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 |
| 생년월일 | 1898년 2월 10일 |
|---|---|
| 사망일 | 1956년 8월 14일 |
| 국적 | 독일 출생, 1950년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 |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 |
| 학력 | 뮌헨 대학교 |
| 직업 | 극작가, 시인, 연출가, 연극이론가 |
| 활동기간 | 1910년대~1956년 |
| 장르 | 서사극, 정치극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독일 출신의 극작가·시인·연출가이자 20세기 현대연극의 주요 인물이다. 본명은 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이며, 서사극(episches Theater)과 소외효과·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연극이론으로 유명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며 노동과 빈곤, 전쟁과 권력의 문제를 다뤘고, 나치 독일의 집권 이후에는 여러 나라를 떠도는 망명생활을 거쳤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동베를린에서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설립하고 자신의 연극이론을 실제 무대에 구현했다.[1]
대표작으로는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이 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만든 《서푼짜리 오페라》는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뒀으며,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전쟁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상인의 삶을 통해 전쟁과 이윤의 관계를 다룬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브레히트는 희곡뿐 아니라 시와 산문도 많이 남겼고, 자신이 구상한 연극을 실제로 어떻게 연출하고 연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론과 작업기록도 작성했다.
브레히트가 현대연극에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은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 울고 웃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만으로 연극의 역할이 끝나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관객이 무대 위 사건을 실제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을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었는지 생각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극의 흐름을 노래와 해설로 끊거나 무대장치와 조명을 관객에게 드러내는 등 연극이 허구의 공연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상기시키는 방법을 활용했다.
그렇다고 브레히트가 재미없는 연극을 만들어 관객에게 정치·철학 수업을 시키려 했던 사람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희곡에는 음악과 풍자, 범죄와 배신, 모순적인 인물들이 활발하게 등장한다. 오히려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떨어져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연극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생애
아우크스부르크와 베를린에서의 활동
브레히트는 1898년 바이에른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지공장에서 일하다 관리직으로 승진한 인물이었으며, 브레히트는 비교적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에 관심을 보였고, 1917년 뮌헨 대학교에 진학해 문학과 자연과학·철학 등을 공부하다 의학도 수학했다. 그러나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지는 않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군에 징집되어 군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했다.[2]
전쟁이 끝난 뒤에는 희곡과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인 《바알》에서는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 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밤의 북소리》에서는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의 삶을 다뤘다. 1922년 《밤의 북소리》가 뮌헨에서 초연되면서 주목받았고, 같은 해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훗날의 서사극 이론이 완성되기 이전에 쓰였지만, 기존의 사회질서와 영웅적인 인물상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1924년 브레히트는 베를린으로 옮겨 막스 라인하르트가 이끌던 독일극장에서 극작과 연출 관련 업무를 맡았다. 당시 베를린은 연극과 영화, 음악·출판 분야에서 새로운 예술적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도시였으며, 브레히트는 여러 작가·배우·음악가와 교류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정치극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연출가 에르빈 피스카토어의 작업과 교류했고, 이후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협업하면서 음악과 연극을 결합한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8년 브레히트와 바일이 공동작업한 《서푼짜리 오페라》가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은 범죄자와 경찰, 빈민을 둘러싼 관계를 풍자적으로 그리면서 당시 사회의 도덕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소재로 삼았다. 관객에게 익숙한 노래와 흥미로운 인물을 이용하면서도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의 극작 방식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나치 집권과 망명
브레히트는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고 노동과 계급,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관계를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다뤘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나치가 집권한 뒤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을 위험에 처했다. 1933년 2월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독일을 떠났으며, 프라하와 빈·취리히 등을 거쳐 덴마크에 정착했다. 나치 정권은 그의 저작을 금서로 취급했고, 브레히트는 독일 국적도 박탈당했다.[3]
망명생활은 한곳에서 안정적으로 작품을 쓰는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머무르다가 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스웨덴과 핀란드로 이동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그는 각지에서 다른 망명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났고, 독일의 정치상황과 유럽의 전쟁을 작품에 반영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과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 주요 희곡 상당수가 이 시기에 집필되거나 발전했다.
