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조선 전기인 1452년(문종 2년)에 김종서를 중심으로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양성지 등 춘추관의 관료들이 편찬한 고려의 역사서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멸망한 1392년까지 약 475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로, 총 35권 3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451년 완성된 《고려사》를 바탕으로 편찬했으며, 이듬해인 1452년 2월 완성되었다. 이후 1453년(단종 원년) 4월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간행되었다.
《고려사》가 국왕의 행적과 관료들의 전기, 국가제도 등을 분야별로 구분한 기전체 역사서라면, 《고려사절요》는 사건이 발생한 연도와 월을 기준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의 정치적 사건과 정책의 변화, 전쟁과 권력투쟁 등이 어떤 순서로 발생했는지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책의 제목에 '절요'(節要)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어 《고려사》의 단순한 축약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고려사》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사론(史論)을 비교적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려사절요》에는 108편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의 세가 부분에 수록된 약 34편의 사론보다 많은 규모다.[1]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는 고려왕조가 멸망한 원인과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는 방법을 후대의 군주에게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에 따라 국왕의 잘못된 정치와 사치, 불교행사에 따른 재정낭비, 신하들의 간언과 충성 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고려 말의 우왕과 창왕에 대해서는 이들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사절요》는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조선 건국 이후의 지배층이 이전 왕조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기본 정보
| 고려사절요 | |
|---|---|
| 한자 | 高麗史節要 |
| 종류 | 역사서, 관찬사서 |
| 편찬 국가 | 조선 |
| 기록 대상 | 고려 (918년 ~ 1392년) |
| 편찬 책임자 | 김종서 |
| 주요 편찬자 |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양성지 등 |
| 편찬기관 | 춘추관 |
| 편찬 완료 | 1452년 2월 (문종 2년) |
| 최초 간행 | 1453년 4월 (단종 원년) |
| 기록 범위 | 918년 태조 즉위 ~ 1392년 공양왕 폐위 |
| 편찬 방식 | 편년체 |
| 분량 | 35권 35책 |
| 사용 문자 | 한문 |
| 최초 인쇄 | 갑인자 금속활자 |
| 주요 저본 | 《고려사》, 《수교고려사》, 《고려사전문》 등 |
| 주요 특징 | 연대순 역사서술, 108편의 사론, 고려시대 정치적 사건의 흐름과 군신관계에 관한 기록 |
| 주요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본 호사문고 등 |
| 온라인 열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시대 사료 DB |
명칭
《고려사절요》는 한자로 高麗史節要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의 역사를 의미하며, 절요(節要)는 중요한 내용을 가려 뽑아 간추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려사절요라는 명칭은 고려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선별하여 정리한 책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절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고려사》의 내용을 단순히 분량만 줄여 놓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려사절요》는 기존의 사료를 연대순으로 재배열했으며, 일부 기록은 《고려사》보다 자세하게 서술하거나 《고려사》에 없는 내용을 수록했다.
또한 두 역사서의 편찬 방식과 정치적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고려사절요》를 《고려사》의 요약판 정도로만 이해하면 실제 사료적인 가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편찬 배경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했다.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 정부는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작업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고려가 왜 멸망했으며 조선이 어떻게 건국될 수 있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의 정치와 제도, 외교와 군사 등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여 새로운 국가의 통치에 참고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수립된 뒤 이전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도 이러한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조선 역시 이전 왕조의 역사를 공식적인 역사서로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정치적 사건에는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데 민감한 내용이 많았다.
특정한 인물이 충신이었는지 역적이었는지, 고려 말의 왕들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조선 건국이 정당했는지 등의 문제는 역사서의 서술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고려국사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주요 고려사 편찬사업은 정도전과 정총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태조의 명령을 받아 1395년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완성했다.
《고려국사》는 고려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였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조선 건국에 참여한 정치세력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된 뒤에는 《고려국사》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정도전은 고려 말의 여러 정치세력과 대립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역사서술에 반영되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으로 조선 정부는 고려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태종과 세종의 개찬사업
태종 시대인 1414년에는 하륜을 중심으로 고려사 개찬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후 세종 시대에 고려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421년에는 고려사의 개정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424년에는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서 역시 편찬방침을 둘러싼 갈등으로 반포되지 못했다.
