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고려사》(高麗史)는 조선 전기인 1451년(문종 원년)에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정창손 등 여러 관료들이 왕명으로 편찬한 고려의 공식 역사서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멸망한 1392년까지 약 475년 동안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제도와 인물 등을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로, 총 139권 7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의 명령에 따라 1449년 본격적인 편찬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451년 8월 문종에게 완성된 책을 바쳤다. 이후 1454년(단종 2년)에 처음으로 인쇄·반포되었다.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의 역대 국왕과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토지제도와 세금, 관직과 군사제도, 천문과 역법, 음악과 의례 등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수록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고려사》는 고려시대를 연구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고려시대에 작성된 여러 문헌이 소실된 오늘날에는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과 제도에 관한 내용도 상당 부분 이 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직접 완성한 역사서가 아니라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가 《고려사》를 편찬한 목적에는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고 정치적인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뿐 아니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설명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이에 따라 고려 말의 우왕과 창왕은 정통적인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국왕의 기록인 세가가 아니라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또한 고려의 국왕들에 대한 기록을 중국의 황제에게 사용하는 본기(本紀)가 아니라 제후를 기록하는 세가(世家)라고 명명한 것도 조선 초기의 정치적인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 세종은 고려시대의 실제 기록과 용어를 후대의 기준에 맞추어 함부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러한 원칙은 직서(直書)라고 불렸으며, 《고려사》가 원래의 사료를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고려사》는 조선 건국 이후의 정치적인 정당성을 설명하려는 목적과 역사적인 사실을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려는 원칙이 함께 나타나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사》가 조선 건국의 합리화라는 목적 아래 편찬되었지만, 자료의 선택과 서술에서 상당한 객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1]
오늘날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원문과 한국어 번역문을 열람할 수 있다.
고려라는 나라를 연구할 때 사실상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역사서이면서도, 동시에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관료들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기록의 정치적인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책이다.
기본 정보
| 고려사 | |
|---|---|
| 한자 | 高麗史 |
| 종류 | 역사서, 관찬사서, 정사 |
| 편찬 국가 | 조선 |
| 기록 대상 | 고려 (918년 ~ 1392년) |
| 편찬 명령 | 세종 |
| 편찬 책임자 |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 |
| 주요 편찬자 | 정창손, 신숙주, 박팽년, 양성지, 최항 등 |
| 편찬기관 | 춘추관 |
| 편찬 시작 | 1449년 (세종 31년) |
| 편찬 완료 | 1451년 8월 (문종 원년) |
| 최초 간행 | 1454년 (단종 2년) |
| 편찬 방식 | 기전체 |
| 전체 분량 | 139권 75책 |
| 세부 구성 |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
| 열전 수록 인물 | 총 1,008명 (주요 입전 인물 770명, 부기 인물 238명) |
| 사용 문자 | 한문 |
| 주요 참고자료 | 고려시대 실록, 《고금상정예문》, 《식목편수록》, 고려시대 문집과 각종 기록 |
| 관련 역사서 | 《고려사절요》 |
| 주요 판본 | 을해자 금속활자본, 을해자 번각 목판본 |
| 주요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
| 온라인 열람 |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
명칭
《고려사》는 한자로 高麗史라고 표기하며, 문자 그대로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사(史)는 역사 또는 역사기록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도 역사기록을 작성하고 편찬하는 제도가 존재했지만, 오늘날 《고려사》라고 부르는 139권의 역사서는 조선 전기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고려사》라는 명칭을 보고 고려시대에 완성된 역사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멸망한 지 약 59년이 지난 뒤에 편찬이 완료된 책이다.
이처럼 새로운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여 공식적인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은 동아시아에서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수립된 뒤 이전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고려사》 역시 이러한 역사편찬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고려사》라는 명칭이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을 의미할 뿐, 책에 수록된 모든 내용이 실제 고려시대의 관점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편찬 배경
고려의 멸망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918년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약 475년 만에 멸망했다.
고려 말에는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원나라와 명나라의 관계 변화,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 등이 발생했다.
또한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확보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이러한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을 새로운 왕조가 필요했던 이유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입장에서는 고려 말의 역사만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고려가 어떤 과정을 거쳐 건국되고 발전했으며, 어떤 이유로 정치적인 혼란과 멸망에 이르렀는지 전체적인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조선 정부는 고려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
조선은 고려를 계승하는 새로운 왕조로서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역사자료를 보존하기 위한 작업만은 아니었다.
고려 말의 정치가 혼란에 빠졌으며 기존 왕조가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왕과 관료들은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정치적인 교훈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역사서에는 어떤 국왕이 좋은 정치를 펼쳤으며, 어떤 신하가 충성하거나 반역했는지에 관한 평가가 중요하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하면 새로운 왕조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 정부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기록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고려국사
조선 건국 이후 처음으로 추진된 주요 고려사 편찬사업은 《고려국사》(高麗國史)였다.
1392년 태조는 조준, 정도전, 정총 등에게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1395년 정도전과 정총 등이 37권의 《고려국사》를 완성했다.
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였으며, 고려가 멸망한 원인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국사》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태조실록》과 《동문선》 등에 편찬 당시의 서문과 관련 기록이 남아 있어 책의 구성과 편찬원칙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의 역사관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고려 말의 정치세력과 대립했으며, 새로운 왕조의 정치제도와 국가운영을 설계하는 데 참여했다.
