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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태조 왕건에선 M자 탈모에 수염이 풍성한 아재로 나왔다.
| 박술희(朴述熙) | |
| 출생 | 미상, 웅천주 혜성군 현 충청남도 당진시 |
| 본관 | 면천 박씨 |
| 사망 | 945년 10월 24일(양력) 갑곶(甲串)으로 유배된 뒤 피살 |
| 경력 | 위사(衛士), 대광(大匡), 대장군(大將軍) (추증) 태사 삼중대광(太師 三重大匡) |
| 국적 | 후고구려 → 고려 |
| 시호 | 엄의(嚴毅) |
| 가족 | 아버지 대승(大丞) 박득의(朴得宜) 아들 박정원(朴精元) |
개요
박술희(朴述熙, ?~945)는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기의 무신·정치인으로, 면천 박씨의 시조다.
고려초기의 정치인.
용맹하고 두꺼비, 개구리, 거미도 먹는 베어 그릴스와 맞다이 뜨는 육식성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거 드라마 설정이 아니라 진짜 기록에 있다.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는 박술희가 성격이 용감하고 고기를 좋아했으며 두꺼비·청개구리·거미까지 모두 먹었다고 적혀 있다.[1]
대체 왜 그런 걸 먹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18세에 닉 퓨리의 위사(衛士)로서 정치생활을 시작해 닉 퓨리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까지 섬기면서 대광(大匡)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정확히는 18세에 궁예의 위사, 즉 군주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무사가 됐다. 이후 왕건을 섬기며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대광까지 진급했다.[2]
그래서 박술희를 단순한 고려 초기 문신이나 궁정 정치인으로 생각하면 틀린다.
출발부터 칼 들고 왕 옆에 서 있던 군인이었다.
왕건과 혜종
박술희가 고려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는 혜종이다.
왕건의 맏아들 왕무는 훗날 고려 제2대 왕 혜종이 되지만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이 다른 왕비 가문들보다 세력이 약했다.
고려 초기에는 왕건이 호족들과 존나 결혼해서 아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왕자의 외가 세력이 곧 왕위계승전의 전투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건 입장에서는 장남을 세우고 싶은데 외갓집 전투력이 너무 약함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921년 왕건은 왕무를 태자로 세우고 싶었지만 오씨 가문의 세력이 미약해 직접적으로 뜻을 밝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낡은 상자에 태자가 입는 자황포(柘黃袍)를 넣어 장화왕후 오씨에게 줬다.
오씨가 이게 뭐지? 하고 박술희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바로 왕건의 뜻을 알아먹었다.
그리고 왕무를 태자로 세우자고 공식적으로 청했다.
왕건은 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ㅎㅎ 하면서 왕무를 태자로 책봉했다.[3]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박술희가 총대 메고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왕건이 당대 기득권이었던 패서, 호서를 기반으로 한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후계자 혜종을 지키기 위해 그를 탱커로 임명했다.
박술희는 이러한 탱커역을 충실히 수행했다.
936년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도 왕건은 태자 무와 박술희에게 일리천 전투 준비를 맡겼다는 연구가 있다. 혜종의 왕위계승 기반을 전쟁 과정에서부터 박술희가 직접 보조했던 셈이다.[4]
그리고 943년 왕건이 죽기 직전에는 아예 박술희에게 국가의 중요한 일과 태자 왕무를 부탁했다.
여기에 그 유명한 훈요십조도 박술희에게 전해줬다고 기록돼 있다.[5]
이 정도면 그냥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수준이 아니다.
내가 뒤지면 얘 왕 만들고 나라까지 니가 지켜라 수준이다.
왕건이 박술희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혜종 즉위와 권력투쟁
943년 왕건이 사망하고 왕무가 혜종으로 즉위했다.
문제는 왕건이라는 최종보스가 사라지자 고려 초기 호족들과 왕자들이 어? 이제 우리끼리 하면 되나? 하고 왕위계승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큰 세력 가운데 하나가 왕규였다.