또한 1438년부터 1442년까지는 권제 등이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을 편찬했다.
이 책도 편년체 역사서였으나 편찬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다는 논란이 발생하면서 정식으로 반포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정부는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조선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고려사 편찬사업의 결과물이었다고 설명한다.[2]
직서와 개서 논쟁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고려시대에 실제로 사용했던 용어를 그대로 기록할 것인지였다.
이 문제는 직서(直書)와 개서(改書) 논쟁으로 이어졌다.
직서
직서는 과거의 기록에 등장하는 명칭과 표현을 가능한 한 그대로 서술하는 원칙이다.
고려에서는 국왕의 명령을 가리키는 여러 용어와 왕실의 의례, 관직과 제도 등에서 중국 황제국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제후국의 지위를 인정받는 체제를 운영했다.
따라서 고려가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쟁이 발생했다.
직서를 주장한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용어와 제도를 후대의 정치적 기준으로 변경하면 역사적인 사실이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서
개서는 고려시대의 기록을 조선의 정치적·외교적 기준에 맞추어 수정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다.
당시 일부 관료들은 고려의 왕실이 사용했던 황제국과 관련된 표현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의 역사적인 용어를 조선의 기준에 맞게 고쳐 써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수정하면 고려시대의 정치제도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세종의 입장
세종은 고려시대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용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는 직서 원칙을 지지했다.
그는 역사서가 과거의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모든 용어를 아무런 수정 없이 보존한 것은 아니다.
현대의 연구에서는 두 역사서에서 황제와 천자 등의 표현이 일부 삭제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사실도 지적된다.
따라서 직서 원칙을 채택했다는 사실과 모든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존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고려사의 완성
1451년(문종 원년) 8월, 조선 정부는 《고려사》를 완성했다.
《고려사》의 편찬에는 김종서와 정인지, 정창손 등 여러 관료들이 참여했다.
완성된 《고려사》는 총 139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였다.
그 구성은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 2권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이 《사기》에서 발전시킨 기전체를 바탕으로 했다.
《고려사》는 고려의 정치적 사건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제도와 인물 등에 관한 내용을 폭넓게 수록했다.
그러나 분량이 방대하고 여러 항목이 분야별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했는지 확인하기 불편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특정한 국왕의 정책을 연구할 경우 세가와 지, 여러 인물의 열전을 함께 확인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에서는 기존의 《고려사》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려사절요의 편찬
김종서의 건의
1451년 《고려사》가 완성되자 김종서는 문종에게 새로운 편년체 역사서의 편찬을 건의했다.
김종서는 당시 감춘추관사로서 고려사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기전체의 《고려사》가 내용은 풍부하지만 읽기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요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역사서를 별도로 편찬하면 국왕과 관료들이 과거의 역사를 보다 쉽게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종은 김종서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춘추관에서 《고려사절요》의 편찬작업이 진행되었다.
1452년 완성
《고려사절요》는 1452년 2월 완성되었다.
이는 《고려사》가 완성된 지 약 5개월 만이었다.
상당한 분량의 역사서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고려사 편찬작업에서 많은 자료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은 이미 완성된 《고려사》뿐 아니라 《수교고려사》와 《고려사전문》 등 과거의 편년체 역사서도 참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책의 완성에 걸린 약 5개월이라는 기간을 고려의 역사를 처음부터 조사하고 연구한 전체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제로는 조선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고려사 편찬작업의 결과가 집약된 것이었다.
주요 편찬자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는 춘추관의 수사관들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종서와 정인지, 신숙주와 박팽년, 양성지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종서 등 모두 28명의 수사관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21명은 《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했다고 설명한다.[1]
| 인물 | 주요 활동 |
|---|---|
| 김종서 | 편찬 책임자, 진고려사절요전 작성 |
| 정인지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한 고위 관료 |
| 신숙주 | 집현전 출신 학자·관료, 편찬 참여 |
| 박팽년 | 집현전 출신 학자·관료, 편찬 참여 |
| 양성지 | 지리학과 역사편찬 등에 참여한 학자·관료 |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 등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던 1452년에는 국가의 역사편찬사업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진고려사절요전
「진고려사절요전」(進高麗史節要箋)은 김종서 등이 《고려사절요》를 완성한 뒤 문종에게 바치면서 올린 글이다.
