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겸 | |
| 국적 | 태봉 → 고려 |
|---|---|
| 본관 | 면천 복씨 |
| 직업 | 무신, 정치인 |
| 다른 이름 | 복사귀(卜沙貴), 복사괴(卜砂瑰) |
| 사망 | 미상 |
고려 건국의 핵심 공신이자 왕건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남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닉 퓨리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만든 4명의 핵심 장군 중 하나다.
다른 공신들이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우리 편에 숨어 있는 반란군부터 잡아내는 데 상당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왕건이 왕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반란을 꾸민 환선길을 미리 알아챘고, 얼마 뒤에는 임춘길이라는 놈이 반란을 꾸미는 것도 적발했다.
그러니까 왕건 입장에서는 왕 만들어 주고, 뒤통수치려는 놈들까지 잡아주는 아주 고마운 신하였던 셈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이며, 지금의 당진시 면천면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덤으로 대한민국의 유명한 전통주인 면천두견주의 탄생설화에도 등장한다.
개요
복지겸(卜智謙, 생몰년 미상)은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기의 무신이자 정치인으로, 918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개국공신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이른바 고려 건국의 4대 핵심 공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활동하다가 궁예를 폐위하고 왕건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건국 이후에는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사전에 적발하여 초기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본래 이름은 사괴(砂瑰) 또는 사귀(沙貴)로 전해지며, 이후 복지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면천 복씨의 시조로,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일대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다만 정확한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왕건을 추대한 정변과 건국 직후의 반란 진압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행적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복지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고려 건국 직후 내부 반란을 적발하여 왕건의 정권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직후에는 기존 태봉의 군사조직과 지방 호족들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군사력을 가진 유력자들이 언제든지 새로운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복지겸은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왕건에게 보고함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신숭겸이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왕건을 보호하다가 전사한 인물로 유명하다면, 복지겸은 왕건의 즉위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반란 모의를 적발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왕건의 왕권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각각 군사적 희생과 정치적 위기 대응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헌했다는 점이 특징이다.[1]
생애
출신과 성장 과정
복지겸은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일대에서 성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면천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충청도 서북부의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서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여러 지역의 유력자들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으며, 복지겸 역시 이러한 지방세력과 관련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복지겸이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면천 복씨 대동보》에는 그의 선조인 복한림(卜翰林)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 면천 지역에 정착했으며, 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주민들을 보호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복지겸의 가문은 서해안의 해상교통과 군사활동에 관여한 지역 유력자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복한림의 존재와 당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족보에 전하는 가계 기록으로, 동시대 사료를 통해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복지겸이 반드시 중국계 이주민의 후손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태봉의 마군장군으로 활동할 정도의 군사적 지위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한 무예와 군사적 경험 또는 일정한 지역적 기반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지겸의 본래 이름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瑰)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복사귀(卜沙貴)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고려사》에는 사괴(砂瑰)라는 초명이 전해진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방식과 후대의 문헌 전승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은 복지겸(卜智謙)이다.[2]
궁예 휘하의 장군
복지겸은 궁예가 세운 태봉에서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활동하였다. 마군은 말을 이용해 전투를 수행하는 기병부대를 의미하며, 마군장군은 이러한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당시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뒤 국호를 마진과 태봉으로 변경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며, 왕건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신라와 후백제의 영토를 공략하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이용해 강력한 군사세력을 형성했고, 이후 한반도 중북부와 서해안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특히 철원을 수도로 삼고 독자적인 관제를 정비하면서 왕조의 체제를 갖추었지만, 재위 후반에는 스스로 미륵불을 자칭하고 신하들을 의심하여 처벌하는 등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예를 보좌하던 여러 장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왕건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복지겸은 당시 태봉의 주요 장수 가운데 하나였으며,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등과 함께 궁예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참여하였다. 다만 복지겸이 궁예 휘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전투에 참여했는지, 언제 마군장군에 임명되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군사적 지위를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고려 건국
왕건을 왕으로 만들다
918년 복지겸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는 정변에 참여하였다. 당시 궁예는 신하들을 의심하고 처벌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상실해 가고 있었으며, 주요 장수들 역시 자신들의 지위와 생명을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들 네 명의 장수는 비밀리에 왕건을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밤중에 왕건의 집을 찾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권유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네 장수는 918년 음력 6월 14일 왕건의 집을 방문해 궁예의 폭정을 비판하고 왕건이 새로운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건은 처음에는 왕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했지만, 장수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결국 추대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직접 갑옷을 가져와 왕건에게 입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왕건이 갑옷을 입고 장수들과 함께 궁궐로 향하자 여러 군사들이 합류했으며, 궁예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궁궐에서 도망쳤다. 이후 왕건은 철원의 포정전에서 국왕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했으며, 연호로 천수(天授)를 사용하였다. 궁예는 도망친 뒤 지방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며, 태봉은 고려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고려 왕조의 성립을 의미하는 동시에 기존 군주를 군사력을 동원해 몰아낸 정변이기도 하다. 《고려사》에서는 궁예가 민심을 잃고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장수들이 왕건을 추대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편찬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궁예의 폭정에 관한 기록과 네 장수의 실제 정치적 의도는 완전히 동일한 문제라고 볼 수 없으며, 복지겸 역시 당시 군사세력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판단을 바탕으로 정변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3]
개국 1등 공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자신을 추대한 장수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918년 음력 8월에는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을 제1등 공신으로 책봉하고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비단과 의복, 침구 등을 하사하였다. 또한 다른 장수와 관리들에게도 공로에 따라 2등과 3등의 공신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성립에 협력한 인물들을 포상하였다.