따라서 그가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자신이 참여했던 정치적인 사건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고려국사》에서는 고려 말의 일부 인물을 부당하게 비판하거나 조선 건국과 관련된 사건을 정치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술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란은 이후 《고려국사》를 다시 편찬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태종 시대의 개찬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은 제거되었다.
이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도전이 주도했던 정치제도와 정책, 역사편찬사업에 대한 평가도 변화했다.
태종은 《고려국사》에 고려 말의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1414년에는 하륜과 남재, 이숙번, 변계량 등에게 고려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완성되지 못했다.
1416년 편찬 책임자였던 하륜이 사망하면서 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사 편찬사업은 세종 시대에 다시 추진되었다.
세종 시대의 편찬사업
세종은 즉위 이후 고려사 편찬사업을 중요한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다.
그는 과거에 작성된 고려사에 오류와 왜곡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수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개찬작업을 지시했다.
1419~1421년 개찬
1419년(세종 원년) 세종은 유관과 변계량 등에게 《고려국사》를 다시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이 작업은 1421년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된 책은 정식으로 반포되지 못했다.
문제는 고려시대에 실제로 사용했던 왕실의 칭호와 국가제도를 조선의 정치적인 기준에 맞추어 변경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황제국과 유사한 정치적 용어와 의례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제후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체제를 운영했다.
따라서 고려가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쟁이 발생했다.
수교고려사
세종은 고려시대에 실제로 사용했던 표현을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423년에는 유관과 윤회 등에게 고려의 실록을 대조하여 당시 사용했던 용어를 그대로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424년 8월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변계량 등 일부 관료들은 고려의 황제국 관련 표현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반대했다.
이 때문에 《수교고려사》 역시 정식으로 반포되지 못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려는 원칙과 당시 조선의 외교적·정치적 명분이 충돌한 사례였다.
고려사전문
1438년부터 1442년까지는 신개와 권제 등이 고려사의 새로운 편찬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기존의 내용을 보완하고 여러 기록을 정리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였으며, 1448년 인쇄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편찬과정에서 공정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권제가 자신의 조상과 관련된 기록을 사실과 다르게 수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 기록을 변경했다는 의혹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려사전문》의 반포도 중단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개찬과정을 거쳐 1449년 최종적인 《고려사》의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2]
직서와 개서 논쟁
《고려사》의 편찬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직서(直書)와 개서(改書)였다.
직서
직서는 역사자료에 등장하는 사실과 용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실제로 어떤 관직을 사용했다면 후대의 기준에서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사용한 표현을 기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세종은 이러한 원칙을 지지했다.
그는 기존의 기록을 후대의 정치적 기준에 따라 변경하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서가 모든 기록을 아무런 검토 없이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문헌을 비교하여 기록의 정확성을 검토하는 작업은 필요했다.
개서
개서는 과거의 기록을 후대의 정치적·외교적 기준에 맞추어 변경하는 방식이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고려의 일부 왕실 용어가 중국의 황제에게 사용하는 표현과 같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예를 들어 고려에서 황제국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했다면 이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변경하면 고려의 정치제도와 국가적인 자의식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세종의 판단
세종은 고려의 역사를 당시의 실제 기록에 맞추어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최종적인 《고려사》에서는 고려시대의 왕실 용어와 제도에 관한 기록이 상당 부분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 원칙이 모든 영역에서 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아니다.
고려의 국왕에 관한 기록을 본기가 아닌 세가라고 명명하고 우왕과 창왕을 반역열전에 수록한 것처럼 조선 초기의 정치적 관점이 반영된 부분도 존재한다.
따라서 《고려사》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보존하려는 노력과 정치적 명분에 따른 재구성이 함께 나타난 역사서다.
1449년 최종 편찬
1449년(세종 31년) 세종은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에게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여러 편찬사업에서 발생했던 문제를 수정하고, 기존의 자료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역사서의 서술방식을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기전체 채택
기전체는 국왕의 행적과 국가제도, 인물의 전기 등을 서로 다른 항목으로 구분하여 기록하는 방식이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김종서, 정인지 등은 고려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기록하려면 기전체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편년체는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을 이해하기에 편리하지만, 특정한 제도나 인물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기전체로 편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고려사》는 중국의 《사기》와 《원사》 등 기존의 기전체 역사서를 참고하여 구성되었다.
1451년 완성
1451년 8월 김종서 등은 완성된 《고려사》를 문종에게 바쳤다.
완성된 책은 총 139권으로, 세가 46권과 지 39권, 연표 2권과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종실록》에는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문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편찬자들은 과거의 흥망을 거울로 삼아 후대의 정치에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함께 올렸다.
이는 《고려사》의 편찬이 역사적인 사건의 정리뿐 아니라 통치에 필요한 교훈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
편찬자
《고려사》는 여러 관료와 학자들이 참여한 국가적인 편찬사업이었다.
대표적인 책임자는 김종서와 정인지, 이선제 등이었다.
또한 정창손과 신숙주, 박팽년과 양성지 등 여러 인물들이 실제 편찬에 참여했다.
| 인물 | 주요 역할 |
|---|---|
| 김종서 | 고려사 편찬을 총괄한 주요 책임자 |
| 정인지 | 편찬 책임자, 이후 간행과 반포에 관여 |
| 이선제 | 편찬 책임자 가운데 한 명 |
| 정창손 | 고위 편찬 책임자 |
| 최항 | 열전 편찬에 참여 |
| 신숙주 | 열전 편찬에 참여 |
| 박팽년 | 열전 편찬에 참여 |
| 양성지 | 세가·지·연표 등의 편찬에 참여 |
| 노숙동 | 세가·지·연표 등의 편찬에 참여 |
| 이석형 | 세가·지·연표 등의 편찬에 참여 |
수사관 명단
《고려사》에는 편찬에 참여한 수사관(修史官) 3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종서와 박팽년, 유성원 등 일부 인물들은 훗날 발생한 정치적 사건 때문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수사관 명단을 당시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완전한 명단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1]
이러한 사실은 역사서의 편찬 자체뿐 아니라 완성된 책의 전승과 간행 과정에도 정치적인 변화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구성
《고려사》는 총 139권 75책으로 구성된 기전체 역사서다.