이 글은 《고려사절요》의 서문에 해당하는 자료로, 책을 편찬한 목적과 역사서술의 원칙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서는 기전체와 편년체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두 방식의 역사서가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전체가 역사적인 내용을 풍부하게 수록하는 데 유리하지만 글이 번잡하고 열람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편년체는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므로 국가의 흥망과 정치적 사건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려의 475년 역사를 정리하면서 국가의 흥망과 정치적인 교훈에 관한 내용을 선별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후대의 군주가 정치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로 본 한국사」에서는 김종서가 문종에게 올린 「진고려사절요전」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공하고 있다.[3]
구성
《고려사절요》는 총 3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918년 태조의 즉위부터 1392년 공양왕의 폐위까지 고려의 역사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
책의 맨 앞에는 진고려사절요전과 범례, 편찬에 참여한 수사관의 명단과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각 권에서는 국왕의 재위기간을 중심으로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주요 권별 구성
| 권 | 주요 기록 범위 |
|---|---|
| 권1 | 태조 원년 ~ 26년 (918~943년) |
| 권2 | 혜종 원년 ~ 목종 12년 |
| 권3 | 현종 원년 ~ 22년 |
| 권4~5 | 덕종부터 문종 시대의 주요 사건 |
| 권6~8 | 선종·숙종·예종 시대 |
| 권9~10 | 인종 시대 |
| 권11 | 의종 원년 ~ 24년 |
| 권12~13 | 명종 시대 |
| 권14~17 | 신종 및 고종 시대 |
| 권18~19 | 원종 시대와 충렬왕 초기 |
| 권20~21 | 충렬왕 시대 |
| 권22~34 | 고려 후기 원 간섭기와 왕권 회복, 고려 말의 주요 사건 |
| 권35 | 공양왕 3~4년, 고려 멸망 직전의 정치적 사건 |
※ 주요 구성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정확한 권별 시작·종료 연도와 왕대 구분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원문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년체
《고려사절요》는 편년체(編年體)로 작성된 역사서다.
편년체는 역사적인 사건을 발생한 연도와 월, 날짜 등의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왕이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이후 전쟁이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신이 교체되었다면 이러한 사건들을 실제 발생한 순서에 따라 정리한다.
이러한 방식은 정치적 사건의 전개과정과 인과관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편년체의 장점
편년체는 사건들이 발생한 시간적인 순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정한 전쟁이 발생하기 전의 정치적 상황과 전쟁 이후의 정책변화를 비교할 때 유용하다.
또한 여러 인물의 활동이 같은 시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건을 발생한 시기에 따라 나누어 기록하기 때문에 한 인물의 생애나 특정한 제도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려면 여러 부분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편년체의 한계
편년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건을 기록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불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려의 토지제도와 조세체계가 수백 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 연구하려면 여러 왕대의 기록을 비교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인물의 생애를 조사할 때에도 그 사람이 활동했던 여러 시기의 기록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편년체와 기전체 등 여러 서술방식을 서로 보완적으로 활용한다.
고려사와의 차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으며 고려의 역사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편찬체제와 내용,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 구분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
| 완성 | 1451년 | 1452년 |
| 분량 | 139권 | 35권 |
| 편찬 방식 | 기전체 | 편년체 |
| 주요 구성 | 세가·지·연표·열전 등 | 연대순 역사서술 |
| 서술의 중심 | 국왕의 행적·제도·인물별 기록 | 사건의 흐름과 정치적 교훈 |
| 주요 특징 | 고려의 역사와 제도를 폭넓게 정리 | 정치적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을 정리 |
| 사론 | 세가에 약 34편 | 약 108편 |
| 활용 | 제도·인물·왕조사 연구 | 사건의 연대와 전개과정, 역사인식 연구 |
고려사는 기전체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여러 분야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세가는 국왕의 행적을 기록하며, 지는 제도와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의 내용을 다룬다.
열전에는 관료와 무장, 학자 등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기록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의 역사와 제도를 폭넓게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특정한 사건을 시간순으로 추적하려면 여러 부분의 내용을 함께 확인해야 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는 편년체
《고려사절요》는 고려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방식은 정치적인 사건과 전쟁, 왕위 계승과 권력투쟁의 진행과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또한 《고려사》에서는 연도나 월이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사건의 시점을 《고려사절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두 역사서를 서로 비교하여 사실관계를 검토한다.