특히 복지겸은 고려 건국을 직접 주도한 네 명의 장수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다른 일반 공신보다 높은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만 공신으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이 곧 복지겸이 중앙정부의 모든 군사권을 장악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고려 건국 직후에는 왕건과 여러 개국공신, 지방 호족들이 복잡한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왕건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공신들을 적절하게 포상하면서도 새로운 정변이 발생하지 않도록 군사적 권력을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실제로 왕건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추대하는 데 협력했던 환선길의 반란에 직면했으며, 복지겸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4]
고려 건국 직후의 반란 진압
환선길의 모반을 적발하다
고려가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18년 6월, 마군장군 환선길이 왕건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반란을 모의하였다.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하는 데 참여했던 인물로, 건국 이후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정예병을 지휘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지방 군벌이 아니라 왕건의 신변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군사적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지위는 반란을 일으킬 경우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환선길의 아내는 남편에게 뛰어난 무예와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왕건의 즉위에도 큰 공을 세웠음에도 정작 권력은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하였다. 환선길 역시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여 병사들을 몰래 규합하고 왕건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미리 알아챈 인물이 바로 복지겸이었다.
복지겸은 환선길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왕건에게 은밀히 보고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아직 반란의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한 공신이자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핵심 장수였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 없이 그를 처벌할 경우 다른 공신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지겸 : 전하, 환선길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왕건 : 아직 증거도 없는데 설마 그러겠느냐?
이렇게 왕건이 복지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실제로 환선길은 부하 병사 50여 명을 이끌고 무장한 채 왕건이 머물던 궁전의 안뜰로 돌입하였다. 당시 왕건은 몇몇 학사들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고 있었으며, 환선길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왕건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왕건은 당황하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반란군을 크게 꾸짖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자신이 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어떻게 감히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느냐고 질책하자, 환선길이 왕건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주변에 매복한 군사들이 있을 것으로 의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환선길은 왕건을 공격하지 못하고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으며, 뒤쫓아 온 호위병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환선길의 동생인 환향식 역시 반란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쳤지만 추격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니까 복지겸이 미리 경고했을 때는 왕건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조금 있다가 진짜 반란군이 칼 들고 궁궐에 쳐들어온 것이다.
왕건 : 아 시발 진짜였네.
다만 당시 복지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환선길을 진압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복지겸의 역할은 환선길의 모반을 사전에 알아채고 왕건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며, 실제 궁궐에 침입한 환선길을 추격해 처형한 것은 왕건의 호위병들이었다. 따라서 복지겸은 반란 진압의 직접적인 지휘관이라기보다 반란을 미리 적발한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5]
임춘길의 모반을 적발하다
환선길의 반란이 실패한 뒤에도 고려의 정치적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인 918년 9월에는 순군리(徇軍吏)로 활동하던 임춘길이 다른 지역의 인물들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군은 군사와 치안, 형벌 등에 관여하는 조직으로, 이러한 기관의 관리가 반란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고려 건국 직후의 정치적 불안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 준다.
임춘길은 청주 출신으로, 같은 청주 사람인 배총규(裴悤規)와 계천 출신의 강길(康吉)·아차귀(阿次貴), 매곡 출신의 경종(景琮)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 당시 청주와 충청도 내륙 지역에는 궁예 정권 시기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군사세력과 지방 호족들이 존재했으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도 이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정권에 반발하거나 독자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임춘길의 반란 계획 역시 복지겸에게 적발되었다.
복지겸은 임춘길 등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왕건에게 보고하였으며, 왕건은 이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명령하였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관련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반란 계획을 인정했으며, 왕건은 이들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다만 배총규는 체포되기 전에 도망쳐 처형을 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건국 → 환선길 반란 적발 → 임춘길 반란 적발.