미국에서는 독일에서 망명한 작가·영화인들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지만, 현지 영화산업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1947년에는 미국 하원의 비미활동위원회(HUAC)에 출석해 자신의 정치적 관계와 활동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위원회에 출석한 뒤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동했으며, 이후 독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4]
브레히트의 망명경력은 당시 유럽 예술가들이 처했던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반대하는 작가라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야 했고, 미국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과 사상을 의심하는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독일에서 도망쳐 미국까지 갔는데 거기서도 정치 때문에 편하게 살지는 못했던 셈이다.
동베를린 귀환과 베를리너 앙상블
브레히트는 1948년 독일로 돌아와 동베를린에서 연극활동을 재개했다. 1949년에는 배우이자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을 설립했다.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을 뿐 아니라 극단의 운영과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9년 1월 동베를린에서 공연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는 바이겔이 주인공 안나 피어링을 연기했으며, 이 공연은 전후 브레히트 연극의 주요한 출발점이 됐다.[5]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가 자신의 희곡과 연극이론을 실제 무대에서 발전시키는 활동의 중심지가 됐다. 그는 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 음악과 장면 전환을 세밀하게 검토했고, 공연을 완성한 뒤에도 연습과 수정작업을 이어갔다. 1954년에는 극단이 베를린의 시프바우어담 극장으로 옮겼다. 이 극장은 1928년 《서푼짜리 오페라》가 초연된 장소이기도 하다.
브레히트는 1950년 동독 예술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1954년에는 부원장을 맡았다. 1950년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으며,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동베를린을 주요 활동거점으로 삼았다. 1956년 8월 1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안치됐다. 브레히트가 사망한 뒤에도 헬레네 바이겔은 베를리너 앙상블을 이끌며 그의 작품과 공연방식을 이어갔다.[6]
서사극과 연극이론
관객이 생각하는 연극
브레히트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서사극이다. 서사극이라는 명칭은 연극을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공연으로 만들자는 뜻이 아니라,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관객이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구성하려는 연극적 접근을 가리킨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등장인물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그 인물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경계했다. 인물의 불행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왜 그 인물은 그런 상황에 놓였고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은 없었는가를 질문하게 하려 했다.
이를 위해 브레히트는 하나의 이야기가 끊김 없이 진행되는 대신 장면마다 비교적 독립적인 사건을 배치하거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알리는 표제를 사용하고, 노래와 해설을 통해 극의 흐름을 잠시 중단시키는 방법을 활용했다. 관객이 결말을 모른 채 긴장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대신, 결과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과 등장인물의 행동을 살펴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사극은 관객의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연극과는 다르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보면 관객은 전쟁 속에서 자녀를 잃는 인물을 안타깝게 느낄 수 있다. 다만 브레히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관객이 그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인공이 전쟁에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려는 선택과 그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 결과 사이의 모순까지 바라보는 일이었다.
낯설게 하기 효과
브레히트의 연극이론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은 낯설게 하기 효과 또는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다. 여기서 소외는 관객을 공연에서 쫓아내거나 인물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소에는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는 행동과 사회적 관계를 낯설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이를 새롭게 살펴보도록 만드는 방법에 가깝다.
예를 들어 공연 도중 배우가 관객을 향해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무대 뒤편에 다음 장면의 내용을 미리 알리는 문구가 나타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노래를 부르며 방금 벌어진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해설하거나, 무대장치를 바꾸는 과정이 관객에게 그대로 보이도록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장치들은 관객에게 무대 위의 사건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 구성한 공연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인물의 행동을 다른 방향에서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는 배우의 연기방식과도 관련된다. 배우가 등장인물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대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관객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가 일부러 연기를 못하거나 감정을 빼고 대사만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표현하면서도 그 행동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브레히트의 연극을 두고 “관객이 감동하면 실패한 연극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관객은 웃거나 슬퍼할 수 있고, 등장인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다. 다만 공연이 끝난 뒤 “불쌍하네” 또는 “멋있네”라는 반응만 남기는 대신, 그 인물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든 상황 자체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 브레히트가 추구한 방향이었다.