단순한 요약본은 아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사》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이미 완성된 《고려사》 외에 앞선 고려사 편찬자료와 고려시대의 기록을 참고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두 역사서가 같은 편찬사업의 성과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내용의 중복이 많지만, 서로 다른 자료를 일부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립적인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고려사》는 내용이 풍부하고 《고려사절요》는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을 확인하기 편리하므로, 어느 한쪽이 다른 역사서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사론
《고려사절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론(史論)을 많이 수록했다는 점이다.
사론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역사가가 자신의 견해와 평가를 제시한 글이다.
단순히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과 달리 그 사건이 왜 중요하며 어떤 정치적·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고려사절요》에는 약 108편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는 고려시대 사관들이 남긴 평가와 이제현의 사론, 정도전과 정총 등이 기존 역사서에 기록했던 평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 사관의 기록
고려에서는 국가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제도가 운영되었다.
당시의 사관들은 국왕과 관료들의 활동을 기록했으며, 때로는 특정한 정책과 인물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편찬된 실록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후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인용된 사론은 고려시대 역사인식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제현의 사론
이제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역사편찬과 사료정리에 참여했다.
그는 고려의 역사적인 사건과 정치에 관한 평가를 남겼으며, 이러한 사론의 일부가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이제현의 사론은 고려 말의 학자가 이전 시대의 정치와 역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현 역시 자신이 속한 시대의 정치적·학문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평가를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108편의 의미
《고려사절요》에는 약 108편의 사론이 실려 있다.
반면 《고려사》의 세가 부분에 수록된 사론은 약 34편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사절요》가 단순히 사건의 날짜와 내용을 정리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군주와 신하가 정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편찬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론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고려사절요》가 《고려사》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역사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고려사》에는 제도와 인물 등에 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어 서로 다른 연구목적에 활용된다.
편찬자 자신의 사론
《고려사절요》에 사론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김종서 등 편찬자들이 모든 평가를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고려시대의 사관과 기존 역사서에 수록되었던 사론을 선별하여 옮긴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따라서 책에 등장하는 특정한 역사적 평가가 곧 김종서 개인의 견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다만 어떤 사론을 선택하여 수록하고 어떤 내용은 제외했는지에 관해서는 편찬자의 판단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편찬 범례
《고려사절요》의 맨 앞에는 책을 편찬하면서 적용한 네 가지 범례(凡例)가 수록되어 있다.
범례는 역사서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지 정한 편찬원칙을 의미한다.
국가의 흥망에 관한 사건
첫 번째 원칙은 국가의 흥망과 정치적인 성패에 관련된 사건을 중요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잘 다스려졌는지 혼란에 빠졌는지, 어떤 정치적인 판단이 국가의 발전이나 쇠퇴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역사적인 교훈과 관련성이 적은 일상적인 내용은 간략하게 처리하거나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고려사절요》가 단순한 사건의 목록이 아니라 후대의 정치에 참고할 수 있는 역사서로 편찬되었음을 보여준다.
국왕의 행동과 신하들의 활동
두 번째 원칙에서는 왕실과 국왕의 활동을 기록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조회와 제사 가운데 관례적으로 반복되는 일은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국왕이 정해진 행사를 거르거나 문제가 발생한 경우에는 이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국왕이 대규모 불교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곡식을 소비한 경우에는 이를 기록하도록 했다.
국왕의 사냥과 자연재해, 대신의 임명과 파면, 유능한 신하들의 활동도 중요한 기록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원칙에는 국왕이 사치와 오락에 빠지지 않고 신하들의 충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교적인 정치관이 반영되어 있었다.
우왕의 재위기간
세 번째 원칙은 고려 말 우왕의 재위기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은 우왕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왕의 재위기간을 일반적인 국왕의 연호처럼 원년과 2년 등으로 표기하지 않았다.
대신 육십갑자를 이용한 간지로 연도를 표시했으며, 작은 글씨의 주석으로 신우(辛禑) 몇 년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이는 우왕이 고려 왕실의 정통적인 계승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당시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찬원칙은 우왕의 실제 혈통에 관한 논쟁과 구분해야 한다.