나라 세운 지 몇 달 만에 반란이 두 번이나 터졌는데 그때마다 복지겸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이 정도면 왕건 옆에 있어야 할 건 장군이 아니라 복지겸표 내부감사팀이다.
특히 임춘길의 사건은 단순히 몇몇 관리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소규모 반란으로만 볼 수 없다. 반란에 관여한 인물들이 청주와 계천, 매곡 등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지방의 여러 군사세력 사이에 정치적 연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또한 임춘길이 순군의 관리였다는 사실은 고려의 새로운 군사·치안 조직 내부에도 왕건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사건 역시 고려 왕조가 성립한 이후 편찬된 사료를 통해 전해지므로, 반란을 모의했다고 지목된 인물들의 실제 의도와 정치적 배경을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다. 특히 이들이 궁예의 복위를 목표로 했는지, 지역적인 이해관계를 지키려 했는지, 또는 새로운 정권의 인사와 군사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6]
두 사건의 역사적 의미
복지겸이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적발한 사실은 고려 건국 초기의 왕권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 준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국왕이 되었지만, 기존 태봉의 군사조직과 지방 호족들이 모두 새로운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사력을 가진 개국공신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했다.
환선길의 반란은 왕건을 추대한 세력 내부에서도 권력분배에 대한 불만이 발생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며, 임춘길의 모반은 지방세력과 군사·치안 조직 내부에까지 정치적 갈등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두 사건은 단순히 몇몇 인물들이 국왕을 제거하려 했던 음모라기보다 고려 건국 이후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지겸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건의 신임을 받은 핵심 장수로 활동했으며, 반란을 사전에 파악하고 보고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그의 공로는 후삼국의 전투에서 적군을 격파했다는 군사적 성과보다 고려 왕조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다만 《고려사》에는 복지겸이 어떠한 정보망을 통해 반란 계획을 알아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현대적인 의미의 정보기관을 운영했다거나 체계적인 첩보조직을 지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군사조직 내부의 인적 관계와 정치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는 복지겸이 단순한 전투 지휘관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말년과 사망
복지겸이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적발한 이후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사료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왕건이 후백제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936년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복지겸이 어떤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관한 기록도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이후에도 장기간 군사활동을 계속했는지, 중앙정부에서 관직을 맡아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 또는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후대의 족보와 지방 전승에 따르면 복지겸은 노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가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면천두견주의 탄생설화에서는 복지겸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고생했고, 딸이 진달래꽃으로 빚은 술을 먹여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후대의 민간 전승으로, 복지겸의 실제 말년을 정확하게 기록한 동시대 사료는 아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와 사인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에는 복지겸이 사망한 뒤 무공(武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 있으며,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려 건국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러한 추정을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사후 예우
복지겸은 사망한 뒤 무공(武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무공은 군사적 능력과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를 가진 시호로, 복지겸이 고려 건국에 기여한 대표적인 무신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그는 왕건을 추대한 네 명의 핵심 공신 가운데 하나였으며, 건국 직후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후대 고려 왕조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994년 성종 13년에는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정배향은 국가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신하를 국왕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내는 제도로, 단순히 명예로운 관직을 부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공식적인 예우에 해당한다. 이는 고려 왕조가 복지겸을 왕건의 즉위와 국가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인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특히 고려 왕조는 복지겸이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적발해 왕권을 보호한 공로도 중요하게 평가하였다. 단순히 왕건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왕조가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정치적 위험을 제거하는 데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복지겸의 묘소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경기도 광주에 묘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도 복지겸의 묘역과 사당인 무공사(武恭祠)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당진의 묘역은 면천 복씨 종중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후손들이 제향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나, 두 지역의 묘소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른 만큼 실제 매장 장소를 단정하기는 어렵다.[7]
면천 복씨
복지겸은 면천 복씨(沔川 卜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면천은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복지겸과 관련된 여러 역사적 전승과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면천 복씨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복지겸을 자신들의 시조로 존경했으며, 종중을 중심으로 묘역과 사당을 정비하고 제향을 이어 왔다.
복씨는 대한민국에서 비교적 드문 성씨 가운데 하나로, 복지겸은 그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고려 건국에 직접 참여한 개국공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면천 복씨의 가계 전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후손들은 그를 무공공(武恭公)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다만 복지겸의 선조가 당나라에서 이주한 복한림이었다는 기록이나 구체적인 가계의 형성 과정은 후대의 족보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복지겸이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사실과 그가 어떤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났는지에 관한 후대의 설명은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면천두견주와 관련된 전설
딸 영랑의 효심
복지겸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민간 전승 가운데 하나는 충청남도 당진시의 전통주인 면천두견주의 탄생설화이다. 면천두견주는 진달래꽃과 찹쌀 등을 이용해 빚는 전통적인 술로, 특유의 향과 맛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특히 이 술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에는 복지겸과 그의 딸 영랑(影娘)이 등장한다.
