가를 구속해도 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광수 역시 자신의 작품을 싫어할 자유 자체는 인정했다. 문제 삼았던 것은 싫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작품을 금지하고 작가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즐거운 사라》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 자체보다 표현의 자유 사건으로 더 자주 회고되고 있다.
또한 마광수가 지속적으로 비판한 한국 사회의 겉으로는 엄숙한 도덕을 강조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이중성 역시 이후 여러 사회적 사건을 거치며 다시 언급되곤 했다.
원문에서는 미투 사건들과 비교하며 마광수를 재평가했는데, 마광수가 성적으로 개방적인 주장을 했다는 사실과 개별 성범죄 의혹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 다만 성적 개방성 자체와 타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성적 강요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구분은 오히려 마광수가 주장한 개인주의적 자유관과도 연결된다.
고은 vs 마광수
극과 극인 두 시를 비교해보며 헬조선이 진정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인은 누구인지 가늠해보자.
ㄴ 국뽕 그자체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온누리 뭔누리 개지랄을 떤다. 와닿지가 않네...
아이러니하게도 마광수가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 할 당시 문단에서 마광수의 구명을 주장했던 문화예술인들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마광수와 당시 주류 문단의 관계를 단순히 마광수 vs 모든 문인으로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즐거운 사라》의 작품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작가를 구속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역사
제자 작품 표절 논란
마광수에게도 당연히 흑역사가 있다.
2007년 자신의 시집에 제자의 시를 일부 수정해 자신의 작품으로 게재한 사실이 알려져 표절 논란이 발생했다.
마광수는 해당 작품을 제자와 함께 고쳐 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취지로 해명했으나, 교수라는 지위와 저작자 표시 문제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마광수를 표현의 자유 문제에서 높게 평가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쉴드칠 이유는 없다.
한의학
치과치료를 받은 뒤 부작용을 겪은 경험 등을 계기로 한의학에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
또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지나치게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의학적 세계관이 자신의 성철학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도 했다.
이 부분은 문학적·철학적 취향의 영역과 의학적 효과의 검증은 별개로 볼 필요가 있다.
말년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마광수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해직과 복직, 휴직을 반복했고 201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그러나 해직 경력 때문에 명예교수 직함을 받지 못했다.
원문에는 《즐거운 사라》 때문에 연금도 받지 못했다고 되어 있었지만 이는 확인이 필요한 주장이다.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해직 경력 때문에 명예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광수는 말년에 학교와 문단에서 상당한 고립감을 느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정년퇴임 이후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 없다며 우울함과 서운함을 토로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얻은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글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2017년에는 등단 40주년을 맞아 과거 시집과 새 작품을 묶은 《마광수 시선》을 출간했다.
결국 죽기 직전까지 작가였다.
죽음
2017년 9월 5일.
마광수는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66세.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으며 현장에서는 자신의 재산과 시신 처리에 관한 내용을 적은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 상황을 토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죽음 이후 《즐거운 사라》 사건과 표현의 자유 문제가 다시 조명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는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토로했지만 사망 이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윤동주 연구》 등 그의 저작 주문이 급증했고 《즐거운 사라》 중고본 가격까지 폭등했다.
죽고 나서야 다시 책이 팔렸다.
참으로 마광수다운 씁쓸한 결말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즐거운 사라》 사건은 한국에서 예술과 음란물의 경계, 그리고 국가가 개인의 표현을 어디까지 규제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사례로 남아 있다.
자살자를 위하여
마광수는 젊은 시절부터 죽음과 자살을 작품의 소재로 다뤘다.
1979년에는 아예 〈자살자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자살한 사람에게 무조건 삶을 견디라고 훈계하거나 그의 선택을 비웃는 사회의 태도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약 38년 뒤 자신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면서 이 시는 사후에 다시 주목받았다.
시에서 나타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그의 다른 글과도 이어진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으며, 개인의 삶을 사회가 일방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사고다.
마광수의 작품에서 성적 자유와 죽음이라는 얼핏 전혀 다른 주제가 반복되는 것도 결국 내 몸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명언
표현의 자유
마광수의 수많은 발언 가운데 가장 일관된 주제는 이것이었다.
야해서 싫어하는 것과 야하다는 이유로 금지하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작품을 싫어하거나 자신을 욕하는 것 역시 독자의 자유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작가를 잡아가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이 점 때문에 마광수의 문학적 성취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즐거운 사라》에 대한 형사처벌은 과도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좌파에 대해
마광수는 젊은 시절에는 신좌파적 문화운동과 상당히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진보진영의 권위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진보적 세상을 주장하면서 조직 내부에서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운동권 문화에 반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68혁명과 히피운동, 성적 자유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유지했다.
결국 마광수에게 중요한 것은 좌파냐 우파냐가 아니라 개인을 얼마나 자유롭게 내버려두느냐였다.
페미니즘에 대해
마광수는 일부 한국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의 여성운동을 보수적 도덕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이 자신의 욕망과 성적 취향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페미니스트로 분류하기도 어렵고 단순한 반페미니스트로 분류하기도 애매하다. 기본적으로 모든 문제를 개인의 성적 자유라는 기준에서 판단한 사람에 가까웠다.
마광수의 평가
호평
불평
대표작
- 《광마집》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가자, 장미여관으로》
- 즐거운 사라 - 1991년 출간. 이 작품으로 1992년 음란물 제작·반포 혐의로 구속됐고 1995년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마광수라는 인물을 한국 문화사의 논쟁적 인물로 만들어버린 작품.
- 《광마일기》
-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 《윤동주 연구》
- 《마광수 시선》 - 사망한 2017년, 등단 40주년을 맞아 출간한 시선집.
평가
마광수를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는 문학가 마광수와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마광수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과 시를 읽고 문학적으로 별로라고 평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자기반복적이며 철학적 주장을 작품에 직접 집어넣는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성을 문학의 전면에 내놓고 국가의 성적 검열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라는 역사적 위치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즐거운 사라》 사건은 한 소설의 작품성이 뛰어났는가보다 국가가 성인에게 판매되는 소설의 내용을 이유로 작가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가라는 훨씬 큰 질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질문 때문에 마광수라는 이름은 그의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한때는 그냥 '야한 교수', '변태 교수'로 소비되던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표현의 자유, 개인주의, 성적 위선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를 다시 살펴보는 시각도 생겼다.
그렇다고 모든 주장이 시대를 앞섰다거나 전부 옳았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관이나 외모에 대한 발언처럼 오늘날 기준에서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많았고, 제자 작품 표절 사건처럼 본인에게 명백히 비판받을 부분도 있었다.
그런 모순까지 포함해서 마광수는 한국 현대 문화사에서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에 미친 교수처럼 보였는데, 정작 평생 싸운 상대는 섹스가 아니라 위선과 검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