역사서에서 우왕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실제로 그가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창왕의 재위기간
네 번째 원칙은 창왕의 재위기간을 독립적인 국왕의 연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로, 1388년부터 1389년까지 고려의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창왕의 재위기간을 독립적으로 표기하지 않았다.
창왕이 즉위했던 해의 사건은 우왕 14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정리했으며, 그다음 해인 1389년의 사건은 공양왕 원년으로 소급하여 기록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말의 왕위 계승을 조선 초기의 정치적인 기준에 따라 재구성한 사례다.
따라서 《고려사절요》의 연도를 연구할 때에는 실제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편찬자가 적용한 연대 표기방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1]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 문제
《고려사절요》의 역사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는 우왕과 창왕에 대한 서술이다.
우왕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왕이 되었으며, 이후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등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우왕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1389년 다시 폐위되었다.
당시 정치세력은 우왕이 실제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우왕과 창왕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공양왕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웠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역사서술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신우와 신창
조선 초기의 역사서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각각 신우(辛禑), 신창(辛昌)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이들을 고려 왕씨의 정통적인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혈통으로 보는 정치적 주장을 반영한 명칭이었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의 실제 혈통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서가 이들을 신씨로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혈통이 완전히 확정되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연대 표기에 나타난 정치적 판단
일반적인 편년체 역사서는 국왕의 즉위와 재위기간을 기준으로 연도를 구분한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반영하여 이러한 원칙을 달리 적용했다.
이는 역사서의 구성방식 자체가 정치적인 판단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의 기록을 삭제하거나 내용을 고치는 것뿐 아니라 연도를 어떻게 표기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편찬자의 역사관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주요 기록
《고려사절요》에는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멸망한 1392년까지의 다양한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책이 모든 사건을 동일한 분량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흥망과 국왕의 정치, 신하들의 활동과 관련된 사건에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두었다.
고려 건국
이후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국가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태조의 정치와 후삼국 통일, 국가제도의 정비 등은 고려의 성립과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고려 초기의 왕위 계승
고려 초기에는 태조 이후 여러 국왕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혜종과 정종, 광종과 경종 등의 시대에는 왕권의 강화와 관료체제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 초기의 권력구조와 국가체제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활용된다.
거란과의 전쟁
고려는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거란의 요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성종과 현종 시대의 대외관계와 전쟁, 외교협상 등에 관한 기록은 고려의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서희의 외교협상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이 있다.
묘청의 난
1135년에는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고려 중기의 정치적·사상적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김부식을 비롯한 관료들이 반란 진압에 참여했으며, 이후 고려의 정치와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러한 사건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연대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무신정변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고려의 정치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여러 차례의 권력투쟁과 정변이 발생했다.
《고려사절요》는 이러한 사건들의 시간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다.
몽골의 침입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고려를 여러 차례 침입했다.
당시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간 몽골에 저항했으며, 이후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는 국가의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지방사회의 피해와 정치적인 갈등도 발생했다.
《고려사절요》는 이러한 사건들을 시기별로 검토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원 간섭기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원나라의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고려 국왕의 혼인과 왕위 계승, 국내 정치와 외교 등에 원나라가 관여했다.
또한 고려의 관직과 제도, 경제와 사회에도 여러 변화가 발생했다.
《고려사절요》에는 이러한 변화와 국왕 및 관료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의 개혁
14세기 중반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며, 신돈 등과 함께 정치와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기존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수반했다.
《고려사절요》는 공민왕 시대의 정책과 정치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 멸망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군사적·정치적 권력구조를 변화시켰다.
이후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1392년에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가 멸망했다.
《고려사절요》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록하지만, 편찬자들이 이미 조선의 관료였다는 점에서 고려 말의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서술은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려 말 역사서술의 정치성
《고려사절요》는 고려왕조가 멸망한 뒤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역사서다.
따라서 책에 수록된 기록에는 고려의 실제 역사적인 사건뿐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의 정치적인 평가가 반영될 수 있었다.
이는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고려의 국왕들이 사치와 불교행사에 빠져 국가재정을 낭비하거나 유능한 신하들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서술 역시 조선 초기 유교적인 정치관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고려사절요》 전체가 허구로 작성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이 책에는 고려시대의 문헌과 사관들이 남긴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도 전한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편찬자의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개별 기록의 출처와 내용, 다른 자료와의 일치 여부 등을 검토한다.