음악과 공동작업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음악은 장면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이야기가 잠시 멈추거나, 노래의 내용이 극중 상황과 어긋나면서 관객이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음악은 극의 인기를 높이는 동시에 범죄와 빈곤,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브레히트는 극작가 혼자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보다 배우와 작곡가, 무대미술가·연출가가 함께 작업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베를리너 앙상블에서는 대본을 실제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 장면의 의미를 계속 검토하고 수정했다. 브레히트의 연극을 이해하려면 희곡의 줄거리뿐 아니라 그 희곡이 어떤 방식으로 공연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주요 작품
《서푼짜리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1928)는 브레히트의 대표적인 음악극으로, 쿠르트 바일이 음악을 작곡했다.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런던의 범죄자와 빈민, 경찰과 사업가들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그린다. 중심인물인 범죄자 매키스와 빈민을 이용해 돈을 버는 피첨, 경찰서장 브라운 등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각자의 이익에 따라 협력하거나 대립한다.
이 작품은 범죄자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 사이의 도덕적 경계가 실제로 얼마나 분명한지 질문한다. 등장인물들은 고상한 원칙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며, 극의 전개 역시 전통적인 도덕극처럼 착한 사람이 반드시 보상받고 나쁜 사람이 처벌받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이후 공연과 음반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서푼짜리 오페라》는 브레히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은 1939년 집필된 희곡으로, 17세기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안나 피어링은 전쟁터에서 군인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행상인으로, 자녀들을 데리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한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돈을 벌어 살아가려는 과정에서 세 자녀를 차례로 잃는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자녀를 아끼는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전쟁이 계속되어야 장사를 이어갈 수 있는 상인이다. 브레히트는 이 모순을 통해 전쟁이 사람들의 생계와 경제적 이해관계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관객은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전쟁과의 관계를 끝내 바꾸지 못하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전쟁을 반대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주인공이 전쟁의 잘못을 깨닫고 관객에게 교훈적인 연설을 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으면서도 전쟁터에서 장사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모순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다.
《갈릴레이의 생애》
《갈릴레이의 생애》(Leben des Galilei)는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희곡이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둘러싸고 기존의 권위와 충돌하고, 종교재판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과정을 통해 과학적 진실과 권력, 지식인의 책임을 다룬다. 브레히트는 망명 중인 1930년대 후반부터 이 작품을 집필했으며, 이후 미국 체류기와 전후에도 대본을 개작했다.
작품의 핵심은 갈릴레이가 실제 역사에서 어떤 발견을 했는지 소개하는 데만 있지 않다. 진실을 알고 있는 과학자가 권력의 압력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연구성과가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 개인의 생존과 지식인의 책임이 충돌할 때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브레히트는 개작 과정에서 원자폭탄의 등장과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 문제도 작품에 반영했다.
《사천의 선인》과 《코카서스의 백묵원》
《사천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은 중국의 쓰촨 지역을 배경으로,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주인공 선테가 생존과 타인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선테는 주변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지만, 가난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 계속 선하게 행동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작품은 개인의 선의만으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하며, 주인공이 처한 환경과 선택의 관계를 강조한다. 여기서 중국은 극의 배경이지만, 작품이 다루는 경제적·도덕적 문제는 브레히트가 활동하던 유럽사회와도 연결된다.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은 전쟁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여성 그루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이의 친어머니와 실제로 아이를 돌본 사람이 양육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무엇이 진정한 소유와 책임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작품은 고전적인 재판 이야기의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혈연과 재산, 돌봄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보도록 구성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관객이 선한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드는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브레히트가 던지는 질문은 개인의 착한 마음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선하게 살기 어려운 사회에서 개인에게 착해지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어떤 사람이 물건이나 아이를 책임질 자격을 가진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처럼 인물의 선택을 만들어낸 조건까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서사극의 특징을 보여준다.