전승에 따르면 복지겸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뒤 노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와 생활했으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약을 사용했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으며, 가족들 역시 그를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복지겸의 딸 영랑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근 아미산에 올라가 백일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백일기도가 끝날 무렵 영랑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신령은 아미산의 진달래꽃잎과 찹쌀을 이용해 술을 빚되, 반드시 면천에 있는 안샘의 물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또한 술을 빚은 뒤 일정 기간 숙성시켜 아버지에게 마시게 하고, 집 앞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고 알려 주었다.
영랑은 신령의 가르침에 따라 진달래꽃과 찹쌀, 안샘의 물을 이용해 술을 빚었으며, 이를 복지겸에게 마시게 하자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딸이 진달래 술을 만들어 먹였더니 살아난 것이다.
이때 영랑이 만들었다는 술이 바로 면천두견주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이후 면천 지역에서는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는 전통이 이어졌으며, 복지겸과 영랑의 이야기는 효성과 가족애를 상징하는 민간설화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형성된 설화로, 복지겸이 실제로 어떤 병에 걸렸으며 딸이 술을 만들어 치료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만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술이 특정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은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설화의 요소로 이해해야 하며, 의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8]
면천 은행나무
면천두견주의 탄생설화에는 술뿐 아니라 은행나무 두 그루도 등장한다. 영랑이 신령의 가르침에 따라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하며, 이 나무들이 오늘날까지 면천 지역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는 매우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존재하며, 이들은 '당진 면천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면천 은행나무는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신성한 나무로 여겨져 왔으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복지겸의 딸 영랑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과 결합하면서 효성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졌으며, 오늘날에도 지역 주민들이 나무의 보존과 전통문화의 계승을 위해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이 은행나무들이 실제로 복지겸이 살았던 10세기에 심어졌는지, 영랑이라는 인물이 직접 나무를 심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복지겸의 전승은 역사적 사실과 민간신앙이 결합한 사례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9]
두견주의 문화적 가치
면천두견주는 충청남도 당진시를 대표하는 전통주 가운데 하나로, 진달래꽃 특유의 향과 발효주의 풍미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도 두견주를 빚는 전통이 존재하지만, 면천두견주는 복지겸과 영랑의 설화가 결합되어 독자적인 지역문화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면천두견주는 1986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제조기술의 단절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당진시와 지역 주민들이 전승사업을 추진하면서 제조기술이 다시 이어졌으며, 현재는 면천두견주보존회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제조방식을 보존하고 있다. 또한 2017년에는 면천두견주 전수교육관이 개관하면서 전통주의 제조기술과 지역의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승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결국 복지겸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신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면천두견주와 은행나무 전설을 통해 오늘날까지 지역사회에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기억이 단순히 정치사나 군사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역의 음식문화와 민간신앙, 자연유산과 결합하여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10]
대중문화
드라마 《태조 왕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길용우가 복지겸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이자 정치적인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며, 궁예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뒤 왕건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한다.
특히 극중 복지겸은 양길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궁예의 세력에 합류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양길이 궁예를 신뢰하는 모습을 경계하면서 궁예의 정치적 야심을 의심하지만, 결국 궁예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궁예가 폭정을 일삼고 신하들을 의심하자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는 정변을 준비한다.
이러한 설정은 복지겸이 실제로 궁예의 마군장군으로 활동하다가 왕건을 추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양길과의 관계나 궁예를 처음부터 경계했다는 내용 등은 드라마의 극적인 구성을 위해 창작되거나 확장된 부분이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는 복지겸이 언제부터 궁예를 섬겼으며 어떤 경로로 왕건과 관계를 맺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남아 있지 않다.
드라마에서 복지겸을 연기한 길용우는 이전에도 여러 사극에 출연한 배우로, 특히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의자왕 역할을 맡았고, 2006년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보장왕을 연기하였다. 따라서 같은 배우가 백제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을 연기한 뒤 고려의 건국공신 역할까지 맡았다는 점에서 배우개그가 성립하기도 한다.