김종서와 계유정난
《고려사절요》의 편찬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편찬 책임자였던 김종서의 말년이다.
김종서는 세종과 문종 시대에 중요한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북방의 군사적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고려사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문종이 사망한 뒤에는 어린 단종을 보좌하는 핵심적인 대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제거되었다.
이 사건은 《고려사절요》가 처음 간행된 해에 발생했다.
간행 이후 몇 개월 만의 죽음
《고려사절요》는 1453년 4월 갑인자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계유정난이 발생하면서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공격을 받아 제거되었다.
따라서 책이 처음 간행된 지 약 6개월 만에 편찬 책임자가 정치적인 정변으로 사망한 셈이다.
김종서는 고려의 흥망과 권력투쟁을 기록하면서 군주와 신하들의 올바른 정치적인 관계를 강조했지만, 자신 역시 조선의 권력투쟁에서 희생되었다.
편찬자들의 엇갈린 운명
《고려사절요》의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지지하여 세조 시대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
반면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시도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1456년 처형되었다.
이들은 《고려사절요》의 편찬 당시에는 같은 역사편찬사업에 참여했지만 이후 정치적인 선택과 운명이 크게 달라졌다.
고려의 왕위 계승과 정치적 충절을 평가한 역사서를 함께 편찬했던 관료들이 불과 몇 년 뒤 조선의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다만 이후의 정치적인 사건을 이유로 편찬 당시부터 이들 사이에 동일한 정치적 갈등이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초간본과 간행
1453년 갑인자본
《고려사절요》는 1452년 완성되었지만 실제 인쇄와 간행은 1453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사용한 활자는 갑인자(甲寅字)였다.
갑인자는 1434년 세종 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로, 조선 전기의 인쇄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활자다.
《고려사절요》의 초간본은 이러한 갑인자를 이용하여 인쇄되었다.
35권은 35책으로 장정되었으며, 여러 기관에 배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1453년 7월에는 《고려사절요》 54질을 집현전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4]
초간본의 보존
1453년 간행된 갑인자 초간본은 오늘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일본 나고야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는 《고려사절요》의 갑인자 초간본 전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초간본의 일부가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규장각에는 초간본 가운데 24책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판본의 소장현황과 문화유산 지정상태는 조사와 관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제 자료를 열람하거나 연구할 때에는 해당 기관의 목록을 확인해야 한다.
을해자본
조선 중종 시대에는 《고려사절요》가 을해자(乙亥字)로 다시 간행되었다.
을해자는 1455년에 제작된 금속활자로, 조선 전기의 여러 서적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른 시기에 간행된 판본은 오늘날 책의 내용을 비교하고 전승 과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같은 제목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판본에 따라 글자의 누락이나 수정, 인쇄상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정확한 원문을 연구할 때에는 어느 판본을 기준으로 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박물관 소장본
경기도박물관에는 《고려사절요》 갑인자본 가운데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해당 유물은 2010년 12월 8일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이 책은 1453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조선 전기의 인쇄문화와 역사편찬사업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국가유산포털에서는 해당 유물의 지정현황과 소재지, 서지적 특징 등을 확인할 수 있다.[5]
근현대의 영인과 번역
《고려사절요》는 근대 이후 영인본과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영인본은 원래의 문헌을 사진이나 인쇄기술로 복제하여 출판한 책이다.
1932년 영인
1932년 조선사편수회는 규장각 소장 을해자본을 바탕으로 《고려사절요》의 영인본을 제작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역사편찬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조선의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출판했다는 사실은 해당 자료의 보존과 연구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목적과 연구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구분해야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제작된 영인본을 연구할 때에는 어떤 원본을 기준으로 인쇄했으며 편집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60년과 1972년 영인
1960년에는 동국문화사에서 《고려사절요》의 영인본을 간행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호사문고가 소장한 갑인자본을 바탕으로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1972년에는 아세아문화사에서 갑인자본을 바탕으로 다시 영인본을 출판했다.
이러한 영인사업은 원본을 직접 열람하기 어려운 연구자들이 책의 내용을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68년 국역
1968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려사절요》의 국역본을 간행했다.
이후에도 번역과 교감, 현대적인 연구가 계속 이루어졌다.