권(卷)은 책의 내용상 구분이며, 책(冊)은 실제로 묶인 물리적인 책을 의미한다.
따라서 139권 75책이라는 표현은 139개의 내용상 단위가 75개의 책으로 묶여 있다는 뜻이다.
| 구분 | 권수 | 전체 권 번호 | 주요 내용 |
|---|---|---|---|
| 세가(世家) | 46권 | 권1~46 | 고려 국왕의 재위기간과 정치적 사건 |
| 지(志) | 39권 | 권47~85 | 국가의 제도와 경제, 사회와 문화 |
| 연표(年表) | 2권 | 권86~87 | 국왕과 시대별 연대, 주요 사건 |
| 열전(列傳) | 50권 | 권88~137 |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활동 |
| 목록(目錄) | 2권 | 권138~139 | 책의 전체적인 차례 |
| 합계 | 139권 | 권1~139 | 75책 |
세가
세가(世家)는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부분이다.
《고려사》에서는 권1부터 권46까지 총 4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918년 태조가 즉위한 이후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되기까지 고려 국왕들의 정치적인 활동을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국왕의 즉위와 사망, 주요 정책과 전쟁, 외교관계와 신하들의 활동 등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국왕이 동일한 방식으로 세가에 수록된 것은 아니다.
우왕과 창왕은 조선 건국세력이 정통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가에서 제외되었다.
본기가 아닌 세가
기전체 역사서에서 본기(本紀)는 일반적으로 황제나 최고 통치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국왕들에 관한 기록을 본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사》에서는 고려 국왕들의 기록을 세가라고 명명했다.
세가는 중국의 기전체 역사서에서 제후나 중요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는 항목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려 국왕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로 분류한 것은 조선 초기의 유교적인 명분론과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영향을 미친 결과로 설명된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제후국의 지위를 인정받는 체제를 운영했으며, 고려의 국왕들 역시 중국 황제와 같은 지위로 기록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려 국왕의 격하 문제
고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책봉과 조공 등 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시에 국내에서는 황제국과 관련된 용어와 의례를 사용한 시기도 있었다.
따라서 고려 국왕의 기록을 세가로 분류한 사실은 조선의 편찬자들이 고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정치적 세계관에 따라 재구성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세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고려사》가 고려의 자주성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 본문에는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와 정치적 활동, 외교와 군사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요 왕대
세가에는 고려의 여러 국왕이 추진한 정책과 정치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태조의 후삼국 통일과 광종의 왕권 강화, 성종의 정치제도 정비와 현종 시대의 여요전쟁 등이 있다.
또한 인종 시대의 묘청의 난, 의종 시대의 무신정변, 고종 시대의 몽골 침입과 공민왕의 개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의 정치적 사건들이 어떤 순서로 발생했으며 국왕과 신하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연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세가에는 국왕과 중앙정부의 활동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려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면 지와 열전 등 다른 부분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지
지(志)는 고려의 제도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주제별로 정리한 부분이다.
《고려사》에서는 권47부터 권85까지 총 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특정한 국왕의 재위기간에만 한정하지 않고 하나의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려의 조세제도를 연구할 경우 여러 국왕의 정치적인 활동을 모두 찾아보기보다 식화지에 수록된 관련 기록을 조사할 수 있다.
《고려사》의 지는 12개 분야로 구분된다.
| 분야 | 권수 | 전체 권 번호 | 주요 내용 |
|---|---|---|---|
| 천문지(天文志) | 3권 | 47~49 | 천체와 천문현상 |
| 역지(曆志) | 3권 | 50~52 | 역법과 시간계산 |
| 오행지(五行志) | 3권 | 53~55 | 자연현상과 재해에 관한 기록 |
| 지리지(地理志) | 3권 | 56~58 | 행정구역과 지명, 지역의 역사 |
| 예지(禮志) | 11권 | 59~69 | 국가의 의례와 제사 |
| 악지(樂志) | 2권 | 70~71 | 음악과 악무 |
| 여복지(輿服志) | 1권 | 72 | 의복과 의장, 수레 등 |
| 선거지(選擧志) | 3권 | 73~75 | 과거제도와 인재 선발 |
| 백관지(百官志) | 2권 | 76~77 | 관직과 중앙·지방 관청 |
| 식화지(食貨志) | 3권 | 78~80 | 토지제도와 조세, 경제 |
| 병지(兵志) | 3권 | 81~83 | 군사조직과 군역 |
| 형법지(刑法志) | 2권 | 84~85 | 형벌과 법률제도 |
| 합계 | 39권 | 47~85 | 12개 분야 |
이러한 구성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4]
천문지
천문지(天文志)는 고려시대의 천문관측과 천체현상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식과 월식, 혜성과 별의 움직임 등 여러 천문현상을 관찰했다.