정치적 입장과 논쟁
브레히트의 작품과 삶에는 정치적 문제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고 노동과 계급, 경제적 이해관계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뤘으며, 나치 집권 이후에는 독일을 떠나 망명했다. 전후에는 동독에서 활동하면서 베를리너 앙상블을 설립했고, 동독 정부로부터 예술적 지원과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브레히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연극이론뿐 아니라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과 그가 실제로 선택한 활동환경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8]
특히 1953년 6월 동독 봉기에 대한 브레히트의 반응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당시 동독에서는 노동규범 강화 등에 반발한 시위가 확산됐으며, 소련군과 동독 당국이 이를 진압했다. 브레히트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에 대한 연대의 뜻을 밝히면서도, 정부가 대중과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후 당 기관지에는 편지의 일부만 발췌되어 게재되면서 브레히트의 입장이 보다 단순한 정부 지지처럼 전달됐다.[9]
브레히트는 이후 쓴 시 《해결책》(Die Lösung)에서 국민이 정부의 신뢰를 잃었다면 차라리 정부가 국민을 해산하고 새 국민을 선출하면 되겠느냐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시는 봉기 이후 주민들에게 더 열심히 일해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라고 요구한 당시의 발언을 풍자한 것으로 읽힌다. 브레히트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자체를 지지했던 입장과 동독 당국의 구체적인 정책·대응을 비판했던 태도는 함께 살펴봐야 하며, 어느 한쪽만으로 그의 1953년 행적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10]
브레히트에 관한 또 다른 논의는 작품의 공동제작과 저작 관계다. 그는 여러 배우와 작곡가·작가의 작업을 활용하고 기존 문학작품을 각색했으며, 일부 작품에서는 공동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여가 작품의 명성과 비교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브레히트가 20세기 연극의 주요 인물이라는 평가와 개별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동료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일은 서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영향과 여담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 효과는 연극뿐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 문학과 공연예술 전반에 영향을 줬다.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향해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극의 흐름을 노래와 해설로 끊고, 장면의 결말을 미리 알리거나, 작품이 허구라는 사실을 일부러 드러내는 표현방식은 이후 여러 매체에서도 사용됐다. 물론 이런 장치를 사용했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브레히트의 연극이론을 직접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브레히트의 특징은 개별 기법 하나를 발명했다는 사실보다, 이러한 기법들을 결합해 관객이 인물의 선택과 사회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연극적 방법을 체계화했다는 점에 있다.
브레히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가였지만 작품의 실제 무대에서는 풍자와 음악, 예상치 못한 인물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서푼짜리 오페라》처럼 노래가 유명해진 작품도 있고,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처럼 관객이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도 그 행동의 모순을 함께 살펴보도록 만드는 작품도 있다. 작품을 읽거나 관람할 때에는 등장인물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만 살펴보는 것보다, 그 인물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 비교하는 편이 브레히트의 연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종종 감정이입을 하면 안 되는 연극으로 간단하게 설명되지만, 그의 작품에서 관객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몰입하는 동안 인물과 사회의 관계를 생각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이 공연을 보고 울었다면 그다음에는 “그런데 저 사람이 꼭 저렇게 살아야만 했나?”라는 질문까지 해보도록 만드는 연극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설립한 베를리너 앙상블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왔으며, 그의 희곡들은 오늘날까지 여러 나라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원래 집필된 시대의 독일과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쟁과 생계, 권력과 개인의 선택처럼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주요 작품
- 《바알》 (1918년 집필)
- 《밤의 북소리》 (1922년 초연)
- 《서푼짜리 오페라》 (1928년 초연)
-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1930년 초연)
- 《도살장의 성 요한나》 (1929~1931년 집필)
-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1930년대 집필)
-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1939년 집필, 1941년 초연)
- 《갈릴레이의 생애》 (1930년대 후반부터 집필·개작)
- 《사천의 선인》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 집필)
-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 (1941년 집필)
- 《코카서스의 백묵원》 (1944~1945년 집필)
- 《해결책》 (1953년 집필)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독일 역사박물관 - 베르톨트 브레히트
- Deutsche Biographie - 베르톨트 브레히트
-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주어캄프 출판사 - 베르톨트 브레히트
- 베를리너 앙상블 공식 홈페이지
- ↑ 독일 역사박물관 - 베르톨트 브레히트
- ↑ Deutsche Biographie - Bertolt Brecht
- ↑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 베르톨트 브레히트
- ↑ 독일 역사박물관 - 망명과 귀환
- ↑ 독일 역사박물관 - 베를리너 앙상블 설립과 공연
- ↑ Deutsche Biographie - 브레히트의 말년과 국적
- ↑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 The Threepenny Opera
- ↑ 독일 역사박물관 - 브레히트의 정치적 활동과 동독 시기
- ↑ 독일 연방정치교육원·독일라디오·현대사연구센터 - 1953년 6월 봉기와 브레히트
- ↑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 1953년 6월 17일과 브레히트