국역본은 한문으로 작성된 원문의 내용을 현대 한국어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번역은 원문에 등장하는 용어와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역사적 주장을 검토할 때에는 가능하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좋다.
고려시대 사료로서의 가치
소실된 고려시대 실록
고려에서도 국왕의 재위기간에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제도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당시 편찬된 실록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의 역사와 정치적인 사건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두 역사서는 고려시대의 기록을 참고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미 사라진 문헌의 일부 내용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두 책 모두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의 관료들이 편찬한 역사서다.
따라서 고려시대 당시에 작성된 원문 사료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라는 두 가지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
정치적 사건의 연대
《고려사절요》는 역사적인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고려사》의 여러 항목에 나누어 수록된 사건들이 《고려사절요》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사》에 연도나 월이 명확하게 기재되지 않은 사건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전쟁과 정변, 왕위 계승과 정책의 변화를 연구할 때 유용하다.
사학사 연구
《고려사절요》에는 약 108편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와 조선 초기의 역사인식을 연구하는 데 활용된다.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어떤 정치적인 사건과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살펴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 기존의 사론을 어떻게 선별했는지도 연구할 수 있다.
다만 사론이 수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고려 사회 전체가 동일한 역사적 평가에 동의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서를 작성한 학자와 관료들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
《고려사절요》는 조선 건국 이후의 역사관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왕위 계승문제, 국왕의 실정 등을 강조하는 방식에는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설명하려는 목적이 반영되어 있을 수 있다.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연대 표기는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책 전체를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전물로만 설명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제도, 인물에 관한 방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으며, 다른 사료와 비교하여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계와 비판
조선 초기의 정치적 관점
《고려사절요》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편찬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과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 가운데 고려 말의 왕위 계승문제와 조선의 건국과정에 관한 서술은 더욱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또한 유교적인 정치관에 따라 불교행사와 국왕의 사치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서술도 존재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불교행사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적·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하려면 이러한 평가 외에도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
선택과 생략
《고려사절요》는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기록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 사건과 인물, 제도에 관한 세부적인 정보가 생략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특정한 제도나 사회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고려사》와 다른 사료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왕과 관료 중심의 기록
《고려사절요》는 국가의 흥망과 정치적인 교훈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국왕과 고위 관료, 군사와 외교 등 국가적인 사건에 높은 비중을 두었다.
반면 농민과 상인, 여성과 노비 등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은 정치적인 사건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려의 사회 전체를 이해하려면 금석문과 불교문헌, 고고학적 자료, 외국의 기록 등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료의 비교 필요성
역사적인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등장한다고 해서 그 내용이 언제나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기록의 작성자와 편찬자의 정치적 입장, 자료의 전승과정, 다른 사료와의 관계 등을 검토해야 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같은 내용이 등장하더라도 두 역사서가 공통된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되었을 수 있다.
따라서 동일한 기록이 두 책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독립적인 증거가 두 개 확보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후대 역사서에 미친 영향
《고려사절요》는 조선 전기의 역사편찬사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례는 1485년(성종 16년)에 완성된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은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한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다.
이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는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기존의 여러 역사자료가 활용되었다.
따라서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의 역사를 보존하는 역할뿐 아니라 이후 조선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고려사절요》가 《동국통감》의 편찬에서 중요한 저본으로 활용되었다고 설명한다.[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늘날 《고려사절요》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온라인에서 열람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면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을 제공한다.
이용자는 권별 또는 왕대별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원문과 국역문을 비교하는 기능도 활용할 수 있다.
온라인 열람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에서는 《고려사절요》의 각 권과 왕대별 기록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편찬에 관한 서문과 범례, 수사관 명단 등의 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활용 방법
예를 들어 1170년 무신정변을 연구하려면 의종 24년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려 말의 정치적 사건을 연구할 때에는 우왕과 창왕, 공양왕 관련 기록을 서로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연대 표기에 독특한 원칙이 적용되었으므로 현대적인 연도와 당시의 기록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역사문서에서 내용을 인용할 경우 가능하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메인 화면보다 해당 기록의 개별 주소를 연결하는 것이 좋다.