천문현상은 자연과학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의 변화가 국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관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문지에 기록된 천문현상은 당시의 자연관과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천문현상을 국왕의 정치적 잘못이나 미래의 재앙과 직접 연결하는 해석은 현대 천문학의 관점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반면 실제 관측한 일식과 혜성 등의 기록은 현대의 천문학사 연구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역지
역지(曆志)는 역법과 달력, 날짜와 시간계산 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고려에서는 중국의 역법을 수용하고 여러 차례 달력과 시간계산에 관한 제도를 정비했다.
역법은 단순히 날짜를 계산하는 기술만이 아니었다.
국가적인 의례와 제사, 농업의 시기와 행정업무 등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역지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과학기술과 정치제도를 연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오행지
오행지(五行志)는 자연재해와 이상현상 등에 관한 기록을 다룬다.
고려에서는 가뭄과 홍수, 지진과 병충해 등의 현상을 기록했으며, 때로는 이를 정치적인 징조로 해석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실제 기상재해와 자연현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후와 재해 연구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옛 문헌에 기록된 재해의 규모와 원인을 현대의 과학적인 기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기록이 작성된 목적과 당시의 관측기술, 정치적인 해석 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지
지리지(地理志)는 고려의 행정구역과 지명, 지역의 역사와 지리적인 특징 등을 정리한 부분이다.
고려시대의 지방제도와 도시, 군현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 시대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개편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의 지명과 옛 지명을 비교하거나 고대와 중세의 행정구역을 연구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또한 지리지에는 특정한 지역과 관련된 전설과 전승이 기록된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려사 지리지의 서해도 유주 관련 기록에는 구월산과 단군에 관한 전승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리지에 이러한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과 전승의 모든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예지
예지(禮志)는 국가의 의례와 제사, 왕실의 행사 등에 관한 기록이다.
총 11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고려에서는 국왕과 왕실, 국가적인 제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례가 운영되었다.
또한 중국의 의례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고려의 상황에 맞추어 변형하기도 했다.
예지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국가의례와 정치적인 질서, 왕실의 권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예지에 수록된 의례가 고려의 모든 시기와 지역에서 동일하게 시행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제도의 규정과 실제 운영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지
악지(樂志)는 고려시대의 음악과 무용, 궁중의 연희 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고려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음악과 기존의 향악 등이 함께 발전했다.
악지에는 아악과 당악, 향악과 관련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악곡과 노래, 궁중의 공연 등에 관한 자료도 남아 있어 고려시대의 음악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악지에 수록된 음악 관련 명칭과 기록만으로 당시 연주된 음악의 실제 소리를 완전히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악기와 악보, 후대의 전승과 다른 기록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여복지
여복지(輿服志)는 수레와 의복, 의장과 관련된 제도를 기록한 부분이다.
국왕과 왕실, 관료들의 복식과 의례적인 장식 등이 포함된다.
이는 고려의 신분질서와 국가적인 위계질서가 의복과 의장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 고려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의 형태를 이해하려면 여복지의 기록뿐 아니라 불화와 벽화, 출토된 유물 등도 함께 참고해야 한다.
선거지
선거지(選擧志)는 관료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제도를 다룬다.
현대적인 의미의 선거와 달리 여기서 선거는 관리의 선발과 추천, 과거시험 등의 제도를 의미한다.
고려에서는 광종 시대에 과거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이후 여러 종류의 시험과 인재 등용제도가 운영되었다.
선거지는 이러한 제도의 변화와 관료 선발의 기준을 연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음서와 같은 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백관지
백관지(百官志)는 고려의 중앙과 지방 관청, 관직과 행정조직 등을 정리한 부분이다.
고려에서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중추원 등 여러 중앙관청이 운영되었다.
또한 시대에 따라 관청의 명칭과 조직이 변경되었다.
백관지는 이러한 관직과 제도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문헌에 관직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해당 관직이 모든 시기에 실제로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관직의 이름과 실제 권한은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식화지
식화지(食貨志)는 고려의 경제와 재정, 토지제도와 조세 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대표적으로 전시과와 농업, 조세와 창고, 물자의 관리 등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의 국가경제는 농업을 중요한 기반으로 삼았으며, 토지의 분급과 조세의 징수는 국가운영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식화지는 이러한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경제활동을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 지역의 경제활동 등은 다른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병지
병지(兵志)는 군사제도와 병력의 편성, 군역과 군사행정 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고려에서는 중앙군과 지방군을 운영했으며, 시대에 따라 군사조직이 변화했다.
군사제도의 변화는 국가의 정치적 상황과 전쟁, 권력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병지의 기록은 고려시대 군사조직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형법지
형법지(刑法志)는 형벌과 법률제도, 범죄의 처벌과 재판 등에 관한 기록을 다룬다.
고려에서는 중국의 법률제도를 참고하면서도 자체적인 법률과 관습을 운영했다.
형법지는 국가가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으며 어떤 처벌을 적용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노비제도와 신분질서, 행정적인 규제 등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법률에 어떤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시행되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연표
연표(年表)는 고려의 국왕과 주요 사건의 연대를 표 형식으로 정리한 부분이다.
《고려사》에서는 권86과 권87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표는 사건의 시간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고려와 주변 국가 사이의 연대를 비교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연표에서는 중국 왕조의 연호와 고려 국왕의 재위기간 등을 함께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에도 조선 초기의 정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연표에서는 중국의 왕조를 위쪽에 배치하고 고려를 아래쪽에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조선이 중국과의 외교적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인식했던 정치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우왕과 창왕의 연대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세가에서 제외하고 반역열전에 수록했다.