왕규는 광주 지역의 강력한 호족이었고 자신의 두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낸 외척이었다. 그 가운데 한 딸에게서 광주원군까지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외손자를 왕으로 올릴 수도 있는 위치였다.
반면 박술희는 왕건의 유언을 직접 받은 혜종 측 핵심 군사적 후견인이었다.
둘이 사이 좋을 리가 없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박술희와 왕규가 서로 미워했다고 나온다.[6]
혜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복동생 왕요와 왕소, 왕규와 광주원군 세력 등 여러 왕위계승 후보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가 반란을 꾸민다고 참소했으나 혜종은 이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왕소에게 자신의 이복누이인 공주를 시집보내 왕소 세력을 강화했다.[7]
왕규는 자기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혜종 암살까지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2대째부터 벌써 왕궁에서 암살게임 찍고 있었다.
박술희도 상황이 존나 위험하다는 걸 알았는지 항상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다녔다.[8]
왕건이 붙여준 혜종 탱커인데 탱커 본인도 탱커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최후
945년 혜종이 병으로 사망하고 왕요가 즉위해 정종이 됐다.
그리고 거의 바로 박술희가 제거된다.
원문에는 왕규의 난때 왕규와 내전을 일으킬려다 뽀록나 정종에 의해 갑곶으로 귀양을 갔고 결국 왕규에게 살해당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히는 조금 다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혜종이 병들어 있던 시기 박술희와 왕규의 갈등이 심해졌고 박술희가 신변보호를 위해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다녔다.
혜종이 죽고 정종이 즉위하자 새 국왕은 이것을 보고 박술희에게 딴 뜻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해 갑곶으로 유배했다.
그리고 945년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4일 왕규가 정종의 명령이라고 속여 박술희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9]
그러니까 전통적인 기록대로라면
혜종 사망 → 정종 즉위 → 박술희 유배 → 왕규가 왕명 사칭 → 박술희 살해
순서다.
그 뒤 왕규도 왕식렴이 이끌고 온 서경군에 의해 제압된다.
우리역사넷에 수록된 기록에서도 왕규가 혜종의 장례를 틈타 정종의 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였고, 이후 왕식렴의 군대가 들어오자 왕규가 갑곶으로 도망갔다가 처형됐다고 설명한다.[10]
근데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박술희를 유배보낸 사람은 정종이다.
왕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종 측에 의해 제거됐다.
그래서 현대 연구에서는 진짜 왕규가 박술희를 죽인 게 맞음? 이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당시 정황상 왕규가 직접 박술희를 제거했다는 『고려사』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정종이 박술희를 제거한 뒤 책임을 왕규에게 돌렸을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다.[11]
반대로 2018년 김명진의 연구처럼 기존 사료의 흐름을 받아들여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2]
따라서 현재로서는
기록상 범인 = 왕규
배후에 정종이 있었을 가능성 = 학계에서 제기되는 해석
정도로 나눠 보는 게 가장 안전하다.
어느 쪽이든 박술희에게는 존나 억울하다.
왕건이 우리 아들 좀 지켜줘 해서 진짜 끝까지 혜종 옆에 붙어 있었는데, 혜종 죽자마자 다음 왕한테 유배당하고 며칠 안 돼 살해당했다.
왕건 사후 고려 왕실 권력투쟁이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평가와 대중문화
사후에는 엄의(嚴毅)라는 시호를 받았고 태사 삼중대광(太師 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자신이 끝까지 따랐던 혜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994년 성종 때 태묘 제도를 정비하면서 박술희와 김견술을 혜종 묘정에 배향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남아 있다.[13]
즉 후대 고려 왕조도 박술희를 반역자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혜종의 충신으로 공식 인증해준 셈이다.
아들로 박정원(朴精元)이 있었다.[14]
원문에는 "아들이 있었으나 숙청당하면서 좆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박정원의 구체적인 숙청 과정까지 확인되는 1차 사료는 많지 않다.
따라서 집안 전체가 박술희 사후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정도가 안전하다.