이를 통해 다른 이용자들이 실제 원문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연혁
| 연도 | 사건 |
|---|---|
| 918년 | 왕건이 고려 건국 |
| 1392년 | 고려 멸망, 조선 건국 |
| 1395년 | 정도전·정총 등이 《고려국사》 완성 |
| 1414년 | 하륜 등이 고려사 개찬사업 추진 |
| 1421년 | 세종 시대 고려사 개정작업 |
| 1424년 | 《수교고려사》 완성 |
| 1442년 | 《고려사전문》 완성 |
| 1449년 | 세종이 고려사의 새로운 편찬을 명령 |
| 1451년 8월 | 《고려사》 139권 완성 |
| 1452년 2월 | 김종서 등이 《고려사절요》 35권 완성 |
| 1453년 4월 | 갑인자로 《고려사절요》 초간본 간행 |
| 1453년 10월 | 계유정난으로 편찬 책임자 김종서 제거 |
| 중종 시대 | 을해자로 《고려사절요》 재간행 |
| 1932년 | 조선사편수회가 규장각본을 바탕으로 영인 |
| 1960년 | 동국문화사 및 일본의 연구기관에서 영인본 간행 |
| 1968년 |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 간행 |
| 1972년 | 아세아문화사에서 갑인자본을 바탕으로 영인본 간행 |
| 2010년 | 경기도박물관 소장 갑인자본이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
여담
- 1452년(문종 2년)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다.
- 총 35권 3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5년의 역사를 다룬다.
- 《고려사》가 완성된 지 약 5개월 만에 편찬되었다.
- 그러나 고려의 역사를 처음부터 5개월 동안 조사해 완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된 고려사 편찬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제작한 책이다.
- 《고려사》는 기전체로 작성되었지만 《고려사절요》는 편년체로 작성되었다.
- 편년체는 사건이 발생한 연도와 월에 따라 기록하는 방식이다.
- 이러한 특징 때문에 고려시대의 정치적인 사건과 전쟁, 왕위 계승과 권력투쟁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사》에 없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 따라서 《고려사절요》를 《고려사》의 단순한 축약본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 사론(史論)이 108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정치와 인물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그러나 모든 사론을 김종서와 편찬자들이 직접 새롭게 작성한 것은 아니다.
- 고려시대의 사관과 이제현, 정도전 등이 남긴 사론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 책의 편찬원칙에는 국가의 흥망과 군주의 올바른 정치에 관한 내용을 중요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기준이 포함되어 있다.
- 국왕이 사치와 오락에 빠지거나 국고를 낭비한 경우에는 이를 기록하도록 했다.
- 대신의 임명과 파면, 유능한 신하들의 정치적 활동도 중요한 기록 대상으로 삼았다.
- 이러한 원칙은 조선 초기의 유교적인 정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서술도 존재한다.
- 우왕의 재위기간은 일반적인 국왕의 연호 대신 간지로 표시했다.
- 창왕의 재위기간은 독립적인 국왕의 연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 이러한 연대 표기는 조선 초기 지배층의 정치적 판단이 역사서술에 반영된 사례다.
- 그렇다고 해서 우왕과 창왕이 실제로 신돈의 혈통이었다는 주장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 역사책이 특정한 인물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인물이 실제로 왕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1453년 4월 갑인자로 초간본이 간행되었다.
- 갑인자는 세종 시대인 1434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다.
- 초간본의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일본 호사문고에는 전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일부 갑인자본과 후대의 인쇄본이 전한다.
- 경기도박물관의 갑인자본 1책은 2010년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책의 편찬 책임자 김종서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제거되었다.
- 고려의 왕위 계승과 권력투쟁을 기록한 역사서를 완성한 김종서가 책이 간행된 바로 그해 조선의 권력투쟁에서 희생된 것이다.
- 편찬에 참여했던 신숙주와 박팽년은 이후 단종과 세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 신숙주는 세조를 지지했지만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가 처형되었다.
-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 정치사의 연구뿐 아니라 조선 초기의 역사인식과 사학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다.
- 그러나 조선 초기의 관료들이 편찬했기 때문에 책의 역사적 평가에 당대의 정치적 관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 이후 동국통감 등 조선의 역사편찬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국역문을 열람할 수 있다.
- 고려시대의 정치와 전쟁을 연구할 때 《고려사》와 함께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대표적인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관련 문서
- 고려
- 고려 건국
- 고려 멸망
- 고려사
- 고려국사
- 수교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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