그러나 연표에서는 이들의 재위기간을 다른 국왕과 유사한 형식으로 정리한 부분이 존재한다.
다만 이름을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표기했다.
이러한 차이는 편찬체제와 담당자의 판단, 정치적인 목적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역사서 안에서도 세가와 연표, 열전의 서술방식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열전
열전(列傳)은 고려시대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전기를 기록한 부분이다.
《고려사》에서는 권88부터 권137까지 총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인물 770명에 대한 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과 관련된 238명의 인물이 추가로 기록되어 총 1,008명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열전은 고려시대의 정치와 사회, 군사와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인물자료다.
그러나 열전에 등장한 모든 사람이 같은 비중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일부 인물은 상당히 긴 전기가 수록되어 있지만 다른 인물은 간략한 활동만 기록되어 있다.
열전의 분류
《고려사》의 열전은 후비와 종실, 제신과 양리, 충의와 효우, 열녀와 방기, 환자와 혹리, 폐행과 간신, 반역 등 여러 유형으로 구분된다.
| 분류 | 주요 내용 |
|---|---|
| 후비전(后妃傳) | 왕비와 후궁 등 왕실 여성 |
| 종실전(宗室傳) | 고려 왕실의 친족 |
| 제신전(諸臣傳) | 주요 문신과 무신 |
| 양리전(良吏傳) | 좋은 행정을 펼친 관리 |
| 충의전(忠義傳) | 충성과 의리를 지킨 인물 |
| 효우전(孝友傳) | 효도와 우애로 평가받은 인물 |
| 열녀전(烈女傳) | 당시의 유교적 기준에서 정절 등을 지킨 여성 |
| 방기전(方技傳) | 의학과 점술 등 여러 기술에 종사한 인물 |
| 환자전(宦者傳) | 환관 |
| 혹리전(酷吏傳) | 가혹한 행정을 펼친 관리 |
| 폐행전(嬖幸傳) | 군주의 총애를 통해 권력을 얻은 인물 |
| 간신전(奸臣傳) | 간신으로 평가된 인물 |
| 반역전(叛逆傳) | 반역자로 규정된 인물과 정치세력 |
이러한 분류는 단순히 직업과 신분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편찬자들의 도덕적인 평가와 정치적 판단도 반영하고 있다.
제신전
제신전(諸臣傳)은 고려시대의 주요 문신과 무신 등에 관한 기록이다.
고려의 정치와 외교, 행정과 군사에 관여한 여러 인물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서희, 강감찬, 김부식, 이규보, 이제현 등 고려시대의 중요한 인물들을 연구할 때 열전의 기록이 활용된다.
그러나 개인의 전기에는 후대의 평가와 편찬자의 판단이 반영될 수 있으므로 다른 사료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충의전과 양리전
충의전은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 정치적인 의리 등을 중심으로 인물을 평가한 부분이다.
양리전은 행정을 올바르게 수행한 관리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러한 구분은 조선 초기의 유교적인 정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의 역사편찬자들은 올바른 신하의 행동과 바람직한 행정에 관한 사례를 후대에 전달하려 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실제 인물의 생애뿐 아니라 조선의 편찬자들이 어떤 행동을 이상적으로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열녀전
열녀전(烈女傳)은 여성의 정절과 가족관계 등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부분이다.
그러나 열녀라는 표현에는 당시 유교적인 도덕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여성의 삶을 단순히 정절이나 남편에 대한 충성만으로 평가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연구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규범과 실제 여성들의 생활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역열전
반역열전은 반역자로 규정된 인물들과 관련된 기록이다.
고려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거나 국왕에 대항했던 인물들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최충헌과 김준 등 무신정권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 말의 우왕과 창왕도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해당 인물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반드시 반역자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분류에는 조선 건국세력의 정치적인 판단과 유교적인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왕과 창왕 문제
《고려사》의 정치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는 우왕과 창왕에 대한 서술이다.
우왕은 1374년 공민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우왕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1389년 다시 폐위되었다.
당시 이성계 등의 세력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우왕과 창왕이 고려 왕실의 정통적인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공양왕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웠다.
신우와 신창
조선 초기의 역사서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각각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두 사람이 고려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반영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의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고려사》의 기록에 신우와 신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혈통이 완전히 확정되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세가에서의 제외
《고려사》의 편찬자들은 우왕과 창왕을 고려의 정통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 관한 기록을 다른 국왕들과 같은 세가가 아니라 반역열전에 수록했다.
이는 고려 말의 왕위 계승에 관한 조선 건국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제로 두 사람이 고려의 왕위에 올라 국가를 통치했던 역사적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서의 편찬자가 어떤 인물을 정통적인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가 실제로 왕위에 있었고 국가를 통치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
우왕과 창왕의 혈통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주장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성계와 조선 건국세력은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했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우왕과 창왕을 정통적인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들을 폐위한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기가 더 쉬워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서술은 고려 말의 실제 사건과 조선 건국 이후의 정치적 평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몽주에 대한 평가
정몽주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조선 건국세력에 반대하다가 1392년 피살된 인물이다.
그는 고려왕조의 존속을 지지했으며, 이성계와 정도전 등의 정치적인 활동에 반대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이러한 입장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사》의 편찬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사》에서는 정몽주와 김진양 등 조선 건국세력에 반대했던 인물들에 관해서도 충신으로 평가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인물이라고 해서 모든 행적을 부정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러한 서술을 《고려사》의 비교적 객관적인 역사편찬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설명한다.[1]
기전체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다.