태조 왕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훗날 야인시대 조병옥을 맡는 김학철이 맡았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이봐 머대리, 머리 좀 기르세, //네 과장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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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태조 왕건에선 M자 탈모에 수염이 풍성한 아재로 나왔다.
작중에선 상당한 개그캐로 등장한다.
덩치 크고 단순무식한데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고 먹을 것에도 환장하는 캐릭터로 묘사돼 신숭겸과 콤비처럼 돌아다닌다.
다만 박술희가 실제로 괴상한 걸 존나 잘 먹었다는 기록 자체가 있으니 먹보 설정은 완전한 창작도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왕건이 박술희와 신숭겸을 의형제로 맺어주는 장면도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둘이 정말 의형제였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왕건의 핵심 무장이라는 점을 활용한 극적 설정이다.
김학철의 박술희는 드라마의 대표적인 감초 캐릭터 중 하나가 됐고, 배우 김형일이 맡은 신숭겸과의 콤비도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citeturn769390image0
작중에선 최고의 개그캐로만 나온 것 때문에 면천박씨종친회에선 굉장히 아니꼽게 바라봤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상을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며 불만이 있었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충직하고 용맹한 모습도 함께 부각되고 캐릭터 자체의 인기가 높아지자 반응이 누그러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담당배우 김학철과 종친회 사이에도 이후 교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박술희는 단순히 왕건 옆에서 칼 들던 힘센 아재가 아니다.
왕무의 태자 책봉에 직접 관여했고, 후삼국 통일전쟁에 참여했으며, 왕건에게 국정과 후계자 보좌를 부탁받고 훈요십조까지 전해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혜종이 왕이 된 뒤에는 신변이 위험해질 정도로 정치투쟁 한복판에서 끝까지 혜종 세력을 지켰다.
혜종이 2년 만에 죽으면서 자기도 같이 좆됐다.
죽어서까지 혜종 묘정에 배향됐으니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혜종 탱커였다.
여담
- 면천 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 이름은 朴述熙 외에 朴述希로 적는 사료도 있다.[15]
- 출생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후대 자료에서 871년 전후로 추정하지만 정사에는 정확한 출생년이 없다.
- 18세에 궁예의 위사가 됐다는 기록은 있다.
- 두꺼비·청개구리·거미를 먹었다는 것도 진짜 정사 기록이다. 왜 먹었는지는 모른다.
- 왕건의 맏아들 왕무를 태자로 만드는 데 직접 관여했다.
- 왕건에게 훈요십조를 전달받은 인물로 기록돼 있다.
- 왕건 사후에는 혜종을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 혜종 말기에는 왕규와 대립하면서 병사 약 100명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 혜종 사후 정종에게 갑곶으로 유배됐다.
-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왕규가 정종의 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였다고 기록한다.
- 다만 정종이 실제 배후였다는 학설도 있다.
- 사망일은 『고려사절요』 기준 음력 945년 9월 16일, 양력 945년 10월 24일이다.[16]
- 사후 시호는 엄의(嚴毅).
- 태사 삼중대광으로 추증됐다.
- 994년 공식적으로 혜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김학철이 연기했다.
- 실제 박술희가 대머리였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김학철이 그렇게 생겼을 뿐이다.
각주
- ↑ 「박술희」,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고려 혜종의 생애와 박술희」, 김명진, 『영남학』 65, 2018.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왕규가 대광 박술희를 죽이다」, 고려사절요, 국사편찬위원회.
- ↑ 「혜종 2년」, 우리역사넷.
- ↑ 「왕규가 대광 박술희를 죽이다」, 고려사절요, 국사편찬위원회.
- ↑ 「왕규가 대광 박술희를 죽이다」, 고려사절요, 국사편찬위원회.
- ↑ 「혜종 2년」, 우리역사넷.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고려 혜종의 생애와 박술희」, 김명진, 『영남학』 65, 2018.
- ↑ 「태묘에서 제례를 지내다」,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박술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왕규가 대광 박술희를 죽이다」, 고려사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