한편 길용우는 드라마가 방영되던 2001년 면천 복씨 종친회와 지역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특히 그해 4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 지역에서 열린 진달래축제에 참가하여 복지겸 장군 가장행렬과 노래자랑 심사 등에 참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는 역사드라마에서 실제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후손들의 종친회와 지역문화 행사에서도 관심을 받았던 사례이다.[11]
역사적 평가
복지겸은 고려 건국 초기의 정치적 안정과 왕권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개국공신으로 평가된다. 그는 궁예의 휘하에서 마군장군으로 활동하다가 918년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개국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기반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복지겸의 가장 중요한 공적은 환선길과 임춘길의 모반을 사전에 적발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는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직후였기 때문에 군사조직과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지지가 충분히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력을 보유한 인물들의 반란은 왕건의 생명뿐 아니라 고려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었으며, 복지겸은 이러한 위험을 미리 파악하고 왕건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환선길의 모반은 왕건을 추대한 공신들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권력질서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며, 임춘길의 모반은 지방세력과 군사조직 내부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복지겸이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적발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개인적인 충성심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 건국 초기의 정치적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만 복지겸을 현대적인 의미의 정보기관장이나 첩보 전문가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당시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반란 계획을 파악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독립적인 정보조직을 운영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군사조직 내부의 정치적 움직임을 파악하고 왕건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가 단순한 전투 지휘관 이상의 정치적 판단력과 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복지겸의 행적은 고려 건국 초기의 왕권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왕건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지만, 기존 태봉의 군사조직과 지방 호족들이 모두 자신의 왕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사력을 가진 개국공신과 지방세력의 협력이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었으며, 복지겸은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후대 고려 왕조가 그에게 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사에 추증한 뒤 태조의 묘정에 배향했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왕건의 측근이 아니라 고려 건국과 초기 국가체제의 안정에 중요한 공로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 준다.
여담
- 본래 이름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瑰)로 전해진다. 《고려사》에는 사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복사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고려 건국 직후 환선길의 반란을 사전에 알아채고 왕건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처음에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환선길이 실제로 병사 50여 명을 이끌고 궁전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같은 해 9월에는 임춘길이 여러 지역의 인물들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는 사건도 적발하였다. 복지겸이 두 차례의 모반을 모두 발견했다는 사실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 환선길을 직접 베어 죽였거나 임춘길의 반란군을 전장에서 격파했다는 기록은 없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되는 역할은 두 사람의 반란 계획을 미리 파악하여 왕건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전사한 충신으로 유명하다면, 복지겸은 반란 계획을 미리 알아내 왕건의 정권을 보호한 공신으로 유명하다. 같은 개국공신이라도 활약한 방식은 상당히 달랐던 셈이다.
- 후대에는 무공(武恭)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994년 성종 때 태사로 추증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확한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환선길과 임춘길의 반란을 적발한 이후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면천두견주의 탄생설화에는 복지겸의 딸 영랑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어 먹였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면천 은행나무 두 그루 역시 복지겸의 딸 영랑이 심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면천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에는 복지겸을 기리는 사당인 무공사(武恭祠)와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면천 복씨 후손들이 제향을 이어 오고 있다.
관련 문서
참고 자료
- 《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
- 《고려사》 권1, 태조 총서
- 《고려사》 권92, 열전5, 홍유 부 복지겸
- 《고려사》 권127, 열전40, 환선길
- 《고려사절요》 권1, 태조 원년
- 《면천 복씨 대동보》
- 김갑동, 「나말여초의 면천과 복지겸」,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20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복지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두견주
-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복지겸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태조가 왕위에 오르다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공신을 책봉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다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모반을 꾀한 임춘길 등을 처형하다
- 연합뉴스 - 천년의 술 당진 면천두견주 전수교육관 개관 (2017)
- 연합뉴스 - 복지겸 딸 효심 깃든 면천 은행나무 목신제 (2022)
- 경향신문 - 태조왕건 장수들 귀빈 대접에 즐거운 비명 (2001)
각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복지겸」
- ↑ 《삼국사기》 권50, 「홍유 등이 왕건에게 정변 참여를 제의하다」 및 주석
- ↑ 《고려사》 권1,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태조가 왕위에 오르다」
- ↑ 《고려사절요》 권1, 「공신을 책봉하다」
- ↑ 《고려사》 권127, 「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다」
- ↑ 《고려사절요》 권1, 「모반을 꾀한 임춘길 등을 처형하다」
- ↑ 디지털당진문화대전, 「복지겸」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견주」
- ↑ 연합뉴스, 「복지겸 딸 효심 깃든 면천 은행나무 목신제」, 2022년 3월 3일
- ↑ 연합뉴스, 「'천년의 술' 당진 면천 두견주 전수교육관 개관」, 2017년 3월 20일
- ↑ 경향신문, 「태조왕건 장수들 '귀빈'대접에 즐거운 비명」, 2001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