기전체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이 《사기》에서 발전시킨 역사서술 방식으로, 국왕과 황제의 행적, 국가의 제도와 주요 인물들의 전기를 각각 다른 항목으로 구분하여 기록한다.
《고려사》에서는 본기 대신 세가를 사용했으며, 지와 연표, 열전 등을 함께 구성했다.
기전체의 장점
기전체는 특정한 인물이나 제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고려의 관직제도를 연구하려면 백관지를, 토지제도와 조세를 연구하려면 식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특정한 관료나 무장의 생애를 조사하려면 열전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한 가지 주제에 관한 기록이 여러 국왕의 재위기간에 흩어져 있는 편년체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기전체의 한계
기전체는 사건을 분야별로 구분하기 때문에 특정한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동일한 인물이나 사건이 세가와 열전, 지 등에 중복하여 기록될 수 있다.
반대로 열전이나 지에서는 사건이 발생한 정확한 연도가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고려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기전체와 편년체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사절요와의 비교
《고려사절요》는 1452년 김종서 등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다.
《고려사》가 완성된 이듬해에 편찬되었으며, 고려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를 《고려사》의 단순한 요약본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두 역사서는 같은 편찬사업의 성과를 공유하지만, 서술방식과 수록 내용에 차이가 존재한다.
| 구분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
| 완성 | 1451년 | 1452년 |
| 최초 간행 | 1454년 | 1453년 |
| 분량 | 139권 75책 | 35권 35책 |
| 편찬체제 | 기전체 | 편년체 |
| 주요 구성 | 세가·지·연표·열전·목록 | 연대순 기록 |
| 서술의 중심 | 국왕·제도·인물 | 사건의 흐름과 정치적 교훈 |
| 사론 | 세가에 약 33편 | 약 108편 |
| 주요 활용 | 인물과 제도, 정치·경제·사회 연구 | 사건의 연대와 전개과정 연구 |
※ 사론의 수는 집계방식과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론의 차이
《고려사》에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인 사론이 비교적 적게 수록되어 있다.
세가에는 이제현과 고려시대의 사관 등이 남긴 사론이 인용되어 있다.
반면 《고려사절요》에는 약 108편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절요》가 고려의 정치적인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면서 군주와 신하들의 올바른 행동에 관한 교훈을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론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고려사절요》가 모든 면에서 《고려사》보다 우수한 역사서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고려사》는 제도와 인물의 역사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서로 보완하는 역사서
두 역사서는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다.
《고려사》를 통해 고려의 제도와 주요 인물에 관한 기록을 조사할 수 있으며, 《고려사절요》를 통해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과 정치적인 배경을 검토할 수 있다.
또한 두 책의 기록이 서로 다를 경우 편찬과정에서 어떤 자료를 선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두 책에 모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독립적인 증거가 두 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두 역사서는 상당 부분 공통된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1454년 간행
《고려사》는 1451년에 완성되었지만 곧바로 인쇄·반포되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어린 단종의 즉위와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1453년에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김종서와 황보인 등 주요 대신들이 제거되었다.
이후 1454년 10월 정인지의 이름으로 《고려사》가 인쇄·반포되었다.
따라서 《고려사》의 완성 시기와 최초 간행 시기는 구분해야 한다.
김종서의 죽음
《고려사》의 주요 편찬 책임자였던 김종서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제거되었다.
그는 고려의 정치와 왕위 계승, 국가의 흥망에 관한 역사를 편찬했지만 자신 역시 조선의 정치적인 권력투쟁에서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고려사》의 편찬 책임자와 실제 간행을 담당한 정치세력이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일부 편찬자들이 이후의 정치적 사건 때문에 공식적인 수사관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도 발생했다.
고려의 475년 역사를 정리한 역사서가 완성된 뒤, 정작 그 편찬 책임자는 책이 세상에 널리 보급되기도 전에 조선의 권력투쟁으로 제거된 것이다.
주요 판본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이후 여러 차례 인쇄되었다.
그러나 최초 간행된 판본이 모두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아니다.
1454년 초간본
1454년 《고려사》가 최초로 인쇄·반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간행된 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이후에 제작된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등을 통해 원문의 내용을 확인한다.
을해자본
1455년 세조 시대에는 금속활자인 을해자가 제작되었다.
을해자는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된 금속활자로, 조선 전기의 인쇄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려사》 역시 을해자를 사용한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오늘날에는 1482년(성종 13년)에 인쇄된 을해자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판본은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인쇄기술과 역사서의 전승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목판본
후대에는 을해자본을 바탕으로 목판을 새겨 《고려사》를 다시 간행했다.
이러한 방식은 번각(飜刻)이라고 불린다.
기존의 인쇄본을 바탕으로 글자를 목판에 새겨 다시 인쇄하는 방법이다.
오늘날에는 1613년(광해군 5년)의 목판본과 이후 인쇄된 후쇄본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서로 다른 시기에 인쇄된 판본 사이에는 글자의 형태와 구성, 오자와 누락 등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정확한 원문을 연구할 때에는 어떤 판본을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물 지정
《고려사》의 현존 판본은 역사적·문헌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21년 2월 17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연세대학교,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등에 소장된 《고려사》 6건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을해자 금속활자본과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유산청은 고려시대 연구의 핵심 사료라는 점과 조선 전기의 인쇄문화, 판본의 전승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등을 중요한 가치로 평가했다.
주요 소장처
| 소장처 | 주요 판본 |
|---|---|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을해자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
| 연세대학교 | 목판본 |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사》 목판본은 총 139권 75책으로 이루어진 완질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소장품 가운데 《고려사》의 일부 권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조선 전기의 정사로 설명하고 있다.[5]
역사적 가치
고려시대의 기본 사료
《고려사》는 고려시대의 역사와 제도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고려에서는 국가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제도가 운영되었으며, 여러 국왕의 재위기간에 관한 실록도 편찬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실록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는 이미 사라진 고려시대의 기록을 일부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고려사》의 기록이 고려시대의 원래 문헌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완전히 검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고려의 제도와 문화
《고려사》에는 고려의 정치적 사건뿐 아니라 다양한 제도와 문화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토지제도와 조세, 관직과 군사제도, 국가적인 의례와 음악 등 여러 분야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는 고려가 단순히 전쟁과 정변만 반복했던 국가가 아니라 오랜 기간 복잡한 행정과 사회제도를 운영했던 국가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물 연구
열전에는 약 1,008명의 인물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친 여러 사람들의 생애와 활동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열전의 인물 분류에는 유교적인 도덕관념과 조선 초기의 정치적 판단이 반영되어 있다.
특정한 인물이 충신이나 간신, 반역자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실제 행적을 모두 평가할 수는 없다.
다른 역사자료와의 비교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지만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문헌과 개인 문집, 묘지명과 금석문,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 다른 자료도 존재한다.
이러한 자료를 함께 비교하면 《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거나 기존 기록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대의 고려사 연구에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독립적인 사료를 함께 검토한다.
한계와 비판
조선 건국세력의 정치적 관점
《고려사》의 중요한 한계 가운데 하나는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했다는 사실이다.
책의 편찬에는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목적뿐 아니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설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왕과 창왕을 반역열전에 수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고려의 국왕에 관한 기록을 본기가 아니라 세가라고 명명한 것에도 조선 초기의 정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특정한 인물과 사건을 평가할 때에는 편찬자의 입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유교적인 역사관
《고려사》의 편찬자들은 유교적인 정치질서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군주와 신하의 관계, 충성과 반역, 정치적인 도덕성과 국가제도의 운영을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은 고려시대의 정치적인 사건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의 불교행사를 국가재정의 낭비로 평가하는 기록이 존재한다면, 실제로 그 행사가 당시 사회에서 어떤 종교적·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왕내제의 해석
고려에서는 외교관계에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국내에서는 황제국과 관련된 용어와 의례를 사용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편찬자들은 이러한 제도를 자신들의 명분론과 정치적인 기준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거나 일부 제도를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적 자의식과 정치제도를 연구할 때에는 《고려사》의 기록뿐 아니라 고려시대에 실제로 작성된 금석문과 외교문서 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연대 표기의 문제
《고려사》에서는 일부 국왕의 재위기간을 기록할 때 조선시대의 연대 표기 관례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원칙은 실제 고려시대의 기록과 1년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특정한 국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표기하는 방식과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표기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사건을 현대적인 연도로 환산할 때에는 당시의 연대 표기방식과 다른 사료의 기록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기록의 중복과 누락
《고려사》는 기전체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이 세가와 열전, 지 등에 반복해서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항목에 수록된 기록의 내용이나 날짜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일부 기록에서는 정확한 연대가 생략되어 있거나 원래의 사건과 다른 시점에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중요한 사건을 연구할 때에는 《고려사절요》와 금석문, 다른 문헌 등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다.
고려사와 삼국사기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기전체 정사로 평가된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역사서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를 다룬다.
반면 《고려사》는 1451년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고려의 역사서다.
| 구분 | 삼국사기 | 고려사 |
|---|---|---|
| 완성 | 1145년 | 1451년 |
| 편찬 국가 | 고려 | 조선 |
| 편찬 책임자 | 김부식 등 | 김종서, 정인지 등 |
| 기록 대상 | 고구려·백제·신라 | 고려 |
| 편찬 방식 | 기전체 | 기전체 |
| 전체 분량 | 50권 | 139권 |
| 왕실 기록 | 본기 | 세가 |
두 역사서는 모두 이전 시대의 역사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편찬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삼국 국왕들의 역사를 본기로 명명했지만 《고려사》에서는 세가라고 명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역사서의 편찬방식이 동일하더라도 실제 정치적 환경과 역사관에 따라 서술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늘날 《고려사》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면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을 제공한다.
원문과 한국어 번역문을 비교하여 읽을 수 있으며, 권별·왕대별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금석문과 묘지명, 중국과 일본의 관련 자료 등도 함께 검색할 수 있다.
온라인 열람
사료 검색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인물의 이름과 관직, 지명과 사건 등을 검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조사하려면 광종 시대의 세가와 관련 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전시과를 연구하려면 식화지에 수록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검색어가 현대적인 표현과 다르면 관련된 기록이 검색되지 않을 수 있다.
한문과 옛 지명, 관직명과 인물의 다른 이름 등을 고려하여 검색할 필요가 있다.
사료 인용
역사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가능하면 데이터베이스의 메인 화면보다 해당 기록의 개별 주소를 제시하는 것이 좋다.
또한 원문을 직접 확인했는지, 국역문을 참고했는지 구분해야 한다.
고려시대의 역사적인 사건은 음력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으므로 현대적인 양력 날짜로 환산할 때에는 별도의 확인이 필요할 수 있다.
주요 연혁
| 연도 | 사건 |
|---|---|
| 918년 | 왕건이 고려 건국 |
| 1392년 | 고려 멸망, 조선 건국 |
| 1395년 | 정도전과 정총 등이 《고려국사》 완성 |
| 1414년 | 태종이 고려사 개찬 명령 |
| 1416년 | 하륜 사망으로 개찬사업 중단 |
| 1419년 | 세종이 고려사 개찬 명령 |
| 1421년 | 개정된 고려사 완성, 반포되지 못함 |
| 1424년 | 《수교고려사》 완성 |
| 1438~1442년 | 《고려사전문》 편찬 |
| 1448년 | 《고려사전문》 인쇄, 공정성 논란으로 반포 중단 |
| 1449년 | 김종서·정인지 등의 최종 고려사 편찬작업 시작 |
| 1451년 8월 | 《고려사》 139권 완성, 문종에게 바침 |
| 1452년 | 《고려사절요》 35권 완성 |
| 1453년 | 《고려사절요》 갑인자본 간행, 계유정난 발생 |
| 1454년 | 《고려사》 최초 인쇄·반포 |
| 1455년 | 을해자 제작과 고려사 인쇄 |
| 1482년 | 을해자로 《고려사》 인쇄 |
| 1613년 | 을해자본을 바탕으로 한 목판본 간행 |
| 1908년 | 일본 국서간행회에서 활판본 출판 |
| 1955년 |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본 간행 |
| 1971년 | 동아대학교에서 국역본 간행 |
| 1972년 |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본 간행 |
| 2021년 | 현존 《고려사》 판본 6건이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 |
여담
- 《고려사》는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고려의 공식 역사서다.
- 1449년 편찬을 시작하여 1451년 완성했으며, 1454년에 최초로 간행되었다.
- 총 139권 7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편찬에는 김종서와 정인지, 이선제 등 여러 관료들이 참여했다.
-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약 59년이 지난 뒤 완성된 책이다.
- 그러나 실제 편찬사업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진행되었으므로 단순히 1449년부터 2년 동안의 작업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국사》는 역사적인 사실이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이후 태종과 세종 시대에 여러 차례 개찬사업이 진행되었다.
- 세종은 고려시대의 실제 기록을 함부로 수정하지 않는 직서 원칙을 강조했다.
- 《고려사》는 중국의 기전체 역사서인 《원사》 등을 참고하여 편찬되었다.
- 삼국사기가 삼국 국왕의 역사를 본기라고 기록한 것과 달리 고려사에서는 세가라고 명명했다.
- 이는 조선 초기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와 유교적인 명분론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설명된다.
- 고려에서는 황제국과 관련된 용어와 의례를 사용한 시기도 있었지만 조선의 편찬자들은 이러한 제도를 자신들의 정치적 기준에 따라 평가했다.
- 세가에는 태조부터 공양왕까지 32명의 국왕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 우왕과 창왕은 정통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아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 이러한 서술에는 두 사람이 신돈의 혈통이라는 조선 건국세력의 정치적 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 그러나 역사서에서 이들을 반역자로 분류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혈통과 정치적 정통성이 완전히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 지(志)는 총 39권이며, 천문과 역법, 지리와 경제, 관직과 법률 등 12개 분야를 다룬다.
- 고려의 토지제도인 전시과 등을 연구할 때에는 식화지의 기록이 중요하다.
- 과거제도와 관료의 선발에 관한 내용은 선거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관직과 행정조직은 백관지, 법률과 형벌은 형법지에서 다룬다.
- 지리지에는 옛 지명과 행정구역, 지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 열전에는 총 1,008명의 인물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 그러나 이 가운데 770명이 주요 입전 인물이고 나머지 238명은 관련 인물로 부기된 것이다.
- 열전에서는 충신과 간신, 반역자 등 인물을 도덕적인 기준으로 분류했다.
- 이러한 분류는 조선 초기의 유교적인 역사관과 정치적인 판단을 반영할 수 있다.
- 《고려사》에는 고려 왕조의 멸망을 설명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존재했다.
- 그러나 정몽주와 김진양 등 조선 건국세력에 반대했던 인물들을 충신으로 기록한 부분도 존재한다.
- 따라서 책 전체를 단순한 정치적인 선전물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고려사》가 완성된 뒤 편찬 책임자 김종서는 계유정난으로 제거되었다.
- 책은 김종서가 사망한 다음 해인 1454년에 정식으로 인쇄·반포되었다.
- 일부 편찬자들은 이후의 정치적 사건 때문에 공식적인 수사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이러한 사실은 역사서의 편찬과 전승에도 정치적인 상황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 고려시대에 작성된 실록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 따라서 《고려사》는 소실된 고려시대 기록을 간접적으로 보존한 자료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 1454년 최초 간행본은 오늘날 전하지 않으며, 을해자본과 후대의 목판본 등이 남아 있다.
- 2021년에는 여러 기관에 소장된 《고려사》 판본 6건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 《고려사절요》는 《고려사》가 완성된 다음 해인 1452년에 편찬되었다.
- 《고려사》는 기전체이며 《고려사절요》는 편년체라는 차이가 있다.
- 두 역사서는 동일한 고려의 역사를 다루지만 수록 내용과 서술방식이 다르므로 서로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 오늘날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국역문을 검색할 수 있다.
- 고려시대에 작성된 책이 아니라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이 편찬한 역사서라는 사실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보존한 가장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지만, 동시에 조선이 고려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관련 문서
- 고려
- 고려 건국
- 고려 멸망
- 고려사절요
- 고려국사
- 수교고려사
- 고려사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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